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8 주일예배,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8 – 기도와 기도문에 관하여, 마태복음 6장 5-15절(주기도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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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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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개혁교회(2106-2308)/주일 예배

20220828 주일예배,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8 – 기도와 기도문에 관하여, 마태복음 6장 5-15절(주기도문 포함)

개혁신학어벤져스 2022. 8. 28. 11:36

 * 예배를 드리실 분은 11:42부터 보시길 바랍니다.^^

 

 * 오늘 설교시, 소리가 약간 작습니다.(설교원고를 처음부터 보시길 추천드려요!)

 * 설교는 29:20부터 시작합니다!


 도입 or 요약

 마태복음 6:1-18까지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의 구제, 기도, 금식을 지적합니다. 마태복음 6:1-18까지 예수님은 3가지 참된 의로움 곧, 진정한 구제, 기도, 금식에 관해, 가르칩니다. 그중 5-15절까지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곧, 어떤 기도가 진정으로 의로운지를 설명합니다. 곧, 타인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선전하려는 동기의 기도는 그 행위를 지켜보는 구경꾼들의 덧없는 칭찬만이 그들에게 보상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과장법에 따르면, 기도는 하나님만 아시게끔 “조용히 행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타인으로 말미암는 칭찬과 평판을 의도한 선전(=광고)으로서, 참되거나 의롭지 않습니다. 


 기도

 - 유대교인들보다 나은 의를 주소서!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중심(또는 목적)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들을 바라보며(=소망하며), 현세에 필요한 것을 기도하게 하소서!(곧, 천국에서의 음식을 생각하며, 매일의 음식을 간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용서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향한 용서를 간구하게 하소서! 종말에 주어질 혹독한 시련(유혹과 시험)을 피하도록 간구하되, 피치 못할 경우, 그것에서 구원받도록 간구하게 하소서!)


 관찰과 이해와 적용

 -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의 시선을 살펴 일부러 특정기도시간에 공공연히 서서 기도하는 유대교인들(특히, 바리새인들)을 무엇과 무엇으로 묘사하나요?(6:5, 7)

 - 예수님에 따르면,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은 내세적으로나 현세적으로나 구속사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진정으로 의로운) 기도를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떤 문구로 표현되었나요?(6:9)

 - 특히, 예수님은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들을 바라보며, 현세에 기도해야 할 바 3가지를 청중들에게 강조합니다. 그것들은 무엇인가요?(설교, 6:11-13)

 - 최근 나는 어떤 내용으로 누구(하나님 또는 사람)에게 집중하여 기도하나요? 점검하고 나누어 봅시다.


 * 소리가 잘 안들려서, 설교 원고를 올립니다. 설교에 사용하시려면, 반드시 출처를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서론

 없음.

 

 본론

 구체적으로 본문을 보겠습니다!

 먼저, 5절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의 기도와 다른 참된 기도(=참으로 의로운 기도)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에게 기도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자, 상황을 연출하는 유대교인들을 닮지 않도록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이 특정한 시간에 공공연한 장소에서 하나님께가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함'을 지적합니다.

 관련하여, 당시 유대인들은 정확한 기도 시간(아침 9, 점심(12), 오후(15)1번씩 기도함)을 준수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평범한 유대인들은 미리 마련한 장소에서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평범한 유대인들은 기도시간에 앞서 기도를 준비하느라 기도처(=)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기도시간을 무시하고, 기도하지 않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부 유대교인(특히, 바리새인 3번째 그룹)들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여기기를 희망하며, 공공연히(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여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들은 못된 내적 동기로 특정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서서 기도했습니다.

 본디, 구약성경은 평소에 거리에서 서서, 공공연히 기도하는 것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금식일(=특별한 시기)에는 기도시간에 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못된 유대교인들(3번째 그룹)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외견상 거룩 때문에, 특히, 그것으로 말미암는 칭찬 또는 존경 때문에, 평소에 거리에서 서서 기도했습니다.

 관련하여, 완료형 분사 헤스토~테스”(서서) 산상설교를 하는 즈음에,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장소에서 서서 기도했던 유대교인들의 근황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자 잘 보이는 곳에서 기도행위를 조금전 선전했던(설교하는 당시 설교장소의 반대편에서 조금 전까지 공공연히 기도한) 유대교인들을 지적합니다.

 물론, 예수님에 따르면, 그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기에, 그들은 주위 사람들의 칭찬만 유일한 상으로 받습니다. 그들은 장래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상을 결단코 받을 수 없습니다.

 

 이어, 6절입니다.

 예수님은 청중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마주치며, ‘골방에서 기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관련하여, 2인칭 단수 대명사 라는 표현이 의도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청중 하나하나에게 ‘조용한 곳에서 기도해야 함 강화합니다. 물론, 이는 과장법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기계적이고 막무가내식으로 골방에서 기도해야 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의도합니다.

 관련하여, ‘골방 창문이 없는 내실이나 창고를 1차적으로 의미하며, ‘은밀한 장소를 대표합니다. 또한, “골방이라는 단어와 함께 “문을 닫고라는 문구는 “골방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은밀성을 강화합니다. 골방에 들어간 채로, 그 방에 들어가는 문까지 닫는다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과장법에 따르면, 참으로 기도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의지적으로 또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기도행위를 숨겨야 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기도는 하나님의 시선만 고려해야 합니다. 기도함에 있어, 기도자는 주위 사람의 시선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의로운 기도'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기도를 행하는 자는 기도행위를 보는 중인(블레폰, 현재능동태분사)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여 누군가의 기도하는 모습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어둠 속에서, 숨은 채로) 지켜보시는 너의 아버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관심이 많아, 그의 은밀한 행동까지 세밀하게 지켜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은밀한 중에 기도하도록청중들을 격려합니다. 누군가가 행하는 참된 기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반드시 보상됩니다.물론, 이러한 보상은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상(=구원을 포함한)입니다.

 또한, (구제와 마찬가지로) 6절의 은밀한 중에(=어둠 속에서, 숨은 채로) 지켜보시는 너의 아버지 하나님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누군가의 내적동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행위가 타인에게 선전하기 위한 것인지 아닌지 압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안에서, 인간의 안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내면에 꽁꽁 감추어 놓은 불필요한 욕구(=명예욕 등) 꿰뚫어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밖에서 인간을 은밀하게 살펴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안에서 인간을 은밀하게 감찰합니다.

 

 이어, 7-8절입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일부러 보이는 곳에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유대교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것(=풀루로기아 - 주술처럼 거듭해서, 하나님을 조종하고자, 그러나 하나님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음성을 내는 것)에 해당합니다. 관련하여,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이방인들과 동급으로 여기며, 그들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길거리에 서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반복적으로 행하는 유대교인들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에 해당합니다.

 참고로, 당시 이방인(혹은 이교도)들은 나름의 순서를 따라 특정어구들을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자신들의 신으로부터 복을 받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며, 주기적으로 또한 반복적으로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집중한 기도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반복적으로 거리에 서서 행하는 기도를 아무 의미없이 기계적으로 또는 피상적으로 특정어구들을 반복하는 기도로, 이방인들의 기도 빗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소음 또는 기계음에 불과한 유대교인들의 기도를 쓸모없는 기도로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이방인과 동급으로 기도하는 '유대교인의 추태'를 지적합니다.

 관련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이는 청중들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아무것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챙겨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청중들의 필요를 아시므로, (유대교인들처럼)쓸데없이 반복적으로 또는 주기적으로 기도하지 않아야 함을 의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구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단회적으로기도하더라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지 또한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누군가의 기도(=간구)에 전제된 인격적으로 긴밀한 교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의식 또는 절차에 담긴 정서적인 나눔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진솔한 관계 없이, 반복적으로 또한 피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어, 9절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말씀드리면, 9-13절은 흔히, 주기도문으로 불리는데요! 문맥적으로 예수님은 9-13절의 기도문을 주기도문을 중언부언하는 유대교인들의 그것에 대조합니다. 예수님은 9-13절의 기도문을 주기도문을 단순히 암송할 목적으로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 곧, 유대교인들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주기도문을 쓸모 없게 만들 뿐입니다.

또한, 그렇습니다. 문맥적으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9-13절을 통해, 유대교인들과 달리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인들처럼 자신의 필요한 것을 성취하려는 기도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구속사역)를 성취하려는 기도'를 하도록 명령합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였듯, 하나님은 청중들의 현세적 필요한 바를 이미 압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암송되던 카디쉬기도문을 변형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자주 사용하던 기도문으로서,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실제 그들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회당 예배에서 사용한 친숙하고 평범한 기도문이었습니다.

 <카디쉬 기도문 - 유대교인들이 사용하던>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능력으로 창조된

세상 속에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너희의 시대에

그리고 온 이스라엘 집의 시대에

그분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이다.

아멘.

 

먼저,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에서 청중들을 “너희(2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합니다. 이는 문맥적으로 해당 문장에 강세를 주되 청중들(=참된 신앙 공동체)의 기도를 유대교인(=가짜 신앙 공동체)들의 기도와 구분합니다.

 

이어, 본격적으로 기도문이 시작됩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청중들과 다른 하나님의 초월성을 내포하며,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청중들 사이의 친밀함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져 나올 주기도문에 잘 어울리는 ‘하나님에 관한 호칭부터 언급하도록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9-13절까지 제시된 기도들을 드릴 수 있는 근거부터 선언하도록 가르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자들과 청중들을 포함한 우리(=그리스도인들, 참된 신앙인들)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너무나 잘 알며, 또한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심이 많으며, 하늘에 계신 존재로서 무엇이든 줄 수 있습니다.

 이어, 청중들은 무엇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해야 하는데요! 이 문구가 주기도문의 핵심입니다.(중요)

 관련하여,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 자체, , 하나님이 자신들과 관계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단어였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들과 관계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단어를 성별(=거룩하게 구별)하여, 다루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현대의 그저그런 신앙인들 상상하는 이상으로 소중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구속사가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으로 표현(연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현세에 자신들이 원수들로부터 구원받음을 나아가, 내세에 죄로부터 구원받음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속사의 성취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구속사역의 성취를 기도하도록 참으로 기도해야 할 바를 기도하도록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구속사가 현세적으로나 내세적으로나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도록 명령합니다.

 

 이어, 10절입니다.

 10절은 9절을 심화합니다. 관련하여, 2가지 기도가 나오는데요! 이들은 각각의 구문으로 구분되나, 비슷한 의미로서 서로를 보충합니다. ,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2개의 기도(=문구) 하나님의 이름이 현세적으로거룩히 여김 받음을 의도합니다. 2개의 기도는 구속사역의 성취 중 현세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현세에 신앙인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함에 관합니다. 2개의 기도는 “카디쉬기도문 후반부와 비슷하게 구속사역의 성취 중 하나님의 현세적 통치에 관합니다. 실제, 유대인들은 ‘구속사의 현세적 성취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현세적으로 거룩히 여김받게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참고로, 9-10절까지 기도해야 할 바들은 공통적으로 부정과거 형태의 동사와 하나님을 주격으로 하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문법적으로 3인칭 수동형 명령문은 3인칭 주어에게 무엇인가를 행해야 할 자에게 요구되는 적극성 또는 능동성을 전제합니다. , 9-10절까지의 기도들은 기도하는 바에 관한 기도자의 열정적 실천 ‘전제 및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9-10절에 따르면, 청중들은 구속사역의 성취를 기도하되, 특히, 현세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어, 11절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이 1인칭 복수대명사("우리", "우리의")로 흐름을 바꾸며,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는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참으로 기도해야 할 바를 추가합니다. , 유대교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청중들은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며, ‘그것에 상응하는 현세의 사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11절의 에피우시온(=일용할)이라는 단어는 에피에나이(“시작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특별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바로, 장차 맞이할 특별한 순간을 내다보며, '매일 새로이' 준비하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아르톤(=양식, )이라는 단어를 수식하여, 그것을 “장차 맞이할 특별한 순간을 준비하며, 매일 새로이 먹어야 할 양식(=)으로 만듭니다. , ‘일용할 양식으로 번역된 톤 아르톤 톤 에피우시온 단순히 현재의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현재의 배부름을 목적으로 한 먹거리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문맥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세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행동해야 함을 고려하면, 청중들은 매일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식사를 얻고자 기도하되, 그때마다 천국에서 먹게 될 식사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적으로 당장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얻도록 매일 새로이 기도함과 동시에, 내세에 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얻도록 매일 새로이 기도하기를 명령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매일 새로이 현세에 체험할 수 있는 기도를 명령합니다.

 

 이어, 12절입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의로운 기도를 가르침에 있어, 종말론적인 주제를 계속적으로 부각합니다. 예수님은 장차 이루어질 심판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여기서도 현재의 사건이 기도의 핵심대상입니다. , 예수님은 미래를 바라보며, 최후의 심판대를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기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때, “죄지은 자로 번역되는 오페일레마타라는 명사는 1차적으로 빚진 자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빚진 자를 놓아주는 빚짐 당한 자 ‘빚진 자의 빚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받습니다. , 12절에서 예수님은 현재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누군가의 잘못을 보상받을 수 있음을 청중들에게 암시하며, 청중들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도록 격려 및 명령합니다.

 * 관련하여, 추가적인 내용이 14-15절에서 다루어집니다.

 

 이어, 13절입니다.

 13절에 2가지 기도가 나오는데요! 전자와 후자는 종말이 임박한 현세에서 악으로 말미암는 시련이 청중들에게 불가피하며, 청중들이 그것로부터의 보호를 간구해야 함을 의도합니다. ,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 주어질 시련과 보호에 관해 기도하도록 명령합니다.

 먼저, 청중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전자)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사용된 페이라스모스라는 명사는 문맥에 따라, 2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문맥에 따라, “유혹또는 시험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됩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죄가 수반될 수 있으되, 유혹은 부정적인 문구에 주로 적용되고, “시험은 긍정적인 문구에 주로 적용됩니다.

 참고로, 문맥적으로 “페이라스모스 양쪽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청중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잃을 정도의 혹독한 유혹과 시을 겪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이 입박한 현세에 ‘청중들이악으로부터유혹과 시험을당할 것이라전제합니다. 예수님은 전자를 통해, 그것이 유혹이든 시험이든 청중들에게 그것들을 경험하지 않도록 기도하기를 명령합니다.

 또한, 청중들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후자)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관련하여, ‘다만으로 번역된 접속사 알라 전자를 기정사실화하되, 새로이 기도해야 할 바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으로 번역된 투 포네루라는 단어는 문맥적으로 종말의 때에,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로 말미암는 미래의 시련(유혹과 시험)을 불가피한 것으로 선언하되, 장차 그것들이 왔을 때, 그것들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그리하여,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기를 명령합니다. 그렇습니다! 청중들은 신앙을 버려야 할만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도록 기도하고, 안타깝게도 그리 아니하사, 시련이 다가 올 때에, 구원받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현세의 필요에 매몰된 기도와 다르게 말입니다.(중요)

 참고로, 개역개정성경 13절에 괄호를 열고 닫은 구문이 있습니다. 바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이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대부분의 고대 사본에는 이러한 찬송문구가 나타나지 않으며, 특히, 기도문의 누가복음판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11:2-4). , 괄호부분은 마태복음의 가장 처음 원본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초대교회가 주기도문을 예배에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괄호문구가 어느 순간 덧붙은 것 같습니다.

 

 이어, 14-15절입니다.

 예수님은 12절의 타인을 향한 용서에 관한 기도를 심화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하나님의 청중들을 향한 용서와 청중들의 타인을 향한 용서는 연관됩니다. 물론, 이는 ‘청중들의타인을 향한 용서가하나님의청중들을 향한 용서를야기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청중들의 타인을 향한 용서는 하나님의 청중들을 향한 용서를 전제할 뿐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용서체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대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타인에게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결여를 증명합니다. 실로, 큰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자는 큰 용서를 베풀지 못하는 법입니다.그렇게, 예수님은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용서와 그것에 근거하여 남에게 베푸는 용서의 관계를 설명하며,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마땅하다고, 그것이 진정으로 의로운 기도 중 하나라고, 그러한 기도를 해야, 구원받은 자라고, 가르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의 기도는 유대교인들의 그것과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목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기도로 자신의 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과장법 따르면, 그들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은밀한 중에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은 유대교인들과 달리, 중언부언하지 않아야 다른 사람의 눈을 살피느라, 말 같지도 않은 기도를 하지 않아야 반복적으로 주술을 부리듯 또는 하나님께 소음으로 기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집중하여 필요한 만큼 필요한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은 내세에서 경험하게 될 것들을 바라보며, 그와 비슷한 현세의 것들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현세에서 식사를 하거나, 누군가를 용서하며, 내세에 누리게 될 식사와 용서를 ‘현재화해야 합니다.’ , 그들은 천국에서의 식사를 간구하며 현재의 식사를 간구하고, 심판대에서의 용서를 간구하며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포함한 청중들은 종말이 임박한 현세를 바라보며, 악으로 말미암는 시련(유혹과 시험)이 다가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되, 피치 못할 경우, 그것에서 구원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청중들은 유대교인들과 달리, 자신의 필요를 성취하기 위함이 아닌, 진정으로 간구해야 할 바를 , 자신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현세적이고 내세적인 구속사역)의 성취를 기도해야 합니다! 잠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