아주 좋은 논문입니다. 교부시대부터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을 다루되, 목회발전적으로 서술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연구 목적: 찬송가의 사용과 이해에 대한 인식 차이를 조사하고, 예배 음악의 중요성을 알리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 회중 찬송가의 정의: 예배 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공동체의 공감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 역사적 발달: 암브로시우스의 삼위일체 찬송가부터 시작하여 루터파, 칼빈의 시편가, 영국 및 미국의 회중 찬송가 등의 발전 과정을 추적합니다.
- 한국 찬송가의 변천: 한국 초기 찬송가부터 "21세기 새찬송가"까지의 역사적 변천과 그 중요성을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한국 교회의 찬송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바른 사용을 강조하며, 예배 음악으로서 찬송가의 중요성을 다룹니다. 상황상 PDF와 글자(TXT 버전)만 첨부합니다!
2009년학년도
석사학위청구논문
한국 회중 찬송가의 역사와
“21세기 새찬송가”에 관한
비평적 고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 Div과정 실천신학 전공
조 경 진
한국 회중 찬송가의 역사와
“21세기 새찬송가”에 관한
비평적 고찰
지도교수 박 영 실
이 논문을 목회학석사(M.Div)청구 논문으로
제출함
2009년 12월 28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 Div과정 실천신학 전공
조 경 진
조경진의 목회학석사(M. Div)학위청구논문을
인준함
지도교수 (인)
지도교수 (인)
2009년 12월 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감사의 글
항상 저의 삶과 믿음을 음으로 양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저의 뒤에서 노심초사하시며 기도로 이끌어주신 양가 부
모님들과 뒷수발을 한 저의 아내 이진아사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
니다. 항상 신대원에서 만날 때마다 정겹게 맞아주시면서 신대원의 어려운
시간 동안 뒤에서 물신양면 후원해주시고 인도해주신 박영실교수님께 감사
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학부 때 신앙으로, 말씀으로 인도해주
신 이성재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렇게
귀하게 인도해주신 총신신대원 모든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목 차
국문초록.......................................................................................... 1
Ⅰ. 서 론................................................................................... 3
1. 연구 목적............................................................................... 3
2. 법위와 방법............................................................................ 5
Ⅱ. 회중 찬송가의 정의................................................................... 6
Ⅲ. 회중 찬송가의 역사적 발달....................................................... 11
1. 암브로시우스의 삼위일체 찬송가........................................... 11
2. 그레고리오 성가..................................................................... 15
3. 루터파 회중 찬송가................................................................ 18
4. 츠빙글리................................................................................. 29
5. 칼빈의 시편가........................................................................ 34
6. 영국 회중 찬송가................................................................... 41
1) 아이작 왓츠...................................................................... 43
2) 웨슬리 형제(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47
7. 미국 회중 찬송가................................................................... 51
IV. 한국 회중 찬송가....................................................................... 61
1. 한국 초기 찬송가의 시작....................................................... 61
2. 한국 찬송가의 역사적 변천.................................................... 64
1) 1892년 “찬미가”................................................................ 64
2) 1894년 “찬양가”................................................................ 65
3) 1895년 “찬미가”................................................................ 68
4) 1908년 “찬숑가”................................................................ 70
5) 1931년 “신정(뎡) 찬송가”................................................. 72
6) 1935년 “신편찬송가”......................................................... 73
7) 1949년 “합동찬송가”......................................................... 75
8) 1962년 “새찬송가”............................................................ 76
9) 1967년 “개편찬송가”......................................................... 78
10) 1983년 “통일찬송가”....................................................... 80
11) 2006년 “21세기 새찬송가”.............................................. 81
Ⅴ. 한국 “21세기 새찬송가”의 개괄적 평가.................................... 85
1. “21세기 새찬송가”의 긍정적 평가......................................... 85
2. “21세기 새찬송가”의 부정적 평가......................................... 88
Ⅵ. 결 론.................................................................................. 112
부 록.................................................................................... 115
참고 문헌...................................................................................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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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찬송의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대하 23:18)와 기쁨의 표현(마
26:3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정·의의 신앙을 통한 덕을 세움(고전
14:15)과 주님을 향한 자신의 감사의 표현(엡 20:13), 주님께 찬양으로
높임(단 4:37)과 영광(녹 2:20)을 둘리기 위함이다.
4세기 위대한 성인 성 어거스틴은(St. Augustinus)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찬송이라고 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는 “음악이 라는 고상한 예술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
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이다. 과연 음악은 우리의 사상과 사고
와 마음과 성령을 좌우한다.”라며 성경 다음으로 음악을 교육내용으로 강
조하고 있다.
역사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회중 찬송의 변화는 그레고리 성가에서
부터 이어진 시편 찬송이 원조가 되어 이어졌으나 라틴어로 기록되어 어
려움을 격은 상황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삼위일체 찬송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급기야 종교개혁(1517) 후 급격한 사회와 교회에 변화를 가져왔
다
특히 17세기 아이작 왓츠(Isacc Watts, 1647-1748)는 영국의 찬송가
에 획을 그은 사람이다. 그는 개혁 교회의 찬송가의 원조라고 할 만큼 위
대한 작곡가이다. 18세기 존 웨슬리(John Wesley),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로 이어지게 되고, 19세기 위대한 전도자 디ž엘 무디(D. L.
Moody, 1837-1908)는 모든 집회에서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가 만든 복음 찬양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53)과 왓츠, 웨슬리 그리고
미국의 찬송, 나아가 한국의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회중 찬송은 매우 복잡
하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민감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2 -
이제 21세기를 맞이한 한국 교회는 과거의 찬송가의 여러 변천 과정
의 그릇된 부분을 바르게 만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찬송가를 바로 알고,
바른 찬양을 부를 수 있게 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찬송가를 알기 위해 더욱 노력에 노력을 더 해야 될 것이며, 교회
마다 찬송가의 바른 보급을 위해서 더욱 많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
- 3 -
Ⅰ. 서 론
1. 연구 목적
본인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성악을 전공한 성악 전공자로서 한국교회
안에서 찬송가의 사용과 이해의 인식의 차이를 보고, 듣고, 예배 시에 찬
양을 하며, 찬송가와 찬양대를 가르치면서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배음악의
중요성을 어떻게 하면 잘 알릴 수 있을 것인가 와 예배 시에 회중(성도들
과 집례자)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을 바르게
부를 수 있도록 인도하고, 지도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었기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먼저 찬송가의 역사적 변천에서 어떻게 찬송가가 변해 왔는지
와 한국 교회의 찬송가가 어떤 상황에 있으며, 어떻게 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는지를 알림으로 한국교회에 바른 찬송가의 정립과 사용이 필요하
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더욱 바른 예배와 찬양이 어우러지게 하는 중요
한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될 것은 찬양을 부르는 목적과 찬양을 통해 이루어
지는 놀라운 역사와 은혜 그리고 하나님이 찬양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찬
양이 예배 시에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놀라운
광경”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 속에서 이루어지는 찬
송가의 활동영역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즉 찬송가의 쓰임과 한국과 세계
역사 속에서 이루어온 그 상황을 이해할 때 한국 교회는 여러모로 지금보
다 더욱 폭넓고 생기 있는 찬양을 교회에서 부르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불려지고 있는 찬송가는 한정적이다. 그리고 폭
이 좁은 생각과 시야 속에서 찬송이 불려지고 있기에 더욱 찬송가의 적극
적인 보급과 사용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들이 찬송가가 불려지는 예배와
모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서실
- 4 -
을 알면서도 교회에서는 찬송가에 대한 지식을 아는 성도와 교역자가 많
지 않음으로 더욱 어려움을 격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많은 주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불려지기를 원
하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음악을 잘 사용하여 예배 시에 바르게 사용해야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서 찬송가는 예배 음악으로서 선봉에 항상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님과 영적인 만남을 이루는 바른 예배를 이루기 위해선 회중들이 찬송가
의 올바른 사용과 인식이 있을 때 예배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과 사역
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즉 영적인 음악은 신앙인들과 사람들의 영성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것이
찬양에 의해 일어나는 놀라운 일인 것이다.
이런 일들로 비추어 볼 때 찬송가가 찬양의 선봉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 시에 찬송가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찬송가는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에 잔잔한 은혜를 불어 넣어준다. 그렇기에 지금까
지 찬송가는 많은 편곡과 작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찬송가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으며, 그
역사 속에서 변해오면서 탄생한 찬송가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그리고
한국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또한 통일 찬송가에서
는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이것은 작음 마
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교회음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분과 역사적인 관
점에서 바라보는 부분을 역어서 지금것 사용했던 통일 찬송가는 어떠했는
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교회가 찬송가를 어떻게 바
라봐야 되며 후에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될 찬송가는 어떤 것이어야 되는
지 알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
- 5 -
2. 법위와 방법
본 논문은 찬송가의 역사적 변천과정 연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왔는
지를 보려고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찬송가의 변천 역사를 예배음악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서 그 변천사에서 일어난 차이와 잘못된 점을 살펴보
기로 한다. 특히 통일 찬송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떠한 점이 잘못
되었는지 비평하고 시편 찬양의 중요성과 예배 찬양의 중심이 돼야 되는
이유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찬송가와 시편 찬송가가 역사 속에서 어떻
게 이어져왔으며 한국교회에서 펴낸 통일 찬송가의 문제점과 시편 찬송이
많이 불려져야 됨을 제시하려고 한다.
- 6 -
Ⅱ. 회중 찬송가의 정의
찬양이란 말은 성도들이 예배 시에 하나님을 찬양으로 올리는 모든 행
위와 행동, 말, 언어를 말한다. 그 중 찬송가는 부르는 회중으로 하여금
같은 공동체로서의 공감을 갖게 한다.1) 특히 어거스틴은 찬송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찬송가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하나님
을 찬양하는 확실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찬송가이다. 만약 그 노래
가사에 찬양의 내용은 있으되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체적인 것이 없으면
그것은 찬송가가 아니다. 또 찬양의 내용은 있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찬
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노래로 불려지지 않는다면 찬송가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노래가 찬송가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다음은 노래로
불려져야 한다.2)
이런 찬송가의 정의는 현재 기존 교회에서 불려지는 많은 찬송가가 있
으나 위의 어거스틴의 정의에 맞지 않음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다. 위의 말을 다시 잘 생각해보면 어거스틴이 말한바와 같이 찬송을 받
는 직접적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
에서는 찬양에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즉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짜집기하여 예배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든 찬양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회중찬송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이 부르는 찬송가를 회중찬송이라고 부르고 있
다. 그리고 예배 외에 선교나 전도를 위래 불려지는 찬양을 바로 복음성
가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복음성가와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은 찬송가
의 편곡을 많이 부르고 있지만 대체로 회중 찬송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1) 신소섭[목회자와 교회음악 지도자를 위한 예배와 찬송가](서울 : 아가페문화사, 1993), 21.
2) 오영걸[교회음악 개론](서울 : 작은 우리, 2000), 187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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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예배 시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동시에 같은 찬양을 부르는 것을 회
중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찬송가는 예배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배 시에만 사용해야 된다는 한정적인 것도 내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
아 찬송가는 한 장소에서 오직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올리는 찬송
인 것이다. 그렇기에 찬송가는 많은 음악의 노래들 중에 가장 신경을 써
야 되는 중요한 노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가는 복음성가와 좀 다른
장르이면서도 음악적인 형식과 시적인 운율이 조화를 이뤄야 되는 것이
다.
사실 요즘은 많은 교회에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예
배에 어떤 음악을 사용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따라서 예배 안에서
이루어지는 요소들을 알아야 더욱 자세히 알 수가 있다. 예배의 요소를
요약해보면 찬송, 기도, 성경(말씀), 헌금, 성찬 등으로 되어있다.3) 찬송은
회중 찬송과 독창자나 성가대에 의한 성가가 포함된다. 교회 음악으로 구
별될 때 모든 교회용 음악에 연주회용 음악 중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이
다 포함되겠으나 찬송가는 예배에 의하여 결정된다. 찬송가 는 예배의 구
성 요소로서 인식하여야 하겠다.4)
찬송가의 종류를 보면 역사적으로 암브로시우스의 삼위일체 찬송가,
그레고리 성가(단선율 성가(Plain song)), 독일의 코랄(Choral) 프랑스의
시편가(Psalter), 영국의 앤덤(Anthem), 성공회 찬송가, 미국의 힘(Hymn)
이 있다. 그리고 국내에 들어와서는 찬미가(1892년 존스(G. H. Jones)
목사와 로드웨일러(L. C. Rothweiler)양이 편집하여 출간한 감리교의 찬
송가, 찬양가(언더우드 목사가 창간한 찬송가), 찬셩시(1895년에 리(G.
3) 김의작[교회음악학](서울 : 총신대학출판부, 1983), 19.
4) 종교개혁가-루터, 칼빈, 쯔빙글리-들은 찬송을 절대로 예배의 부수적인, 즉 예배를 돕기 위환 하
나의 장식물로 보지 않았다. 김철륜[교회찬양학 개론](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9),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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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와 기포드(M. H. Gifford) 여사가 함께 편찬한 찬송가), 찬숑시(1898
년 모페트(S. A. Moffett(馬布三脫-마포삼열)) 목사가 발행한 찬송가), 합
동찬송가(1905년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한 복음주의 선교연합
공회의’를 조직한 후 우선 가능한 사업부터 합동하여 하자는 여론에 따라
공용 찬송가의 편성과 발간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찬송가 만들
게 된다,
1) 복음가(성결교에서는 1911년 처음으로 성가 160여 곡으로 편찬하
여 출판, 1919년 다시 성가 50여 곡으로 증보하여 <신정복음가>
를 출판),
2) 구세군가(구세군에서는 1912년에 출판)
3) 신정찬송가(1924년에 합동찬송가 개정위원이 장로교, 감리교, 연합
공의회에서 선정되어 약 4개년 간을 연구 검토하여 1928년에 314
음 선정출판)
4) 시편찬송가(장로교에서는 314음에 86음으로 추가하여 총 400음으
로 단독으로 출판)
5) 부흥성가(성결교에서도 지금까지 사용하던 복음성가에다 성가 40
여 음으로 보충하여 1930년에 출판)
6) 합동찬송가(1948년 각 교파 총회에서 정식으로 결정을 내린 후 한
국기독교 연합회 주최 하에 합동으로 추진한 결과 총 586장이 수
록됨, 교독문은 38편 첨부하여 1949년에 출판)
7) 개편찬송가(1967년 3년 3월 5일에 찬송가 위원회 첨부 한국기독교
장로회에 찬송가 위원 파송을 의뢰하여 위원회를 보강하여 합동찬
송가 개편작업을 착수하여 출판, 1967년 9월에는 다시 개편 찬송
가를 개편한 <개편찬송가>가 출판)
8) 새찬송가(1959년 9월 대전에서 모였던 예장 44회 총회에서는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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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분열 이후 그 다음해인 1960년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고신측파,
승동측의 합동총회가 성립하여 2년간 연구하여 1962년 찬송가를
출판)
9) 통일찬송가(1976년 6월 찬송가 위원회로 발족되었고, 1981년 한국
찬송가공회로 재발족되어, 연구와 검토를 실시하여 1983년 즐거운
성탄절과 함께 오랫동안 고대하던 558곡의 <통일찬송가>가 출판
오늘에 이르게 됨) 5)
10) “21세기 새찬송가”(2006년 9월 찬송가공회에서 5년간의 고심 끝
에 발간을 함. 찬송가는 558장, <21세기 새찬송가>는 87장이 늘
어난 645장. 교독문도 76개에서 135개로 늘었음.〈통일찬송가〉
는 외국곡 일색이었는데 〈21세기 찬송가〉는 한국 찬송가가 109
곡 (108곡?) 이나 새롭게 삽입. 6))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보편적으로 찬송가가 그 대표적인 이름이 된다.7)
그렇다면 찬송가의 중요성과 찬송가의 요소를 살펴봐야 될 것이다.
먼저 찬송가의 요소를 살펴보면 그 첫 번째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다. 찬송은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그 대상은 예배의 대상과 같기에 하
나님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 예배의 주체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은 찬송의 요소로 노래, 찬양,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칼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적합한 시
로서 시편을 주장하여 시편가를 발전시켰다.
사실 시편가의 대가는 루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편을 주해한 역대
이레 가장 훌륭한 해석을 했으며 그가 남긴 시편 해석을 아직도 다 해석
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운 실정이다. 그가 쓴 시편집의 서문8)에서 그는 그
5)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01-106.
6) 한국찬송가작가총연합회 출범…21세기 찬송가 성토 2008년 09월 18일 (목) 신동명 전문기자,
다음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
7)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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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이런 유의 폭풍우가 치는 동안에 발해진 가슴 저미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찬양의 시편이나 감사의 시편에서보다 기쁨을 표현하는
더 고상한 말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시편들 속에서
우리는 당신이 사랑스러운 기쁨의 동산을 보거나 하늘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모든 성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 또는 탄식의 시
편에서보다 슬픔을 표현 수데 있어서 더 깊고 더 참회하고 더 슬픈 말
을 우리는 어다 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 시편들에서 우리는 당신이
죽음을 보거나 음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성인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 요약하여 말하면, 당신이 살아있는 색채로 묘사되고 생
생한 형태로 주어졌으며 축소판보고 그려진 거룩한 기독교회다. 고자
한 요약시편을 당신 앞에 갖다놓으라는 것이다. 당신은 기독교가 무엇
인지다. 당신에게 보여줄 아름답고 빛나고 광채 나는 거울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니 당신은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참된 “너 자신을 알라”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만물을 창조
하신 하나님과 아울러 너 자신을 알 수 있다.… 9)
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고 박형룡 박사는 “찬송시는 어떤 복음의 전리가 어떤 특수한 경험이
나 갑상을 통하여 신자의 마음에 특수하게 감 명 되는 때가 있다. 그 강
명 되는 바를 긴말로 자세히 서술하면 설교가 되 고 간추려서 표현하고
거기에 곡조를 붙여서 노래하면 찬송가가 된다.”고 말씀하셨다.10)
8) Bertram Lee Woolf가 번역하고 편집한 The Reformation Writings of Martin Luther, volume
II, The Spirit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London: Lutterworth Press, 1956), 267-71
에서 발행인의 허락을 얻어 전재함.
9) 이윤영[개혁주의 찬송가학]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98-101.
10) Ibid,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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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 340-397)
로마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법률을
공부하고 후에 지사가 되었다. 당시 밀란의
감독이 죽고 그 후임자 문제로 정통파와 이
단인 아리우스파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였
다. 암부로시우스는 소동이 일어날 것을 염
려하여 감시할 겸 회의에 출석하여 회중에
게 연설을 했다. 이 때 한 소년이“암브로시
우스를 감독으로 뽑읍시다.”라고 소리 질렀
암브로시우스
Ⅲ. 찬송가의 역사적 발달
1. 암브로시안(암브로즈)의 삼위일체 성가(Ambrosian Chant)
다. 암브로시우스의 능력과 그의 의견을 알고 있던 의원들은 소년의 부
르짖음에 옹호하여 만장일치로 그를 감독으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세례도 받지 못한 평신도의 신분이어서 사양했으
나 백성들의 탄원에 이기지 못하여 세례를 받고 374년에 밀란의 감독에
취임했다. 감독이 된 다음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했고 23년 동안 교회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의 재직 중에 즉위한 세 사람의 교황보다 더 많은 업
적을 남겼다. 그는 관대한 사람이었으나 이단에 대해서는 대단히 가혹했
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힘썼고 야만인들에게 납치당
한 사람들의 몸값을 위해 교회당 장식품을 내어다 팔았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한때 총독에게 반항하자 7000여명이나 붙잡아다
가 참살한바 있는 데오도시어스 황제(Theodosius the Great, 379-395)
가 밀란에 와서 회당에 들어가려고 할 때 암브로시우스는 왕의 앞을 가로
막고 “사람의 피를 흘린 손으로 어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성찬을 받
고자 하느냐”고 책망하였다. 왕은 이 말에 감동하여 자기의 죄를 참회하
고 8개월 후에야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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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 성가(라틴어로 쓰여진 성가)
이후 어거스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암브로시우스는 동방으로부
터 창법을 수입 해다가 독자적으로 노래를 만들어 자기교회의 신도들에게
보급시켰다.(통 42장 : “찬란한 주의 영광을”참조) 100여 편의 찬송을 지
었고 그의 노래는 교리적인 면이 많다.
그의 찬송가는 온 서방교회에 퍼졌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오릴리
어스 · 프르텐티어스(Orelius Putlentius, 348-413), 카유스 · 카엘리어스
· 세두리어스(Cayus Caelius Sedurius, 5세기경)등이 나타났고 특히 플
루나터스 · 베난티어스 · 호노리어스 · 클레멘티나너스(Fortunatus Ven-
antius Honorius Clementianus, 550-609) 그리고 교회음악의 대성자(大
成者)인 그레고리어스 대교황(GregoryⅠ, 540-604)등이 나타났다.11)
암브로시우스는 많은 이들이 “라틴찬송의 아버지”(Father of Latin
Hymn), “서양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밀라노의 대주교 성 암브로시
11) 문영탁[단권 찬송가 해설집] (서울 : 새순 출판사, 198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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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대인과 동방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방법인 교
송(Antiphonal Singing)과 응답시
편송(應答詩篇頌 - 히브리교회 시
대부터 부르던 스타일의 시편 노
래(Responsorial Singing)을 교회
에 도입하였다. 그 이유는 서방에
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즉 밀라
노 교회 의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암브로시우스 찬송(Ambrosius
chant)이라 부르는데 이 찬송은
문학적 운율(題律)을 가졌으며 대
중적인 성격을 띠고 감수성이 담
암브로시우스의 시편가
우스(Ambrosius, 340 - 397)는 339년 프랑스의 트리에르에서태어나
397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사망한 이탈리아의 성인이다. 사실 그는
이름 높은 설교자였으며, 음악가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우
스, 대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교회박사의 한 사람이다.
겨 있기에 이단파(異端派)와의 삼위일체 논쟁과 투쟁이 있었을 때 강한
무기의 역할을 했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그의 마음이 담긴 음악은 1세기 후 로마의 셀레스틴(Celestin I세 교
황. 422-432)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다.12) 암브로즈 시
편가는 하나의 음정으로 시편 한 구절을 낭송하고 각 구절은 단순한 종지
를 하도록 되어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또한 시편이나 찬송가를 두 개로 나
뉘어진 합창으로 부르게 하고, 또 고전적인 장단의 음률에 의한 찬송가를
창작했다. 그리고 암브로즈 성가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성행했으며 몬테
12)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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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암브로시우스는 이단 아리
우스파와의 논쟁과 우상숭배 문제
로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어서 찬송이 커다란 힘을 가
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기본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삼위일체의 교
리를 담은 찬송을 만들어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Ambrosius의 찬
가와 성 Augustine의 찬가는 우
리가 보았던 통일 찬송가에 각각
42장과 301장에 실려 있다. 원형
과 똑같지는 않지만 여러 면에서
암브로시우스 정격, 변격 4선법
카지노에 의해서 교황 스테판 Ⅳ세(1057-1058)가 그레고리 성가를 사용
을 위해 암브로즈 성가를 버릴 때까지 사용하였다.13)
약 600년 동안 사용되어진 것처럼 보이지만,14세기 후반 까지도 암브
로즈 성가는 그레고리 성가와 함께 일부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며 이 후기
시대에는 그레고리 성가만큼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암브로즈 성가가
사양길을 걷게 된 이유는 일정한 형식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구조가 너무
단순해서인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14)
윤곽이 비슷하다.15) 또한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으로는 오늘나의 선
법과 아주 흡사한 4개의 선법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음계라는 것은 추상
화된 개념으로 음의 소리를 음정의 높이에 따라 나열한 것이고, 멜로디의
성격, 즉 조(調)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선법은 양식(樣式) 또는 격식, 방법의 뜻을 가지며 살아
13) Ibid, 65.
14) Ibid, 66.
15) 이유선[기독교 은악사](서울 : 기독교문화사, 199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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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음악을 구성한다. Ambrosius 보다 160여년 후에 출생한 Gregory I
세도 4개의 선법을 창안, 추가했는데 Ambrosius의 4선법을 Authentic(정
격)선법(교회선법 중에서 피날리스(마침음)로부터 피날리스까지의 1옥타
브를 음역으로 한 선법을 말함)16)이라 하고 Gregory I세의 것은 Plagal
(변격)선법(아래4도로부터 위 5도까지의 1옥타브를 음역으로 한 것을 말
함)17)이 라고 부른다.18)
일반적으로 암브로지오 성가라고 불리우는 단선율 성가의 발전에 기여
하였으며 찬가와 교창형식을 로마 전례에 도입하여 그 자신도 찬가를 작
곡하였다고 하는데 중세에 전설화된 면도 있어서 전면적으로 역사적 사실
로 인정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그가 작곡한 찬송의 두드러진 특징은 언
어의 악센트 취급에 있다. 운율에 있어서는 고대 헬라와 로마의 것을 없
는고 있지만 악센트의 취급이 다르다. 그가 작곡했다고 전해져, 암브로시
우스 찬송(Hymni Ambrosiani)이라고 불리는 찬송은 상당히 많지만 실제
로 그의 저작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12편 정도에 불과하다. 이 성가들은
악기의 반주가 없이 제창이나 독창으로 불려졌다. 그의 성가는 그레고리
안 성가와 함께 일부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나 그레고리안 성가만큼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다.19)
2.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 Plain Song)
기독교 예배에서 초창기 600년 동안에는 예배를 위한 음악적 수단이
멜로디였다. 그 멜로디는 지나칠 정도의 단순성을 갖고 있는, 읊조리는
형식(Cantillation)의 기도의 형태를 갖고 있거나 엄숙한 절기에 드리는
정교한 그라두알(Gradual)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
16) 세광음악 대사전(서울 : 세광출판사(사전편찬위원), 1992), 1329
17) 세광음악 대사전(서울 : 세광출판사(사전편찬위원), 1992), 1329.
18) 이유선[기독교 음악사](서울 : 기독교문화사, 1994), 23.
19)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6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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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원후부터 5세기 까지는
자유롭게 또 자발적으로 노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으며, 절대적으로교
회 안에서 정식으로 훈련받은 찬양
대원들만이 미사(Missa(예배))시에
찬양 할 수 있게 하였다. 343-381
년 중간에 개최되었던「라오기아」
회의에서 결의한 조항 가운데 지정
된 가수만이 성단에 올라가 노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4세기
까지 자유롭게 부르던 부녀자들은
여승원찬양대 외의 찬양대에서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21)
그레고리 1세
다 해도 단선율 악곡(Monody)20) 은 그리스도인들의 통일성을 상징하는
가장 완벽하고도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이었다.
그레고리우스 I세(Gregorius I)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나 604년 로마
에서 사망한 카톨릭의 교황이며 신학자이다.
그는 590년부터 604년 까지 교황으로 재위했는데, 그를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그의 재위 중에 전례의 조직화가 이루어 졌
기 때문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로마교회의 성가는 “그래고리안 성가
(Gregorian Chant)”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22)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란 어떤 것일까? 로마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단성 전례성가(單聲 典禮聖歌)라고 말한다. 이를 특별히 그레고
20) 어떤 반주도 덧붙여지지 않은 단선율의 멜로디
21) 이유선[기독교 음악사] (서울 : 기독교문화사, 1994), 28.
22)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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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안 성가의 특징으로는 가톨
릭교회의 전례용(典禮用) 음악으로서
그 자체의 선율이 부드럽고, 우아하며,
엄숙하고, 고요하며, 섬세할 뿐만 아니
라 균형과 조화가 잘 어우러진 음악이
다. 가사는 그 당시에 가장 중요시 했
던 라틴어로서 시편 중심의 성경 본문
과 전례문에서 나온 것들로 되어있으
며, 그리고 라틴어 산문으로 되어 있
기도 하다. 멜로디는 단순한 멜로디로 그레고리안 성가
리안 성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레고리우스 I세 (Gregorius 590-604년
재위) 교황이 옛부터 불리어져 오던 여러 종류 그레고리를 수집하여 정리
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로마교회에서는 그 업적을 기려 그레고리안 성가
(Gregorian Chant)라고 부르게 되었다.23)
된 단선율(單旅律)로 되어있으며, 소박하고, 숭고하며 경건과 거룩성을 강
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음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레고리안 성가의 기
본 형태는 시편창(Psalmody)과 아주 비슷하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남성들만이 부르는 무반주 음악이라
는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에서는 남성만 찬양을 할 수 있게 정하였다.
즉 수도원에는 남성들이 많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회중이 함께 부르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음역이
한 옥타브(Octave)내에 국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 같이 부르
기 쉽고, 어렵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생각해낸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또한
그레고리안 성가의 음계, 선법, 음악이론은 서양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
23)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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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예배 음악은 단성성부의 진행을 하였다. 그러기에 화성과 악기의
도움 없이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었다. 따라서 부르기 쉬운 단선성
부로 이루어진 그레고리안 성가는 그 시대 로마 카톨릭교회의 예배를 위
한 예배음악이었던 것이다.24)
여기서 그레고리안 찬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레고리안 찬트 안
에 쓰여져 있는 가사는 거의 시편이 중심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
레고리안 찬트의 가사에 기본적으로 되어있었던 것은 시편창(Psalmodia)
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루터파 회중 찬송가(Chorale)
루터파 회중 찬송가(Chorale)에 들어가기에 앞서 역사적인 종교개혁당
시에 일어났던 회중음악과 그 당시의 상황들을 먼저 알아보고 루터파의
회중 찬송가에 들어가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은 각종 혼란과
새로운 문화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기에 이를 가리켜 중세와 근세를 구분
하는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은 종교 자체의 부흥이었다.25) 종교
개혁은 내면적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의 갱신이라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카톨릭 교회는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각종 타락과 부
패한 상태가 누적되었으나 때가 차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인류역
사에 가장 유력한 정신 운동의 하나였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
터 박사가 그의 99개 조항을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 붙인 사건은 분명히
종교개혁의 생일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 사건을 유럽인들
24)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41-142.
25) 로랜드 H. 베인토, 서영일 역[16세기 종교개혁] (도서출판 은성),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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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반적인 역사와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26)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로서 종교개혁 시기에 인쇄술
의 발달은 종교개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쇄는 과거와 현재 그
리고 미래의 문화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너무도 중요했으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라 할 수 있다. 1511년 “독일의 음악”(Musica Getutscht),
1512년 뉘른베르그에서 출판된 외글린(Oeglin) 다성가곡의 악보집 등, 악
보의 인쇄에 따라 음악의 발전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이는 음
악 문화 향상에 큰 공헌을 하였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의
라틴어 논제들 이 수만 장이 14일 이내에 독일 전역에 퍼진 것27)과 그의
악보가 단시간에 시민들에게 전달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던 르네상스는 음악, 종교
와 문화, 사회의 전반적인 분분에서 큰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더 교회 안
에서는 큰 여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르네상스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르네상스는 인간 개성의 발전과 인
권 존중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중
심으로 일어나 유럽 각국으로 퍼져 유럽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르네상스는 내세 지향적인 중세의 삶과 달리 “행동하는 삶”즉 현실적
인 삶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기본사상인 인본주의(Human-
ism)가 추구하는 것은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적인 것이었다. 이는 누구든
세계 시민의 하나로서 인류라는 정신을 불어넣어 주며 인권을 확장시켰
다.28)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루터가 성경 연구를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
었다. 루터는 발라나 로힐린 같은 인본주의자들의 성경의 원어를 연구하
26) 모이어, E. S, 심재원 역, [인물 중심의 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94), 299.
27) 이성삼, [서양 음악사] (남해 문화사, 1983), p. 70.
28) 모이어, E. S, 심재원 역, [인물 중심의 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94),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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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기독교의 진리를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29)
이처럼 종교개혁은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에서 보아도 어두운 가운데 있
었기에 더 더욱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방법이
필요했다. 이러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피난처로 교회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개신교는 1517년 루터 이후에 급진적으로 많은 일들이
사회의 전반과 교회에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영향을 교회는 당연히
받게 되면서 교회 자체 안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은 예배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영향은 예배의 찬양과 예
전(예배의 형식)에도 영향을 주었음을 개혁자들의 말과 그들의 예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종교개혁 당시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인 예배의 현장이 그 의미를 잃고, 하나님과의 만남
의 역사가 발생되지 못한데서 이런 결과가 파생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
다.30)
이 시대에는 또한 가장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예배는 회중들이 알 수 없는 언어를 쓰면서 예배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그 당시에는 가장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예배
의 모습이 아니라 “라틴어”로 된 예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는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언어31)”속에서 진행된 미사는 허공에다 드
리는 느낌의 예배가 된 것이다. 이 예배를 정말 주님이 받으셨는지 의심
이 들 정도이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든 상황이지만 종교개혁 당
시는 정말 많은 신자들이 예배와 찬양에 갈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은
29) 이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 루터와 칼빈을 중심하여](장로회신학대학 석사 학위 논문, 1984),
7.
30)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 : 종로서적 출판주식회사, 1986), 91.
31) 당시에 사용된 언어는 라틴어였다. 그럼으로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는 그 의미 전달
이 불가능했다. 로마 케톨릭 교회는 1963-1965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미사에 모
국어 사용을 부분적으로 허용할 것을 결의한 바 있다. W. M. Abbott, The Documents of
Vatican Ⅱ(New York : Guild Press, 1966), 150-5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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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서방교회에서 집례 된 성만찬은 하나의 연극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은 성만찬으로서 보다는 화체(화체)의 기적으로 절정을 이루었고
순수치 못한 미신적 경배 속에 행하여 졌다. 미사는 알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청취를 불능케 했고 … 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 되었으며 대부
분의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하였다. 성경 말씀이 봉
독되어져야 할 부분은 성자들의 생활담과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은 예
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은 시급
하고도 필연적인 것이었다.33)
이런 불만과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즉 그들의 우월주의
가 많은 신자들을 아프게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사의 집례 행위는 더욱 사제들에 의해서 독점되
어 예배가 특정한 상류층(교황과 귀족들)의 인간의 기분과 구미에 맞게
이러지는 타락의 예배가 되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은 교회
와 그 시대의 예배를 힘없는 모습으로 전락 시켰으며, 정치와 종교가 분
리되어 있지 않던 그 세계의 신앙과 윤리 질서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32)
윌리암 맥스웰(William Maxwell)은 그의 명저“기독교 예배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종교개혁과 예배의 상관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마틴 루터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에 의해서 생긴 종교개
혁으로 인해 교회음악에 미친 영향과 파장, 그리고 교회 회중 음악에 어
떠한 영향력을 끼쳤는지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여
1546년 고향에서 사망한 신학자요, 종교개혁가요, 음악가이다. 그는
1505 년 7월 17일 엘프르트(Erfurt)의 어거스틴(Augustinus)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1507년에 신부로 서품 받았다.34) 사실 루터는
32)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 : 종로서적 출판주식회사, 1986), 92.
33) William Maxwell, A History of Worship(Gre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82), 72.
34)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Christian Church 이영헌외 공역, 세계기독교회사 (서울 :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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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회에서 예배에 대한 4가
지 개혁의 변화(성경, 신앙, 만민제
사,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전례)를
심층적으로 구화하는 구실로써 교회
음악의 서민화(대중화)를 주장하였
다. 이뿐만 아니라 자국어 찬송을
확립, 자작 찬송을 활성화, 찬양대
음악 보급 장려하는 것과 개신교 코
랄의 기초를 열었다. 그리고 많은
찬송과 노래들을 만들었고, 또 다른
음악가들 에게 의뢰하여 노래들을
마틴 루터
법학을 공부하려다 수도원에 들어가 승직에 서품되었으나 케톨릭 교의에
깊은 의문을 품고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또한
1517년에는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교황의 세속화,
교회의 부패 등을 추궁하는 95개항의 의견서를 제시하여 종교개혁의 생
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종교개혁의 물고를 트게 되었다.
번역했다. 위의 말을 생각해볼 때 루터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루터는 16세기 예배음악을 발전시킨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위대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교계에서 최초로 회중찬송의 창시자로
서의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즉 루터의 음악은 회중에 의해 불려지는
찬송(Hymn)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또한 찬송을 학교음악 교과과
정으로 넣음으로써 교회음악이 학교에서 행해질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학생들의 교육에 찬양의 중요성과 찬양을 통
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감사를 어려서부터 몸에 익히도록 음악교육에
한기독교서회),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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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쓴 것이다. 즉 그는 찬송가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
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14세기 이후부터는 종교적인 시에 세속적인
곡조를 붙여 사용하는 것이 관례처럼 교회에서 불리어 졌다. 그 배경은
많은 성도(신자)들이 빨리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불려진 것이다. 그래서
민요풍이나 그 시대에 유명했던 곡에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일이 비일비
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연가나 권주가의 가사를 바꾼 노래들이 종교적인
노래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15세기에는 대중 찬송이 독일에서 초기 기독교 2세기 동안의
발전을 능가할 만큼 급속도로 번창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루터는
자신의 음악을 택하게 되었고, 이것을 복음과 연결 시켜서 종교개혁의 목
적에 적용시킴으로서 더욱 많은 성도(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됨으로
인해 급속도로 확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될 것은 루터는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에 혼동을 일으키거나, 부정확하게 알고 있거나, 이단들
과 다른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노래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음악을
통해 교리와 신앙, 믿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알리는 큰 역
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카톨릭의 것이라면 모든 것을 배척한 칼
빈(무반주 단선율 유니송, 즉 무반주로 노래하는 엄격하고 준엄한 태도)
과는 다르게 카톨릭의 음악의 장점은 살리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오늘
날 전 세계적으로 살펴보면 루터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음악이 상당히
발전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루터 교회의 전통 속에서 배출된 가장 결정적이고 완벽한 교
회 음악가는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였다. 예
배 음악에 대한 루터 교회의 지속적인 요구는 바로크 스타일의 발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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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아주 훌륭한 음악가이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음악가는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이다. 그 또한 바흐의 음악을 뒤이어
교회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음악가로서 그를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뛰어난 인물
이다. 이처럼 루터의 영향은 교회음악에 지대
한 영향을 준 것을 보게 된다.바흐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한 가지 획기적인 사
실이 있다. 그것은 그가 음악적인 편집에 많은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중세의 8
개 선법을 12개로 확대했으며, 오늘날 장조
(Major)와 단조(Minor)의 조성을 낳게 한 이오니
아 선법(교회선법)35) 을 코랄 제작에 사용하였다.
또한 루터는 찬송 부르기의 규칙을 단순화하기
헨델
성은 물론 이려니와 최고 수준의 음악을 창조해 낸 인물이다.
위하여, 그레고리안성가곡에서 보여지던 멜리즈마와 이음줄을 없애면서
한 음절에 하나의 음표를 배치하고자 하였다. 이는 미사의 모습을 좀 더
밝게 하여 제 역할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루터의 음악목회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찬송가를 출판하는 일
이었다. 그는 “몇 편의 기독교 노래”(Etlich Christlich Lieder, 1524),“영
적 찬송가”(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 1529),“영가집” (Gei-
stliche Lieder, 1533)을 비롯하여 많은 찬송가 집을 출판하였다. 루터는
찬송가를 출판함에 있어서 자신이 직접 창작찬송가에 관여함으로 더욱 효
35) 세광음악 대사전(서울 : 세광출판사(사전편찬위원), 1992), 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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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적인 음악에 대한 목회를 할 수 있었다.
루터는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간단한 멜로디를 많이 사용하여 작
곡했다. 그 중에는 라틴어 또는 독일어로 되어 있는 신앙의 노래들, 학교
에서 불리는 노래를 동요, 민요, 또는 캐롤 등이 있었다. 이 노래들은 유
럽의 기독교 세계로 퍼져 나갔고 노래의 가사 들은 때때로 약간씩 변경되
었거나 완전히 새롭게 쓰여졌다.
그러나 칼빈의 영향을 받은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독일의 일부 지
역, 스위스 같은 나라들은 음악의 발전이 아주 저조한 편이다. 특히 내세
울 만한 훌륭한 음악가가 없을 정도의 상황이다. 즉 교회 음악에 큰 두각
을 나타낸 음악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교회음악과 회중음악에 큰 영향
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루터의 찬송가 철학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먼저 찬송은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드려져야 한다는 주장
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찬송하지 말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찬송은 하나
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 이므로 제사로 드려
져야 됨과 기쁨으로 찬양해야 됨을 알린 인물이다.
그리고 오르간이나 기악음악도 반주악기로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으
며, 젊은이들을 위한 찬송은 합창으로 불려지는 것이 좋다고 그는 주장하
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프로테스탄트 코랄의 기초를 여는 동시에 성
경, 식문, 가사에 대해서도 뛰어난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여 음악과 문학
사상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으며36), 그의 지도하에 드디어 독일어 회중찬
송 코랄(Chorale)이 탄생하였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그는 특히 더욱 단순하고 겸허한 독일 민요풍의 선
36)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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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을 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작의 선율에 의한“내 주는 강한 성이
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37)”는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으며, 그 외에 많은 코랄의 선율은 루터자신의
작품으로 되어있다.
그는 심요한 성서적 가르침을 단순하연서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찬송의 단순함에는 힘과 용기가 있었
다.38) 루터의 찬송 가사는 예술적로 잘 다듬어 지고 섬세한 시적언어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거창고 투박하면서도 신앙고백적으로 표현하고 있
다.39)
루터는“복음 찬송가의 아버지 (Father of Evangelical Hymnody)" 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는 자신이 찬송을 작사 작곡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
시의 유능한 음악가 발터(Johann Walther of Thuringia, 1496-1570)와
루프(Conrad Ruft)의 협조를 얻어 루터교 찬송가를 편집 출판하기도 했
다.40) 루터의 감독 하에 발터가 편집한 Geistliche Gesangbüchlein이 역
시 같은 해인 1524년 늦은 여름에 Wittenberg에서 출판 되었다. 이것은
루터교회 chorale들에 근거한 Polyphonic Motets (다성적 모테트들)의
곡집이다. 주로 그것은 회중을 위해서가 아니고 합창대를 위해서 구성되
어 있지만, 루터는 그의 찬송들이 전체 회중을 익숙하게 하는 합창대에
의해서 노래 불리워지는 것을 원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41)
1524년부터 이외의 다른 찬송가집들의 출판물이 매해 목격되었다. 종
교개혁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서든지 출판업자들은 보다 더 우수하고, 내
용이 풍부한 찬송가집을 내놓으려 다투었다. 1524년부터 루터가 서거한
37) 김의작, [교회음악학]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83), 207.
38) W. J .Reynolds and Milburn Price, op.cit., p.13.
39) C . Schalk(ed), Key Words in Church Music (St Louis :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78), 201 - 202.
40) 조숙자외 1명, [찬송가학, 1996], 62.
41) 신중호[종교개혁자들과 교회음악](서울 : 서울신학대학대학원 M. Div 과정 석사논문),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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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까지 100권 가까이 찬송가집이 출현되었으며, 이중에서 루터가 직
접 감독한 것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➀ The Lufft Enchiridion l526년 Wittenberg에서 출판됨
➁ The Hans Weiss Hymnal 1528년 Wittenberg에서 출판됨
➂ The Joseph Klug Hymnal 1529년 Wittenberg에서 출판됨
➃ The Valentin Schwnann hymnal 1539년 Leipzig에서 출판됨
➄ The Valentin Babst Hymnal 1545년 Leipzig에서 출판됨
이 상의 루터의 찬송가집 5권은 종교개혁 기간 동안의 가장 아름다운 찬
송가 집이었다.42)
사실 16세기 말경에 와서야 회중 찬송이 예배용으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빠른 속도로 회중 찬송이 보급되지 못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때 회중 찬송은 단성성부로 찬양하였으며, 찬양대는
테너성부에 코랄 선율이 있는 아주 세련된 다선 선율로 찬양을 하였다.
사실 코랄이라는 것은 단음으로 부른 그레고리안에 대해 몇 가지 소리
로 합창한 것을 카툴릭에서는 풀이하고 있으나 루터가 말하는 코랄은 4
성부로 쓰여져 있지만 처음에는 테너에 선율부가 있고 회중은 이것을 합
해서 제창하고 다른 3성부는 중세기부터 시작된 관계가 계속되어온 바
있는 소년들을 주축으로 해서 성가대의 제도를 부활시키어 회중들과 함께
부르게 했다.43)
이러한 고전적인 찬송가의 대표자는 요한 발터이다. 발터의 찬송가들은
대부분이 묘사적 형식을 넘어서는 작품들이고 다른 것들보다 화성적인 형
식으로 쓰여진 작품들이다. 루터의 개혁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던 독일의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러한 고전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성악곡을 작곡하려
42) Martin Luther, Liturgy and Hymns, Luther's Works. vol.53. ed. Ulrich S. Leupold.
(Philladelphia : Fortress Press.1979), 192-194.
43) 律川主一[교회음악 5000년사, 문덕준역] (서울 : 에덴문화사, 1978),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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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에 배치됨으로 인해 전체의 회중(성
인남, 여 모든 성도)들이 찬송 부르기에
더욱 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 어느 누구든지
음악이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진실 되
게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루터의 개혁주의를 따르게 된 기독
교는 대단히 개인적이며, 음악으로 인해
더욱 친밀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
고 이러한 형식의 찬송가(Hymn)와 코랄요한 발터
하였다. 이것은 인문주의자들의 단순한 주제들은 기독교 내에서 예배 시
에드려질 찬송의 경우 회중을 위한 4부 합창곡으로 이어졌으며, 아주 점
차적으로 주선율이 남성의 테너 성부에서 여성의 소프라노 파트로 옮겨지
게 되었다. 몇 세기 동안 테너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주선율이 소프라노
(Chorale)은 교회 예배음악의 음악적인 기초가 되었다.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찬양하기 위해 사람에게 내
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므로 좋은 찬송이 예배에 사용될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직접 복음
적 찬송을 지어44) 온 회중으로 하여금 기쁘게 찬송하도록 하였으며, 한
선율로 부르는 제창(Unison), 성가(Chant), 캐롤(Carol) 등을 포함시켰을
44) 루터가 직접 집필하고 작곡한 40여 개의 찬송가들 가운데 10곡을 뽑아서 연대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루터선집 8권 pp. 499-515.)
① Nun freut euch, liebe Christen Gemein(너 성 도들아 기뻐해), ② Nun Komm, der
Heiden Heiland(구세 주여 오시어), ③ Aus tiefer Not(마음 깊은 곳 당신께), ④ Gatt sei
gelabet und gebenedeiet(찬양과 경 배 를 주님께), ⑤ Christ lag in Todesbanden(죽음을 당
하신 주), ⑥ Komm, heiliger Geist, Herre Gott(주 성 령 하나님 오소서), ⑦ Ein feste Brug
ist unser(내 주는 강한 성이요), ⑧ Vom Himmel hoch da Komm ich her(하늘에서 오신 주
님), ⑨ Vater Unser(주기도), ⑩ Erhalt une, Herr, Bei deinem Wort(주님의 말씀만으로) 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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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예배 음악의 목
적은 첫째 하나님을 찬
양하는 일, 둘째 교리적
교훈, 셋째 회중의 참여,
넷째 자국어로 찬송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당시
의 음악을 교회에 수용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교회의 모든 미사와 행
사에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종교개혁자이며,
예배 음악가였다.요한 발터의 고전 찬송가
뿐만 아니라 민요풍 선율을 지닌 찬송을 한 목소리(unison)로 부르게 하
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독일 안에 있는 종교개혁을 따른 모든 개신교 예
배음악과 회중찬송을 정착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교회음악
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신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예술적인 음
악이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과 토대를 마련해 주었
다.
4. 츠빙글리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 빌트하우스
(Wildhaus)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마을 행정관이었으며 8남 2녀
중 3째였다. 1500년 빈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502년 바젤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았으며, 인문학자 비
텐바흐(Thomas Wyttenbach 1472~1526)를 추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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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며 군종 신부를 사임하였다. 이
후 아인지델른(Einsiedeln)으로 옮겨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1519년 취리히의 대성당의 설교자
가 되어, 체계적인 성경강해를 하여 시
민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는 성추
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로
스뮌스터 주교좌 성당의 유급사제로 영
입되었다. 이 무렵부터 츠빙글리는 성
서를 새롭게 해석하여 설교하는 설교가
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522년 츠
빙글리는 단식계율(斷食戒律)을 어기고울리히 츠빙글리
1506년 9월 16일 사제 서품을 받고 10년간 글라루스에 있는 교회의
신부로있는 동안 세 차례나 종군목사로 종군하였다가 1515년 용병제도를
친구들과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취리히 교구의 경고를 받았다. 츠빙
글리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친구들을 변호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
데 이것이 그의 종교개혁적 사상을 외부에 표현한 최초의 글이었다.
1522년 츠빙글리는 세자녀를 둔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아
내를 가진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혼서를 주교에
게 제출하였다. 그는 성서에 합치되는 내용을 주장하면서 취리히의 종교
개혁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
제안(提案)>를 발표하여, 시 당국을 설득시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하
였으며, 또 제2회 토론회에서는 성화상(聖畵像) 폐지에서 십자가 · 제단 ·
오르간의 폐지까지 제의하였다. 이 운동의 영향은 취리히는 물론, 그 밖
의 도시에까지 번지는 동시에, 가톨릭교를 고수하는 주(州)의 반발도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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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독일의 루터파(派)와 제휴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1529년의 마르부르크회담에서, 성찬(聖餐)에서의 빵과 포도주
를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이른바 ‘상징론’을 주장함으
로써 루터와 의견이 대립된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가톨릭교를
견지하는 원시(原始) 5주(州)와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취리히군의 종
군목자로 참전하여,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에는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당분간 J. H. 불링거에게로, 그 다음에는 J. 칼뱅에게로 넘겨
졌다.45)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스위스의 Wi1dhaus에서 태어낸 Zwing1i
(1484-1531)는 특히 Vienna 에서는 음악교육을 받었고, 여러 가지 악기
를 잘 연주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수한 작곡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그가 12세 되던 때 Berne에 있는 동안에는 단지 그의 음악적 포부를 넓
히기 위하여 그 지방 수도원의 예배당 합창대에 입단 했었던 일도 있었
다. 그의 동기들 중에서 많은 사랑들이 그의 비상한 음악적 재능에 대해
말했으며, Wyss는 그( Zwingli) 만큼 노래 부르는 것과 악기를(루트, 하
프, 큰 비올, 작은 비올, 독일 풀룻, 트럼펫, 덜시머. 코르넷등 ...... )의 연
주에서 우수한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기술하였다.46)
사실 츠빙글리가 연주했던 악기는 10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연주한 악기는 오르간이다. 그의 전공이 오르간이라고 할 만큼
그는 오르간에 전문가였다. 아마도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음악의 교
육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인 종교개혁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음악분야에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작곡 능력은 눈부실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눈부신 활약은 음
45) Naver 백과사전[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46) 신중호 [종교개혁자들과 교회음악, 1982](M, Div 논문),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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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가 택
한 것은 종교개혁가로서의 뒤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1519년 l월l일에 그는 Grossmünster의 사제직에 임영되어 그의 직무
를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성경을 강해하였는데 사람들은 큰 흥미를 가지
고 그의 강해를 들었다. 그의 설교는 대담하고 성서적이며 복음주의적이
었다. 그는 여러 설교에서 속죄권을 매매하는 Bernhard Samson을 공격
하였고. 또한 교직자의 독신생활, 마리아 화상의 예배, 그 밖의 교회의 악
폐를 연거푸 공격하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와의 충돌이 날이 갈수록 심해
갔다.
취임한지 3년 안에 그는 성직자의 결혼승인을 Konstanz의 주교에게
청원하고 사순절금식을 깨뜨림으로써 Zurich에서의 파격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47)
그의 의식(liturgy)개정에 대한 첫번째 시도는 “De canone missae
epicheiresis”였고 1523 년에 나타났다. 여기에서 미사전문( canon of
the Mass)과 성자 기념일들은 생략 되었으며. 음악적 부분들도 극적으로
축소되었다. 그의 보다 파격하며. 전체가 자국어로 개정된 “Aktion oder
Brauch des Nachtmahls"는 1525년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그 후의 모든
츠빙글리파의 예배를 위한 양식이 되었다.48)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음악에 대한 부분은
다른 어느 종교개혁자들 보다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
은 신학을 접하고 급진적으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의 배표적인 반응
이 오르간을 교회에서 없애는 일을 하였고, 천주교에서 사용했던 모든 음
악이 미신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 반기를 들고 모든 음악의 연주를 금
하게 하였다. 즉 칼빈과 같은 단성성부의 노래만 부르도록 한 것이다.
47) 신중호 [종교개혁자들과 교회음악, 1982](M, Div 논문), 67.
48) Ibid,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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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츠빙글리의 카펠 전쟁에서의 전사 그림
둘째로, 츠빙글리가 취리히에 도착하였을 때. 그 시에 있는 교회들 속
의 음악상태는 매우 빈약하여 민감한 음악인인 츠빙글이를 노하게 하였
고, 교회들 안에서의 찬양을 불쾌히 여기어 그것을 그치도록 말하게 하였
을 것임에 틀립없다는 견해가 있고, 이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높다. 다음
으로는. 츠빙글리의 개혁이 루터의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들
수가 있겠다. 루터는 성경에서. 특별히 명령한 것만을 포함 시켰다. 그렇
기 때문에 루터는 음악을 신학 다음에 놓았고. 츠빙글리는 음악을 신자에
게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49)
사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가 함께 루터와 로마 카톨릭 황제의 면죄
부(免罪符) 판매에 반대하여 1519년 이후에 취리히에서 목회하면서 로마
카톡릭 교회의 부패성을 공격 하므로 말미암아 스위스 정부가 거의 카톨
릭 교회에서 이탈하기에 이르렀다 울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은 루터
의 종교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층 더 이성적인 운동으로 칼빈
49) 신중호 [종교개혁자들과 교회음악, 1982](M, Div 논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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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Calvin)은 법학을 공부하
고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한
후 1535년에 스위스로 오게 되어
쯔빙글리의 뒤를 계승하게 된다.
당시 교회음악에 대한 적대감정이
심한 분위기를 알면서도 1537년에
제한된 시편송을 단성만으로도 노
래하게 허락하는 한편 그는 시편
가창을 예배의 경건을 조장한는데
1548년 베자(Theodor Beza)라
다는 수단으로 삼기 위하여 각서
를 제네바에 제출하였으나 거부당 칼빈
의 영향을 받은 예정설에 기초를 둔 운동인 것이다.
츠빙글리의 사상은 스위스에서부터 북쪽으로 확장하여 독일 남쪽까지
그 세력을 폈으나 이 지역은 워낙 보수주의적이었으므로 강렬한 저항에
부딪혀서 전쟁으로까지 확산되어 서로 싸우다가 불행하게 츠빙글리는 전
사하여 패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음악을 매우 좋아했으나
그가 이끄는 종교개혁 때에는 카톨릭교회의 미사나 교회의 성상(聖像) 폐
지를 주장하는 때였으므로 교회 안에 있는 오르간마저 없애버렸으므로 교
회음악이나 찬송가 분야에는 별로 공헌한 것이 없다.50)
5. 칼빈의 시편가(Psalter)
하고 다음해 그는 스트라스부르그(Strasburg)로 피해 가버렸다. 몇 해
후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42년에 프랑스어로 시편을 운율화 했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당한 바 있는 마로트(Chemen Marot)를 격려하여 시
50) 주정식 [교회음악 발전사, 1990] (서울 : 호산나음악사), 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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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으로 된 30편의 시편 선집을 내게 했는데 Marot는 19개의 시편집을
추가하고 프랑스로 귀국한 후 1544년에 사망했다. 마로트가 스위스를 떠
난 후 칼빈은 150개의 시편을 완전히 운율화 시켜 줄 사람을 구하는 박
식하고 유능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마로트가 완수하지 못한 운율화를 마
치고 여러 집으로 출판하기 시작하여 1562년에는 완성판을 내게 되었
다.51)
사실 시편가는 16세기에 들어와 다시금 제네바의 개혁자 존 칼빈에
의해서 새롭게 단장된 모습을 교회 앞에 드러내게 되었는데 칼빈은 루터
와는 전혀 다른 가르침으로 찬송가를 시도하였다. 그 이유는 루터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민요나 세속음악을 받아들여 회중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한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해야 된다는 일념 하에
민요나 세속음악 등을 함께 사용 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하였으며 그런 신
념으로 그는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그는 루터보다 로마 케톨릭교회의 의전과 행사들을 유지하는 것에 대
해서 더욱 강렬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예배 의식에서 예술이 유혹하는 힘
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은 성경에 없는 가사를 노래하는 것이라 주장하면
서 오직 성경 안에 있는 노래 가사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편을
교회의 찬송이라고 보았고, 이것이 회중에 의해 불리어져야 한다고 주장
했다.52)
또한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신약성경은 오직 시편만을 그리스도인들이
부르기에 알맞은 운율적 찬송가로 인정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
주의자들은 시편과 한두 가지 성경의 노래(canticle)들을 제외하고는 절대
로 어떤 본문도 찬송가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더 나아가서 칼빈
은 이렇게 주장했다 :
51) 이유선[기독교 음악사](서울 : 기독교문화사, 1994), 97.
52) 이성재 [장 칼뱅과 찬송가 그리고 한국 개혁교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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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고 순수하게 신을 찬양하는 노래에는, 어떤 의미가 없는 만
큼 교훈을 주는 것도 없다. 그 노래를 가슴과 법으로부터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혀로부터 흘러넘치도록 하라. 악기를 사용한 음악은 오직 율
법 시대에만 그것도 인간들의 유치함 때문에 허용되었던 것이다.”53)
그러므로 화음을 맞추어 노래하거나 어떤 종류이든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금지되었던 것은 당연하다.54)
16-17세기에는 독일음악의 발달과 더불어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와 네델란즈에서도 시편가
(Psalmondy)가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클레망(Clemaent)과 마로
(Marot), 그리고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에 의해서 운율적인 시
편가가 고안 되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루터와 그의 후계자들의 찬송가와
코랄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이런 운율적인 시편가도 당시의 세속적
인 민요 가락에 맞추어 불려졌다.
결과적으로 이 시편가는 독일에서 유행하던 찬송가나 코랄에 밀려나게
되었다. 기용 프랑크( Guillaume Franc)는 칼빈이55) 1542년 제네바에서
발행한 시편집을 편찬했고 1561년에는 루이 부르죠아(Louis Bourgeois)
가 리용에서 다른 판을 발행했다. 이 두 번째 판은 시편에다 4성부 5성부
혹은 6성부로 된 83개의 민요 같은 곡조를 붙인 노래를 싣고 있다.
또 1565년에는 아드리안 르 로이(Adrian Ie Roy)가 파리에서 완본 시
편집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는 선율이 클로드 구디벨56)의 모테트와 같은
53) 앤드루 윌슨, 딕슨 [교회음악사 핸드북 : 박용민 옮김](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6), 65.
54) Ibid, 65
55) 사실 칼빈은 교회음악 특히 회중찬송과 예배 음악에 대해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칼빈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스코틀렌드와 영국과 웨일즈 일부 지역, 특히 독일(독일
의 북쪽 지역, 스위스 근접지역)과 스위스에서는 예술적 표현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그 영향은
아직도 위에서 거론된 나라들에서는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음악적인 면에서는 저조한 상
황이다.
56) Goudimel(l510-1572)은 유그노교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모테트 형태의 시편’이란 책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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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를 두드리는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지 만 그 민족의 풍습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있으며 다윗도 그것이
그의 시대에 존속했음을 증거하면서 분명 일반적이고도 용납된 풍습으
로써 노래하는 자들과 함께 “소고치는 동녀”를 열거하고 있다. (시
68:25). 그러나 동시에 그 악기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패하여
졌던 그 율법적인 의식에 속하는 우리는 아주 간단한 의식을 지녀야
함은 물론이다.58)
빙식으로 붙여졌다. 일반적으로 이런 편찬물들은 회중이 회중이 부르기에
는 너무 어려웠지만 이 마지막 작품은 1607년 홀란드에서 다시 발행 되
었다. 그 후 1663년에 라이멘에서 콜로딘 레 쥬네(Claudin le Jeunc)에
의해 보다 쉬운 곡조가 채택되었고 이 시기에는 멜로디가 보통 소프라노
보다는 테너에 주어졌다.57)
사실 칼빈은 인간이 음악을 오용함으로써 오는 예배의 허영적인 것과
감각적인 가능성 및 위험성을 간파함으로 자신은 스스로 삼갔던 것이다.
그는 츠빙글리처럼 예배에서 모든 음악을 제거하는 한편 제단에서의 노래
와 복음송 그리고 악기의 사용을 금하였던 것이다.59) 그 실 예로 칼빈은
예배에서 극히 간소화된 음악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다음의
문구(칼빈의 출애굽기15:20 주석)는 이 사실을 명확히 하여주고 있다.
따라서 칼뱅은 청소년 교육과 교인들의 예배 교육을 위해 제네바에
“찬송학교”를 설립했고,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교회음악가를 찾았다. “찬
송학교”는 좋은 수준을 유지했고 학내에서는 아침·정오·저녁의 기도 시간
과 식사 시간에 4성부의 시편가를 불렀다. 그리고 찬양대는 회중 에게 시
했다. 그는 리용(Lyons)에서 유그노 대학살 때 학살되었다. (재인용-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41. 각주.)
57)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41.
58) 존 칼빈 [구약 성경주석, 3권,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 역편] (서울: 성서교재 간행사.
1980), 249.
59) Walter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ed, by F. Blume: Protestant
Church Music, Part V.),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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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
하도록 격려하는 노래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가 행하신 일을 생각게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영과 돌리게 하
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으
로부터 말미암지 않으면 아우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면에서 노래를 찾아보았으나 성령 자신이 말씀하시고 성
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다윗의 시편 보다 더 합당한 노래를 찾지 못했
다.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입에 말씀을
루시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찬양 하는 것이 되
지 때문이다.61)
편가를 자르 쳤다.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칼뱅은 개혁 교회의 회중 찬송
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60)
그는 공식예배에 적합한 음악을 찾기 위하여 여러모로 애써 보았으나
성경속의 시편보다 더 우수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는 시편이 갖고
있는 경건성과 깊은 영적인 무게를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는 1543년에 출간한“제네바 시편가”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칼빈의 자세는 지금의 개신교 교회 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예배
의 형식과 찬양의 모습과는 사뭇 너무나도 다른 모습니다. 그의 말을 다
시금 생각해보면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해서 연주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에서는 왜! 악기를 사용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
일까? 그리고 지금의 예배는 개혁주의에 앞장을 선 칼빈의 입장을 따르지
않음으로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서 드리는 찬송과 예배가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아이러닉한 입장일 것이다. 모든 교회는 찬양을 할 때 악기란 아
기는 다 동원해서 찬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혁주의를 부르짖
은 종교개혁자인 칼빈주의에 입각한 진정한 찬양은 어떤 것이란 말인가?
60) 이성재 [장 칼뱅과 찬송가 그리고 한국 개혁교회], 4.
61) 조숙자외 1명, [찬송가학, 1996],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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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모든 교회와 교역자들이 한 번 더 깊이 생각을 해봐야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와 교역자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종교개혁의 부르짖
음을 받아들여야 되는지 다시금 고민에 빠져야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런 칼빈의 의식은 성경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이 작사한 가사에서는 더욱 절실히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루
터와 같은 사람들이 신앙적 노래를 자유로이 작시 한데 반하여 , 칼빈은
이런 유의 일을 결코 용납지 않았던 것이다.62) 그리고 계시시대가 끝난
근대에 세속인이 감히 사적인 생각만으로 혹은 예술적 감정 및 자기 마음
의 신앙 감정만으로 찬송시를 쓸 수 없다는 것과 자신과 그의 동지들에게
찬송의 본체인 시편 외에 다른 찬미를 용납하지 않았다.63)
이렇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빈에 의해 제작된 제네바 시편가는 프
랑스와 유럽대륙으로 퍼져 나갔으며 기독교 노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교회 내에서 시편가를 무반주 단선율 유니송으로만 부르게 하고 곡
조를 변경하거나 편곡하는 것을 반대 하였다. 사실 16세기에 와서는 종교
개혁자인 칼빈의 지도하에 시편은 자국어로 운율적인 형태를 갖추어 번역
되었으며 여기에 회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단순한 곡조가 붙어져 불란
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회중찬송으로 나타나게 되었다.64)
그래서 그는 성서 중심적인 가사를 찾다가 시편을 가장 적절한 가사로
선택을 하였으며, 이 시편을 교회의 찬송가 가사로 선택하게 되었다. 이
런 영향을 유럽의 선진국 중에서도 스위스나 네덜란드 화란 개혁파교회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지금도 시편찬송을 예배 때 계속 부르고 있다.
특히 화란에서는 신교도들이 150편으로 만들어진 시편가 만을 부르고 있
다.65)
62) 김은성[한국교회 예배 찬송에 대한 연구]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원 석사논문, 1988), 108.
63) Walter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ed, by F. Blume: Protestant
Church Music, Part V.), 516.
64) 조숙자외 1명, [찬송가학, 1996],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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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초의 칼빈주의 시편가의 시작은 사람들의 관례에 의하여 그렇
게 시작되었다. 칼빈과 그의 체계를 나타내는 음악의 영향이 약 2세기 동
안 스위스, 프랑스, 화란 등의 개혁주의 교회와 영국 스코틀렌드, 그리고
북미의 청교도들의 교회에 미쳤다. 시편만을 찬송하는 칼빈주의 교회들의
예배 의식(어쩌면 이것은 전혀 예배 의식이 아닐지도 모른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66) 여기서 우리 한국교회의 실정을 살펴보고 “칼빈이 주
장한 시편을 찬양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생각해봐야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의 실 예로 D. L. 무디와 함께 했던 생키의 경우는 무
디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 받은 글을 받아 적어서 그 즉시 작곡을 하는
일을 자주 했다. 그 대표적 찬송은 “십자가 군병 되어서 (통391)”, “우리
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통412장)”, “어려운 일 당할 때(통342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통349장)”, “양 아흔 아홉 마리는(통191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통397장)”등이 한국 교회에 일려져 있다.
지금의 복음성가가 생키처럼 그런 일들을 많이 범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아들였던 1890년경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D.
L. 무디 목사와 함께 했던 생키의 음악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
그냥 그대로 해석을 해서 보급 시켰다. 이것은 지금 많은 교회들이 120
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받지 말아야 될 것을 받아들인 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일들 속에서 지금의 한국의 예배 음악은 너무나도 큰 여파
속에서 해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교회는 칼빈이 공
을 드리고 준비한 예배 찬송의 진정한 노래인 시편가는 어느 곳에서도 찾
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칼빈은 예배 찬양으로 오직 시편가, 칼빈이 바른 찬송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애착을 가진 진정한 신학자요, 음악에 많
65) John. J . Trowbridge. [성가지휘법 : 문덕준역] ( 에덴문화사 1981), 51.
66)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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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케톨릭교회, 루터교회,
독일 개신교 그룹의 음악과 스
위스, 프랑스, 화란, 영국의 칼
빈주의 음악, 그리고 영국 독립
교회와 비국교도의 찬송가 외에
도 영국 성공회(Anglican Chu-
rch)의 음악이 있다. 성공회에
서는 로마 케톨릭의 팔레스트리
나나 독일교회의 바흐와 같은
윌리암 옥캄
은 관심을 가진 진정한 교회음악을 사랑했던 신학자였다. 그런데 사실 우
리나라 한국 교회들은 찬송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
시대의 흐름에 맞게 찬송을 받아들여서 빚어진 무지의 결과이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개혁을 외치기 전에 예배를 예배되게 찬송서부터 올바르게 살
려야 될 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과 교역자들
에게 던지는 강한 메시지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칼빈이 주장한
예배의 참 모습과 함께 찬양의 참 가사를 지닌 시편가를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올려야 될 것이다.
6. 영국 회중 찬송가
훌륭한 음악가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회의 음악은 350년 동안 높
은 수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국민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67)
윌리엄 오컴(William Occam, 1285-1349)을 영국 종교의 개혁자라고
할 수 있으나 영국 교회, 즉 영국성공회를 설립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
혁자는 Henry Ⅷ세(재위1509-1547)라고 한다. 16세기의 영국 신교(新
67)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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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주의의 중요한 공헌은 앤덤(Anthem)이다. 은 성공회 교회에서 예배
의전에사용되는 합창찬미가로 로마 케톨릭 예배 의전에서의 Motet와 거
의 흡사한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앤덤은 반주 혹은 무반주곡의 짤막
한 합창곡이다. 그리고 이 앤덤의 가사는 성공회 교인들에게 예외적으로
경우도 허용되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이나 기도서에서 채택되었
다.68)
앤덤의 특징은 리듬적이고 화성적이며, 성경대본의 가사를 사용하여
각 음절에 맞게 되어있고 곡의 길이는 비교적 짧아서 단순하지는 않다.69)
앤덤은 성서에서 인용한 영어 가사에 보통 Organ반주의 합창곡으로 쓴
것이다. 독창자를 위해 쓴 부분이 있는 것을 Verse Anthem70)이라 부르
고 그렇지 않은 것은 Full Anthem71)이라 한다. 그리고 Catholic으로부터
영국교회로 변모하는 동안 작곡가들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왕은 한때 Luther개혁파의 노선으로 기울어지는 듯 하다가 다시 취했던
까닭이다. 한때는 교회에서 앤덤이 자유롭게 불러지지 못했으나 엘리자베
스(Elizabeth)여왕이 부를 수 있다는 언명이 있은 후 활기를 띠게 되었
다.72)
16세기 영국과 스코트랜드의 개신교도들은 루터보다는 칼빈의 개혁사
상을 따랐으므로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칼빈의 이상을 따랐다. 예배시의
음악으로는 회중찬송으로 자국어 운율시편가만 허용 하였고, 창작 찬송
(hymn)은 금하였다. 그러나 17세기경부터 찬송은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
68) Ibid, 157.
69)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57.
70) 합창, 독창, 오르간 동의 기악반주가 포함된 악곡으로서 독창자를 위한 앤덤이나 독창자와 합창
의 교체되는 짧은 합창부분이 섞여 있다.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
판국, 1992), 158.
71) 합창만으로 작곡되어 반주가 있거나, 무반주 스타일의 합창으로서 대위법적이며, 17세기에 영
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pp.158.
72) 이윤선[기독교음악사](서울 : 기독교문사, 1994),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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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국 찬송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은 바로 아이작 왓츠
(Isaac Watts: 1674-1748)이다. 왓츠
의 영국 찬송에 대한 관제는 암브로즈
의 라틴 찬송에 대한 관계, 마로의 프
랑스 찬송에 대한 관계 그리고 루터의
독일 찬송에 대한 관계와 같다. 아이
작 왓츠는 대중 예배에 찬송을 도입하
는 것을 반대하는 편견을 극복하고 최
초로 찬송을 대중 예배에 도입한 사람
이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편견이 있
아이작 왓츠
했으며, 17세기 말경에 가서는 운율 시편가가 점차 사라지고 찬송이 교회
의 노래로서 그 기반을 굳혀갔다.73)
1) 아이작 왓츠(Issac Watts)
아이작 왓츠(Issacc Watts, 1674-1748)는 1647년 영국의 사우탬프
턴(Southampton)에서 태어나서 1748년 런던 부근 스토크 뉴잉턴(Stoke
Newington)에서 사 망한 영국 찬송가 작사의 원조(元祖)이다.74) 고향인
Southampton의 Grammar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5세에 라틴어, 독일어, 9
세에 희랍어, 11세에 프랑스어, 13세 히브리어를 배웠다.75)
었다는 사설조자 믿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에는 많은 교회가 그런 제안
때문에 분열되었었다. 또한 운율적인 시편가만 부르자는 제안은 심한 반
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후기의 영국 개혁교회에서는 시편가가 회
73)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09.
74)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70.
75) 律川主一[교회음악 5000년사, 문덕준역], (서울 : 에덴문화사, 1978),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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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찬송으로 볼리워졌다.76)
그는 영문학의 역사를 보면 왓츠(Watts)라는 시인의 이름을 볼 수 있
는데 시인인 동시에 고금을 통해서 비교할 수 없는 유명한 찬송시의 작가
이다.77)
왓츠가 태어났을 때는 영국 종파사상 독특할 만한 시대로서 국교에 불
만을 품고 각처에서 신앙의 자유를 절교한 시대였다. 찰스왕의 통치 밑에
악명으로 유명했던 제퍼레이스(Jephrase) 판사가 악독한 처형을 하며 순
진한 사람들인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 존 번연 (John Bunyan)
들을 투옥했다.
이때 비 국교파의 목사였던 왓츠의 부친도 여러 차례 투옥되어 볼 수
있는데 시인인 동시에 고금을 통해서 비교할 수 없는 유명한 찬송시의 작
가 성 미카엘 형무소의 돌계단에 왓츠를 안은 어머니가 여러 차례 간 일
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오는 길에서 시편가만 부
르는데 예배에 부족한 점을 느껴 자유스러운 찬송가를 채용했으면 하는
뜻을 비쳤다. 그래서 20세 때에 처녀작으로 작시한 것이“보다 어린양의
영광”이다.78)
사실 17세기에 그의 출현은 영국 찬송에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하
였다. 왓츠의 교회 찬송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은 영국에서 시편가를 찬송
가로 변화시키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하였다.79) 왓츠가 번역하여 사용한
시편과 또한 그가 자유로 이 작곡한 찬송들은 영국교회에서 발견되는 전
통적 시편가에 대한 반발의 시작을 의미했다. 왓츠의 시대까지 기성교회
들은 운율적으로 번역된 시편을 노래했다.80)
76)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44.
77) 律川主一[교회음악 5000년사, 문덕준역], (서울 : 에덴문화사, 1978), 327.
78) Ibid, 327-328.
79)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14.
80) 제임스 셀리[복음적 찬송의 역사(A HISTORY OF EVANGELISTIC HYMNODY), 전덕영 역] (서울: 에
덴문화사, 197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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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 개혁교회 찬송가의 원조라고 불리울 만큼 위대한 작가이다.
그의 시는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심미적이며 진지하다. 그리고 찬송
시 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81)
왓츠를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로 부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거의 혼자서 시편을 찬송으로 변형 했고 또한 약 750의 찬송을 만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를“복음성가의 아버지”(the father of
gospel song) 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는 찬송가에 대단히 많은 복음적
인 주판성과 개인적 표현(즉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의 새로운 형태)를 가
져왔기 때문이다.82) 그래서 그를 다들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
다. 그 예로 그의 찬송 제작에 특기할만한 사실은 많은 찬송이 매주일의
예배 설교에 맞도록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영국국교회에서 교회력을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비구교도의 전통을 매
주일의 설교를 자유로 선택하였다. 이러한 찬송은 설교의 내용을 재강조
하든지, 더 설명하든지, 절정으로 이끈다든지, 결론을 짓는 역할을 하였
다. 그래서 왓츠의 많은 찬송은 그의 설교와 관련되어 작사된 것이다.
“Am I a Soldier Cross(십자가 군병되어서 통391, 개370, 합537, 새390
장)”는 고전16:13에 기초한 설교의 결론으로 부르도록 만든 찬송이며
1721-1724년에 출판된 그의 “설교집(Sermons)”에 수록되어있다.83)
그리고 그의 유영한 작품으로 “주 달려 죽은 십자가”(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 1707) 이 찬송은 갈라디아 6장 14절을 근거로 한
것인데 이 찬송은 성만찬식에 부르는 것이 전통적으로 되어 있다.84) 즉
그는 대중 예배에 찬송을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편견을 극복하고 최초
81) 김의작[교회음악학, 1983], 123.
82) 제임스 셀리[복음적 찬송의 역사(A HISTORY OF EVANGELISTIC HYMNODY), 전덕영 역] (서울: 에
덴문화사, 1979), 17.
83)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16.
84) 律川主一[교회음악 5000년사, 문덕준역], (서울 : 에덴문화사, 1978),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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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찬송을 대중 예배에 도입한 사람이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편견이 있었
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에는 많은 심한 반대를 받지 않
았기 때문에 분열되었었다. 그러나 운율적인 시편가만 부르자는 제안은
심한 반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후기의 영국 개혁교회에서는 시편
가가 회중 찬송으로 붙리워졌다.85)
왓츠 목사는 찬송가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고 당대 영국의 비국교도로서 뛰어난 신학자이었다. 그의 저
서인 “교육편람(A Manual for Education)". “논리학( Guide to Ethics)"
은 불후 명저작으로 그 후 여러 세기를 두고 영국의 여러 대학과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86)
그는 철학, 과학, 논리학, 종교 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고 그의 시로
작곡한 찬송가는 600여 편에 달하게 되었으며, 그의 찬송집은 매년 6만
부씩이나 판매되었다. 장중함과 경건함이 가득 찬 그의 찬송가는 용어가
단순하고도 뜻이 깊어 예배용으로 적합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
은“주 달려 죽은 십자가”이다. 이 찬송의 원시가 지닌 문학적인 묘미나
심각한 종교적인 정신은 번역된 가사를 가지고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점
이 있다. 그의 작품은 형(型)이 단순 완벽함과 그 질에 있어서 깊이와 풍
부함이 구비되어 있어서 빌려 애창 되고 유명해졌다.87)
그는 시구의 정신을 생생하게 살려 보기 위해서 원문을 다소 변형시켜
풀이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신도의 교육수준이 낮은 자에게도 잘 이해
가 되었고, 아름답고 힘 있게 전달되기도 했다.88) 한국 찬송가에 알려있
는 왓츠의 찬송가는“구주와 왕이신 우리의 하나님”(통7장)과 “목소리 높
여서”(통8장) 의 영광송이 있으며 “큰 영광중에 계신 주”(통41장)와 “참
85)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44.
86) 문영탁[단권 찬송가 해설집] (서울 : 새순 출판사, 1984), 47.
87)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70-171.
88)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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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다 그 보좌(새46장)”이 있다. 그리고“햇빛을 받는 곳마다”(통 52
장, 새 19, 합 553, 개 206)의 찬양은 으뜸가는 선교의 찬송으로 널리 알
려진 것인데 시편 72편을 인용한 것이다.89) 또한 그 외에“기쁘다 구주
오셨네(통115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통141장)”, “주 달려 죽은 십자
가(통147장)”, “예부터 도움 되시고(438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138
장)”, “저 하늘나라는(227장)”, “저 높고 넓은 하늘에(237장)”, “주 사랑
하는자 다 사랑할 때에(249장)”, “나는 예수 따라가는(387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391장)”, “예부터 도움 되시고(438장)”90)이 많이 알려져 있
는 찬송들이다.
왓츠에 의해 시작된 교회찬송가(Church Hymnody) 의 새로운 운동은
예배의 목적을 위한 의도였지만 영국교회의 전통성에 영향을 0끼치지는
못하였다. 그의 찬송가 는 점점 비국교도 교회에서 운율적인 시편가 대신
사용되었지만 나머지 교회들과 예배당 에서는 시편의 사용을 계속하였다.
이때가 바로 존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가 나타날 해의 회중노래(집회노래)
상태였다.91)
2) 웨슬리(Wesley) 형제
(존 웨슬리(John Wesley),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웨슬리(Wesley) 형제 중 형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영국
웹워드 사제관(목회관)에서 태어나 1791년 사망한 영국 찬송가 작곡가이,
다. 그는 옥스퍼드 퍼드의 주교 Petter 박사로부터 성직을 받았고, 링컨
대학의 교수와 복음전도 협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89) 律川主一[교회음악 5000년사, 문덕준역] (서울 : 에덴문화사, 1978), 330.
90) 한국 통일찬송가 [한국 찬송가공회 1983], 문영탁[단권 찬송가 해설집] (서울 : 새순 출판사,
1984), 601(index of authors).
91) 제임스 셀리[복음적 찬송의 역사(A HISTORY OF EVANGELISTIC HYMNODY), 전덕영 역] (서울: 에
덴문화사, 197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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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
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발자
취는 그의 천부적인느낌에서 나온 리
듬의 새로운 힘과 자신만의 독특한 열
정이 그의 영감 있는 음악을 이끌게
되었다.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도 1707년 영국 웹워드 사제관에서
태어나 1788년 영국에서 사망한 찬송
가 작가이다. 웨스트민스터의 왕실 장
학생으로 공부한 그는 옥스퍼드 Chr- 존 웨슬레
그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많은 설교를 했고, 누구보다도 많은 저서를 남
기며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이끌었다. 그는 위대한 설교가요,
위대한 찬송가 작곡가였다.92) 사실 감리교의 창시자고 인정을 받은 존
웨슬리는 부흥운동의 추진력으로서 새로운 기독교의 노래를 계획하고 출
판하고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웨슬리의 찬송가는 영국의 전 교회를
ist Church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공부한 후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 감리교를 처음 시작한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1738년에 모라비안 교도들을 방문하여 그
들과 친교를 맺었던 관계로 독일의 코랄과 친숙해 졌는데. 그는 그들의
노래와 그것을 부르는 방법을 영국에 와서 많은 모라비안 찬송들을 그의
책에 실었다.
그리고 지금 영국의 찬송들은 1740년에 찰스 웨슬리에 의해 만들어진
“찬송과 성시(Hymns and Sacred Poems)”라는 찬송가 모음집을 출판하
92)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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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류투성이의“The Foundery”
보다 훨씬 잘 인쇄되었다. 1742년에 발
행된“The Foundery”란 찬송가는 감
리교 교회에서 사용했던 것을 본 따서
만든 것이다. 1746년도에 찰스 웨슬리
가 만든 첫 번째 책은 1725년 그의 나
이 22세 때 영국에 정착한 성공적인
독일 작곡가인 존 프레드릭 람페(John
Frederick Lampe)에 의해 발행된 것
의 재판이었다.93)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뛰어난 음악가이며 웨슬리의 친구 찰스 웨슬리
기 시작할 때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영국에서는 회중찬송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찬송에 대한 인식이 적은 상태였다. 이
에 맞물려 1740년 이후 잇달아 많은 찬송가가 계속 나오게 되었는데
1746년에 찰스웨슬리의 이름으로 출판된 첫 번째의책인“Hymn on the
Great Festivals, and Other Occasions”가나타났다.94)
인 토마스 부츠(Thomas Butts) 가“Harmonia Sacra”란 새로운 찬송가를
펴냈다. 1761년에 찰스 웨슬리는“Sacred Melody”란 제목의 두 번째 찬
송가를 토마스 부츠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책이 사실 그의 마음에 들지
는 않았지만 이 책은 매우 성공적으로 잘 팔리게 되어 1765-1770년 사
이에 3판이나 출판되게 되었다. 매우 성공적인 두 번째 출판이 된 것이
다.
이 외에도 그는 6500여 편의 많은 찬송시를 썼으므로 높은 수준의 찬
송 시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도 하지만 그의 찬송시는 매우 독특하여 대
93) Ibid, 148.
94)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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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 뛰어나게 높은 수준의 것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공사간 어떤
경우라도 그의 감정이나 영감을 모두 찬양시로 담았다. 모든 교리와 신
앙, 성경 역사상의 현저한 사건, 친구들의 죽음 등이 그의 찬송가 이면에
흐르고 있다. 그의 찬송가는 감리교 교리의 표본이다.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존 웨슬리 목사의 설교 주제와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빚진 것
을 갚아야 한다는 그의 사상이 찬송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95)
찰스 웨슬리의 한국 통일찬송가에 공헌은 “만 입이 네게 있으면(통
23장-시편 72:15, 새 8, 합 8, 개 173)”, “만유의 주 앞에(26장)”,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통 45장-요한계시록 7:9-12, 새 35, 개 220)”,
“하나님의 크신 사랑(55장)”으로 찬양과 경배 찬송이 있고 그 외 10여곡
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기다리던(통 105장-학개 2:7, 새
117,. 합 87, 개 79)”, “천사 찬송하기를(통 126장-누가복음 2:8-14 ,
새 139. 합 112. 개 94)”, “예수 부활했으니(통 154장-고전15:55, 새
174, 합‘ 144. 개 134)”, “대속하신 구세주께(통 161장)”, “웬일인가 내
형제여(269장)”, “생전에 우리가(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장)”,
“나 맡은 본분을(372장)”, “비바람이 칠 때와(441장)”, “큰 은혜로 묶어
주신(527장)”96)이 있다.
찰스와 존 웨슬리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루터만큼 음악
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존 웨슬리는 플룻으로 간단한 음
악을 연주할 수 있을 정보였고 정규 적인 음악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찰스가 복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회중 찬송의 필요성을 절감
하였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의 시대에 까지 교회에서 찬송은 불려
지지 않았고 비국교도 교회들만이 찬송을 불렀다.97)
95) 임영만[교회음악개론] (서울 : 대한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2), 177-178.
96) 한국 통일찬송가 [한국 찬송가공회 1983], 601(index of authors)., 문영탁[단권 찬송가 해설
집], (서울 : 새순 출판사, 1984), 601. (index of authors), 律川主一[교회음악 5000년사, 문
덕준역] (서울 : 에덴문화사, 1978), 33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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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편가가 미 대륙에 처음 소개된
것은 1579년 북부 캘리포니아 (Califo-
rnia) 연안에 도착한 드레이크경(Sir
Francis Drake) 일행에 의해서였다. 이
들은 선박을 수리하기 위하여 5주간 연
안에 머물면서 원주민 인디안들과 예배
를 드리며 시편가를 불렀던 것이다. 이
시편가는 악보가 없는 문자만 있는 노래드레이크경
이처럼 웨슬리 형제는 형인 존 웨슬리는 부흥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빚진 자로써 갚으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그의 생각이 찬송가에 쓰며들어 있다. 그리고 또 한사
람 동생 찰스 웨슬리는 음악가로써 찬송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성도들
에게 전달하여 그들의 심령이 불길처럼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 웨슬리 가
문의 두 형제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서 헌신하고 힘썼으며, 이
가문으로 인해 영국의 모든 교회들이 부흥의 뜨거움을 맞보았다.
7. 미국 교회의 찬송가
책으로서 초기 개척교회들은 모두 영국에서 가져온 이런 시편가를 사용하
였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서를 받아 거룩하게 하신 것 외에 어
떤 다른 찬송가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독을 당하
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98)
식민지 미국의 종교적인 발달은 모국의 종교적 발달과 아주 밀접하게
병행했다. 다시 한 번 시편가로부터 찬송가로의 점차적인 변천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변천은 영국교회에서 발견된 오랫동안 굳어진 전통과 또한 널
97)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147.
98) 김경선[찬송가학]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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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 시편가
리 인정된 종교적 표현의 규범에 대한 반발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의 신성
한 음악은 운율적언 시를 노래 하는 것에 기초를 두었다.99)
1620년에 들어와 제네바 시편가를 접하게 되는데 이 시편가의 뒤를
이어 히브리 학자인 에인스워드(Henry Ainsworth)가 영국에서“에인스워
드 시편가(Ainsworth Psaltery)”를 가져왔으나 곡이 어려워서 많은 호응
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프리머드 청교도들은 1685년에
“에인스워드 시편가”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640년 메사츄세츠 케임브리(Cambridge)에서 “The Whole Booke
of Psalmes Faithflly Translated into English Metre” (시편전집)이란
제 목으로 출판된 이 시편가는 미국대륙에서 출판된 최초의 책이었다.
이 시편가는 베이(Bay) 연안의 거의 모든 청교도들이 사용하였으므로 일
명 “베이 시편가(TheBay Psalm Book)”라고도 한다.100) 이 베이 시편가
99) 제임스 셀리[복음적 찬송의 역사(A HISTORY OF EVANGELISTIC HYMNODY), 전덕영 역] (서울: 에
덴문화사, 1979), 31.
100)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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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너무 널리 보급되게 되어서 1762년에는“베이 시편가”를려무 27판을
인쇄하게 될 정도였다.
이런 여파는 인디언들에게도 불게 되었는데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곡조
와 언어로 부르던“인디언 시편가”가 있었지만 영국 시편가의 여파로 인해
영국 시편가의 곡조 아래에 자신들의 언어를 기재하여 부르게 되었다.
1716년에 출판된 라이온(James Lyon)의 곡조집“Urania(하나님의 노래)”
에는 영국과 미국의 시편가 곡조, 찬송곡조, 성가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상당수가 사성부 합창곡으로 되어 있으며, 18세기 말경에 가서 아주 유행
하게 된 스타일 "Fuguing tune" (후가풍의 곡조)이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
다.101)
미국은 17세기 후반부에 들어와서는 시편가 곡조의 레퍼토리
(Repertoire)가 점차 감소되어 갔고 곡조를 악보대로 정확히 부르지 못하
고 마음대로 바꾸어서 제멋대로 불렀다.102) 그 이유는 그 시대에는 문맹
률이 떨어졌으므로 글을 잘 읽지 못하였으며 음악적인 지식이 없어서 악
보를 볼 줄 몰랐었다. 사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시편을 한 줄씩 읽는
습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죤 카튼은 그의 작은 책자에서 모든 사람이 책을 가지고 있고 또 책을
읽을 줄 알거나 시편을 암기할 수 있는 곳에서는 한 줄씩 읽을 필요가 없
다고 지적했다. 이 때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할 수 있고 회중들이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가사 한 줄마다 음악적인 운율을 붙여 선창(Lining out)할
수 있는 집사는 드물었다. 그래서 예배에 쓰이는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하
여 찬양대의 사용에 대한 허락을 해 주기를 바라는 자발적인 요청이 많이
있었다.
뉴저지주에 있는 멘드함 제일장로교회에서는 재미있는 제한사항이 있
101) Ibid, 167.
102) Ibid,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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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 속에 1735년 영국에
서는 웨슬리 형제들의 부흥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는 부흥의 길을 연 위대한 설교가
이면서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
가(Jonathan Edwerds, 1703-1759
) 1734년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
으키게 된다. 대 각성은 전통적인
종교제도에 대해 반항한 운동인데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집단들을 조나단 에드워즈
었는데 이 교회는 1791년에 읽지도 않고 노래만 하도록 하는 것에 관한
투표를 했다. 오직 운율적인 시편만을 노래하도록 하는 이런 교회의 음악
적 사용을 제한한 결과는 음악을 한정 지웠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해로웠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관심은 시편가사를 운율
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훌륭한 곡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앎으로
줄어들었다.
청교도 시편가는 구전에 의존하고 있었고 음악 자체도 음악적인 감수
성이 매우 빈약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편가는 계속 줄어
서 18세기 초에는 100년 전에 불려졌던 회중 찬송의 일부분만이 불리게
되었다. 질이 떨어지는 이러한 음악적 현상은 미국 식민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었고 영국, 스코틀렌드나 기타 다른 지역의 동일한 교파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103)
모은 것이다.
이 일은 1734년에 노템프턴(Northampton)과 메사츄세츠(Massachu-
setts)에서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설교에
103) 러셀 N. 스콰이어[교회음악 역사] (서울 : 호산나음악사, 1992), 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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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필드는 그의 부흥 집회에
서는 항상 뜨거운 찬송이 뒤따랐다.
사실 그는 왓츠의 찬송을 특히 좋아
하였고 집회의 성격상 시편가보다 복
음적인 찬송이 요청되었기 때문에 왓
츠와 웨슬리의 찬송을 주로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시편가 시대에
서 찬송가 시대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교회에 “왓츠의 시대
(The Era of Watts)”를 갖다 주었
다.107) 이 일 이후로 왓츠의 찬송가
화이트 필드
의해 시작되었다.104) 사실 이 대각성 운동은 영국의 부흥사 화이트필
드105)(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미국에서 1739-41년까지 바
로크시대의 막바지인 반기에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더욱 뜨겁게 열기를 더
하게 되었다. 즉 바로크시대106)에 흥했던 합리주의의 팽창과 고전주의가
오기 바로전의 문화적인 혼란시기에 발생한 이 운동은 특히 개인적인 회
개를 많이 강조하였다.
(Psalme and Hymn)는 1778년까지 50판 인쇄를 하였다. 이것은 미국 역
사상 최고의 판매였으며 이로 인해 각 교파별로 자신들의 찬송가 이름을
붙여서 만들기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대부흥운동 이후 계속된
104) 제임스 셀리[복음적 찬송의 역사(A HISTORY OF EVANGELISTIC HYMNODY), 전덕영 역], (서울:
에덴문화사, 1979), 37.
105) Ibid, 37(각주 참고-영국에서 온 복음전도자이며 신학자임).
106) 음악대자전, 새서양음악사, 교회음악사 핸드북, 기독교음악사, 교회음악사, 금성 뉴에이스 국어
사전 : 바로크시대는 1600년대 초부터 1750년대까지 이 시대는 절대 군주 시대이며, 변화와 모
험, 이성과 신앙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시기이다. 음악의 중신이 교회로부터 궁정이나
귀족들 사회로 옮겨지게 되면서 교회선법은 점점 약화되고, 장조와 단조의 중심적 역할이 뚜렷
해졌다. 그리고 다성음악이 절정에 이르면서 화성음악이 발달해 갔고, 여러 가지 새로운 모양의
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107) Benson, [The English Hymn],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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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9세기 부흥의 기틀을 마
련한 사람 중에 한 사람 D. L. 무디
(Moody, Dwight Lyman, 1837-
1899)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부흥
의 동반자였던 인물은 생키(Ira D.
Sankey)이다.108) 사실 무디는 음악
적인 소양은 없었지만 시카고 주일
학교에서 노래의 위력을 보았기 때
문에 그의 전도를 위하여 음악을 중
요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였다.109)
그리하여 집회가 시작하기 전에 생
디엘 무디
부흥운동에는 새로운 것이 수반되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찬송의 탄생이었
다. 이 일로 인해 미국의 서부 대부흥운동은 “켐프집회 찬송(Camp
Meeting Hymn)”을 일어나게 되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당시는 거의
찬양을 외 워서 부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쉽게 외울 수 있는 찬양과 가사를
택하였으며 특히 찬양의 멜로디는 잘 알고 있는 민요리드이나, 발라드풍
의 스타일과 후렴 부는 단순히 반복되는 가사를 사용하여 금방 친숙해지
는 쪽을 택하게 된 것이다.
키가 찬양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열은 상태에서 무디의 설교는 엄청난 변
화를 주게 되었다. 그리고 생키는 무디의 설교를 듣고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하여 즉흥적으로 무디의 설교가 끝난 후 다시 한 번 찬양을 함으
로 인해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성도들이 두 번 감명을 받음으로 부흥의
역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무디 목사와 생키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는 한국 찬송가로는“양 아흔
108) 원진희[교회음악 약사](서울 : 대학 기독교서회, 1978), 208.
109)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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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리는(통191장)”,“어려운 일 당할 때(통342장)”,“나 주의 도움 받
고자(통349장)”,“십자가 군병 되어서(통391)”, “주 믿는 사람 일어나(통
397장)”,“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통412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
히 쉬네(478장)”,“어두운 후에 빛이 오네(535장)”이 있다.110) 스티븐슨
(Robert M. Stevenson)은 그의 저서 “개신교 교회음악의 형태”
(Patterns of Protestant Church Music, 1953)에서“복음 찬송”(Gospel
Hymnody)은 기독교 노래에 없어서 미국의 가장 독특한 공헌이다 복음찬
송은 단단히 포장된 사람의 마음을 파헤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장엄하고
고상한 교회의 찬송이 할 수 없는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종교가 생존하기
위해서 대중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한 시대에 있어서 복음찬송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쌩키의 노래는 진정한 대중의 민요였다.111)고 말하고 있다. 이
러한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한국의 찬송가에 대해서 생각 하지 않을 수 없
다.
이렇듯 복음 찬양의 시작으로 미국은 대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되
었다. 그런데 생키의 음악에 대해서 생각 해봐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한국 찬송가는 미국에서 격은 찬송가에서 복음송가로 옮겨가는 변천과
정이 없이 곧바로 복음송가로 들어온 경우이다. 그러기에 기존의 찬송가
에 들어가 있는 찬송이 다 찬송가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에 사
용했던 통일 찬송가만 보아도 그 찬송가 안에는 복음송가가 절반(264
곡)112)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찬송가 안에 찬송가와 복음송가가
반반씩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미국 선교사님
들을 통해 직ž간접적으로 미국의 찬송가와 복음송가의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말 한국의 찬송가에 대해서 더욱 깊
110) 한국 통일찬송가 [한국 찬송가공회 1983], 601(index of authors)., 문영탁[단권 찬송가 해
설집], (서울 : 새순 출판사, 1984), 601(index of authors).
111)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81.
112) 이성재 [장 칼뱅과 찬송가 그리고 한국 개혁교회], 16.(찬송가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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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은 단순하였고 감성적인 곡(그
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내용을
즉흥적으로 써서 대중가요의 풍으로 부른
곡들이었다.)이 많았으며 찬송가라기보다
는 그 당시 대중가요에 가까운 곡이 대부
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복음찬양은 그 시
대의 성도들의 마음을 자극하였고 이러한
물결이 미국의 전반적으로 흐르면서 찬송
가의 개념보다 복음송가(Gospel Song)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다. 생키
은 관심과 애착이 필요한 상황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 찬송가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잘 편집된 찬송
가들이 출판되었다. 각 교파의 찬송가들은 다른 교파의 찬송가와 경쟁하
거나 비교하는 식으로 만들지 않고 오직 각 교파의 예배 형식, 찬송가의
전통, 교인들의 문화적, 경제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편집되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1933년에 출판된 장로교 찬송가 “The Hymnal”은 교회 음
악가 딕킨슨(Clarence Dickinson)이 편집한 것으로 “음악가의 찬
가”(Musicians Hymnal)라 풀려질 정도로 질이 높은 찬송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찬송가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복음적인 장로교회에서는 별로 인
기가 없었다.113)
그리고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찬송가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
를 마련하였다. 다글라스(Winfred Douglas)의 노력으로 문학적인 질에
있어서나 곡조의 특성에 있어서 문학적인 뒷받침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
적인 특징으로 가케톨릭의 단성성가(Plainsong) 곡조들이 많이 사용되었
으며 기존의 시편가와 찬송가 곡조외에 다수의 미국의 곡조들을 채택하고
113)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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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모든 곡조에는 운울 부호(Meter Signature)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리듬적으로 자유스러운 단성성가의 영향을 반영 하고 있
다.114)
현대 미국 찬송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예배에 대한 개
념의 변화가 반영되고 있는 점이다. 신자의 공동예배(Corporate
Worship)의 의미가 첨차 새롭게 인식되고 강조됨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임박한 마지막 심판을 강조하던 전 시기의 찬송과는 달리 하나
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노래가 많이 나타났다. 또한 “약속한
나라”(Promised Land)를 동경하던 표현에서 이 세상에서의 풍부한 삶을
간구하며 수동적이며 경건한 기독교인의 생활태도 보다는 적극척인 봉사
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생동력 있는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선교에 대
한 강조도 이방종교에서의 개종이나 인류의 평화를 위한 복음의 메시지로
변화되었다. 왓츠나 웨슬리의 찬송은 당시의 문학적 표현이 현대 교인들
에게 진부하고 의미가 별로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급격히 쇠퇴되고 있
는 현상을 보여주며 19세기 영국 옥스퍼드운동의 찬송들은 예전적인 교
파나 비예전적인 교파에서 모두 광범위하게 채택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영국과 유럽의 민속곡조에서 따온 찬송곡조가 많이 사용되
고 있으며 미국의 민요곡조도 많이 채택되고 있다.115)
영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북미대륙에 노예로 팔려와 갖은 고생을 하
면서 자유와 평안을 그리는 노래로서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은, 그리
고 작곡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노래들이다. 이것이 이른바 Negro
Spiritual Song이다. 흑인영가라고 불리우기 전에는 쥬빌리(Jubilee)라 했
는데 1871년에 이르려 죠지 화이트(George White)가 교장으로 있던 휘
스크(Fisk) 대학의 관계자들이 오래전부터 불러내려온 종교적인 노래들을
114) Ibid, 187.
115) Ibid,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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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연습시킨 후 미국 주요도시를 누비며 노래하면서 학교 선전도 하며,
합창운동을 전개했다.
약 5년간 계속하는 동안에 2차나 유럽에 순연하면서 약 15만 달러라
는 거금을 얻자 이것을 기금으로 하여 대학 안에 Jubilee Hall을 건축하
고 흑인들의 노래를 많이 불러 이 합창운동이 계속됨으로써 다른 지방 흑
인학교에 까지 파급되어 흑인영가의 기틀이 잡히게 된 것이다. 영가의 멜
로디는 종교적이며 기품이 높고 구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은 노
래로서 듣는 이들에게도 동감할 수 있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116)
현제 한국교회에서 미국의 흑인영가(Negro spiritual)가 불려지고 있
다. 지금도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Were You There”(거기 너 있었는가, 한136. 개127. 통643), “Lord, I
Want to Be a Christian”(신자 되기 원합니다. 한 518. 개 281. 통649)
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흑인영가이다. 현제 전 세계적으로 널
리 알려진 흑인 영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애창되고 있다.
이러한 19-20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찬송가, 복음송가가 한국에 온 선
교사님들에 의해서 전해지게 되었는데 서실 그분들은 찬송가에 대한 해박
한 지식과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했던 분들이어서 무분별하게 한국교
회에 찬송가를 가르침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찬송가가 아닌 현대
식 찬송가 즉 찬송가와 복음송가의 중구남방으로 섞여 있는 무분별하게
찬송가를 배우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일이 한국 교회에 어떻게
일어났는지 한국 찬송가의 변천을 살펴보면서 천천히 보기로 한다.
116)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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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편찬한 찬송가들이 나오기 까
지 우리나라 성도들은 “主耶縣 我愛”하는 식
으로 중국 찬송가를 우리 나라말로 불렀다.
그러나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선교사 언
더우드(Rev. H. G. Underwood,
1859-1916) 박사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Rev. H.D. Appenzeller, 1858-1902) 박사
가 서울에 도착하여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
적인 선교 활동과 그들의 선교의 열정과 사
랑이 담겨있는 교육 활동을 하면서 더욱 그
들의 활동은 넓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한국에 그들이 알고 있는 한 가지를 더 쏟아
붙게 되는데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최초의
찬송가집을 발간하기에 이르게 된다. 즉 언더
우드 박사는 1893년에“찬양가”를 내놓았고,
아펜젤러 박사는 1896년에 존스(Rev. G.B.
Jones) 목사와 공통으로“찬미가”를 내놓았으
며, 모펫(Sammuel A. Moffett, 馬布三脫-마
포삼열) 목사는 1898년에“찬성시(讚聖詩)”를
내놓았다. 초기에 있어서, 미국 선교사의 처
언더우드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
Ⅵ. 한국 교회의 찬송가의 역사적 변천
1. 한국 초기 찬송가의 시작
사는 항상 절대적이었다. 1885년경 우리나라 안에는 아무런 인쇄기구나
제본에 판한 시설이 없었으므로 이미 찬송가를 갖고 있는 중국에서 얻어
다가 번역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117)
117) 김의작[교회음악학, 1983],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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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례로 1887년9월30일 선교사에
의해서 최초로 설립된 새문안교회에
14명의 신도가 참가하였는데 이들 총
l3명이 이미 서상륜을 통해서 신자가된
사람이었고 백홍준과 서상륜이 최초의
장로로 선택되었다.120) 1886년 선교사
에 의해 설립한 이화학당121)과 배재학
당122)에서는 처음에 영어찬송을 그대로
가르치다가 점차 한 두 줄씩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화 학당의 초기
졸업생인 김룻세(1888-1897)에 의하
면 “처음 학교에 들어오니 소꿉질을 하예수 사랑하심을 - 중국어 찬송
백홍준의 따님인 백관성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돌아와 새문
안교회에 교적을 두었을 해 매일 새벽이면 기도를 하시고 나즈막한 소리
로 “주 예수 애워, 주 예수 애워”를 부르셨다고 한다.118) 이것은 “예수
사랑하심을”(Jesus Loves Me, This I Know, 개 549, 합 387, 새 592,
성 110)의 중국어 번역 “主耶蘇愛我”119) 였기 때문에 한국말 번역 찬송
이 나오기 전에 초창기 교인들이 중국 찬송을 우리 말 발음으로 부르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다.123)
게하고 주기도문, 또는 찬송가를 영어로 가르쳐 주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통역도 쓰지 않고 대뜸 영어로 자르쳐 주었다”124) 라고 회상하였다.
118) 새문안교획 70년사(서울 : 새문안교회. 1958), 47.
119) Carlton R. Young, Songbook for Saints and Sinners(Chicago : Agápe,1 1971), 제7장
120) 새문안교회 85년사(서울 : 새문안교회, 1973), 48-50.
121) 사진(이화여학당 사진)
122) 사진(배재학당 사진)
123)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04.
124) 이화 80년사(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1967),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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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배재학당
그 당시 대표적인 찬송
으로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과 같은 몇 개의 찬송
가가 번역되어 사용되었으나
예배 때에는 찬송가를 많이
부르지 않았는데 소리 높여
부름으로서 외부의 주목을
끌가 두려웠기 때문이었
다.126) 즉 그 당시의 우리나예) 존스 선교사 가족사진
음악은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으로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 사
업을 시작할 때 곧 찬송을 번역하여 가르치고 부르게 하였다. 이러한 번
역찬송은 1888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125) 이처럼 음악
을 통한 선교의 계획은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에 잘 알려진 찬송가는 그 당시에 자주 불려지고 처음으로 번역하여
부른 찬송들이다.
라의 상황은 참으로 좋지 않았으며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순
간 순교하기도 하고 또한 많은 어려움을 당하던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었
125) James E. Fisher.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1928), 132.
126)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 -1910]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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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에서는 언
더우드의 “찬양가”의
사용을 거부하고127)
감리교 선교사 존스
(George Heber Jo-
nes) 목사128)와 로드
웨일러 (Louis G.
Rothweiler)양이 공
편한 수형본의 소책
자 “찬미가 ”에는 당찬미가, 1892년 존스(G.H.Jones) 외 공역
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찬송을 크게 부르는 것은 아마도 어
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에 주목을 끌까 봐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 속에서 우리나라에 찬송가가 최초
로 발간된 것은 1892년이었다.
2. 한국 찬송가의 역사적 변천
1) 1892년 “찬미가”
시에 사용되던 번역찬송 27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악보가 없이 가사만
으로 된 찬송가였다.129) 우리나라에 많은 자료와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
던 터라 한국 교회에“찬미가”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의 찬송가는 극적인
시발점을 마련하게 되서는 좋은 찬송가의 및 바탕이 되어준 견인차 역할
을 하였다. 이러한 “찬미가”의 등장으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130)
127)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12.
128) 예) 사진(존스 선교사 가정 사진)
129) H. G. 언더우드(편), 찬양가(일본: 요꼬하마. 1894). 서문.
130)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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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한국 창가(시) 4, 시편 1, 독일곡이 1곡,
선교사가 지은 것이 2, 미상이 4곡 도합 81
곡이 수록되었다. 제4판(1897)에는 90곡이
실린 53매로 제본되어져 1500부가 인쇄 발
행되었다. 제5판은 156매에 176곡이 실린
4ž6배판으로 나왔으며, 제 6판은 205곡이
수록되어 1902년에 출간되었는데 10년 동
안 30곡에서 205곡이라는 방대한 곡수로 증예) 존스 선교사
이 찬미가는 당지(唐紙) 39매의 소형본으로서 당시에는 오로지 감리교
전용 찬가송였다. 이 찬미가는 5판까지 출간되었으며 증판 할 때마다 곡
수가 2배씩 증가하였다. 즉 3판은 81곡, 4판 때에는 90곡으로 증판 되었
다. 제3판에서는 국판46매로 되었는데 영국인의 곡이 54곡, 미국곡이 15
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자의 수가 점차 증가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131)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892년 [찬미가] 존스, 로드와일러. 감리회 132)
2) 1894년 “찬양가”
H. G. Underwood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파의 독신 선교사이며
1885년 미감리교의 아펜젤러(부인대동)와 함께 내한한 최초의 선교사로
언더우드는 제대로 4성부를 갖춘 곡조 찬송가를 “찬양가”라 이름하여
1894년에 117곡을 수록하여 출판했다. 117곡은 영국곡 79, 미국 23, 한
국 7, 시편 1, 주기도문 1, 미상 7으로 되어 있으며 인쇄된 양식은 면 윗
부분은 악보가 실려있고 하단에는 한글의 가사가 적혀있는 스타일인데 국
131)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09-210.
132)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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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890년대 상황에서 우리나
라의 찬송가 특히 악보를 갖춘 찬
송가가 나온다는 것은 그 당시 생
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러한 부푼 꿈을 안고 찬미가가 나
온 지 2년여 만에 그 꿈은 이루어
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부푼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끈질긴 집념과 뛰어난
편집능력으로 인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에 우리
나라에는 많은 어려움에 있었기에
1894년 찬양가-언더우드
판으로 총 128면으로 되어있다.133) 사실“찬미가(1892)”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최초의 규모를 갖춘 악보찬송가인 “찬양가”가 등장 하게
된다. 즉 최초로 악보다운 찬송가로 만들어진 것은1894년에 발간 된 언
더우드의 “찬양가”이다.134)
재정이 없었다.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찬송가 작고가
인 L. MASON의 곡이 16곡으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25
곡은 P. P. BLISS와 W. H. DOANE 등 19세기 말 부흥집회 찬
송가가 작곡자들의 곡으로 되어있었다. 이들 복음 찬송가는 대부
분 후렴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후대 한국의 찬송가와 동요
의 음악 형태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135)
133)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10.
134)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05.
135) 조숙자[교회와 신학 - 한국 최초의 악보 찬송가“찬양가”(1894년)연구](서울 : 장로교 신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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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양가”의 특징은 영국의 왓츠와 웨슬리의 찬양과 영국찬송, 미
국찬송이 어우러진 찬송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때 우리나라
의 찬송이 7편(4, 29, 38, 61, 93, 113, 115)136)이 들어가 이었
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언더우드 목사의 형의 재정적 후원으로 일본
에서 이 “찬양가”를 인쇄하게 된 것이다. “찬양가”에는 117곡의
찬송가 중에 88곡의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88곡 중 19세기 미
국곡조가 60곡우로 70%, “찬양가”의 대부분은 중국어 찬송에서
따오거나 번역한 것이어서 난해한 점이 많았다.137)
“찬양가”속에 한국인의 가사가 117편중에 7편이나 되는데 내용은 제
4장(이 세상을 내신 이는 여호와호나 뿐일세), 제29장(우리 쥬의 피를
보면), 제38장(우리 예수 큰 공로가 뇌죄악을 모두 씻네), 제61장(예수의
놉흔 일홈이 뇌귀에 드러온 후), 제93장(어렵고 어려우나 우리 쥬가 구
흐네), 제113장(이 셰상에 쥰미들은 쥬의 은덕 바이 몰라), 제115 장(나
는 밋네 나는 밋네)인데 제93장은 백홍준 작시로 되어 있음 이 확실하지
만 그 외의 작시는 익명이거나 불명으로 되어 있다.
이 찬양가의 제161장(예수의 높은 일홈이 내귀에 드러온후) 한 장만
이 감리교 “찬미가”(l895, 3판)에게 53장으로 실려 있다. 이 찬양가가
편집 번역될 때에(언더우드가 책임자임) 서상륜과 최명오(崔明梧)가 절대
적으로 협력을 기울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찬양가는 1894년 117곡
(초판), 1895년 154폭(재판). 1900년 182곡(3판)으로 되어 있다.138)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학출판사, 1992. 제 24집), 469.
136) 찬양가(1894), 셔문(4, 29, 38, 61, 93, 113, 115장 )
137) F. S. Miller, “Early Korean Hymnology," Korea Mission Field, vol. XXVI. No.9.
(September, 1930), 189. cited by 새문안 85년사, 71.
138)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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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셩시”는 주로 북장로회의
선교지대인 서북지역 교회에서 사
용했다. 이 “찬셩시”는 “찬양가”발
행의 북장로교파와 동일하지만 찬
송가의 파별에 따르는 파벌 싸움,
즉 분파성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
다, 제2판(l898)의 “찬셩시”는 영
국곡 33, 미국곡 22, 한국곡 1, 독
일곡 1, 일본곡 1, 순수한 창작이
2, 미상 23곡으로 총83 곡이고,
1900년에 나온 제3판은 총 87곡으
로, 소형본으로 되었다. 1905년에
나온 “찬셩시”는 S, Moffett(馬布
三脫)선교사의 편집으로 곡보부 초
1895년 찬미가
1894년 [찬양가] 언더우드. 남장로회 전용 139)
3) 1895년 “찬미가”
1895년 즉 “찬미가”가 제3판으로 출간 되던 해에 북장로회 선교사
Graham Lee 선교사와 M. H. Gifford 부인의 공편으로 출간한 찬송가가
“찬셩시”다. 처음 나올 때의 곡수는 54곡으로 국판 56면으로 되어 있다.
판으로 137곡이 수록되어 있다.140) “찬양가”는 원래 장ž감 양선교부에서
합동찬송가를 편찬하기로 합의하고 감리교의 존스(G. H. Jones)와 장로교
의 언더우드가 편찬위원으로 위촉되었던 것인데 존스목사가 미국에 돌아
가서 일년 남짓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지연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139)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6.
140)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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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에 찬 언더우드가 단덕으로 단독으로 출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감
리교 선교사들은 언더우드가 원 번역자의 허가도 없이 다른 이의 번역을
포함시켰고 “신”(GOD)의 호칭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여호와”로 대치하였으며 다른 이의 번역을 마음대로 고쳤다는
이유를 들어 “찬양가”의 사용을 전면으로 거절하였던 것이다.141)
여기에서 우리는 초기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불화가 찬송가 문제와 관
계되어 표면화된 현상을 볼 수 있다. 결국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따로 찬
송가를 편찬하기로 하였고 “찬양가”는 남쪽 장로교에서만 주로 사용하였
다. 그러나 존스(G. H. Jonse)가 “찬미가”(1895)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언
더우드가 한국 찬송가에 끼친 공헌은 간과할 수 없다.142)
그리고 언더우드의 “찬양가”가 공인되지 못한 채 서울지방에서만 사용
되다가 장로교회의 공인 찬송가로 출간된 것이 1895년에 발간된“찬셩시”
이다.143) 이것은 평양 주재 장로교 선교사 라이 (Grataham Lee) 와 기
포드 (Mrs. M. H. Gifford)의 공편으로 54편이 수록되어 있다.
악보가 첨부된 곡보“찬셩시”는 1905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는데 그동
안 많은 찬송들이 여러 가지 곡조로 붙여졌기 때문에 각 찬송에 고정된
곡조를 붙여 곡조를 통일해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144) 이리하여 1896년
에는“찬양가”,“찬미가,“찬셩시”3개의 찬송가가 사용되었다.145)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895년 [찬셩시] 리, 기포드 부인. 북장로회
1896년 [찬미가l 아펜젤라, 존스. 감리회
1897년 [찬생 시] 마펠. 북장로회
141) 백낙준[한국개신교사, 1832-1910], (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50.
142)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12.
143)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15.
144) 찬셩시 (1905), Preface.
145) The Korean Repository for September,1896,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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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Baird), 밀러(F.
S. Miller)목사, 벙커
(D. A. Bunker)였으며
합동원칙은 이미 사용
하던 찬송가를 토대로
새찬송도 첨가하되
“말은 존경어로구조가
녕확하며 의사가 졍주
목적으로 했다가 여의1908년 찬숑가
1900년 [복음찬미가] 침례교회
1903년 [성회송가] 성공회
1904년 [천도송가] 성 공회
1904년 [복음찬미] 펜윅. 대한기독교회 146)
4) 1908년 “찬숑가”
1902년에 이르러 한국 장로회 공의회에서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찬
양가”와 “찬셩시” 중 하나를 공식 찬송가로 채택할 것을 강구했고, 다음
으로는 다른 교파와 합동하여 새 찬송가를 편집하자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무렵 감리교 에서는 이 움직임에 찬동하고 위원을 선정 파견하여 그 편
집사업에 협력하기로 했다.147) 이 때 편집위원은 배위량부인(Mrs. W.
치 못하여 중단되고, 합동당하고 교리에 뎍절한 것만 쓰기로” 하였다.148)
이 찬송가는 요코하마의 인쇄소의 화재로 1908년에야 나오게 되었는
데 266편의찬송이 수록되어 있으며 “찬숑가” 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146)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6.
147) Ibid, 216.
148) 찬숑가(1931)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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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드(A. A. Baird) 여사와 밀
러(F. S. Miller) 목사는 장로교
대표로, 가사의 전역과 수정작
업을 했으며, 감리교 대표인 벙
커(D. A. Bunker) 목사는 가사
와 곡조의 엑센트가 맞는지를
조사하는 작업을 담당하였
다150) 는 사실이다. “찬숑가”
(1908년)는 장로교의 “찬셩시”
(1905년)와 감리교의 “찬미가”
(1905년) 그리고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찬양가”를
통합하여 만든 것인데, “찬셩
예) 찬숑가 (1908년) 206장
이것은 곡조가 없이 가사만 기록되어 있으며“찬숑가”는 출판비 관계로 피
득목사 내외(Rev. and Mrs. A. A. Pieters) 가 사적으로 출판하였다.149)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찬양가”(1908년)의 편집위원 중
시”(1905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었다. “찬미가”(1905년)는 번역이
“찬셩시”(1905년)보다 미숙하여, 그대로 채택된 것이 거의 없고 가사가
많이 수정되어 수록되었다.151) 이러한 가운데 “찬숑가”는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찬송가 합동사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지는 것은 1905년이
었는데 대한복음선교부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조직되고 우선 통일된 단일 설정을 찬송가 편집문
149)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21-222.
150) F. S. Miller, [Early Korea Hymnology] The Korea Mission Field (Sept., 1930), 189.
151) 조숙자[교회와 신학 - 한국 최초의 개신교 통일 차송가 “찬숑시”(1908년)연구](서울 : 장로
교 신학대학출판사, 1992. 제 27집),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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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 중점을 두고 진지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드디어 1908년에 총262장
의 합동(장ž감 연합공의회) “찬송가”가 출판되었다.152)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11년 [복음가] 성결교회
1912년 [구세군가] 구세군. 구셰군 공인찬송
1919년 [신정복음가] 성결교회.1911년 복음가 중보판
1924년 [조션어성가] 민아오스딩 감수. 카톨릭
1928년 [신정찬송가] 장감연합공의회. 감리교만 사용
1928년 [신편찬송가] 장로회. 장로교회가 새로 만든 찬송가
1930년 [부홍성가] 성결교회.
1919년 신정복음가에 40여곡 추가153)
5) 1931년 “신정(뎡) 찬송가”
1924년에 새로 조직된 「죠선 기독교 연합공의회」는 그 첫 사업으로
찬송가를 개정하기 위하여 개정위원회를 구성(위원장 아펜첼러, 변성옥,
김인식. Kerr - 공위량의 5인)하여 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고 드디어 1928년에 편집이 완료되고 1931년 6월 14
일 죠선예수교서회 발행으로 “신뎡찬송가”제1판이 9만부 출판되었다. 이
찬송가에는 청년찬송가에서 70장, 현상모집에 당선된 한국인 찬송시 6장,
새로 번역한 외국 찬송 등으로 총 314장으로 편찬되었다.
출판된 후 1년2개월 동안에 매월 4천여권이 판매되어 57,627권이 판
매되었다는 보고가 1932년판에 실렸다. “신뎡찬송가”는 원래 장ž감에서
공동 사용하기로 했던 것인데 1931년에장로교 측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내걸고 채택하지 않기로 하고 1935년 6월에 “신편찬송가”를 발간했다.
152)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16.
153)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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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찬송가(1931년) 210장
결국“신뎡찬송가”는 감리교에서만 사용했다.154)
6) 1935년 “신편찬송가”
1933년 연합의회는 찬송가 개청편찬위원으로 장ž감에서 동수로 하여
14인을 추천선임하고 재정기간을 5년으로 하였다. 그러나 장ž감의 위원들
154)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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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우여곡절 속에
1935년 11월 7일로 “신
편찬송가”가 간행된 것이
다. 이 책의 내용에 있어
서 새로운 면은 별로 없
고 이미 나왔던 여러 찬
종자에서 뽑아 편찬한 것
뿐이었다. 총 400곡으로
되었는데 짧은 기간 안에신편찬송가(1949년)
의 계획과 정인과(聊仁果)목사가 총무인 장로교 종교교육부의 출판계획이
대립되던 중 1934년 장로교 제 23회 총회에서 장로교 종교교육부에서
편찬하도록 가결해 버렸다. 여기에서 감리교는 아직 찬송가를 다시 편찬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와 재정적으로 곤란하다는 이유로 태도를
굳혔다. 이무렵 정인과 총무는 장로교 찬송가(계획하던)의 판권을 이미
획득했다는 표리부동한 보고를 했다.
300여명의 한국 목사와 찬양대 관계자 40여명의 의견을 종합해서 편찬
했다는 편찬위원회 위원들의 보고가 있었다.155) 그리고 이 신편찬송가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 중에 다른 하나로는 1931년 신정찬송가가 만들어지
지 4년 후에 새 철자법(현대식)에 의한 “신편찬송가”가 탄생되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찬송가의 내용은 미국 장로파와 감리교계통의, 비교적 온건
하고 순한 것들이었다.156)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36년 [아동찬송가] 대한예장. 현재명 편157)
155) Ibid, 218.
156) 김의작[교회음악학, 1983], 133.
157)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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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삼대교
파가 통일된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손으로 편짐된 최초의 찬송가란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그러나 합동원칙
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세 교파에서 사용하
는 찬송가 중 각 교파의 특이한 전부를 편
입하기로 하고 공통의 것은 가사를 적절히
선택하여 편입하기로”했기 때문에 새로운
편집이라기보다는 세 가지 찬송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곡파 가
사의 중복이 많았고 종래의 복음찬송, 부합동찬송가(1949년)
7) 1949년 “합동찬송가”
1945년, 조국 광복의 감격도 새롭게, 교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부터 벗
어난 기쁨에서 별 생각 없이 모든 교파의 찬송가를 총 망라하여 그냥 합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158)
흥성가가 그 주축을 이루었다. 한국인의 창작 찬송도 결여 되어 있으며
(합 195,486 두 장), 단지 해방의 기쁨을 가지고 연구할 겨를도 없이 만
들어진 것이어서 결함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의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감격은 컸으며 1967년 개편찬송가가 나오기까지 합동찬송가는 무려 20
판을 거듭 출판하였다.159) 그리고 1946년 찬송가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합동전권위원으로 장로회 김관식, 검춘배, 유호준, 김종대, 정훈, 감리교의
강태희, 김희운, 엄재희, 조민형, 김유순, 성결교의 박현명, 김유연, 황성
택, 한영환 등의 14인이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1949년 8월에 우선 무곡
찬송가를 발간했고, 1950년 3월에 유곡찬송가를 발행하여 1년 만에 10
158) 김의작[교회음악학, 1983], 133.
159) 조숙자 외 1명. [찬송가학, 1996],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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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고신(高神)측과 합
동측은 각 교파의 특유한 찬송가
를 발행하려는 뜻을 가졌다가
1960년 12월에 두 교파의 합동을
보게 됨에 따라 그 기념사업의 하
나로 새로운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작업한 결과 이른바 “새
찬송가”(총671장)를 1962년 12월
에 출간하게 됨으로 전국 각 교파
교회를 위해 편찬 사용하던 합동
찬송가는 이름만의 합동찬송가가
되고 말았다.162) 이것은 합동찬총
가를 추축으로 하여 약간의 민요
곡을 제외하고, 미국찬송가 중에
새찬송가 (1968년)
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총 곡수가 586장으로 되었는데 그중에 과반수
이상 3백여 곡의 복음성가가 수록되어 있다.160)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53년 [어린이 찬송가] 기독교 아동 교육 연구회161)
8) 1962년 “새찬송가”
서 선택하여 몇 곡을 더 추가하고 가사가 어색한 곳을 몇 군데 정정하는
정도 외에 별로 새로운 것이 없는 문자 그대로“새”찬송가라 하기에는 만
족스런 내용이 못된다.163)
160)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19-220.
161)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7-158.
162)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19.
163) 김의작[교회음악학, 1983],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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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부터 고려측 총회에서는 찬송가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찬송가
편찬· 작업을 추진하여 오던 중 1959년에 예장총회 가 W.C.C.를 탈퇴하
고 에큐메니칼운동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 후 「합동찬송가」 출판사업도 에큐메니칼 계획의 하나라고 단정하
여 별개의 찬송가 편찬위원회를 정식으로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측
과 예장총회측의 두 위원회가 각각 새출발하에 사업을 벌이다가 1960l건
12월 13일에 두 총회의 합동을 보게 되어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새찬
송가」를 편찬하게 된 것이다.
이 「새찬송가」 편집위원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1. 신편 찬송가를 기초로 하고
2. 수십 종에 달하는 구미 각국의 찬송가에서 발췌하여 작시 작곡자
와 작시 작곡 연도를 조사하며 원작·에서 직접 번역하여 완벽을
기한다.
3. 보수 진영의 찬송가임을 생각해서 찬송가의 선택과 번역, 성구, 작
곡, 작시, 제목, 색인, 교독문 선정에 신중한 판심을 둔다는 것 등
이 었다.
이 새찬송가는 다른 찬송가와는 단리 매곡마다 운율표시와 메트로놈
기호를 사용한 템포의 표시, 그리고 악구를 표시하는(phrase mark) 또는
숨쉼표(breath mark)를 표시하고 독창곡도 곁들여 놓았다. 그러나 개편찬
송가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 외에「새찬송가」에는 가사 내용의 시적 구
성이나 운율구성상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164)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62년 [주일학교 찬송가] 기독교서회 강소천, 나운영
1962년 [새 찬송가] 대한예장통합
164) 김경선[찬송가학],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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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찬송가 관리, 수정 및 출판
문제를 위하여 항구적인 찬송가 위원회
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기독교연
합회의 알선으로 1956년 초에 기독교대
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대한예
수교장로회 등 세 교파에서 파송한 위원
들로 찬송가 위원회를 조직했다. 교회가
성장됨에 따라 합동찬송가 개편의 필요
성을 느끼게 되어 1963년 3월 5일에
찬송가 위원회는 한국 기독교장로회에
찬송가위원 파송을 의뢰하여 위원을 받
고, 위원회를 보강하여 합동찬송가 개편개편찬송가 (1971년)
1966년 [아동찬송가] 감리교총리원교육국 165)
9) 1967년 “개편찬송가”
작업에 착수했다.
만 5년에 걸쳐 이룩한 개편찬송가의 완성은 1967년 12월 15일에 그
초판을 보게 되었다(총 620장). 특기할 것은 종래의 찬송가에서 볼 수 없
었던 한국인 저작 찬송이 이 개편찬송가에 27곡166)이 선정 수록되었다는
165)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7-158.
166) 개편찬송가, 1967 우리나라 작곡가 27곡수록, 1) 가슴마다 파도친다 (565) 2) 인류는 하나
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 (213) 3)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87) 4)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482) 5) 고요하고 거룩한 밤 구주 예수 나셨다(86) 6)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538)
7) 어서 돌아오 어서 돌아만 오오(237) 8)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545) 9)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379) 10)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463) 11) 어머님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 있으랴(533)
12)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이 짙었을 때(212) 13)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주 하나님
(27) 14)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321) 15) 눈물 밭에 떨어 진 주의 귀한 복음 씨(214)
16) 어둠의 권세에서 인생을 건지신 주(172) 17) 미더워라 주의 가정 반석 위에 셨으니(546)
18)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402) 19) 주 예수 흘린 피 만백성 구했다(473) 20) 고요히 머리 숙
여 주님 생각합니다(55) 21) 눈을 들어 하늘· 보라(401) 22) 하늘가는 밝은 길이(488) 23) 눈물
의 공짜기에서 (461) 24) 주는 나를 기르시는 묵자요(67) 25) 성부여 외지 없어서(298) 26) 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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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이 개편 찬송은 통일“찬송가”가 출판되기까지 9년간 예장 합동
측만 제외하고 전 교화에서 사용했었다. 그 후 성결교회에 서 그 교화의
찬송이 많이 누락되었다 하여 다시금 더 보충했다.167)
찬송가위원회에서는 1963년 3월 5일에 한국 기독교장로회에 찬송가
위원 파송을 요청하여 찬송가위원회를 보강하였으며 각 교단에서 파송한
각 5 명씩의 위원과 한국 기독교연합회 대표 1명, 기독교서회 대표 l명
등으로 찬송가 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찬송가위원회는 다음 9가지를 원칙으로 결정하고 가사 위원으로 전영
택, 이호운, 반병섭, 곽안전, 음악위원으로 박재훈, 이동훈, 광상수, 장수
철, 이중태, 주진주., 원진희, 서수준, 관리위원으로 기독교서화 조선출,
그러고 교독문 선정위원으로 김동수, 정진경 등에게 위축하여
1. 중첩된 것의 단일화
2. 국가, 민요풍의 곡조와 가사 등의 채재검토
3. 종류별 편찬에 유의
4. 예배용 찬송가의 보강
5. 특정 예배용 찬송가의 보강
6. 한국 찬송가의 보강
7. 교독문 보충
8. 가사의 검토 168)
9. 묵도송, 송영송, 아멘송의 보강 등의 원칙을 세웠다.169)
그러나 이 개편 찬송가에는 번역상의 문제점과 구절법의 문제 그리고
“아멘” 코드의 부당한 사용 등의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밖에
캄한 밤중에 빈들에서(337) 27) 지금끼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464) (총 27곡), 김경선
[찬송가학],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661-662.
167)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20-222.
168) 김경선[찬송가학],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660-661.
문영탁[단권 찬송가 해설집], (서울 : 새순 출판사, 1984), 36
169) 김경선[찬송가학],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660-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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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교회에서 매우 애창되고 있는 것으로 나운영교수와 김두환교수 그리고
이동훈교수가 각기 시편 23편에 곡을 붙인 시편가들이다.170)
이때 발간된 찬송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967년 [개편찬송가] 한국찬송가위원회
1968년 [어린이찬송가] 한국교회음악연구회 박재훈외
1971년 [어린이 새찬송가] 예장통합
1972년 [어린이 새찬송가] 예장통합 민영완면
1972년 [감리교 어린이 찬송가] 감리교총리원교육국 정순모편
1973년 [어린이용 찬송가] 찬송가위원회
1976년 [어린이찬송가] 주일학교교재사 1953년의 어린이찬송가
를 증보 개정한 것
1979년 [찬송가(통일)] 생명의 말씀사
1981년 [유치부 어린이 찬송가] 대한 기독교출판사 171)
10) 1983년 “통일찬송가”
찬송가 위원회가 1975년 초부터 시작한 설문조사에 교인 99.8%가 하
나로 통일된 찬송가를 원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그 이유는 당시 세
종류 찬송가의 장수를 억지로 맞추어 불러도 가사가 다르기 때문에 교파
간 연합예배나 가족, 친지 예배에 많은 불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찬
송가 통합을 위해 1976년 찬송가 통일 위원회를 발족하고 1981년 한국
찬송가 공회가 설립되어 이를 이어받는다. 이에 한국 교회 100주년을 맞
이하여 하나 된 찬송가를 출판하게 되었다.172)
이러한 일들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1983까
170) Ibid, 662.
171) 이중태[한국교회음악사](서울 : 예찬사, 1992), l57-158.
172) Ibid, l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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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약 8년간 사용해 온 개편 찬송가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더욱 심해짐
에 따라 한국 찬송가 위원회 산하에 있는 모든 교회(기감, 예장통합, 기
성, 기장)에서는 개편에 대한 건의가 빗발치자 찬송가를 개편하되 한국
전 교회가 하나의 찬송집으로 부를 수 있도록 통일하자고 하는 제안을 하
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1976년 11월 26일, 당시 한국찬송가 위원회 위원장인 김창
희는 한국 찬송가 위원회측 김창희, 김익선, 이우호 그리고 한국기독교
지도자 협의회측 강신명, 지원상, 한학수 등과 찬송가 통일을 위한 간담
회를 갖고 1977년 2월 3일 개신교 각 교단 대표들이 감리회 본부 감독
실에서 “한국찬송가 통일 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에 김창희, 부위원장 정
봉조(예장합동), 조남기(예장통합) 등을 선출하였다. 이 찬송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찬송은 총 558장, 교독문 76편, 앞면지에는 주기도문, 사도신
경, 뒷면에는 십계명이 수록되어 있다. 찬송을 항목별로 보면 예배 72편,
성부, 성자, 성신, 찬양 108편, 구원 37편, 천국 14편, 성경 8편, 교회 42
편, 성례전 15편, 절기와 행사 17편, 성도의 생애 138편, 송영 13편 합
558 편으로 구성되었다.173)
이후 출판된 찬송가 일람은 다음과 같다.
1983년 [통일찬송가] 한국찬송가공회
1984년 [한영찬송가] 대한기독교서회
1987년 [완전해설찬송가l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년 [어린이찬송가l 대한기독교출판사 174)
11) 2006년 “21세기 새찬송가”
173) 이유선, [기독교음악사] (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77), 222-224.
174) 김영준[한국 찬송가 개선 방향에 대한 연구-통일찬송가 문제점 분석을 중심으로](서울 : 감리
교신학대학 대학원, 1997, 석사논문),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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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찬송가는 2006년 9월 30일 발행 확정된 개신교의 찬송가이
다. 공식 제목은 다른 찬송가들과 마찬가지로 찬송가이나, 기존의 통일찬
송가 등과 비교하기 위해 이렇게 호칭한다. 몇몇은 새 찬송가라 부르기도
한다. 전체 645장으로, 기존의 통일찬송가에서 162곡이 추가되고 78
곡175)이 삭제되었으며, 가사 상당수가 일부 변화되었다.176) 이 과정에서
국내 작곡가의 곡이 대폭 추가(108곡177))되었으며, 중국, 포르투갈, 아프
리카, 그레고리안 성가등의 외국곡도 몇 곡 추가되어, 기존의 서양곡 중
심의 찬송가를 개혁하였다. 또한 외국의 유명한 곡이 추가로 들어온 것도
(81장 주는 나의 보배, 113장 저 아기잠이 들었네)특징이다.178)
기존의 여러 면에서 조금이나마 좋아진 부분이 사실 있다. 그러나 항
상 그러했듯이 좋은 면 뒤에는 개선의 목소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될 것이
다. 기존에 복음성가로서 많이 불렸던 곡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622장
거룩한 밤, 568장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620
장 여기에 모인 우리, 635장 하늘에 계신(주기도문)). 그러나 CCM이나
워십 부류에 속하는 곡들은 저작권 문제로 채택되지 않았다. 변화된 점으
로는 기존의 찬송가의 가사가 많이 변화되었다.179)
175) 21세기 찬송가에 삭제된 통일찬송가 78곡 (5, 7, 10, 15, 17, 18, 51, 54, 63, 64, 65, 69,
76, 77, 80, 81, 92, 95, 99, 100, 103, 108, 110, 124, 127, 129, 131, 134, 140, 143, 148,
153, 165, 166, 170, 192, 203, 207, 225, 227, 229, 237, 238, 250, 254, 264, 280, 294,
322, 345, 380, 285, 286, 392, 407, 420, 426, 428, 437, 445, 459, 467, 472, 494, 501,
522, 526, 527, 529, 536, 537, 538, 540, 546, 551, 553 외 두곡(찾지 못했음))(자료 : 한국
찬송가공회)
176) 21세기 찬송가 [Daum백과사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
177) 21세기 찬송가에 추가된 한국인 작사·작곡 찬송 108곡(11, 13, 16, 17, 18, 45, 47, 48, 51,
52, 57, 61, 62, 76, 77, 98, 100, 110, 136, 137, 142, 153, 155, 156, 157, 158, 178, 181,
192, 193, 203, 206, 223, 247, 248, 256, 271, 281, 296, 306, 307, 308, 316, 318, 319,
332, 344, 389, 392, 396, 398, 402, 409, 416, 418, 422, 431, 437, 443, 444, 448, 464,
467, 468, 469, 470, 473, 474, 476, 477, 506, 514, 517, 514, 547, 553, 555, 556, 557,
558, 561, 568, 571, 572, 573, 576, 577, 578, 581, 583, 584, 594, 596, 601, 603, 609,
611, 612, 613, 614, 626, 627, 628, 629, 633, 637, 539)(자료 : 한국찬송가공회)
178) 21세기 찬송가 [Daum백과사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
179) 21세기 찬송가 [Daum백과사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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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찬송가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공회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2001년 발행된 시제품 찬송가에서는 600여 곳을 수정했고
2007년 발행된 21세기 찬송가에서는 100여 곳의 가락화성 부분의 오
식을 발견했다”면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과 사람이 만든 정리되지 않
은 찬송곡은 분류되어야 한다. 찬송가는 단 한 곳의 미스가 있어도 안
되며 교정 없이 출판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180)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통일 찬송가에 비해 장수가 늘어난 점이
다. 이점은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지만 그 안에 문제점이 발견되면 곡
의 수가 많음으로 큰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교회음악
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신 많은 교회음악 교수들과 전에 한국교회 찬송가
를 위해 평생을 수고하신 많은 원로 목사들의 말속에 담긴 질타는 피할
길이 없는 것 갔다. 황철익 전 건국대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개역개정판처럼 기존의 한국어 표준법에 맞지 않는 가사들을 변화시켰
다. 수용문제 협의 점을 살펴보면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
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장로
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기독교한국침례회는 2007년부터 공식행사에
21세기 찬송가를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181)
출판 수용과정에서의 문제 또한, 출판사들간의 이권 다툼도 있었다.
찬송가에 대한 판권을 기독교서회와 예장출판사에게만 주어, 아가페나 성
서원등의 반발을 샀으며, 이 때문에 출판 감사예배가 당초보다 2주정도
연기되었다. 현재 21세기 찬송가는 출판감사예배를 드리고 출판이 되었
고, 현재 기독교 서점들에서 시판되고 있지만, 본격적인 사용은 되고 있
지 않다
21세기 찬송가 중 이동되지 않은 찬송가는 1장, 4장, 21장, 23장, 25
장, 27~29장, 36장, 37장, 39장, 73장, 74장, 83장, 85~89장, 91장, 93
180) 한국찬송가작가총연합회 출범…21세기 찬송가 성토 2008년 09월 18일 (목) 신동명 전문기
자, 다음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
181) 21세기 찬송가 [Daum백과사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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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04장, 105장, 109장, 111~123장, 125장, 126장, 144~146장, 249
장182)이다.
182) 21세기 찬송가 [Daum백과사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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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송가의 부피가 두꺼워졌다.
기존 찬송가는 558장, 〈21세기 찬송가〉는 87장이 늘어난 645장.
교독문도 76개에서 135개로 늘었음. 열심히 찬양하자!
2) 우리나라 곡이 많이 삽입됐다. 〈통일찬송가〉는 외국 곡 일색이었
는데 〈21세기 찬송가〉는 한국 찬송가가 109곡 (108곡?) 이나 새롭
게 삽입됐습니다. 기존의 17곡까지 합한다면 한국찬송가가 126곡으로
늘어 3%에서 약 20%까지 비율이 높아졌다. 환영할 일!
3) 영·미권 중심의 찬송가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의 다양한 찬송을 새
로 수록.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영어권 이외의 찬송가들을 많이 삽입
-외국 민요나 국가, 혹은 예배에 적합하지 않은 곡들을 과감하게 뺌.
-대신 예배찬송과 교회절기에 부를 수 있는 곡들을 보강했다.
예) 송구영신예배에 사용하는 찬송이 2곡에서 5곡을 대폭 늘었다.
5월 가정의 달에 주제곡처럼 부르던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를 보완할 곡도 4곡이나 된다.
4) 청년을 주제로 한 곡이 2곡에서 5곡으로 늘어난 것.
- 예수 우리 왕이여(38장) 주님의 시간에(623장) 주 찬양합니다(617
장) 찬양하라 내 영혼아(621장) 등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복음송
도 포함됐다.
-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568장)와 같은 곡은 <어린이 찬송가>에 있
던 것이 신분상승(?) 된 경우. 아무튼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위한 배려
에 감사!
5) 곡 제목이 변경된 경우도 44곡이나 된다.
- 내 죄 사함 받고서(210)를 내가 예수 믿고서(421)와 같이 제목 자체
가 완전히 바뀐 경우도 여러 곡.
Ⅴ. 한국 21세기 “새찬송가”의 개괄적 평가
1. 21세기 찬송가의 긍정적 평가
한국찬송가공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21세기 찬송가에 대한 입장을 긍
정적인 평가로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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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법도 현대어법에 맞게 고침.
- 여호와→하나님, 예수여→예수님, 성신→성령, 왕→주님, 축복→복,
버성겨→멀어져, 하옵시고→하시옵고 등으로 바뀐 것이 특징.
7) ‘고음불가’이신 분들을 위해서 장조를 낮추거나 높인 곡도 있다.
-〈통일찬송가〉 내 주는 살아 계시고(16)는 내림 마장조로 시작해서
높은 음자리 파까지 올라간다. 고음불가인 분들이 부르기에는 좀 버거
운 찬송이었으나, 새 찬송가에서 장조를 라장조로 낮추었다.
- 무덤에 머물러(150)를 부활절 새벽예배 때 부르기 곤혹스러운 것이
었는데, 기존의 다장조를 라장조로 내렸다. 183).”
기존의 여러 찬송가들에 비해 위에서 말한 내용들은 조금이나마 좋아진
사실들이다.
다른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한국 찬송가 연구회 회장이신 이성재 명예
교수님의 글을 들자면 긍정적 평가 중 편집부분에서
1) 21세기 “새찬송가”는 통일 “찬송가”184)에 비하여 제목 분류를 한
층 명료하게 세분화시켰다.185)
2) 제목 분류의 배열순서 역시 사건의 순서에 맞도록 배열하였다. 예
컨데 ③“성자”의 경우- i,예수 그리스도-ⅱ, 구주 강림-ⅲ, 성탄-
ⅳ, 주현-v, 생애-ⅵ, 종려주일-ⅶ, 고난-ⅷ, 부활-ix, 재림 등의
순서가 바로 그것이다186).
183) [〈통일찬송가〉와 새롭게 나온 〈21세기 찬송가〉의 차이점과 특징](자료 : 한국찬송가공회)
184) 한국찬송가공회, [찬송가], (서울 : 생명의 말씀사.1983), 찬송가의 차례를 보라. ①예배(72
곡) ②성부(13곡) ③성재(87곡) ④성령(12곡) ⑤구원(31곡) ⑥천국(13곡) ⑦성경(7곡) ⑧교회(38
곡) ⑨성례와 예식(14곡) ⑩절기와 행사(16곡) ⑪성도의 생애(232곡) ⑫송영과 영창(12곡) 총
558장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남까지 - 김차생 장로 고희 및 이사장 은퇴기념 논총, 논문 12,
21세기 “새찬송가”를 말한다.(이성재명예교수)의 각주 8번 재인용, 440.
185) 한국찬송가공회(예장) ①예배(12곡) ②성부(15곡) ③성자(101곡) ④성령(19곡) ⑤성경(8곡)
⑥교회(15곡) ⑦성례(19곡) ⑧천국(15곡) ⑨구원(39곡) ⑩그리스도의 삶(204곡) ⑪전도와 선교
(54곡) ⑫행사와 절기(44곡) ⑬예식(18곡) ⑭경배와 찬양(10곡) ⑮영창과 기도송(20곡) 총 645
곡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남까지 - 김차생 장로 고희 및 이사장 은퇴기념 논총, 논문 12, 21
세기 “새찬송가”를 말한다.(이성재명예교수)의 각주 9번 재인용, 441.
186) 한국찬송가공회(예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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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독문이 일반 (기존 53개 번에서 87개 번으로 34개 번 증개,
성례 절기 및 행사 (기존 23개 번에서 50개 번으로 27개 번 증
가 등 총 61개 번 증가로 총 137개 번) 등 보완되었다.187)
4) 각종 색인을 분야별로 게재하여 참고 자료 및 문헌 활용에 도움
을 주게 되었다.188)
찬송가 평가의 정비 부분에서 1) 그 동안 찬송가로서 적절치 못했던
일부 찬송가를 삭제하였다.189) 예를 들어 동일한 곡에 두 가지 가사가 붙
은찬송가 중 1곡을 삭제하였고,190) 통일한 가사가 두 곡 수록된 경우 역
시 1곡을 삭제했다.191) 2) 영ᐧ미 일변도였던 찬송가를 극복하고 한국
찬송가 128곡을 비롯하여 남인도, 독일, 라틴 찬송, 브라질, 네덜란드, 중
국, 아프리카 카메룬, 폴란드 찬송 등으로 넓혀 상징적이나마 다양성을
기하였다.192) 3) 예배 찬송이 아님은 물론 가사나 곡에 문제가 있는 찬
송들을 삭제한 점 등이다.193) 이러한 평은 좋은 부분이라고 필자는 생각
187) Ibid, 644-709.
188) Ibid, 710-751.
pp. 710-751 영어가사 첫줄, pp. 716-720 성구색인, pp. 721-726 운율색인, pp. 727-731 곡
명색인, pp. 732-742 작사자, 작곡자, 편곡자 색인, pp. 743-751 나라별 색인
189) <표> “통일 ‘찬송가’ 에서 삭제된 곡”, [기독신문], 2006년 10월 15일,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남까지 - 김차생 장로 고희 및 이사장 은퇴기념 논총, 논문 12, 21세기 “새찬송가”를 말한
다.(이성재명예교수)의 각주 13번 재인용), 442.
190) 4) C, G, Claser의 23장 “만입이 내게 있으면”과 같은 곡 170장 “주여 크신 인애를”, J, B,
Dyker의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와 같은 곡 81장 ”귀하신 주의 이릉은.", C, C, Converse
의 487장과 같은 곡 426장에 “날 위하여 날 위하여”, J, H, G, Nageli의 525장 “주 믿는 형제
틀”과 같은 곡 280장 “생전에 우리가”를 F. J. Hayden의 245장 “시온 성과 같은 쿄회”와 같은
곡 127장 “예수님의 귀한 사랑”, J, Dawall의 26장 “만유의 주 앞에”와 같은 곡 227장 “저 하
늘 나라는”, M, M, Well의 181장 “진실하신 주 성령”과 같은 곡 294장 “친애한 이 죽으니” 등
을 삭제했다. (* 순서는 가사를 가나다순으로 하였음)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남까지 - 김차생
장로 고희 및 이사장 은퇴기념 논총, 논문 12, 21세기 “새찬송가”를 말한다.(이성재명예교수)의
각주 14번 재인용), 442.
191)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459장, 460장에 병행 사용되었는데 459장을 삭제하고 한국 가락의
박재훈 곡을 유지하였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남까지 - 김차생 장로 고희 및 이사장 은퇴기
념 논총, 논문 12, 21세기 “새찬송가”를 말한다.(이성재명예교수)의 각주 15번 재인용), 442.
192) 한국찬송가공회(서회), 743-751.
193) ) 110장 “공중에는 노래”, 108장 “구주 탄생하심을”, 385장 “군기를 손에 높이 들고”, 494장
“나 죄 중에 헤매며”, 15장 “내 영혼 이제 깨어서”, 428장 “내가 환난 당할 때에”, 467장 “내
게로 와서 쉬어라”, 225장 “새 예루살렘 복된 길”, 140장 “성도들아 다 나와”, 223장 “세상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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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될 것들이 첩첩산
중 속에 가려져있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것은 많은 교회음악을 사랑하
고, 하나님을 위한 참된 음악이 찬송가를 통해 교회에서 울려 퍼지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교회와 찬송가공회는
많은 교수들과 교역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며 다음의 부정적 평가로 넘어가려고 한다.
2. 21세기 찬송가의 부정적 평가
21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지금의 한국 찬송가는 다들 희망에 부분 마
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찬송가를 받아 들고 나자 많은 곳에서
질타의 목소리가 줄을 있고 있다. 특히 심한 경우에는 “찬송가의 반환”까
지도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찬송가공회에
서 찬송가의 깊은 조회가 없기 때문이며, 찬송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아
는 사람들의 인맥을 통해서 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아직까지도 한국 찬송가는 앞에서 종교개혁자 루터, 쯔빙
글리, 칼빈을 들면서 이야기를 잠시나마 했지만 아직 까지도 피편 찬송가
의 보급이 저조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마아도 전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일 것이다. 개혁주의를 외치고 있지만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다.
왜냐하면 칼빈의 주장을 따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루터의 주장을 따르
든 수고 끝나”, 143장 “십자가에 달리신”, 250장 “이름다운 시온성아”, 551장 “아멘”, 553장
“아멘”, 537장 “엄동설한 지나가면”, 472장 “영광스럽도다 참된”, 538장 “예루살렘 금성아”,
392장 “예수의 이름 힘입어서”, 445장 “오 나의 하나님”, 153장 “오늘 다시 사심은”, 95장 “온
세상이 어두워”, 266장 “왕의 명령 전달함”, 536장 “이 곤한 인생이”. 540장 “이 세상 지나가
고”, 537장 “저 높고 높은 하늘이”, 227장 “저 하늘나리는”, 207장 “주 나에게 주시는”, 437장
“주 나의 목자되시니”, 546장 “주께로 나오라”, 522장 “주님이 가신 섬김의”, 52장 “주의 귀한
말씀은”, 501장 “주의 십자가 있는데”, 527장 “큰 은혜로 묶어 주신” 등 37곡{가사의 가나다
순)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남까지 - 김차생 장로 고희 및 이사장 은퇴기념 논총, 논문 12,
21세기 “새찬송가”를 말한다.(이성재명예교수)의 각주 17번 재인용),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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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않을뿐더러 츠빙글리는 더 더욱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한국교회는 개혁주의를 따
른다고 하지만 교회음악적으로 보면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상
황이 계속 된다면 우리 나라에는 시편찬송이 보급도 되기도 전에 복음성
가로 교회의 모든 예배 찬송이 복음송으로 꽉 차고 넘칠 것이다. 그렇다
고 고리타분하게 종교개혁 당시의 리듬의 음악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즉, 찬송가의 가사는 시편의 가사가 가장 정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상 어떤 가사도 시편의 가사를 따라 오기 어렵기 때문이
다. 그래서 칼빈도 시편가사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시편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새찬송가에는
시편찬양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이것이 지금의 21세기 새찬송가의 현
주소인 것이다.
여기서 이제 여러 교계의 어르신들 이신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먼저 다른 교단에서 21세기 새찬송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그러면 수원 합신에서는 전부터 계속
이 21세기 새찬송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사
실 수원 합신에서는 21세기찬송가 검토위원회 2차 모임에서 “찬송가 잘
못된 가사 수정되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위원들은 각자 맡은
부분에 대해 준비한 연구물을 발표하고 토의했다. 참석자들은 발표 후 이
종섭 목사의 문건 서론과 결론을 그 요약과 평가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종섭 목사는 "21세기찬송가에 '신학'과 '문학'(문법)과 '상식'(보편성)
에
미치지 못하는 가사들이 상당히 많이 채택되었다"면서 ①문장의 기본조차
없는 수준미달의 가사 ②개인적인 경험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가사 ③성경의 사실과 다른 가사 ④번역할 실력이 없는 사람들의 가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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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작사한 것들이어서 가사 검증과 작사자 검증에 문제 ⑥시와 노래
라는 문학 적 음악적 차원의 예술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가사들이 수두
룩하다고 지적 했다. 또 "21세기찬송가는 이미 지적한 가사의 오류뿐만
아니라, 분류와 편집과 악보표기와 교정에도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서 "21세기찬송가의 머리말을 보면 '10년 동안 신학자, 목회자, 국문학자
들과 교회음악 전문가가 대거 참 여하여 수많은 모임을 통해 더 좋은 찬
송가를 만들려고 함께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이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단지 노래들을 수집하고 선정하여 분류만 했을 뿐이라는 생각
이 지배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21세기찬송가의 잘못된 가사는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면서 “서공회가 ‘개역개정판성경’을 출판한 이후 각 교단의 의견을 듣고
4차까지 개정판을 낸 것처럼 21세기찬송가도 마땅히 이런 절차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194)
그리고 고려신학교 총회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면 또한 면의 질타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는 문법적인 표현의 면에서의 아쉬움입니다.
예를 들면,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이라는 찬송에서, 전에 통
일 찬송가에서는 후렴 끝부분이 “참내 구주님”이라는 부분을 지금 새 찬
송가에서는 “참 내 구세주”라고 고쳤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개악”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법적인 무지를 고의(?)로 저지르다니, 이
찬송가 위원들 중에 보니, 쟁쟁한 문학가들이 많던데, 이렇게 아둔한 짓
(!)을 할 수가 있는지 기가 찹니다. 개인의 구주와 이 세상의 구세주를 구
분을 못하고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나 말이지요. 어떻게 문법
194) 수원합신에서 21세기찬송가 검토위원회 2차 모임을 4월 12일 총회 회의실에서가진 이종섭
목사의 담화 내용[기독교 개혁신보 - 번 호1965, 등 록 일 : 2007-04-18 “찬송가 잘못된 가
사 수정되어야” - 21세기찬송가 검토위원회 2차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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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내 구세주”라는 표현이 맞는가 말입니다.
둘째로는 “시적인 표현”의 퇴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얼마나 직유법, 은유법적인 표현의 우아한 표현법들
이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간접적인 표현의 비유의 풍부함에 감탄이 나
올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에 옛날 신편, 개편, 합
동 이라고 하던 시절에서부터 '새찬송가'에서 그리고 통일찬송가에서 그리
고 오늘 21세기 새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주욱 느낀 것이 바로 이런 점에
서의 아쉬움입니다.
시적인 깊은 의미를 유치한 직설법으로 풀어서 그 뜻의 범위를 그리고
깊이를 축소해버린 이러한 아둔한 짓(!)을 오늘 한국교회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한국교회의 신앙의 수준의 퇴조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찬송가의 254장
(통일186장) '내 주의 보혈은'이라는 찬송에서도 너무도 안타까운 것입니
다. 여기서도 후렴 부분인데, 마지막 소절의 '십자가의 보혈로'라는 표현
입니다. 그 전의 통일 찬송가에서는 '골고다 보혈로'로 나와 있고, 이 가
사의 기원은 제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아마 통일 찬송가 전의 새찬송가의
더 전부터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끔씩 21세기 오늘의 새 찬송가가 나오기 전에도 어떤 목사님들은 '
십자가의 보혈로'라고 고쳐부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너무도
유치한 생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골고다의 보혈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그 풍성한 의미를 축소시켜 좀 더 사실적으로 주님의 보혈을 표현하고 싶
어 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정 그럴 것이면, '십자가의 보혈'도 틀렸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고칠 것이라면 차라리 '예수님의 보혈'이 더 정확한 표
현입니다. 십자가가 무슨 보혈을 흘렸습니까?
문학적인 이해도에 따라서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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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퇴조적인 생각입니다. 옛날 새찬송가 시절까지만 해도 95장(통일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라는 찬송가에도 6절까지 있었습니다.
통일 찬송가에서부터 그 때 있던 4절이 빠졌습니다. 이 찬송가가 개인적
으로는 너무 좋아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4절이 좋았는데, 그 4절을 속
빼버렸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시온 성에 사는 처녀들이여, 사랑
하시는 내 주를 빈들에서나 그 장막 안에서 만나 뵌 일이 없는가?' 입니
다. 이 4절을 빼버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녀상열지사라
불경건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도
읽어보지 않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냅니다. 아니면 이런 찬송
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 문학적인 소양이 너무 없는 분
들이 아닌가 화가 치밀 정도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서도, '살아계신 주'라는
곡의 끝에도 '나의 구세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느 다른 복음
성가에서 부르는 '보혈의 피'라는 표현만큼이나 기독교인들의 무지를 폭로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195) 이처럼 21세기 새찬송가의 질타
는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질타는 극단적인 말도 있지만 지금 21세기
새찬송가가 다루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총회 산하에
있는 한 노회에서 나온 지적을 보기로 하자.
21세기 [해설찬송가] 해설위원으로 해설을 작성하면서 잘못된 부분들
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얼마 전 교계신문에 나채운 교수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사건으로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어 원문에 보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요.
여기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는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입니다. 21세기
195)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사이트에 올라온[찬송가에 대하여 - 전성일] 2009-04-10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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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48장<통일 [찬송가] 388장>은 그대로 1,2,3절 초두에 모두 "
마귀들과"로 수정하지 않은 채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마귀들"이
란 표현이란 엄청난 신학상의 오류입니다.
기존의 통일 [찬송가] 388장이나 269장에서 "마귀 들"이란 표현은 성
경에도 없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성경 여러 본문 어디에도 “마귀들”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귀는 대장이기에 항상 헬라어 (διaβολοs)에서
단수로 쓰였습니다.
신구약성경에 “마귀”라는 성경구절은 모두 34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32:17, 마 4:1, 5, 8, 11, 13:39, 25:41, 눅 4:2, 3, 5, 13,
8:12, 요 6:70, 8;44, 13:2, 행 10:38, 13:10, 엡 4:27, 6:11, 딤전 3:6,
7, 딤후 2:26, 히 2:14, 약 3:15, 4:7, 벧전 5:8, 요1서 3:8, 10, 게
2:10, 12:9, 20:2, 20:10절 등입니다. 위의 성경 구절 중에 신명기 32:17
절만 라쉐디임으로 70인 헬라어 역경에 δαιμονιov, δαιμoνιοis <이방신
들, 귀신들, 악령들>을 의미할 경우만 복수로 쓰여 진 경우이고요, 나머지
경우에 용례는 모두 “마귀”라는 명칭, 분명히 단수요, 그 정체가 사탄(Σα
ταν 즉 악령의 왕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숙적)인 [마귀]인 것입니
다.196)
지적을 해서인지 통일 [찬송가] 269장=21세기 [찬송가] 522장에서는
다행히 고쳐놓았습니다. 그러나 388장(21세기 [찬송가] 348장)은 리듬과
가사의 어울림의 난제로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곳을 올바르게 고치는 방
법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① 첫째 마디의 리듬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 마귀 / 싸워 이길지라
죄악 / ” 로 고치시든지, 아니면 “ 저 마 / 귀와 싸울지라 죄악 /”
으로 고치면 해결될 것입니다.
196) 신소섭, [예배와 찬송가](서울 : 아가페문화사, 1993), 18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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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첫째 마디를 사분음표로( ♩ )로만 고치고, 가사를 "마 / 귀와 싸울
지라 죄악 / "로 고쳐져야 합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성도들이 알지 못하는 오류가 여기 저기 보입니다.
그렇기에 찬송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필요한 것이고, 이어서 연구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총회 예장출판사 출판국에 전
화를 해보니 지금 [찬송가공회]에서 수정해서 명령만 떨어지면 곧 고칠
수 있다고 하기에 이렇게 급히 건의 드리오니 꼭 수정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③ 그리고 21세기 [찬송가] 281장 4째 소절 첫 마디에 베이스 테너
음이 G-Bb으로 배치한 것은 화성법 상 부자연스럽고, 좋은 화성
배치는 Bb-Bb으로 고쳐 테너 선율이 베이스로 이어지지 않게 하
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첫음이 강박이니까 7화음보다는 3화
음을 배치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④ 21세기 [찬송가] 51장과 52장의 곡명을 똑같이 [봉헌]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 제목 분류를 그대로 곡명으로 기재한 것은 찬송가
학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넌 센스입니다. 51장은 '기뻐 받을 제물'
52장은 '아낌없이 바침' 이렇게 가사에서 따서 붙이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곡명을 바르게 붙여주어야 세계인들이 손쉽게 찬송가를 찾
아볼 수 있도록 손색이 없는 찬송가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⑤ 21세기 [찬송가] 449장의 작곡자는 돈(W. H. Done, 1832-1915)
이 아니라 타우너(Towner, 1850-1919)가 옳습니다.
⑥ 21세기 [찬송가] 564장의 성구는 원 작사자가 가사를 작사할 때
말라기 3:17을 가지고 작사하였기 때문에 원 작사자의 성경인용구
절로 원상복구 시켜야 합니다. 1937년 [찬숑가]를 편집하면서 누
군가 마18:3절로 바꾸어 넣은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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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3:17절로 기재하는 것이 옳습니다. 원작자의 인용 성구를
우리 맘대로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⑦ 끝으로 21세기 [찬송가] 326장은 통일 [찬송가] 368장 4분의2박
자 곡을 부르기 쉽도록 하기 위해 4분의 4박자로 고쳐 놓은 결과
인데, 큰 문제는 후렴 부분에 보면 부르기 쉽게 한다고 리듬과 마
디를 바꾸면서까지 하여 아주 다른 곡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원곡을
임의로 바꿔버려 리듬을 상실하게 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
다.197)
새 찬송가에 대한 분석 (A ANALYSIS ON THE NEW HYMNS) -김영재교
수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새 찬송가 584장은 ‘우리나라 지켜주신’ 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곡
인데 1절 가사에 ‘억눌렸던 겨레울음 가슴터져 쏟아졌네 만세소리 울린
그 날 태양빛도 눈부셨네‘ 라는 가사가 기록되어져 있고, 2절에 ’말과 글
을 찾았으니 주의 은혜 고마워라‘ 는 가사가 기록되어져 있다. 이는 8.15
광복절을 토대로 해서 쓰여진 지극히 한국적인 가사이며, 시대에 뒤떨어
진 것이다.
복음성가 중에서도 ‘예수님이 좋은걸 어떡합니까’ 라는 가사로 시작하
는 노래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는 가사
로 시작하는 노래는 부흥회나 집회때에 애창(?) 하는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 역시 교회의 음악과는 코드(Code)가 전혀 맞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
하고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끊임없이 불러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노래는 교회에서 불러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어야만이 거룩성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렇
197) 찬송가 연구학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군산노회 성도교회, E-mail : green-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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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이 지금의 교회의 현 주소인 것이
다. 특히 다른 부분에서도 그러한 점이 발견되어지지만 특히 음악에서 만
큼은 아주 많이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비단 찬송가뿐만이 아니라 청소년
들이 즐겨부르는 성가가 C.C.M.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다분히 발견되어
지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던 두 곡의 복음성가와 C.C.M.에서 발견되어지
는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대책과 방안을 구해야 할 것이며 현저히 구별해
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어지는 시대적인 상황속에서 오히려 21세기 찬송
가는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찬송가 이외에 많이 불려졌던 복음성가도 찬송
가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복음성가와 찬송가의 구분점이 사라
지게 되었다.
이전에 복음성가로 불려졌던 곡중에서 21세기 찬송가에 수록되어진
곡들을 살펴보면 158장의 ‘서쪽하늘 붉은 노을’, 308장의 ‘내 평생 살아
온 길’, 316장의 ‘주여 나의 생명’, 614장의 ‘얼마나 아프셨나’ , 620장의
‘여기에 모인 우리’, 621장의 ‘찬양하라 내 영혼아’이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찬송가의 장수가 확연히 바
뀌어서 혼란을 가중케 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기존의 찬송가의 제
목과 가사가 그대로 수록되지 않고 바뀌어서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기존의 찬송가의 가사 중에서도 바뀌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꼭 바
뀌지 않아도 될 부분들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특히 가사는 바꿀지언정 제
목은 그대로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가사도 내용면에서 바뀐
것이 아니라 철자의 한 획이 바뀌어서 그 동안에 불렀던 찬송이 입에 배
어 바꿔 부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듯 싶다.
그 곡들을 살펴보면,
(1) 163장의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 가 새 찬송가에서는 176장에
수록되면서 제목이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로 바뀌어졌다. 후렴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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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부분에 ‘맞아라’를 ‘맞으라’ 로 바꾸었으며, 4절에 ‘한 밤이나 낮이나’
를 ‘한 밤에나 낮에나’ 로 바뀌었다.
(2) 166장의 ‘주 예수 믿는 자여’ 가 새 찬송가에서는 178장에 수록되
면서 제목을 동일하지만 곡이 바뀌었고, 가사도 1절에 ‘저 신랑 영접하러’
가 ‘신랑을 영접하러’ 로, ‘주 오실 때가 되고 밤 깊어 가는데’ 가 ‘주님
오실 때가 되고 밤은 깊어 가는데’ 로, ‘주 속히 오신다’ 가 ‘주님 속히 오
신다’ 로, 2절에 ‘큰 소리 외칠 때’ 가 ‘큰 소리로 외칠 때’ 로, ‘곧 나와
맞아라’ 가 ‘주님 나와 맞으라’ 로, 3절에 ‘빛 비쳐 주소서’ 가 ‘참빛을 주
소서’ 로 ‘나의 손을 높이 들어 우리 주께 비오니’ 가 ‘내 손을 높이 들어
주 앞에 비오니’ 로, ‘곧 강림 하소서’ 가 ‘지금 강림 하소서’로 바뀌었다.
(3) 172장의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가 새 찬송가에서는 183에 수록
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주님의 허락한 성령’ 이 ‘’주님이 약속
한 성령‘ 으로, 바뀌었다.
(4) 173장의 ‘불길 같은 성신여’ 가 새 찬송가에서는 184장에 수록되
면서 ‘불길 같은 주 성령’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고, 후렴부분에 ‘내 영혼
의’ 가 ‘우리 영의’ 로 바뀌었고, 3절에 ‘비고 비인 마음에 주의 이름 위
하여 성신 충만합소서 ’ 가 ‘비고 빈 내 마음에 성령 충만 하도록 주여
채워 주소서’ 로 바뀌었고, 4절에 ‘허락하신 성신을’ 이 ‘약속하신 성령을’
로 바뀌었다. 특히 이 찬송가에서 ‘성신’이라는 구약적인 용어를 ‘성령’이
라는 신약적인 용어로 바꾼 점을 높이 평가할만하다.
(5) 215장의 ‘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 가 새 찬송가에서는 426장
에 수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내 만속에 거하심 원합니다’ 가
‘내 맘 속에 영원히 거하소서’ 로, 2절에 ‘몸 드리는 일 까지 도우소서’
가 ‘이 몸 주께 드리니 받으소서’ 로 ‘내 온 몸과’ 가 ‘내 마음과’ 로, 3절
에 ‘하심을 비옵니다’가 ‘하시기 원합니다.’ 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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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16장의 ‘아버지여 나의 맘을’ 이 새 찬송가에서는 424장에 수록
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2절에 ‘부드럽고’ 가 ‘온유하고’ 로, 4절에 ‘죄
를 씻어 버리고’ 가 ‘죄를 씻어 주시고’ 로, ‘성령으로 하늘 길에’ 가 ‘성령
이여 하늘 길로’ 로 바뀌었다. 217장의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가 새 찬
송가에서는 425장에 수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3절에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가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로, 4절에 ‘동거함을’ 이 ‘동행함을’
로 바뀌었다.
(7) 221장의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가 새 찬송가에서는 246장에
수록되면서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라는 제목으로 바뀌었고, 1절에 ‘내
중한 짐을’ 이 ‘내 무거운 짐’ 으로 바뀌었다. 특히 이 찬송가에서 이전의
제목에서는 ‘가나안’을 ‘가난’으로 줄여서 표현하여 마치 하나님이 약속하
신 땅이 가난한 땅인 듯한 인상을 주었었는데 가나안으로 확실하게 표현
한 것은 높이 평가할 하다.
(8) 222장의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이 새 찬송가에서는 235장에 수
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2절에 ‘밤낮을 즐기네’ 가 ‘영원히 즐기네’
로 바뀌었다.
(9) 223장의 ‘세상 모든 수고 끝나’ 가 새 찬송가에서는 236장에 수록
되면서 ‘우리 모든 수고 끝나’로 제목이 바뀌었고, 1절에 ‘우리 장막 벗고
서’ 가 ‘세상 장막 벗고서’ 로, ‘사라진 뒤에’ 가 ‘사라진 후에’ 로, 2절에
‘가는 길이 외로워도 주님 나를 붙드니’ 가 ‘가는 길이 외로와도 주 날 붙
드시리니’ 로, ‘주의 뜻을’ 이 ‘그의 뜻을’ 로, 3절에 ‘눈물 흔적 거둔 뒤’
가 ‘모든 눈물 거둔 후’ 로, ‘주의 찬란하신 영광’ 이 ‘주의 영광 찬란하게’
로 바뀌었다.
(10) 352의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가 새 찬송가에서는 313장에 수
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2절에 ‘맘을 보사’ 가 ‘마음 보사’ 로, 4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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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오니’ 가 ‘것이오니’ 로 바뀌었다.
(11) 444장의 ‘예수가 거느리시니’ 가 새 찬송가에서는 390장에 수록
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2절에 ‘풍파 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 거느리
네’ 가 ‘풍파 중에 지키시고 평안히 인도하시네’ 로, 4절에 ‘지옥의 권세’
가 ‘마귀의 권세’ 로, ‘천국에 있을 때에도’ 가 ‘천국에 가는 그 길도’ 로
바뀌었다.
(12) 446장의 ‘오 놀라운 구세주’ 가 새 찬송가에서는 391장에 수록
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샘솟는’ 이 ‘안전한’ 으로, 3절에 ‘내 생
활을’ 이 ‘내 믿음을’ 로 바뀌었다.
(13) 450장의 ‘자비하신 예수여’ 가 새 찬송가에서는 395장에 수록되
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맘이 어두웠으니’ 가 ‘마음 심히 어두니’
로, ‘저를’ 이 ‘나를’ 로, 2절에 ‘저의’ 가 ‘나의’ 로 바뀌었다.
(14) 471장의 ‘십자가 그늘 밑에’ 가 새 찬송가에서는 415장에 수록
되면서 제목이 ‘십자가 그늘 아래’로 바뀌었고, 1절에 ‘쬐이고’ 가 ‘뜨겁
고’ 로, 2절에 ‘나’ 가 ‘날’ 로, 3절에 ‘나 관계없도다.’ 가 ‘나 두려움 없
네’ 로 바뀌었다.
(15) 475장의 ‘이 세상은 요란하나’ 가 새 찬송가에서는 414장에 수
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후렴에 ‘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가 참 기쁨
이 내 것일세‘ 로 바뀌었다.
(16) 449장의 ‘이 세상의 친구들’ 이 새 찬송가에서는 394장에 수록
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3절에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가 ‘영원
하신 주 능력 나를 붙으드네’ 로 바뀌었다.
(17) 478장의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가 새 찬송가에서는
419장에 수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날 지키시리니’ 가 ‘날 지
켜 주시니’ 로, 2절에 ‘못 위로해 주나’ 가 ‘위로치 못하나’ 로, 후렴에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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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워라’ 가 ‘평안하다’ 로 바뀌었다.
(18) 488장의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가 새 찬송가에서는 428장에
수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후렴에 ‘그 빛’ 이 광채‘ 로 바뀌었다.
(19) 510장의 ‘겟세마네 동산의’ 가 새 찬송가에서는 457장에 수록되
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사양할 수’ 가 ‘외면할 수’ 로, 3절에 ‘짐
으로’ 가 ‘지고서’ 로, 끝 부분에 ‘따라가겠네’ 가 ‘따라가리라’ 로 바뀌었
다.
(20) 513장의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차도’ 가 새 찬송가에서는
458장에 수록되면서 제목이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로 바뀌었
고, 1절에 ‘즐겁게 하시리라’ 가 ‘위로해 주시리라’ 로, 후렴에 ‘즐거운’ 이
‘참 기쁜’ 으로 바뀌었다.
(21) 516장의 ‘맘 가난한 사람’ 이 새 찬송가에서는 427장에 수록되
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저들의 천국이요’ 가 ‘그들의 것임이요’
로, ‘애통을 하는 이’ 가 ‘늘 애통하는 이’ 로, ‘저희가’ 가 ‘그들이’ 로, 4
절에 ‘저들의’ 가 ‘그들의’ 로 바뀌었다.
(22) 517장의 ‘생명 진리 은혜되신’ 이 새 찬송가에서는 462에 수록
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2절에 ‘거저 받은 주의 은혜 거저 주게 하소
서’ 가 ‘이웃 사랑 나누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로, 3절에 ‘물리치고’ 가
‘다 그치고’ 로, ‘우리 앞에 빛나리’ 가 ‘이뤄지게 하소서’ 로, 4절에 ‘없도
다’ 가 ‘없으니’ 로, ‘모시고’ 가 ‘모시네’ 로 바뀌었다.
(23) 519장의 ‘십자가를 질 수 있나’ 가 새 찬송가에서는 461장에 수
록되면서 제목은 동일하지만 1절에 ‘저들’ 이 ‘성도’ 로, 3절에 ‘주께 내
혼 맡기겠나 최후 승리 믿으며 걱정 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 덮을 때’
가 ‘걱정 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 덮을 때 주께 내영 맡기겠나 최후 승
리 믿으며’ 로 순서가 바뀌었고, ‘네 혼’ 이 ‘네 영’ 으로, 4절에 ‘옛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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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울’ 로, 후렴에 ‘당신의’가 ‘주님의’ 로 바뀌었다.
또한 가사적인 부분에서 지적하면
(1) 576장에 수록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 가사는 비록 1절에 ‘하
나님의 뜻을 따라 태어난 생명’ 이라는 가사가 있지만 전반적인 내용면에
있어서는 육신의 어머니의 사랑에만 치중되어져 있다. 그러기에 이는 찬
송가라고 할 수 없으므로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578장에 수록된 ‘언제나 바라봐도’ 도 비록 3절에 ‘죄인을 구하시
려 독생자 보내신’ 이라는 가사가 있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고 어머니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찬송의 전반적인 가사의
내용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에 치중되어 있다는 난점을
피할수 없는 것이다
(3) 261장의 ‘어둔밤 마음에 잠겨’ 가 새 찬송가에서 582에 수록되었
는데 이 찬송을 지은 김재준은 자유주의 계열에 속한 자로서 창세기 1장
에서 3장까지의 내용을 가설이라고 주장한 자이다. 또한 이 찬송가의 가
사의 내용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지극히 민족주의 적이
며, 사회 혁명적인 요소가 다분하여 찬송가라고 볼 수 없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 중에 하나는 찬송가의 가사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러기에 찬송을 만드는 자들은 자신의 성향을 가사화해서는
안되며, 성경을 토대로 해서 성경에 입각한 가사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그 가사에 붙이는 곡도 세속적이거나 대중적인 것들을 회피하고 종교적인
곡을 선택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를 수 있게 한다는 얄퍅한 생각으
로 찬송을 세상의 소리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234장의 ‘나의 사랑하는 책’ 2절에 ‘병거’를 성경적으로 ‘바람’ 이
라고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왕기하 2장 1절과 11절에 보면 엘리야
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이다. 이에 새 찬송가에서는 199장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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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5) 123장의 ‘저 들밖에 한 밤중에’는 새 찬송가에서도 역시 123장에
수록되었는데 이전의 찬송가와 같이 1절에 ‘양틈에 자던 목자들’ 이라고
가사가 기록되어져 있다. 하지만 이 가사는 ‘양 떼를 치던’ 이라고 바꾸어
야 한다. 왜냐하면 목자들이 성탄의 소식을 들은 이유는 그들이 밤에 잠
을 자지 않고 양 떼를 지켰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
의 계시를 전해 주실 때에 선지자들에게 주시고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백
성들에게 증거하도록 하셨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선지
자들에게 주어졌었는데 신약에 와서는 그러한 자격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그 때에 깨어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듣게 되는 것이다.
사실 목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은 이유는 누가복음 2
장 8절의 말씀처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
니’ 이다. 목자들이 낮에도 한 눈을 팔다가는 이리나 늑대가 양을 삼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에는 더더욱 목자들이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
면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찬송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
광만을 찬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을 찬송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21세기 찬송가에는 그러한 점이 미비하다. 비록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곡들이 많이 있기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
쉬움이 남게 된다. 198)
작가총연합 전희준 교수 또한 지금의 21세기 새찬송가에 관심이 많은
분 중에 한 분신데 “찬송가 불량제품 출판을 즉각 중단하라”고 외치셨다.
그러면 전 교수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기로 하자.
198) 새 찬송가에 대한 분석 ((A ANALYSIS ON THE NEW HYMNS) -김영재교수, 09.02.23,
http://cafe.daum.net/Kosin52/44z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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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용한 찬송가에서 삭제된 곡(76곡)과 새로 선곡되어 수록된
외국곡(53곡)에 대한 문제이다. 중복된 곡에서 삭제 할 곡은 그대로 두고
외국에서 널리 부르고 있는 은혜로운 찬송곡과 그동안 한국에서 즐겨 부
르던 찬송곡이 여러 곡 삭제된 점을 지적하고 미숙한 악보정사와 오자의
교정문제를 들었다.
찬송가 면수를 줄이기 위해 음악형식을 무시하고 마디와 행을 자유롭
게 축소해서 4단을 2단 혹은 3단으로 하고 6단을 4단 혹은 5단으로 정
사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외국 찬송가의 가사를 원문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
국어와 한국어의 언어구성과 어휘의 뉘앙스, 적당한 낱말, 어순의 차이
등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사를 번역한다는 것은 제2의 창
작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똑 같은 가사라도 번역자의 신앙적인 배경, 외국어의 능력, 시적인 감
정표현 능력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창작가사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한국인의 창작가사는 번역가사와 다르다.
우리의 정서와 문화가 물씬 풍겨나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의 가사이어야 하
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최근 에 수없이 많이 창작되어진 다양한 가사를 보
면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며 누구를 위한 가사인지? 창작가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가사의 내용이 일괄성이 없고 산만하여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
지? 찬송을 부르면서 가사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일이 허다하다고 말
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큰 어르신이신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박재훈 원로목사가 CBS 종교부 고석표 기자와의 대화에서 21세기 “새찬송가”
에 대해 한 가지 꼭 고처야 될 점을 말씀하시려고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박재훈 목사는 60년대 사용했던 ‘개편찬송가’나 ‘새찬송가’에는 이 찬송의
작사자가 크로스비 여사로 분명히 표기돼 있으나 83년 발간된 통일찬송가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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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으로 지난 2006년 11월 발간된 21세기 새찬송가에서부터는 김인식으
로 잘못 표기돼 있다고 지적했다.
6,70년대 여러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면서 큰 불편을 겪어 오던 한
국교계가 한국교회선교백주년을 기념해 하나의 찬송가를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한국찬송가공회가 조직되고 지난 83년 통일찬송가를 발간해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찬송가를 발간했지만 이때부터 ‘예수 나
를 위하여’란 곡의 작사자는 크로스비가 아니라 김인식으로 둔갑했다는
것
2) ‘자신의 곡이 지난 2006년 발간된 새 찬송가에 9곡(17, 301, 319,
392, 515, 527, 561,578,592장)이 수록돼 있으나 어떤 곡은 본인의 의
도와 달리 화상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 찬송가공회측에 수정을 요청했
다’고 밝혔다.
3) 한국찬송가공회측이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에 대한 저작권료를 한번
도 지급한 적이 없고 심지어 본인의 허락 없이 자신의 곡이 실려 있는 찬
송가도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또 83년 발간된 통일찬송가에 실려 있는
4곡을 비롯해 7곡의 찬송가 곡에 대한 저작권을 기독교서회측에 양도했
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될 경우 서회측은 7곡에 대한 저작권료를 공회측
에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찬송가공회측은 ‘이름이 바뀌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지
난 83년 당시의 전문위원들에게 확인요청을 해야 한다’면서 ‘원 작사자의
이름이 맞다면 사실대로 고칠 일’이라고 밝혔다.
또한 21세기 찬송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21세기 찬송가를 사
용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 미주 찬송가 공회의 글입니다.
정세광 목사(필그림 찬양단, 필그림 선교회장)은 새 찬송가에 대한 다
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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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1년 11월9일 중앙일보 미주판에 "찬송가 뭐하러 새로 만
드나?"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한국과 미국에서의 너무나 큰 반응에
놀랐고, 혹시 교계에 ‘반대만 일삼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울 때도
있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11월 15일, 드디어 10년 만에 21세기 찬송가
는 한국에서의 판매를 시작으로 11월 27일 이곳 미주에서도 판매가 시작
되었다. 필자는 흥분된 마음으로 하루 종일 21세기 찬송가를 보고 또 보
았다. 21세기 찬송가는 그 분야의 훌륭하신 전문가들이 편집, 감수 하셔
서 필자가 감히 평가는 할 수 없지만, 평생 예수를 믿으며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 신자로서, 부족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을 찬양을 지휘하
고 인도하고 가르친 사람으로서 아주 조심스럽게 나의 의견을 밝히고 싶
다.
첫째 21세기찬송가 별로 바뀐 게 없다
1983년 필자는 물론, 온 성도들이 통일 찬송가가 나오길 얼마나 기
다렸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예배 때마다 찬송가가 4종류가 되기 때문에
"합동찬송가__장, 신편찬송가__장, 개편찬송가 __장, 새 찬송가__장, 입니
다"라고 일일이 말해야했으며, 주보에도 역시 4권의 서로 다른 찬송가의
장수를 모두 기입해야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렸던 통일찬송가는 558곡으로 우리가 불렀던 새
찬송가에 비해 곡수도 113곡이나 줄었고, 가사도 바뀌었고, 음악부호도
모두 빼 버려서 찬송가가 통일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나아진 게 없었
다. 통일찬송가가 나온 지 23년 만에 금년 21세기 찬송가가 나왔는데,
23년 전에 나온 통일찬송가의 558곡 중에서 481곡이 21세기 찬송가에도
그대로 나왔으므로 86.2%가 통일찬송가에서 그대로 베껴진 것이다. 타이
틀도 거창하게 ‘21세기 찬송가’라고 붙였지만 23년 전의 통일찬송가와 별
반 다를 게 없다. 세상의 음악이 모두 우리 기독교에서 유래되었고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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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21세기 찬송가라면 세상 음악의 으뜸이 되어야 하는데 옛날 새 찬
송가에서도 있었던 음악 부호들이 하나도 없고 그냥 악보뿐이다.
둘째 21세기 찬송가로 예배 찬송의 선곡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데 정
말 해결될까?
21세기 찬송가를 만들면서 2001년도 초순에 분명히 말하기를 800
곡을 수록하여 예배 드릴 때 찬송의 선곡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고 했다.
그런데 처음 약속보다 무려 155곡(20%)이 부족한 645곡만 수록되었다.
설령 약속대로 800곡이 모두 수록되었다 하더라도 그 곡으로 예배찬송의
선곡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그 발상 자체가 일선 교회음악의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지금 한국교회와, 해외에서 한국인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미국의 한인
교회만 보더라도 학생 청년 장년 모두, 찬송가 외에, 2000곡이 넘는 복음
성가집을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선곡이 모자라서 찬양CD, 인터
넷, 복음 성가집 등을 통해 새 곡을 찾고 있다. 필자가 강의한 웬만한 찬
양인도자들은 거의 5000곡 이상의 곡들을 가지고 예배찬양의 선곡을 하
고 있다.
80~90년대만 하다라도 예배드릴 때 복음성가(찬양과 경배)를 불러서
는 된다, 안 된다로 참으로 말들이 많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서 그런
논쟁은 없어지고 어떻게 하면 찬양과 경배를 잘 드릴 수 있는가? 에 대해
서만 초점이 맞추어져 가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했던 찬송
가에서 복음성가가 수록된 비율은 신편찬송가(1935년): 41.5%, 합동찬송
가(1945년): 54.9%, 새찬송가(1962년): 43%, 개편찬송가(1967년): 29%,
통일찬송가(1983년): 50.4%였다.
새로 나온 21세기 찬송가 역시 45~50%가 복음 성가 임을 감안할 때,
이젠 교회에서 복음성가가 된다, 안 된다 라는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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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645곡 만 으로는 예배음악의 선곡대상으로 너무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셋째 낭비가 너무 심하다
세계에서 유독 우리 한국교회만이 찬송성경 합본으로 되어있고 고급
가죽, 금박, 지퍼까지 달려있다. 이제 찬송가가 바뀌었으니 옛날 사용하던
성경찬송 합본에 새로운 찬송가까지 그 크고 무거운 것을 누가 두 권씩이
나 들고 다니겠는가? 우리 집만 하더라도 성경합본이 11권에 이르고, 20
년 전에 쓰던 새 찬송가 합본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있다. 하
나님의 말씀이라 버리지도 못하고,...또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또 모두
사야하나? 어제 비닐 카바에 조잡하게 인쇄된 21세기 찬송가를 구입하는
데 $10.00+Tax 였다.
넷째 신앙과 믿음의 연륜이 깃든 성경인데 버려야 하나?
찬송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 그 시대의 정서에 맞게 변할
수 있다‘새 노래(new song)로 여호와께 노래하라...(시96:1)고 하셨다. 그
러나 성경은 낡고 오랜 세월이 흐를수록 찾기 쉽고 밑줄이 그어지고 신앙
의 연륜도 배어있다. 찬송가 234장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해어졌으나 faded 색이 바랬으나)’란 가사
를 생각해 보자. 해어졌건 아니건 이젠 모두 버려야하나...
다섯째 한국인의 정서를 살리기 위해 한국 작곡자의 곡을 많이 넣었다
고 하는데 사실과 다른 말이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찬송가는 우리가 부르는 한국인의 찬송가지만 다
른 나라 찬송가에 비해 자작찬송의 비율이 현저히 낮았다
일본 고금성가집(일본인 자작찬송 비율): 25.1%(530곡 중에서 133곡)
중국 보천송찬(중국인 자작찬송 비율): 12%(550곡 중에서 63곡)미국
The Hymnal(미국인 자작찬송 비율): 88%(600곡 중에서 530곡)한국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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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찬송가(한국인 자작찬송 비율): 3%(558곡 중에서 17곡) - 현재 쓰는
찬송가21세기 찬송가는 한국인 자작찬송이 645곡 중에서 128곡이나 수
록되어 무려 19.8%나 수록되었으나(통일찬송가 3%) 대부분의 곡들이 한
국인의 정서를 담은 찬송곡이 아니라, 미국풍 유럽풍의 곡들이 주류를 이
루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수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곡들이 대부분 그대로 실려 있
다.
21세기찬송가 145장, 493장, 280장, 165장, 108장, 348장,...등은
세속가요, 군가, 민요, 심포니 테마곡,... 등인데 지금까지 찬송가 가사를
입혀서 성도들이 찬송가로 불러왔다. 이 모든 곡들도 아직까지 논란의 대
상이 되고 있다. 한국성도가 최초로 하나가 되어 어렵게 만든 멀쩡한 통
일찬송가를 두고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21세기 찬송가를 구태여 새로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과 의구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찬송가 공회에
서 찬송가에 대한 바른 인식의 부제와 음악 이론의 무지로 인해 빚어진
일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찬송가의 맨 앞부분에 나오는 초보자가 봤을
때 이러한 것을 기초로 하여 찬송가가 쓰여져 있음을 알려주는 부분이 있
다. 그 부분의 이름은 “일러두기”이다. 이 부분은 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
람도 보기 쉽게 알려주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그러면서 찬송가 안에 이
러한 음악적인 것이 쓰여져 있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설명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21세기 “새찬송가”에서도 너무나도 많이
틀려서 다 손을 봐야 될 상황이다. 이 부분은 이성재교수(한국 찬송가 연
구회 회장)의 글을 인용하여 쓰려고 한다.
우리 나라 찬송가에 ‘일러두기’ 를 게재하기 시작한 것은 「새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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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962)였다. 개편「찬송가」에는 없다가 통일「찬송가」(1983)에
이어 이번 21세기 「새찬송가」에 계속 실렸다.
‘일러두기’ 는 찬송가 체제와 정보 및 안내를 상세히 알려 줌으로써
가 창자로 하여금 찬송을 바르게 부르는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에 충분하
다. 그러나 그 ‘일러두기’가 부실하거나 잘못 해설을 해 줄 때의 해악도
그만 큼 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찬송가 차례 다
음 변에 게재된 ‘일러두기’는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일러두기’에 순
번을 점으로 표시했기에 편의상 11항으로 표기하여 그 문제점을 바르게
일러두고자 한다. ④항의 작사자와 ⑤항의 작곡자 또는 편곡자의 출처
(Source)는 그 사람의 출생과 사망 연도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품 연
도를 표시함이 원칙임에도 대부분 출생 및 사망 연도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④항에 연주 속도를 표시하였는데 그 속도 표시는 ⑦항에 메트로놈
상의 속도 표시와는 무관하게 ‘조금 느리게’ , ‘보통으로’ , ‘조금 빠르게’
의 3단계로나누어 표시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할 것은 어
느 나라, 어느 교파의 찬송가도 속도 기호가 표시된 바가 없다는 사실이
다.
과거 「새찬송가」나 통일「찬송가」에 음표와 메트로놈(Metronom)
숫자가 기계적으로 서로 맞지 않았던 점도 문제였거니와 조급 느리게 어
anante) , 보통으로(modrato), 조금 빠르게(Allegreto) 표시 역시 일반 회
중에게는 문제로 남는다.
찬송가의 속도는 지리적, 문화적, 상황적 환경에 따라 찬송의 빠르기
가 달리 불러지는 것이 음악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⑦항에서 “2/2박이나 6/8박, 9/8박은 2분음 1개나 8분음 3개”라
고 했는데, 이는 “2/2박자나 6/8박자,9/8박지는 2분 음표 1개나 점 4분
음 표를 기준 박으로 하여”라고 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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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항 반주를 위한 전주 표시 및 간주표시를「」로 하였는데, 이 역시
과 인친절로서 삭제함이 옳다
⑩항 찬송가 안의 약자 및 영문자풀이 오류의 개선
Adapt. (Adaptation) = 개작,은 ‘Adapted by’ 로 (예: 169장 등)
Alt.(Alter)에 = 수정,은 Alter가 아닌 ‘Alteration’ 199)으로 바로 잡
아야.
Arr.(Arrange) = 편곡,은 ‘Arr. by’로 (예: 23,24장 등)
Harm.(Harmonised) = 화성 붙임,은 ‘Harm. by’로 화성을 붙인이’
로 (예: 29장등)
IRREG.(Irregular) = 불규칙 운율,은 ‘Irregular meter’로 바로 잡아
야,
Para,(Paraphrase) = 인용,이 아닌 ‘의역’ 으로 바로 잡아야.
St.(Stanza) = 절 = Stanza 그대로 표기해야 옳다. St.의 경우
Seint ‘성’(聖) 또는 Sturdy, Street 등으로 얽혀질 수 있기 때문이
다.200)
Trad. (Traditional) = 전통적인 ‘민요나 민속곡’ 을 뜻한다.
Trans.(Translase) = 번역하다,는 동사가 아닌 명사 ‘번역’ 으로 바
로 잡아야 한다.
⑪항의 작사, 작곡자의 출생 및 사망 연도를 굳이 나타낼 경우 동사
가 아닌 명사로 표기해야 옳다.
b.(bom) = 출생하다,는 ‘birth’ 곧 ‘출생’ .
d.(diecl) = 죽다,는 ‘dead’ 곧 자망’ .
이러한 부분이 지금 21세기“새찬송가”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음악의
무지에서 온 것들이다.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지적을 지금도 받고 있다.
199) Prime English-Korean Dictíonary, (서울 동아출판사 출판국, 동아출판사, 1991), 89
200) Ibid,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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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음악을 모르는 무지에서 빚어진 것이기에
찬송가공회는 음악적인 지식을 많이 알고계신 분들로 모셔서 속히 이러한
음악적인 무지에서 탈피해야 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많은 부분의 질타는 아마도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분의 질타가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21세기 찬송가에 관심
을 가지고 있음이 직접적으로 들어난 것이기도 하다. 어떤 교수님의 많
은 부분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음에 찬송가를 만들 때에는 많
은 부분의 협조와 조언을 받아서 이것을 찬송가에 정성을 다해 실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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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결 론
이상과 같이 회중 찬송가의 역사적 과정을 고찰한 필자는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고자 한다.
첫 번째로 회중 찬송은 성경 말씀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의 회중찬양은 암브로시우스 성가에서부터 그레고리안 성가에까지를
말한다. 이러한 회중찬양의 발전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특히
찬양 안에 교리와 말씀이 들어가게 된다. 그 이유는 이단들과의 투쟁이
바로 그 근거이다. 즉 찬양의 중심은 말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
찬송가의 명맥이 소멸된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는 교회사적으로 어려웠
던 바로 중세이다. 사실 중세는 교회사적으로나, 교회음악적으로 어려웠
던 시기였기에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슬픈 시기이며, 회중찬양이 소멸
될 번한 시대였다.
두 번째로 회중찬양은 말씀 중에서 시편이 그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회중찬양을 강하게 알린 시기가 바로 종
교개혁시대이다. 칼빈은 이 시대를 대표하며 회중찬양을 집대성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한 시편이 그 근거이다. 그의 주장은 시편
이 가장 찬양의 가사로서 좋으며, 이 이상 더 좋은 가사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다고 강조를 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그는 예배시 회중 찬양
으로 시편만을 찬양하였다. 사실 칼빈주의를 따르는 나라들은 시편찬양을
예배시 회중찬양으로 다 사용하고 있다. 또한 칼빈의 시편찬양에 대한 사
랑은 후대 많은 교회와 종교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회중찬양의 역사적 변천 속에 19-20세기에 들어오자
영국과 미국에 기독교 역사상 길이 남을 대 부흥운동과 회중찬양에 급격
한 변화를 보인 시기이다. 이러한 경향 속에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의 회
중찬양 즉,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1892)를 비롯하여 21세기 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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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2006)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회중찬송가의 변천사 속에서 참된 한국찬송가의 발전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 번째, 한국 “21세기 새찬송가”는 회중찬송가의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칼빈의 주장대로 시편찬송가가 필요하다.
사실 한국 찬송가공회는 위의 제안에 옳은 답변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21세기 새찬송가”에 시편찬양이 1곡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즉 “21세기 새찬송
가”는 회중찬양이라고 하기에 너무 수준 낮은 찬송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칼빈과 루터가 주장한 개혁주의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두 번째, 한국 장로교회에는 개혁주의 찬송가가 필요하다.
이것은 개혁주의를 외치면서 회중찬양에 몸담은 많은 목사들과 교수들
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한 가지 목소리가 있다. 즉 회중찬양은 칼빈의 주
장대로 말씀에 근거해야 되며, 말씀 중에서도 시편에 근거해야 바른 찬양
을 하나님께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주의를 외치기 전에 진
정한 예배를 예배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찬송가공회에서는 찬송가부터
개혁주의를 따르는 회중찬송가를 속히 만들어서, 예배가 예배되게 해야
될 것이다.
세 번째, 한국 회중찬송가는 각 교파별로 분리 되야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개혁주
의는 다른 교파와 단리 교리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최초의 회중찬양인
암브로시우스 성가는 교리를 찬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회중찬송가와
는 질적으로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21세기 새찬송가”는 교리
의 찬양도 아니고, 시편의 찬양도 아닌 어정쩡한 찬송가가 되고 말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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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한국인 작사, 작곡가가 많이 들어간 회중찬양으로만 웃고 있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장로교의 교리가 정확하게 들어가 있는 회중찬송
가를 만들어서 예배가 예배 되게 해야 될 수 있도록 한국찬송가공회는 바
른 개혁주의에 입각한 교단 찬송가를 만들어야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찬송가는 이제 더욱 더 멀리 내다보고 예배를 위한 찬
송가를 만들어야 될 큰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된다. 한국찬송가공회는
교회음악의 역사적 변천사를 들여다보고, 찬송가에 대한 안목을 넓혀서
앞으로 만들어질 한국의 찬송가는 개혁주의에 입각한 찬송과 개혁주의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 찬송이 예배에 울려 퍼지게 해야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한국 교회의 찬송가의 미래는 좋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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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년도 편자 제목 곡수 특징 교단
1 1892
존스,
로드웨일러
찬미가 27 가사만 있는 학국 최초의 찬송가 감리교
2 1894 언더우드 찬양가 117 한국인 가사 찬송7곡(이유선은 9곡 주장) 장로교
3 1895 존스, 아펜젤러 찬미가 81
한국인 작사 찬송 4곡, 번역찬송 비판, 한국
찬송 주장
감리교
4 1908
조선 예수
교서회
찬숑가 266
한국고유곡조 5곡조(Korea Music), 10, 11,
12, 13, 40장 창가형태
감리교
장로교
5 1931
감리교, 장로교
연합공의회
신정
찬송가
314
한국인 작사 찬송 7곡, 한국 고유곡조 5편,
모두 탈락(조선인 위원들에 의해)
감리교장로
교
6 1949
한국
기독교연합회
찬송가(합동
)
586
한국인 작사 찬송 6곡, 한국화 퇴보(2.2%
=>1%)
감리교
성결교장로
교
7 1967 찬송가 위원회
찬송가(개편
)
600 한국화 강조, 한국인 작사ž작곡 27곡(4.5%)
감리교성결
교 장로교
8 1983 한국찬송가 공회
찬송가(통일
)
558
한국인 작곡 18곡(3%), 개편 찬송가에서
9곡 감소
전교단
9 2006 한국찬송가공회
21세기
새찬송가
(합동)
645
한국인 작곡 126곡(20%), 통일 찬송가에서
87장 증가
전교단
부 록
지금까지의 한국 찬송가의 변천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년도별로 보는
도표1-1과 도표1-2을 각 한 개씩 쉽게 볼 수 있도록 수록했다.
(도표 1-2)201)
21세기 새찬
송가
(2006)
(도표 1-1)202)
201) 이천진 목사[한국교회 찬송가의 역사와 한국찬송가, 표1], 9번은 찬송가공회 “21세기 새찬송
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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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저 서
존 빌렌버그 편집 [루터 저작선: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티, 2005)
베른하르트 로제 [마틴 루터의 신학: 정병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2009)
베른하르트 로제 [루터 연구 입문: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티, 2000)
김영재 [교회와 예배](합동신학교 출판부, 1995)
이윤영 [개혁주의 찬송가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이윤선 [기독교음악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4)
조숙자, 조명자 [찬송가학](서울: 장신대출판부, 1996)
이유선 [기독교음악사](서울: 기독교문사, 1977)
윌리암 젠슨 레이놀즈 [찬송가학, 이혜자 역]
(서울: 이화여대출판부, 1990)
이중태 [한국교회음악사](서울: 예찬사, 1992)
김철륜 [교회찬양학 개론](서울: 호산나 음악사, 1999)
존로슨. 김무석 옮김 [웨슬리의 찬송시](서울: 예영B&P,2000)
김의작 [교회음악학](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83)
김영재 [교회와 예배](수원: 합동신학교 출판부, 1995)
김철륜 [교회 찬양학 개론](서울: 호산나음악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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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3. 도표
이천진 목사[한국교회 찬송가의 역사와 한국찬송가]
이성재[장 칼뱅과 찬송가 그리고 한국 개혁교회] 부록: 한국교회 찬송가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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