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신앙 생활(WISE FAITH, 21년 12월호) - 원본 전문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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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신앙 생활(WISE FAITH, 21년 12월호) - 원본 전문 업로드

개혁신학어벤져스 2023. 10. 13. 22:42

 

 

 

 

 

 

 

사속지망 

유지경성 

嗣續之望 有志竟成 

 

신앙을 전수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슬기로운 신앙 생활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의 이야기 

 

 

 

 

 

 

 

 

발  행|2021년 12월 15일 

저  자|장창한, 윤선영, 윤다원, 장봉근, 윤다이, 백승엽, 김은성, 김호남 

편집자, 펴낸이|장창한 

펴낸곳|온고지신 북스 

출판사등록|2021.01.08.(제2021-5호) 

주  소|서울특별시 성북구 솔샘로 4길 18 601호 

전  화|0507-1353-2952 

이메일|changhan3501@daum.net 

 

ISSN|2765-6411 

 

cr-ministry-institute.tistory.com 

ⓒ 온고지신북스 2021 

본 저작물은 각 저자와 온고지신북스의 지적 재산으로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비매품 

        목차 

 

      들어가며 
4  장창한_슬기로운 신앙 생활과 다음 세대(칼럼) 
 
       신학과 목회 - 특집  
10  장창한_부동산에 대한 교부들의 관점(평론) 
26  윤선영_도전(시) 
28  장창한_어린이 슬기로운 신앙 생활(QT) 
 
       인문학과 철학과 일반과학 - 기획연재 
32  윤다원_비극의 결말(문학) 
41  장봉근_치과진료와 치경부마모증(치의학) 
45  윤다이_COVID-19와 일반 독감 백신(약학) 
 
       세계적 변화와 대비 - 집중점검 
47  백승엽_한국개혁교회(장로교회)의 역사(칼럼) 
65  김은성_위드 코로나 사역과 청소년부(칼럼) 
71  김호남_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칼럼) 
 
       나가며 
75  장창한_종교개혁의 최전선, 어린이(칼럼) 

 

 

 

 

 

 

 

 

 

 

 

 

 

 

 

 
들어가며 
슬기로운 신앙 생활과 다음 세대 
장창한 / 열린개혁교회 담임목사 
 
 장창한 목사는 슬기로운 신앙 생활을 지속적으로 출판하고자 노력중이다. 이는 여러 이유 중 한국개혁교회 다음 세대의 성숙한 신앙적 성장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그는 개혁신학적 교부학 연구를 통해 다음 세대에 필요한 신학적 목회적 통찰력을 교부들로부터 얻어, 이를 다음 세대 사역에 총체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먼 미래를 바라보며 준비하기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는 한국개신교회의 50년 후를 바라보며, 착실하게 그 때를 준비하려 한다. 달리 말하면,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는 다음 세대와 다음 세대가 중심이 되어 살아갈 세상에 꼭 필요하되, 특히, 반드시 지금 실행해야 할 사역을 감당하려 한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한국개혁교회의 다음 세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세상에 펼쳐지길 소망한다면, 그는 장기적인 계획을 전제로 현재의 모든 사역을 수립 및 수행해야 한다. 비록, 단기간에 필수적이고 의무적으로 이뤄야 할 성과도 분야별로 또한 경우와 상황에 따라 있을 수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해야 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전제를 토대로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는 재정과 인력을 세밀하고 조직적으로 배치하려 한다. 물론, 그러한 사역의 일환으로 슬기로운 신앙 생활은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알차게 출판될 것이다.  

 슬기로운 신앙 생활은 크게 교단 정치에 필요한 제언, 다음 세대 목회 기록, 개혁교회 세계관 중심의 문학, 교회에서의 여성 인권 신장, 신학의 일반 학문 포용, 개혁교회 목회자의 일상과 생각, 가까운 미래의 개혁신학적 지향점 등을 다룰 것이다. 이는 현재 한국개혁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노력하고 집중해야 할 전분야를 아우른다. 비록, 다수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노력과 집중분야들을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말이다.1)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슬기로운 신앙 생활을 통해, 언어적인 또한 문화적인 또한 사회적인 또한 철학적인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개혁신학적 사고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슬기로운 신앙 생활은 한국개신교회 모두에게 일종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특히, 어린이들의 신앙에 있어서 말이다.2) 

 이미, 다들 알다시피, 미래에 한국개혁교회가 한국개신교회와 한국사회에 더 크고 확실한 영향력을 끼치려면, 좋게 말해서 단순히 양적인 교회의 성장을 위한 실용주의적 신학 또는 목회 방법만으로 신앙생활을 장려해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이는 다분히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아니, 이미, 서울의 많은 교회는 실용주의적으로 신학과 목회를 해 온지 수십년이 되었고, 그중의 다수가 그로 말미암아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다. 당장 성도의 수를 늘리거나, 심도 있고 제대로 된 신학발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잔재주를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적 목회에 집중했을 때, 그것에 대해 가장 높은 효율성을 달성한 대형교회들마저 앞서 언급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타깝게도 교단을 불문하고, 단 하나의 대형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머지 않아, 한국은 인구절벽을 생생히 체험할 것이다. 이는 자명한 일이며, 안타깝고 당연스럽게도 그 안에 한국개신교회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 이대로 한국개신교회가 계속 운영된다면, 향후 10년 후에는 수도권을 제외한 즉, 인구가 집중되는 곳을 제외한 모든 지방은 장담컨대 대예배 하나만을 드리게 될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리드하는 소위 실용주의적 개신교회 지도자들에게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뭔가 새로운 자세와 시도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달리 말해, 그들은 일당백의 어린 그리스도인을 길러내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비록, 당장은 나이가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교회의 예산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규모의 경제를 만들기 위해, 교육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이는 실용주의적 목회의 부산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과거 종교개혁시대에 그리하였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이념을 깨뜨리는 전투에 능한 ‘용사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지혜와 용기가 한국개신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 물론, 꼭 개신교회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 누구더라도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을 각자의 자리와 재능을 바탕으로 적재적소에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는 모든 사역을 일당백의 용사가 되어야 할 또한 그렇게 성장시키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 맞추어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설교 및 주해 시에는 최신 성경해석학적 방법론과 지식들이 충분히 반영되고, 각종 캠페인에는 단순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위드 코로나를 살아가는 세대를 위한 다양한 생각과 사회적 현황들이 모든 성도들의 신앙생활 지도에 고려된다. 이외에도 여러 책에 대한 추천과 동영상 자료들에 관해, 주로 다음 세대를 고려한 짧은 코멘트를 제공한다. 비록, 해당 글을 작성하는 필자가 구체적으로 이를 강조하지 않아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강조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필자는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의 대표로서 많은 고민과 함께 하나하나의 사역을 세밀하게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여러 핵심 축 중에 하나가 바로 슬기로운 신앙 생활이다. 이는 한국개혁교회 다음 세대들을 위해, 가장 개혁신학적 관점으로 만들어진 전천후 신앙분야를 다루는 전문서적이다. 물론, 이는 나아가 한국개신교회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사용되기에 적합하기도 하다. 그렇게,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는 가능한한 철저하게 다각도로 현재 한국개혁교회가 처한 시국을 담담히 헤쳐나가며, 한국개신교회를 섬길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국개혁교회와 그 소속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지원이 매우 필요하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참되고 진실하게 신앙(信仰)하는 것은 어렵다. 시대를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주장을 하거나 특정한 문제나 사안(事案)에 미리 대비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일반 사회보다 교회 안에서 더욱 성취하기 힘들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안에서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유의미하지만 말이다. 

 다른 것도 아닌 신앙적 진리에 관한 대의(大義)를 따르기 위해, 곧, 다음 세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의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말처럼, 종교개혁은 언제나 진행중이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신앙과 신학에 대한 기본 전제이다. 작고 부가적이고 오래된 것들에게 매몰되어, 크고 중요하고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앞으로 더욱 빠르게 변화할 사회에서 지난 수십년의 목회방식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도 힘들다.3) 그것이 실용주의적인 목회방식이든 아니면, 그 어떤 것이더라도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겉으로 보기에, 최신유행을 따르는 듯한 목회방식도 포함될 것이다. 

 다음 세대를 향한 지원과 계획을 철저함과 용감함을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또는 그 누구도 시도할 수 없었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원리를 충실히 따라서, 목회와 신학 현장의 새롭고도 급격한 각종 변화를 제대로 파악해서 말이다. COVID-19 바이러스의 출현 이후, 이미 인류는 역사상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놓여 있다. 

 자랑스럽게도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성취하기 위해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많지 않은 인원임에도 이렇게 소중한 신앙적 인류사적 유산을 남겨감은 그 자체로 미래의 한국개혁교회 다음 세대들에게 그 어떤 기독교 교파와 비교할 수 없는 뽐내고 싶어할만 할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복을 주셔서,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의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지혜와 힘으로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확장해 나가고 있음을 목도함을 고백하며, 앞으로도 그러하길 간절히 기도 및 확신한다.

 

 

 
신학과 목회  
부동산에 대한 교부들의 관점 
장창한 / 열린개혁교회 담임목사 
 
 장창한 목사는 이번에 사회적으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인 부동산에 관해 핵심적으로 짧은 글을 준비했다. 그는 부동산과 관련하여, 가톨릭교회, 정교회 등 다른 기독교회들과 차별화되고 더욱 심도 있는 동시에 성경의 내적 증거에 충실한 논의를 펼친다. 이는 세상에 처음으로 제시되는 부동산에 관한 하나의 짧은 학설이자, 논의가 될 것이다. 

 

 

 항상 존재했던 문제, 부동산의 편중(偏重) 

 토지의 집중화로 인한 문제는 종교개혁교회를 넘어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속에서 개신교회 교부들은 토지로 인해 야기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갈등을 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아마, 이는 빈농문제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빈농은 토지의 집중화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결과물로서 항상 역사 속에서 그 문제가 항상 제기되었다.  

 본고는 빈농문제 또는 토지의 집중화에 관한 개신교회 교부들의 해결방안 또는 접근방법을 짧게 그러나 핵심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만약, 이를 통해 이끌어 낼 수 있는 일련의 논리가 체계적으로 세워지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용된다면, 개혁교회는 최소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적용할 수 있는 적절한 현대적 토지사용방법을 찾은 것이다. 나아가, 이는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사회 전체의 부동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4) 필자는 본고를 통해 그 시발점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안한다. 

 

 개신교회 교부(敎父)들의 토지 임대 및 임차에 대한 관점 – 루터를 중심으로 

 먼저, 개신교회 안에서도 루터파를 정립한 루터는 『고리대금업에 관한 긴 설교』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땅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차액을 남기는 일종의 투기행위를 강하게 비판했다.5) 그는 상당한 부를 전제로 이러한 투기행위를 일삼던 상인들을 강도 또는 도둑이라 표현했다.6) 

 관련하여, 김유준은 루터가 현대판 토지 투기 즉, 부동산 투기를 비판했음을 체계적으로 논증한다. 그는 루터가 토지 투기를 비판함에 있어, 루터가 견지했던 중요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 및 정리한다. 바로, 이는 어떤 노동을 주고 받음에 있어서, 제공자와 수취자 간에 자연스럽게 또한 응당 나누어야 할 타인을 향한 생존과 존엄을 고려하지 않음이다.7) 예를 들어, 수취자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을 힘겹게 구하여 판매하는 제공자의 노고를 고려할 수 있다. 이는 그것의 가격이 얼마로 책정되는가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직관적으로 갖게 되는 마음이다.8) 

 루터 당대의 부동산 또는 토지 투기자들9)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이는 아마 수에서 수십채의 공동주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강남 또는 서초 등10) 당장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소위 양질의 일자리 근처에 아파트 또는 오피스텔 또는 빌라를 다수 소유한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는 루터 당시로 따지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양질의 재화를 생산하는 농토를 농업인에게 세를 주는 자와 동일하다. 그것의 소득을 만들어내는 방법 또는 원리에 있어, 말이다.11) 

 대게 임차인은 자신의 직장과 자녀의 교육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부동산을 임대 또는 구입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실로, 직주근접과 학세권은 현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전세계 모든 현대인들에게 거주지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게 임차인은 어떤 면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값비싼 임대료12)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언제든 포기라는 선택이 가능하기에, 그는 이러한 ‘을(乙)’의 입장을 벗어날 수 있다. 좀 더 경제적으로 쉽고 편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미래에 관한 좋은 선택지를 소위 이번 생애(生涯)에 포기하는 일에 해당한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다. 

 즉, 다수의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들은 을에 해당하는 현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의 심리와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지 않는지,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또는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서 고려해야 할 타인을 향한 생존과 존엄을 고려하지 않고, 이익을 남기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13) 

 실로, 모든 다주택자들은 웬만해서는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임차인의 수고와 희생을 고려하여 임대료를 책정하지 않는다. 대게 그들은 자신의 가정과 사회적 형편을 계산하여, 적절한 수준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임대료를 책정한다. 

 이미 강조하였듯, 루터는 『기독교인들은 모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 토지 투기를 고리대금업과 동일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이며, 그러한 행위로 돈을 버는 사람들을 고리대금업자로 표현한다.14) 관련하여, 루터는 토지 투기로 인해 얻는 차액에 대해, 국가15)가 타인을 향한 생존과 존엄을 위해, 10~20%의 세금을 신설하여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루터가 종교개혁시대에 부동산 투기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그것으로 지나친 이득을 보지 않아야 하며, 그것에 세금을 거두어 다른 평범한 사업활동과 동일하게 개신교회 그리스도인 전체의 생존과 존엄16)에 사용되도록 제안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17) 

 개인적으로 필자는 루터의 제안을 기계적으로 현대에 적용하기 전, 아마 이것을 갖추는 것이 좋을 것이라 예상한다. 바로, 누군가가 신앙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임대인이 개인의 양심에 비추어,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들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남길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모상(模像)’임을 반영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된다면,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들은 현존하는 부동산 문제에 관해 충분히 해결할 방법을 원리적으로 찾아, 실제적으로 그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는 임차인이 일하는 과정에 들인 수고와 희생을 지나치게 뺏지 않아야 한다. 이는 루터의 말처럼 임차인들에게 고리대금(高利貸金)을 행하는 것과 같다.18) 

 그리스도인 다주택자는 임차인에게 자신의 수입활동을 과도하게 전가하지 않아야 한다.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빚을 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구조에 어쩔 수 없이 함몰되는 임차인에게 다시 말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로 말미암아 임차인이 고통을 당할 수 있음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하나님의 모상’으로서 그가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을 권리가 없다. 

 물론, 건전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어, 도박성이 짙은 일로 말미암아 빚을 내게 된 임차인의 경우는 본인의 잘못이 매우 크다. 이는 예외적인 경우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적절한 수준으로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임대해야 함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임대인은 신앙생활을 본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만족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가르치거나 벌주는 상황은 흔하지 않다. 토지 또는 부동산으로 말미암아 임차인에게 부과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지 않아야 한다.19)   

 

 개신교회 교부(敎父)들의 토지 임대 및 임차에 대한 관점 – 크리소스톰을 중심으로 

 크리소스톰이 토지 또는 부동산 투기에 대해 가졌던 관점은 『In Matthaeum Homilia』 61-63에서 잘 드러난다. 관련하여, 김유준은 해당 저작이 AD386~404에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렀던 크리소스톰의 생생한 경험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20)  

 해당 저작에서 크리소스톰은 토지 또는 부동산 투기라는 문제가 생겼던 근본 원인을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아무런 특별한 근거없는 토지를 향한 소유욕(所有慾)으로 다룬다. 관련하여, 크리소스톰에게 토지를 포함하여 무엇인가를 향한 각종 소유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다.21)  

 예를 들어, 당시, 크리소스톰이 활동했던 안디옥에 거주하던 사람의 10%가 부자였으며, 그들은 안디옥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얼마 남지 않은 안디옥의 땅을 소유하고자 했다.22) 이러한 상황은 크리소스톰에게 토지의 소유로 인해 생기는 빈부의 격차와 그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문제를 깊이 또한 생생히 경험하도록 했다.23) 그는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토지 또는 부동산 투기가 즉, 소수에 의한 땅의 독점이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다수24)에게 비참한 삶을 야기함을 처절하게 체험했다.25) 

 이외에, 크리소스톰은 『Peccata Fratrum Non Evulganda』 2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나사로 비유를 설명하되, 해당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부자가 나사로를 비인간적으로 대했음에 주목한다.26) 크리소스톰에 따르면, 부자가 부동산을 얼마나 소유하느냐를 정량적으로 따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대신, 그는 그것과 무관하게 부동산을 어떻게 모으고 사용했느냐가 즉, 얼마나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고려하여 부동산을 모으고 사용했느냐가 부자의 구원과 연관됨을 강조한다.27) 그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으로 즉,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고려하지 않고 토지를 이용해 재산을 늘리는 부자는 내세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28) 

 이때, 다른 교부와 마찬가지로 크리소스톰은 부동산 투기로 인해 피해를 입는 어떤 약한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역시, 이는 강조하였듯 현실적으로 큰 틀에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익의 그리스도인 공동체29) 내의 공유 또는 재분배로 요약할 수 있다. 

 관련하여, 크리소스톰은 사도행전 4:32과 누가복음 16장을 주해 및 인용하며, 비가시적인 교회에 속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의 경제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30) 그에 따르면, 비가시적인 교회는 분명한 하나의 실체다. 이는 실생활에서 어렴풋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항시적으로 또한 체험적으로 일상 가운데에 존재한다. 그 안에서 약한 지체에 대해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하는 지체는 곧, 다른 지체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하는 지체는 존재할 수 없다.31) 

 또한, 크리소스톰은 『De Decem Millium Talentorum Debitore』 4에서 토지 또는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부자들에게 그것의 취득과정에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해치는 예를 들면, 강탈 또는 착복이 없었는지를 노골적으로 질문한다.32) 이때, 크리소스톰에 따르면, 그러한 부동산은 원래의 주인에게 반환되어야 하며,33) 그가 그렇게 행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은 장차 그가 맞이할 최후의 법정에서 그를 살인자로 선언할 것이다.34) 크리소스톰은 부자들의 부동산 투기 행위를 신앙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자기 기만 또는 위선으로 표현하며, 부자들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강도짓 또는 살인을 행했다고 즉,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35) 

 나아가, 크리소스톰은 그것이 로마의 실증법에 따른 합법적 절차를 거쳤다더라도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36) 즉, 그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부동산의 사용과 소유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 사이에 적용되어야하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우선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준다. 교부들은 한결같이 당대의 사회에 만연한 소위,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체계 또는 사회체제에 맞서 싸우며, 오직 성경에 근거한 행동원칙을 토지 또는 부동산 문제해결에 있어 강조했다. 

 

 개신교회 교부(敎父)들의 토지 임대 및 임차에 대한 관점 – 칼빈을 중심으로 

 루터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칼빈도 루터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물론, 루터에 비해 약간 후대를 살았던 칼빈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토지 임대 및 임차에 관해 더욱 발전된 논의를 이끌어 낸다. 바로, 청지기론37)이다. 잘 알려져 있듯, 칼빈은 재세례파와 달리 과도하고 이분법적인 재산의 공유를 주장하지 않았다.38) 그는 개인의 재산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다른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나친 구제와 사유 재산의 공유가 오히려 서로에게 악영향을 일으킨다고 말했다.39) 

 먼저, 칼빈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각각 구분되는 경제적 영역을 신학적으로 설정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상학적인 재산의 불평등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를 도입했다.40) 이는 신학사적으로 최초의 시도이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이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토지를 포함하여 재물을 많이 준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고, 반대로 하나님이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토지를 포함하여 재물을 적게 준 것은 하나님께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41)  

 이를 전제로, 칼빈은 토지 임대를 포함하여 어떠한 종류이든 그것이 전체 그리스도인의 삶에 긍정적인 또는 생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면, 채권인 또는 임대인이 어느 정도의 이자(利子)42) 또는 이득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43) 단, 그는 신명기 24:19-22를 주해하며, 이자를 매김에 있어 추가적인 조건 또는 전제를 단다. 바로, 이는 해당 성경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44) 

 구체적으로 칼빈은 임차로 인해 발생하는 이자가 임차인의 생존과 존엄에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적시했다.45) 이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에 근거하여 토지 임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칼빈의 입장을 대표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요약한다.46) 그는 부동산과 관련된 어떠한 경제활동이든지 그것이 성경을 토대로 특히, 참된 이웃사랑이라는 성경 전체의 핵심주제를 토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학과 목회 
도전 
윤선영 / 동현교회 은퇴전도사 
 
 윤선영 전도사는 은퇴 후에도 항상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녀의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모든 은퇴 목회자들에게 모범과 귀감이다. 이 시는 하나님 앞에 선 그녀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눈물로 대표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아야 할 삶의 방향과 그로 말미암는 삶의 현장에서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 눈 물 > 

- 윤 선 영 ㅡ 

 

주님, 

제게서 눈물을 가져가셨다면 

메마른 세상 목말라 살 수 없었을 것을 

사막 같은 세상에서 영혼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가는 길 어둡고 힘겨울 때에 

두 줄기 눈물 속으로 

당신이 예비한 길이 보이고 

영롱한 진주알 사이로 

천국의 찬란한 광채가 보이나니 

 

기쁨만이 나의 복이 아닌 것은 

눈물은 천국을 더 가까이 보게 하는 

망원렌즈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목회  
어린이 슬기로운 신앙 생활 
장창한 / 열린개혁교회 목사 
 
 장창한 목사는 자립적인 신앙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초등학교 3~4학년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에게 중요한 성경본문을 해석 및 적용하도록 도우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적절하고 체계적이고 올바른 신학을 전제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아름답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아래의 성경본문은 레위기를 올바로 읽기 위한 첫 단추인 부정과 정결에 대해 다루었다.  

 

 

 성경 본문 - 레위기 19:30~37 

 개역개정 

30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3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5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7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제목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요! 

 

 요약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을 기억해야 해요! 그것을 기억한다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지 않고, 노인을 공경하고, 거류민을 학대하지 않고, 공정히 재판과 거래를 행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단어 설명 

공경(32) : 남의 생각과 행동을 받들어 모심. 

거류민(33) : 앞으로 계속 머물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머물다가 가는 사람. 

에바(36) :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자 도구(1에바 = 약 22L), 바구니처럼 생김.  

힌(36) : 액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자 도구(1힌 = 3.6L), 항아리처럼 생김. 

규례(37) : 일정한 규칙,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함. 

법도(37) : 규칙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구체적인 법문(法文)으로 정해진 명령, 역시,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함. 

 

 관찰하기 

 1. 이스라엘이 가져야할 모습은 무엇인가요?(36절) 

1번 친구 : 음흉히 웃으며, “무당과 친해야 해!(말풍선)”를 생각하는 얼굴 

2번 친구 : 짜증을 내며, “노인은 귀찮아!(말풍선)”를 생각하는 얼굴 

3번 친구 : 살짝 미소 지으며, “구원받아서 감사해!(말풍선)”를 생각하는 얼굴 

정답 : 3번 

 

 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음 힌트를 참고하여 알맞은 낱말을 적어보세요(36절). 

 질문 : 나는 너희를 (ㅇㅈㅌㅇㅅ ㅇㄷㅎ 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답 :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생각하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사는 이방인과 다르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구체적인 가르침과 규례를 주셨어요. 첫째, 필요한 것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기 원하셨어요. 둘째,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해서, 노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을 존중하기 원하셨어요. 셋째, 재판이나 상거래를 할 때, 권력이 있거나 힘이 센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기를 원하셨어요. 하나님의 가르침과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해요.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서, 항상 하나님의 가르침과 규례를 지키는 어린이가 되어요! 

 

 느끼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나님의 명령대로 항상 살 수 있음을 보며, 무슨 느낌이 드나요? 

 

 결심하기 

 구원받은 것을 하루 종일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예_ 일일 신앙계획표 만들기, 신앙알람 맞추기), 실천하기로 결심해요. 

 

 기도하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며, 바쁜 생활환경을 정리하게 도와주세요!

 

 

 
인문학과 철학과 일반과학 
비극의 결말 
윤다원 / 열린개혁교회 집사 
 
 윤다원 집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아래의 연재 소설은 현대개혁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복잡한 사회적 개인적 문제와 그것의 적절한 대처법을 섬세하게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과 상황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비극의 결말 2장 

 의성 마씨는 원래 평범한 소작농 집안이었으나 조선 11대 왕인 중종 21년에 당시 선암부락이었던 의성읍 치선리에 마늘 재배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 운명이 달라졌다. 타고난 농부였던 31대 조상들이 본격적으로 마늘농사에 종사하면서 그 일대는 의성 마씨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제대로 자라는 마늘이 없다는 소문이 도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 받았던 밭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고 그렇게 의성 마씨 집안이 대농으로 거듭나기까지는 고작 100년밖이라는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쟁과 침략으로 이름있는 집안들이 풍비박산 나는 동안에도 의성 마씨는 이름 없는 가문으로 어느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은채 조용히 명맥을 이어갔다.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 자식의 성공이었던 시절, 대한민국 전역이 맹모삼천지교를 외치며 이유 막론하고 교육열에 불타던 때에도 의성 마씨 집안만큼은 그 불씨가 비켜간 듯 했다.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자식을 판검사로 키우는 대신 일본 농업학교에 유학을 보내 농업 전문가가 되길 바랐으니까. 이러한 노력 끝에 의성 마씨 집안은 의성토종 마늘로 무병씨마늘 자체 생산 기술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적 지역 특산물 홍보와 상품력으로 승승장구하던 의성 마씨 집안이 별안간 마늘 산업에서 손을 뗀 건 다름 아님 김서라 여사의 남편, 의성 마씨 39대 장손 마덕춘의 의지였다. 처음엔 집안 사람들도 마덕춘의 결정을 탐탁치 않아 했다. 젊은 놈이 부모님 안 계시다고 집안을 자기 멋대로 휘두른다 호통을 치는 어른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유산과 그에 대한 결정권은 마덕춘에게 있었고 그런 마덕춘을 막기 위해 소송까지 불사할 성의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결국 마덕춘의 의지대로 의성 마씨 집안은 마늘 사업과 관련된 모든 걸 정리했다. 그리고 마덕춘은 마늘 사업을 정리한 돈으로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의성 마씨 집안을 거부로 만든 건 사실 마덕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서라 여사가 가지고 있던 어머어마한 재산 또한 마덕춘이 샀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전에 마늘 사업으로 번 돈도 적다고 할 순 없지만 친척들이 들고 일어나 마덕춘을 방해 할 만큼 욕심나는 정도도 아니었다. 다만 마덕춘이 마석진과 마석민을 얻고 난 후부터 땅을 보러 다닌다는 명목으로 사시사철 밖으로 나도는 바람에 김서라 여사가 아들 둘을 홀로 키우며 과부 아닌 과부 생활을 해야 했다는 게 재산증식 과정의 가장 큰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마덕춘이 암으로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식들까지 제쳐두고 김서라 여사에게 모든 재산을 맡긴다는 선언을 했을 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누군가는 소송을 건다고 난리를 쳤고, 누군가는 죽어가는 마덕춘 앞에서 김서라 여사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의성 마씨 집안은 전무후무한 전쟁터가 되었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이 일의 여파로 의성 마씨 집안의 행사란 행사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오직 마덕춘의 39대 직계 가족들만이 조용히 관계를 이어 나갔다. 

 마덕춘의 방랑으로 인한 김서라 여사의 고생을 아는 마덕춘의 형제들은 마덕춘의 결정에 직접적인 토를 달진 않았다. 하지만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서 품어져 나오는 뿌연 연기까지 숨길 순 없었다. 형제들 간에 연락이 뚝 끊기게 된 것도 어쩌면 이때 생긴 그을은 감정이 방아쇠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나마 마석진, 마석민이 살아있을 때는 가끔 안부전화라도 주고 받았지만 두 형제의 비극적인 장례식이 끝난 후엔 그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김서라 여사가 보유하고 있는 재산은 돈으로 따지면 400억에 가까웠다. 따로 재산 관리인을 두었기 때문에 평생 주부로만 살았던 김서라 여사라도 이런 큰 돈을 가지고 있는 게 그리 부담은 아니었다. 마덕춘과 인연이 깊었던 재산관리인이 생전 마덕춘의 부탁대로 최대한 김서라 여사가 신경 쓸 일 없게끔 일을 잘 처리한 덕도 있었고. 거기다 김서라 여사는 태생적으로 사치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가진 부에 비하면 괜한 일에 돈을 쓰는 일도 전혀 없이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상속을 받아 꾸준히 하는 일이라곤 교회에 감사헌금을 내는 것과 지역 아동센터, 그리고 미혼모 센터에 다달이 기부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조차 김서라 여사가 이 정도로 부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물론 마덕춘의 형제들도 김서라 여사의 정확한 재산규모는 알지 못했으나 형제들만이 가진 정보와 감으로 대충 100억대 정도는 되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짐작이 이들을 김서라 여사의 장례식으로 불러 모은 원동력이었다. 

 “아 잠깐만요, 유언을 읽기에 앞서 김서라 여사님이 부탁하신 게 하나 있습니다만, 이 조건을 받아 들이신다고 서명을 해 주셔야 유언을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김한철 변호사는 봉투에서 꺼낸 종이를 다시 바바리 안쪽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뭐가 또 있습니까? 그냥 빨리빨리 좀 진행 하죠.”  

 아까부터 온몸에 쥐가 나는 듯 사지를 뒤틀던 마소영의 아들 한기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김한철 변호사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서류철에 꽂혀 있던 종이를 꺼내 읽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 유언을 가지고 고소, 고발, 소송 등등 그 어떤 법적인 다툼도 일으키지 않겠으며, 혹시라도 약속을 어기고 문제를 일으켰을 시엔 그 문제의 경중에 상관없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썼던 유언의 내용은 완전한 무無가 되고 그에게 할당된 몫 또한 즉시 사회에 환원한다.”  

 한기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니 유언에 무슨 내용이 있길래 그런 조건이 달린 겁니까? 공평하지 않다면 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애초에 큰 어머니 재산은 집안 재산이었던 건데.”  

 한기문은 이영인을 슬쩍 흘겨 보고는 언성을 높였다. 이로 인해 긴장된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하게 변했지만 이에 대해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덕호조차도 괜히 시선을 낮추고 자신의 다리만 연신 주물러 댔다. 김한철 변호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찬찬히 타이르듯 말했다.  

 “저는 김서라 여사님의 유언을 집행하는 집행인일 뿐입니다. 이미 정해진 유언을 바꿀 순 없고요. 여러분이 하실 일은 간단합니다. 여기 동의하시는 분은 서명 하시고,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은 유언을 들을 자격이 안되니 그냥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사람을 3일씩이나 고생시켜 놓고 이제 와서 먼저 사인을 하라니! 이게 무슨 경우야? 나 참 어이가 없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 큰 어머니도 나를, 아니 우리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각서까지… 허!”  

 생각보다 온화하게 나오는 김한철 변호사의 태도에 기가 산 한기문이 이어서 말을 보탰다. 이미 죽은 사람 이름까지 들먹거리며 언성를 높이는 건 누가 봐도 과했지만 그 과함이 상주 방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고인에 대한 예의를 끊어 버리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죄라도 지은 듯 조심조심 유언에 참여하던 사람들의 사심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김한철 변호사에게 한기문의 반응은 유언장 공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소소하고 당연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리고 경험에 비추어 보아 이런 사람은 초장에 기를 꺽어야 앞으로의 진행에 무리가 없었다. 한기문은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꺼내 잠깐 손에 쥐었다가 다시 내려 놓으며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 했다. 습관적으로 꺼낸 담배였지만 아무리 한기문이라도 좁은 상주 방에 있는 모두를 깡그리 무시하고 담배를 피울 정도의 싸가지는 아니었다. 

 “오빠, 사인하기 싫으면 나가. 괜히 시간 끌지 말고.”  

 김한철 변호사가 손쓰기도 전에 한기문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혐오스럽게 쳐다보던 김혜영이 말했다. 마덕호는 한숨을 쉬며 상주 방에 난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한기문이 김혜영을 노려봤다.  

 “하나도 안 변했네. 한 번에 말귀 못 알아 먹는 거. 사인하기 싫으면 나가라고. 나 2시간 뒤에 차 타야 하거든? 시간 없다고.”  

 김혜영은 시계와 한기문을 번갈아 쏘아봤다. 눈살을 찌푸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짙은 다크써클이 더 도드라졌다. 한기문은 너야 말로 오빠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여전하다며 김혜영을 위협하듯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했다. 

 “왜? 돈이 많이 필요한가 보지? 근데 당사지도 아니면서 오빠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큰 어머니가 상속해 줘도 사실 그거 이모 돈 아니야? 아, 오빠 그 사업 때문에 그렇구나? 기영이한테 얘기 들었어. 또 망할 것 같다고 하던데.”  

 한기문은 자기 동생이름까지 거론되자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채 혼자서만 전전긍긍 숨겨왔던 진실이 사촌동생 김혜영의 입에서 나오자 당황한 나머지 불필요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야 말로 큰 어머니 장례식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유언장 공개하는 날 나타난 주제에, 부끄러운 줄 알아! 그리고 한기영? 지나 잘하라 그래. 여태껏 직업도 없이 글이나 쓰는 주제에. 하긴 끼리끼리 논다고 둘이 잘 어울리긴 한다. 능력 없는 것들끼리.”  

 한기문은 괘씸하다는 듯 동생과 김혜영의 사적인 문제들을 공개해 버렸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남의 사생활을 들은 김한철 변호사와 마덕호의 길 잃은 두 눈이 마주쳤다. 김한철 변호사는 안타깝다는 기색이었고, 마덕호는 황당해하는 듯 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어른 앞에서 이게 무슨 행동이냐고 호통을 칠 것 같았던 마덕호는 의외로 아무 말이 없었고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던 이영인이 김혜영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김혜영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얼굴에 비웃음을 띄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영이도 없는 자리에서 자기 동생을 그렇게 말하는 거 창피하지 않아? 그리고 능력없는 것들끼리? 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오빠는 능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마이너스만 시키고 있잖아. 가족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아는 사실이야. 그리고 기영이가 자꾸 받아주니까 자기가 괜찮은 줄 아는가 본데 그거 착각이야. 오빤 돈 때문에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인성이 그 따윈데 돈까지 없어서 사람이 없는 거야. 알기나 똑바로 알아. 언니랑도 그래서 끝난거고. 내 주위에 이혼한 사람 여럿 봤는데 오빠처럼 자식들까지 연락 딱 끊어버리는 게 어디 평범한 건 줄 알아? 그 정도로 당했으면 사람이 좀 교훈을 얻어야지. 성질 좀 죽여.”  

 김혜영이 정확히 한기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한기문은 40대때 아내와의 이혼소송에서 완전히 패한 후 그때부터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 한기문을 찾아 오는 자식은 없었다. 한기문이 명절에나 전화를 하면 마지못해 받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한기문의 최대 약점은 자신과 연을 끊으려 하는 자식들이었다. 한기문의 이상행동의 원인을 계속해서 파 고 들어가다 보면 항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식들이 나왔다. 김혜영의 독설로 한기문은 애써 외면하던 상처가 벌어진 듯 찌릿한 아픔에 숨이 막혔다. 아이들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정신이 반쯤 나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만 바르르 떨 뿐이었다.  

 “어휴, 등신.”  

 김혜영은 누구에게나 들리지만 정작 등신인 당사자에게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혼잣말을 했다.  

 “보다시피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시작하시죠, 변호사님.”  

 김혜영은 자신의 일격에 생각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듯한 한기문을 슬쩍 보고는 아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제가 마덕호씨부터 서류를 돌릴 테니까 사인 하시고 넘겨 주세요.”  

 김한철 변호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일을 재개했다. 그런데 마덕호가 사인을 하다 말고 김한철 변호사에게 만약 사인을 하고도 소송을 걸면 그 돈은 어차피 법에 묶여 버리니 다퉈볼 여지가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김한철 변호사는 미소 띤 얼굴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 소송에 돈이 묶일 일은 없다는 말을 덧붙이며. 변호사의 말을 들은 마덕호는 사인을 마쳤고, 종이는 돌고 돌아 다시 김한철 변호사에게로 돌아왔다. 김한철 변호사는 사인된 종이를 정성스럽게 서류철에 봉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유언장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문학과 철학과 일반과학 
치과진료와 스케일링 
장봉근 / 열린개혁교회 집사 
 
 장봉근 집사는 여러 치과질환에 대한 적절한 진료 및 치료에 관심이 많다. 뿐만 아니라, 관련 학계로의 기여를 통해 소외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것으로 말미암는 희망을 나누려 한다. 특히, 그는 한국전역에 놓인 어려운 상황에 놓인 목회자와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실질적으로 강구 및 준비 중이다. 

 

 

 치경부 마모증이란? 

 아래 사진의 치아에서는 치아와 잇몸이 만나는 부위가 패여 있습니다. 이를 ‘치경부 마모증’이라 합니다. 치아의 목 ‘經’ 부위에 생긴 마모 현상을 뜻합니다. 

 

 

 

 * 치경부 마모증은 어떤 증상이 동반될 수 있나요? 

- 치경부 마모증이 진행되어 치아가 많이 패이면, 신경이 외부 자극에 쉽게 노출 됩니다. 이 경우, 찬 음식을 먹거나 찬 바람에 노출 되면, 치아 시림을 호소하시기도 합니다.  

 

 * 치경부 마모증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 첫 번째 원인은 잘못된 칫솔질입니다. 올바른 칫솔질(아래 사진 참조)은 잇몸에서 치아 방향으로 쓸어가며 손목 회전을 이용해 닦아야 합니다. 하지만, 가로 방향(앞뒤)으로 과도한 힘을 주어 닦을 경우 치경부 마모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 두 번째 원인은 질기고 딱딱한 음식 등을 씹을 때의 과도한 저작력, 이 악물기, 이갈이 등의 습관입니다. 치아는 단단하지만, 씹는 힘과 악무는 힘 역시 매우 강하여, 치아가 미세하지만 휘어지게 됩니다. 치아가 휘어질 때, 취약한 부위인 치경부가 조금씩 깨져나가게 됩니다. 

 

- 이 외에도, 치주 질환으로 잇몸이 내려가 단단한 법랑질로 덮히지 못한 치아 뿌리가 노출 되면, 치아가 패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또한 잦은 탄산음료 등의 섭취는 치아를 부식시켜 치경부 마모증의 발생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 치경부 마모증의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 초기이며 증상이 미미한 경우, 원인을 줄여나감으로써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등도로 진행된 경우, 패인 부분을 레진이나 글래스 아이오노머(GI)를 이용해 수복하게 됩니다. 레진은 글래스 아이오노머 보다 치아 색상에 가까워 심미적입니다.  심한 경우, 신경치료 및 크라운 보철 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치경부 마모증이 심한 치아를 지속적으로 방치한다면, 치경부에서 치아가 부러져 치아 뿌리만 남게 될 수 있으니 적절한 치료가 꼭 필요합니다. 

 

- 레진이나 글래스 아이오노머 등의 수복치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원인을 제거해주는 것이 재발을 줄여주는 핵심입니다. 만약 치경부 마모증의 원인이 잘못된 칫솔질이었다면, 올바른 칫솔질로 바꾸어야합니다. 또한, 부드러운 칫솔모로 교체하고 치약도 연마력이 약하거나 지각둔화제가 포함된 시린이 전용 치약 사용을 권장합니다. 만약 치경부 마모증의 원인이 과도한 저작력, 이 악물기, 이갈이 등이었다면, 이러한 악습관을 없애기 위한 노력, 이갈이 장치 등의 치료가 동반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치아에 작용하는 유해한 힘을 줄여주도록 해야 합니다. 추가적으로 치주 질환의 치료 및 치아를 부식시킬 수 있는 음식 섭취를 제한하는 것도 부가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은 치경부 마모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찬 것에 치아가 시리거나 치아가 패이셨다면, 치경부 마모증인지 확인 받으시고 적절한 상담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잘못된 칫솔질과 생활습관 개선이 치경부 마모증의 재발 방지에 중요함을 잊지 마세요.

 

 

 

 
인문학과 철학과 일반과학 
COVID-19와 일반 독감 백신 
윤다이 / 열린개혁교회 담임목사 사모 
 
 윤다이 사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어머니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녀는 자녀에게 좋은 신앙인으로 기억되기 위해, 늘 자녀와의 성숙한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자녀와의 대화와 함께 함은 그녀에게 가장 큰 감사와 기쁨이다. 매일 항상 자녀를 사랑하고 아끼며 배려하는 모습은 남편에게 늘 귀감이 된다고 한다. 

 

 

 COVID-19와 일반 독감 백신 

- 올해 독감에 걸렸다가 나았는데, 독감 백신을 꼭 맞아야 하나요? 

 

 올해는 맞아야 하는 백신이 참 많죠? 코로나 백신도 기본 2회 접종에 지금은 추가 접종하라고 하고(21.12.15. 기준 3차 접종), 겨울이니 독감백신도 맞아야 하고, 올 겨울은 주사만 맞다가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독감에 걸렸다가 나으셨나요? 독감 걸렸었는데 굳이 백신을 맞아야 하나 고민되시나요? 

 독감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경우, 해당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은 획득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매년 유행하는 독감 바이러스가 한가지 종류가 아닙니다. 또 다른 종류의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될 경우 다시 아플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매년 접종하는 독감 백신은 3가지 또는 4가지 바이러스에 대한 항원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올해 독감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더라도 다른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위험은 여전히 있기 때문에, 백신의 접종을 권장합니다.  

 혹시 이전에 독감 백신 접종 후 독감 유사 증상이 나타났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혹시 백신에 맞아서 독감에 걸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셨던 경우가 있으신가요? 

 결론적으로 백신이 바이러스 감염을 유발할 수 없습니다. 생백신이라고 약하게 만든 바이러스를 주사하여 면역력을 얻게 하는 백신의 경우에도, 백신으로 인한 감염의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독감 백신 접종 후 발열이나 근육통 등의 독감 유사 증상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있으신데요. 이는 면역 반응이 유도되면서 발생하는 전신 이상반응으로 대부분 특별한 치료 없이 수 일 내에 호전됩니다. 면역반응이 일어나 몸이 항체를 생성하고 있다는 의미죠.  

 요즘 같이 많은 질병이 유행할 때에, 백신으로 먼저 몸에 항체를 만들고 건강을 지키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감염성 질병은 걸리면 본인도 아프지만 가족들에게 병을 옮길 수 있기 때문이죠. 궁금한 점은 예방접종 시 의사 선생님께 편히 여쭤보시고 맘편히 백신 접종하시고 건강하게 올 겨울도 보내시길 바랍니다.

 

 

 
세계적 변화와 대비 
한국개혁교회(장로교회)의 역사 
백승엽 / 부산시민교회 부목사 
 
 백승엽 목사는 따뜻한 사랑과 진심을 가진 목회자다. 그는 올바른 신학과 신앙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겸손하게 매일 기도한다. 그의 실천적인 신앙은 그가 만나는 모든 성도들과 한국개혁교회 목회자들에게 도전과 귀감이 된다. 그는 하루 종일 하나님과 만나는 삶을 귀하게 여기며, 매일 더욱 깊이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 

 

 

 한국장로교회 교단의 시작과 분열의 역사 

 1.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시작 

 한국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개신교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전파된 것은 1895년이 되어서입니다. 이전에도 한국(당시는 조선)에는 여러 경로에 의해서 서구의 개신교 신자들이 발을 디뎠으며, 또한 개신교의 선교사가 들르기도 했고, 한국 땅에 와서 죽음을 당한 선교사도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이미 나라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만, 이 모두는 그리스도교의 종교가 아직 국가에 의해서 폐쇄되어 있던 때의 경우였습니다.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허용이 된 때는 1883년에 있은 영국과 독일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입니다. 이 조약문에는 비록 지정된 거주지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종교의식을 집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86년에 불란서와 맺은 수호조약에는 그들이 믿는 종교를 전할 수 있는 자유로 해석될 수 있는 ‘교회’(敎誨; 잘 가르치고 타일러서 지난 날의 잘못을 깨우치게 한다는 뜻)라는 문구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1884년 9월 22일에 알렌(Horace N. Allen)이 아직은 서양 종교를 경계하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들을 처형하는 법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서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서 의료선교사로 들어와 활동을 하고 있었고, 1885년 6월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한국 의료선교사로 임명한 헤론(W.J. Heron)이 들어와 협력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1885년 9월 20일에 북 장로교회로 불리우는 미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선교부로부터 직접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파송 받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가 한국에 공식적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들어옴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비로소 자유롭게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미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부부도 언더우드 목사와 동행하여 함께 입국을 했었으나, 당시 한국의 상황이 두 해 전인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신변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타고 왔던 배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6월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북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에 의해서 미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되고 서울을 중심으로 의료, 교육 활동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복음 전파가 시작되고, 또한 그리스도인을 얻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장로교회에 국한하여서 보게 될 경우, 언더우드 목사는 복음을 전파한지 1년 남짓이 되는 1886년 7월 24일에서야 첫 신자로 노도사(본명은 노춘경)를 얻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솔내(소래)에 있는 솔내교회(또는 소래교회;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1884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교회)에서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편지를 받고 그곳을 방문하여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솔내교회는 그 다음 해에도 7명이 세례를 받아 10명의 세례 교인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에는 장로교회의 경우 미 북 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에 의한 복음 전파의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언더우드 목사의 입국이 있은 후에도 그 뒤를 따라 입국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 미 남 장로교회 선교사, 캐타다 장로교회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의 활동으로 장로교회의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한 초기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는 교단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점차 그 필요성이 점차 대두가 되었습니다. 먼저는, 선교사(목사)의 활동에 있어서 서로 연합하여 회의를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되어 협의기관을 만들었습니다. 헤론 부부(의료선교사)에 의해서 조직된 '미국 북장로회선교회'가 있었으며, 그리고 후에 각 교파에 속한 여러 선교사들이 계속 파송되어 들어오게 됨에 따라 이들이 갖고 있는 선교회의 선교 활동에 있어서 서로 마찰과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 등의 낭비를 줄일 필요성을 갖고 상호협의를 하고자 해서 선교사들 사이에 협의체가 구성이 되었는데, 먼저 장로교 선교사들 사이에 협의체가 구성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회 선교회인 빅토리아 선교회가 조직한 '장로회선교연합공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 남북 양장로교회 선교회가 조직한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인 총대가 참가하게 되면서 영어만이 아니라 조선어를 쓰는 회(會)가 필요하므로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교회가 교단으로서 오늘날의 교단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독노회’가 조직됨으로써 입니다. 장로교회는 1907년에 한국에 장로교회가 들어온 지 23년 만에 한국장로교회로서는 첫 조직이 되는 조선전국독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것은 장로교회가 정식 노회의 형태를 갖춘 장로교회 교단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에 장로교회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장로교회 교단이 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된 것은 1907년이지만, 신학교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오고 있었습니다. 장로교회 최초의 신학교가 되는 평양신학교는 1901년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평양신학교의 토대가 되는 신학교육이 1890년부터 행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1890년 가을부터 ‘신학반’(Theological Class)이라는 이름으로 언더우드의 집 사랑방에서 신학교육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좀 더 체계적인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서 1900년 마펫 선교사의 제안에 따라 당시의 장로교선교공의회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01년 평양에서 오늘날 평양신학교(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로 불리우는 장로교회 신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장로교회 신학교가 되는 평양신학교는 장로교회가 신자를 얻고 목회자로 육성하는 일을 위해서 장로교회의 교단이 되는 독노회가 조직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옴으로써 사실상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그리고 또한 교단과 더불어 함께 항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 9월 30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해 일제에 의한 강압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자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신학 또는 고등교육을 받은 신학자들이 1940년 4월 19일 서울에 조선신학교(설립자 김대현)를 세웠습니다. 이 조선신학교는 해방 이후인 1946년 6월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로 승인을 받고 고려신학교가 세워질 때까지 장로회 총회의 유일한 신학교로, 그리고 이후로는 고려신학교의 인허와 인허 취소가 거듭되는 가운데서 총회 인준을 받은 유일한 신학교로 있어 왔습니다. 

 

 2.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분열 역사 

 그런데 장로교회 교단과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신학교는 분열의 역사를 걷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1911년 대구 남문안교회에서 모인 제5회 독노회에서 다음해인 1912년에 7대리회(代理會)를 7노회(老會)로 승격시켜 노회를 조직하여 총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황해노회, 전라노회, 경충노회, 경상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함경노회 7개 노회를 조직하고 총회의 모습을 갖춤으로써 그해 9월에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로 제1회 총회로 모여 마침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되는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분열의 역사를 가지면서 많은 교단의 분파를 이루게 됩니다. 

 

 1차 분열 : 예장 총회측과 고신측의 분열 

 

 한국교회에서 장로교회의 첫 분열인 1차 분열은 1951년에 있었습니다. 장로교회는 일제 치하를 거쳐 6.25사변 속에서 교회 재건에 힘을 씁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협력하여 신사 참배 가결에 협력한 자들과 그렇지 않고 신사 참배를 거부한 자들과의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함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옥한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던 자의 권징을 요구하며 대립하여 있는 상태에서 보수적인 장로교회 신학교로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할 것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고 경남노회의 지지 속에서 1946년 7월 제47회 임시노회에서 고려신학교의 인가를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재건운동에 반대하는 자들은 12월에 가진 경남노회 정기노회(제48회)에서 다수의 회원을 확보하여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경남노회는 앞서 결정한 고려신학교의 인허를 취소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고 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경남지역의 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제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측과 그 반대측이 대립하는 혼란 속에 있었는데, 이러한 중에 고려신학교는 전 평양신학교 학생 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박형룡 목사가 귀국하여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47년 12월의 경남노회 제49회 정기노회에서 한상동 목사가 탈퇴 선언을 취소함으로 노회와 고려신학교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운영 체제 방식에 있어서 전국적인 노회와 교회의 지지를 받는 총회신학교를 염두에 둔 박형룡 목사에 반하여 한상동 목사는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회와 독립장로교 선교회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신학교를 총회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으므로 이견의 충돌이 생기자 박형룡 목사는 교장직을 고신에서 이탈하여 서울에서 중도보수주의자들과 함께 1948년 5월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고려신학교는 제2대 교장으로 박윤선 목사가 6월에 취임하였습니다. 이에 박형룡 목사와 박윤선 목사가 각각 교장으로 있는 ‘장로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그리고 김재준 목사가 중심으로 있는 조선신학교까지 해서 모두 세 개의 신학교 체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박형룡 목사가 없는 고려신학교는 1948년 9월 경남노회 제49회 임시노회에서 김길창 목사의 주도 하에 다시 한번 인허가 취소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경남노회 제50회 정기노회에서 한상동 목사의 제명동의에 의해 김길창 목사가 제명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는 1949년 3월 8일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신앙과 신조가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장로교회 노회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로서 첫 번째,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로서 첫 번째로 가진 분열 역사입니다. 비록 이 분열은 총회의 분열에 의한 교단의 분열이 아닌 노회가 분열을 겪은 것이지만, 이것은 이 분열로 해서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의 역사를 걷고, 또한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장로교회의 교단에서 계속적으로 분열을 갖는 시발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1950년 4월의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다루는 전권을 맡은 총회 특별위원회가 경남노회를 3분(分)함으로써 5월에 경남노회는 모두 5개의 노회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1951년 3월에 개최된 제36회 총회에서 특별위원회가 경남 산분노회파와 중간파를 통합하여 새로운 경남노회를 조직한 별노회를 승인하고 거기서 선출한 총대를 받아들임으로 소위 경남노회(법통)은 여기에 반발하여 불참하였습니다. 그러자 5월에 속회된 총회에서 새로 조직된 경남노회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경남노회(법통) 총대는 배제함으로써 경남노회(법통)을 축출하였습니다. 그리고 1952년 4월에 개최된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에서 경남노회(법통) 총대권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신학과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 경남노회(법통)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남노회(법통)는 따로이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법통노회’라고 하였는데, 이들을 일명 ‘고려파’ 또는 ‘고려파장로회’ 라고 부릅니다. 소위 고려파는 1952년 9월 제1회 총회를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하고 독립 총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고려파는 그 후 전국에서 고려파를 지지하는 교회들과 연합하여 1956년 4월 제5회 총노회에서 총노회를 6개 노회를 둔 총회로 개편할 것을 결의함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려)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고려측으로 양분되어 두 개의 장로교회 총회, 곧 두 개의 장로교회 교단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려파장로회인 고려측은 고려신학교를 두고 있었으므로 ‘고신측’으로도 불려지며, 지금에는 ‘고신측’이라고만 불려지는데 이는 고려파장로회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이후 ‘고신측’으로 통일함). 이것이 장로교회 교단의 1차 분열입니다. 

 

 2차 분열 : 예장 총회측과 기장측의 분열 

 장로교회 교단의 두 번째 분열은 장로교회 총회 인준을 받은 조선신학교의 분열로 인해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한번 분열을 경험한 장로교회는 새롭게 총회를 구성한지 1년 만에 다시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해서 세워진 조선신학교는 총회 인준 신학교이지만 ‘신신학’인 자유주의 신학노선이 가르쳐지고 있는 반면에 총회 산하의 교단 목사는 보수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학 사상과 노선 논쟁으로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47년 4월 대구 총회에서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김재준, 송창근 교수 등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문제 삼아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조선신학교가 고등비평에 입각하여 성서절대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면서“ 서울에 새로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함으로 총회는 보수 신학의 교수를 목적으로 1948년에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19468년에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의 제안에 의해서 설립된 고려신학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총회 안에는 모두 세 개의 신학교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고려파에 의하여 고려신학교가 분리되어 나갔지만 그래도 한 총회 안에 두 개의 신학교가 존재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총회에 큰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총회 안에 신학 사상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신학교가 존재하므로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나 두 신학교 사이에 갈등의 큰 골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총회는 두 신학교를 해결하고자 1951년 5월 제36회 총회에서 두 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의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결정에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이에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는 김재준 목사를 제명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학생은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조선신학교 출신의 영향력이 강한 경기노회가 1952년 5월 노회에서 총회의 불법 결의를 부인한다는 성명을 내고, 동년 9월에는 대구에서 조선신학교측을 지지하는 신자들이 호헌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는 제36, 37회 총회의 결의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면서 김재준 목사의 파면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선신학교측은 1953년 6월 조선신학교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개최하고 교단과 단절함으로써 교단과 완전히 분열하였습니다. 그리고 1954년 6월에는 교단 명칭을 일명 ‘기장측’으로 불리우는 ‘대한기독교장로회’(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바뀜)로 명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장로교회 교단의 2차 분열이며, 조선신학교는 ‘기장측’ 총회신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기장측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측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와 ‘고려파측 신학교인 ’고려신학교‘와 함께 각각 장로교회 교단의 신학교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3차 분열 : 합동과 통합의 분열 

 장로교회(총회측)는 고려파측과 기장측이 분열되어 나가는 분열의 역사를 겪었으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시 1959년에 분열하였습니다. 이때의 총회측 교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격의 목사와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 세계복음주의친교회)에 참여하는 보수적 성격의 목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NAE측의 목사는 WCC가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기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항하여 당시 총회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목사가 학교부지구입을 부정 지출하여 사기당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을 빌미로 WCC측 목사는 박형룡 교장의 면직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NAE측 목사는 박형룡 목사가 학교를 위하여 일하다 생긴 실수라며 일축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1958년 제43회 총회는 박형룡 목사의 교장 사임을 결정함으로써 마무리 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두 파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다가 1959년 제44회 총회에 파송할 총회 대표 선출 문제로 경기노회가 갈라짐으로써 교단 분열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59년 5월에 열린 경기노회에서 뽑은 총대 선거에 부정이 있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같은 해 6월에 임시 노회를 열어 새로 총대를 선출하였는데, 5월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NAE측의 목사가 많았으나 임시노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총대는 WCC측의 목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총대 명단이 1959년 9월 대전 총회에 동시에 제출되었는데 어느 쪽의 총대를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총회장 선출을 비롯한 영향을 받게 되는 결정이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로 대립하여 물러서지 않는 격렬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총회는 11월 2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를 하였는데,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목사들이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해서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을 연동측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WCC측 목사들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승동교회에서 속회를 목사들은 승동측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NAE측 목사로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할 것”을 가결했습니다. 이 일로 서로 다른 각각의 총회를 속회하므로 승동측과 연동측의 총회로 분열되고, 이 둘은 1960년 총회부터는 완전히 서로 다른 교단으로 분열되어, 승동측인 NAE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일명 보수파, 또는 NAE 복음주의 동지회파 라고도 함)으로, 연동측인 WCC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일명 진리파 라고도 함)으로 각각 불려 졌습니다. 

 특히, 승동측이 합동측으로 불려지게 된 데는 고신측과 1960년 합동한데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고신측은 승동측과의 합동으로 양측간의 학교를 통합하는 일로 인해서 고려신학교를 폐합하고 서울 총회신학교(장로회신학교)로 옮기게 한데 대한 반발과 갈등으로 1963년 9월에 승동측과 갈라져 환원함으로(교단의 환원으로 고신측은 ‘환원파’라고도 불리운다) , 남은 승동측은 합동측으로 불려진 대로 그대로 ‘합동측’으로 계속 불려 졌습니다. 그리고 총회의 분열에 의한 교단 분열은 신학교의 분열도 가져와 합동측 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신학교’로 통합측 신학교는 흔히 ‘장신측 총회신학교’로 불려지는 ‘광나루 총회신학교’로 각각 존재해 왔습니다. 

 장로교회 교단이 이렇게 됨으로써 교단에 속한 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신학교, 장신측 총회신학교, 고려신학교, 조선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가 1957년 교회당 소송 문제에 대한 반대를 제기하고 교장직을 사표낸 후 떠나 서울에서 ‘개혁신학원’을 세웠으나 그해 9월에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복귀를 하였습니다. 

 

 4차 분열 : 합동(예장총회 승동측 및 고신측의 합동)과 대신의 분열 

 예장총회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하여 ‘합동측’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 교단에 있는 목사들이 1961년에 분리되어 나가서 예장총회 성경장로회를 세움으로 합동측은 분열을 겪었습니다. 에장총회 성경장로회는 김치선 목사가 중심으로 있는데, 김치선 목사는 1948년 8월 남대문교회 안에 야간 신학교로 대한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생을 양성하여 오고 있었다가 미국의 성경장로회 선교회의 지원 속에서 1960년 9월에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창립하고, 1961년에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독자적인 장로교회 총회를 형성함으로써 대신측 교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교단 총회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성장측; 성경장로회를 줄인 말)으로 변경했다가 1971년 제7회 총회에서 다시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대신측으로 불리우는 이 교단 총회는 대한신학교를 총회 인준 신학교로 두고서 신학생을 양성 배출하였습니다. 현재는 총회 인준 신학교로 여러 학교를 두고 있는데, 대한신학교(대신총회신학연구원)를 비롯하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안양대신대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장총회 대신측도 1992년에 분열하여 각각 주류측과 비주류측으로 존재해 오고 있으며, 비주류측도 독자적으로 대한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5차 분열 : 합동(예장총회 승동측 및 고신측의 합동)과 호헌의 분열 

 WCC를 반대하는 목사들은 숭동교회에서 교단의 활동을 위하여 NAE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하여 일명 '합동측'으로 이어 오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1962년 9월 제47회 총회 때 다시 총회가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합동측 그대로 ,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호헌총회로 명칭을 달리하게 됨으로써 합동과 호헌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합동측과 분열한 호헌총회는 총회 직영 신학교로 호헌총회 평양신학교를 두었으며, 1978년 63회 총회에서 일명 호헌총신으로 불리우는 ‘호헌총회신학교’로 학교 이름을 바꿨습니다. 

  

 6차 분열 : 합동(예장총회 승동측)과 고신의 재분열 

 (1) 합동과 고신의 재분열 

 장로교회 총회측이 승동측(합동)과 연동측(통합)으로 분열한 후 앞서 언급한대로 승동측은 고신측과 1960년에 합동하여 예장총회 ‘합동측’으로 있었으나 1963년에 고신측이 탈퇴하여 환원함으로써 합동측은 전(前) 예장총회 승동측만 남게 됨으로써 예장총회(합동)로부터 고신이 재분열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2) 고신과 ‘반고소 고려파’의 분열 

 예장 고신은 승동측으로 불리우는 합동측과 합동하여 일시적으로 ‘합동측’으로 있었으나 여기서 다시 분열하여 고신측으로 환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환원 후 고신은 교단의 교권주의와 고신대학교 문제로 분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한상동 목사가 계속해서 총회장을 맡아 고신 총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교권주의에 대한 반발과 고려신대학교의 재산권 문제에 의한 정치적인 싸움으로 인해서 입니다. 이 일로 고신은 환원파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다가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석원태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서 고신측을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세웠는데 그 교단이 ‘반고소 고려파’로 불리우는 ‘고려측’입니다. 

 

 7차 분열 : 합동과 합동보수의 분열 

 (1) 합동(주류)과 합동보수(비주류)의 분열 

 승동측(합동측)과 연동측(통합측)으로 분열을 겪었던 예장총회(예장총회 잔류파 승동측)는 고신측과 합동을 했었으나, 고신측이 환원함으로 합동측으로 남게 된 장로교회 교단이 되었는데, 복음의 이해와 성경 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진보적인 신학 사상의 성격을 띠는 합동진보측으로 인해서 보수적인 신학 사상의 성격을 띠는 합동보수측간에 의견 대립과 충돌이 있게 되어 1979년 9월 대구 총회에서 합동진보측이 합동보수측을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합동보수측은 대구 은일교회에서 별도의 총회를 개최함으로 합동측은 다시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교단의 세력을 장악한 파와 여기에 반발하는 소외된 파 간의 세력 투쟁이 원인입니다. 한상동 목사와 그 이후 정규오 목사로 이어지는 교권의 실세에 대해 이영수 목사를 비롯하여 소외되어 있던 자들이 힘을 합쳐 교단의 세력을 장악함으로 인해서 정규오 목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비주류’를 형성하여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독자적인 총회를 이루었습니다. 

 이 합동 비주류의 총회를 ‘합동보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영수 목사의 남은 계열의 합동 주류측은 그대로 ‘합동’이라고 부릅니다. 합동보수측은 홍은동에 교단 총회의 소재로 두고서 그곳에 ‘홍은개혁신학연구원’을 세웠습니다. 홍은개혁신학연구원의 설립으로 장로교회 교단 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신학교(후에 사당동 총회신학대학교로 바뀜), 장신측 총회신학교(후에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바뀜), 고신측 고려신학교(후에 고신대학교로 바뀜), 기장측 조선신학교(후에 한신대학교로 바뀜), 홍은개혁신학연구원, 호헌총회의 호헌총회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2) 합동보수(합동 비주류)와 합동개혁의 분열 

 장로교회 총회측이 합동 주류측인 합동측과 합동 비주류측인 합동보수측으로 분열된 뒤인 2년 후에 비주류측인 합동보수는 다시 그 안에서 내부적인 분열을 보여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보수측‘(현재 홍은동 소재 총회)과 호남세를 중심으로 한 '합동 개혁측'으로 분열됩니다. 

 

 (3) 합동보수(합동 비주류)와 기타 교단의 분열 

 합동보수인 합동 비주류측은 합동개혁과의 분열을 가진 후에도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함에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 교단은 합동, 통합, 고신, 대신, 기장, 호헌, 개혁, 합동보수 외에 수많은 교단을 형성하여 오늘날에는 장로교회 교단만도 80여개 교단이 넘는 실정에 이르러 있으며(이 숫자는 전에 한 글에서 본 것이며 그 후 더 많은 장로교회 교단이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장로교회 교단의 숫자는 전보다 더 많은 그 이상일 수 있다), 그에 따라서 교단의 총회 직영 신학교 이름도 그 수만큼이나 많게 되어 소위 군소교단 신학교가 양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8차 분열 : 합동과 합신의 분열 

 예장총회 합동(주류)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견지하는 중에서 거듭되는 분열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또 다시 분열하는 사태를 맞이했다. 그것은 교권주의자들의 간섭을 거부하고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할 것을 이유로 하는 목사들이 박윤선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1980년에 설립 개교한 합동신학원(지금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총회를 소집할 것을 합의하고 1981년 9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총회를 소집함(제66회 총회로 소집)으로써 예장총회 합동은 일명 ‘합신’과의 분열을 겪었습니다. 

 

 3.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분열 이유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 교단의 분열 역사와 그와 함께 하는 신학교의 분열 역사를 보았습니다. 신학교는 교단 총회의 존재와 함께 따르기 때문에 장로교회 교단 수만큼이나 거기에 속한 신학교의 수도 존재를 합니다. 그러기에 님이 알고 있는 고신, 총신, 장신, 대신, 합신의 교단(신학교) 이름은 한국 장로교회 교단 중에서 대체적으로는 전국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것인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는 교단의 교세가 크건 작건 간에 교단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각 교단은 교단의 실질적인 정체성을 떠나 교단의 세력과 그 확장을 위해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교단이 이렇게 자주, 그리고 또한 많이 분열하게 된 분열 역사에 대하여 이를 평가하는 분들은 분열 초래의 이유를 많은 복합적인 원인들에서 찾으며 이것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그러한 것을 크게 보면 다음의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일제의 신사 참배 동의자와 거부자 간에 생긴 신학 사상의 노선 이해 관계는 이후 이것이 종자 씨의 역할을 하여서 교단의 분열에서는 항상 진리와 비진리, 진보와 보수, 법과 은혜로 양분되는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사실상 근본적인 이유는 교단 내에서의 목사들 간에 갖는 정치적이고 이해 계산적인 세력에 의한 싸움의 투쟁에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교단과 신학교는 오랜 세월 속에서 많은 분열의 역사를 가지는 것 속에서 각 교단과 신학교의 정체성을 가지고서 존재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자세하고도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 한국의 장로교단들 특히 군소교단들은 매년 가을 총회만 되면 총회에서 감투싸움 하다가 하나의 총회가 두개 세개로 분열을 거듭했다. 그래서 현재는 장로교단 총회만 300이 넘는다고 한다. 지난 9월에도 대형교단으로 알려진 대신백석 총회가 백석과 대신백석 총회로 분열했다.

 

 

 
세계적 변화와 대비 
위드 코로나 사역과 청소년부 
김은성 / 주님기쁨의교회 교육목사 
 
 김은성 목사는 서울의 중심 중 하나인 잠실 지역에서 청소년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성도들과의 진심어린 교제와 함께하는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모든 사역의 핵심 요소로 둔다.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공존하는 시대와 장소에서 어렵지만 정직하고 탄탄하게 청소년 사역을 감당하는 것으로 행복해 한다. 다음 세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역자로서 장래가 기대된다. 

 

 

 위드 코로나 사역을 하며 

잠실에서의 사역이 어느 덧 1년이 되어간다. 코로나로 인하여 대면예배의 부재가 심하였고, 사역자와 선생님들 모두가 지쳐갔다. 코로나가 일상이 되어버려 마음 속 깊은 곳 까지 매너리즘이 뿌리를 내렸으며 아이들의 영적 상태는 침체와 게으름 그리고 알 수 없는 묵직한 무엇인가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여름 수련회라는 큰 강을 건넌 이후, 열악한 방송 시스템과 질서 와 체계가 없는 교회 내부적인 문제들까지 겹치다 보니 사역의 방향성을 잡아가기는 커녕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어쩌다 이 지 경까지 오게되었나.. 안그래도 건강하지 못한 토양에서 우여곡절이 많은 곳인데, 이제는 어찌할 도 리가 없어 망연자실한 모습만 얼굴에 가득하다. 

 1인 5역 이상을 맡아 사역을 하다보니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만 가고, 행여나 일이 그릇되면 성도들의 불만섞인 언성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곧장 담임목사님에게로 보고가 된다. 나와 사이가 좋았던 목사님은 이전까지 내가 얘기했던 교회의 어려움, 사역의 어려움을 그새 잊어버리셨는지 성도들의 단편적인 말만 듣고 노발대발하셨다. 이해는 되지만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기도 하다. 상반기 사역에서도 사역의 시발점을 찾지 못하여 목사님과 대면했던 적이 있었다. 찬양 도 심방도 예배도 어느 하나 온전히 준비된 것이 없었다. 이 정도 상태일 줄이야.. 어려운 것은 들었 지만 이렇게 열악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믿음으로 달려왔건만, 남은 기간 사역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하반기 사역도 결국 고민만 하고, 끙끙댄 채 코로나를 핑계로 하며 상반기 사역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목사님의 호출과 동시에 2시간 가량의 긴 대화가 이 어졌고, 결국 이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이 교회다’라는 공식이 성립된 채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이다. 어떠한 사물과 사 람도 이를 대신할 수도 대신할 자격도 없다. 주인되시고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도구를 통하여서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준비 되어야 하고, 교사와 스탭까지 동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력과 장비의 준비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조치 없이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고 있다가는 상반기 사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여 목사님께 1가지 제안을 했다. “찬양팀을 구성해주십시오. 저희 고등부 재정을 털어서 라도 할 터이니 허락해주십시오” 8개월 가량 씨름해왔던 부분이다. 고등부 재정의 절반을 보태고 목사님이 절반(오병이어 계좌)을 후원해주시는 것으로 회의는 종결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고등부의 찬양팀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뒤로, 실용음악과를 전공하는 청년을 찾아가 부탁을 하였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전공자 4명을 섭외할 수 있었다. 백석예술대학 실용음악과 1학년 학생들이며 사례를 중요시하기보단 자신들만의 팀을 꾸려 섬길 수 있다는 데에 만족감을 가지고 섬기려하는 건강한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과 처음으로 찬양을 맞추어보고, 기도를 하며 예배 준비를 했다. 낯설고 어색함이 난무했지만 은혜롭게 데뷔전을 치르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부모님과의 신앙이 없이 나홀로 신앙 생활을 하며 서울로 올라와 다닐 만한 교회를 찾고 있는 실정. 동시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할 수 있음에 감사하 는 친구들을 보며 순수함과 동시에 대견함이 밀려왔다. 

 이 친구들과 새롭게 개편된 예배를 준비하고 고등부 예배에 큰 활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금만 더 일찍 이렇게 준비가 되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더라면 이렇게까지,, 예배 상황이 악화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훨씬 더 질 높은 예배를 참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망설였단 말인가.. 

 이 친구들을 심방하고 만나면서 찬양 인도자 이전에 이들을 예배자로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양육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때묻지 않고 순수한 열정만으로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자신의 열정과 마음을 헌납하는 친구들을 보니 괜스레 나의 마음이 숙연해지게 된다. 또한,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현재의 20대 친구들의 눈높이와 상황을 들여다보며 미래의 대학청년부을 향한 나의 비전도 마음 한켠에 그려보았다. 

 10월 중순, 교회의 큰 행사가 있는 주간. 대내외적으로 모든 교역자들이 분주했다. 연중 가장 큰 행사인 ‘여리고 기도 행진’이 있는 주간이다. 여리고 기도행진은 전도 축제이자 새생명을 초청하고 정착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다. 이를 위해 전도 축제와 동시에 교회에서는 여리고 기도행진을 위한 ‘특별새벽기도’를 준비했다. 2-3주간 기획을 하고 준비를 하고 매일 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학교 강당 세팅(교회 자체건물 없음)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내었다. 낮에 일어나 사역을 하여도 부족한 잠으로 인하여 비몽사몽하기 일쑤였고, 아프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뛰어다녔던 것 같다. 김양재(우리들교회), 송태근(삼일교회), 김인중(안산동산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하며 교회적으로 큰 행사를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었다. 

 더불어 다음 세대 각 부서에서 따뜻한 동행(전도축제)를 준비해야 하기에 ‘서로 사랑하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초대된 아이들 모두에게 문화상품권 1만원권을 선물하고 선생님과 반별로 교제의 시간을 가지도록 기획했다. 전도 축제에만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설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교제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 말로 ‘일상의 전도’가 될 것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기획을 했다. 가변성이 많고 이동성이 많은 청소년의 특징을 감안하여 어느 특정한 날에만 전도 축제를 여는 것이 아닌 2달에 1번은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어질 수 있도록 기획하고 준비하고자 했다. 

 특송을 위해 백석예술대학 실용음악 싱어를 섭외하였고, 예배의 분위기에 좀 더 활력을 주었으며, 당일인 주일에는 15명 가량의 학생들이 참석을 했다. 지난 주, 3명의 출석에 비하면 눈에 띄는 성과이기는 하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제서야 고등부 다운 모습을 갖추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배를 마친 후, 1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목사님 아까 특송을 불렀던 형제를 저희 교회 예배 인도자로 세우는 건 어떨까요? 찬양이 이렇게 중요한 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목사님도 찬양 인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구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세팅, 찬양 연습 후 바로 예배 준비- 찬양 인도- 설교- 기도회를 진행하고 나면 오전 내내 쉼 없이 달리고, 잠시 쉬는 동안 꾸벅꾸벅 조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특송을 부른 형제의 경우, 유투버로 활약도 했었고 거리 공연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바로 찬양팀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섭외에 들어갔다. 하루 정도 고민을 해보겠다는 특송자와 간절한 마음으로 이를 기다리는 나와 선생님들 사이에서 기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특송을 부른 청년이 집이 멀고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 큰 맘 먹고 헌신을 해보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전문 예배인도자까지 얻은 나의 마음은 부담을 덜어내는 것은 고사하고 ‘천군만마’를 얻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이번 주부터 바로 섬겨주겠다고 하니.. 지난 8개월 동안 찬양팀의 부재로 예배에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느끼는 기간이었다.. MR을 틀어놓고 MR의 순서대로 노래를 부르고 연습하고, 방송실에서는 틀었다 멈추었다를 반복하고, 혹여나 반주가 없는 노래는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했던 열악한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제서야 예배를 드리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가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에너지 많은 청년들을 예배자로 바르게 세우고 이들을 잘 인도하여 고등부 예배의 활력과 질적인 개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예배 당에 가득채워지길 소망한다. 고등부 예배의 회복을 위해..

 

 

 

 
세계적 변화와 대비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김호남 / 동암교회 부목사 
 
 김호남 목사는 청년들에게 활발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는 늘 끊임없이 청년들에게 다가가며, 신앙적으로 도전하도록 돕는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청년 한면한명에게 목회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행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그는 현대개혁신학에 특히 관심이 많아, 오래 전부터 다양한 관련서적을 가까이 하며, 항상 공부한다.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고하며.. 

 이 시대의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상속에 거대하게 몰아치는 파도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서 성공하느냐가 그들의 관심인지 모른다. 훌륭한 서핑선수는 파도를 두려워 하지 않고, 높은 파도를 오히려 이용해서 보다 멀리, 보다 높이 즐기는 선수이다. 세상의 두려움과 고난에 대해서 좌절하고 낙망하며, 더군다나 코로나19 상황 가운데에서 좌절하고 낙망하는 청년들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심정이다. 분명히 청년들이 바라보아야 할 소망이 하나님을 보기 보다는 세월이 갈수록 세상의 윤리적인 가치관과 일반적인 교훈과, 시대적인 이념에 편승해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어려운 상황과 환경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고,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의 역사는 늘 계속해서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직장을 다니는, 평신도로써의 삶을 33년을 살다가 목회라는 길로 방향전환을 해봤기에, 이 시대의 청년들이 취업과, 결혼, 관계등의 문제에 있어서 어려움을 더 공감한다.  

 그래서 조금 더 먼저 겪었고, 조금 더 겪어 봤기에,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더욱더 애를 쓴다. 지금 이 시대에 청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뛰는 아파트값 아래에서 하늘만 바라보는 낙담. 비트코인, 주식이나, 여러 가지 돈을 벌기위해 애를 쓰는 모습은 참으로 열심인 반면에, 어려울수록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그것이 당연시 되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감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믿지 않는자나 매한가지이다.  

 청년의 때는 믿음의 성인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성장기이다. 물론 노년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경주와 성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때 받은 은혜와 하나님을 체험함이 평생의 문제를 맞딱드렸을때에 중요하다. 문제에 맞았을때에 청년들에게 몇 가지를 고한다.  

 첫째, 문제를 만났을때에 사회적인 관점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문제의 답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에 우리는 사회적인 경험, 신앙적인 경험이 짧고, 부족하기 때문에, 당장 내 눈 앞의 문제를 세상의 윤리적인 관점과, 이념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그 거대한 바람이 우리를 유혹한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심해서, 이단이나 동성애를 가기도 한다. 문제를 보려 하지 말고, 그 문제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먼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을 통해서 그만큼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커다란 신앙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둘째, 문제를 만났을때에, 성경속에서 답을 찾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또한 위의 것과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제일 잘 나온 부분이 바로 이 성경속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혈기와 열정을 가지고만 앞장섰다가는 일을 그르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경과는 정 반대의 생각과 행동으로 간다면, 그 문제는 더 꼬이게 만드는 것이다. 위기속에 있었던 요셉,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에서 백성의 원망을 들었던 모세, 그들 모두는 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잘 이겨냈음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신실한 사역자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들에게 밥을 주던지 말씀을 주던지 라는 말이 있다. 교역자들이 청년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교제와 적당한 선물등이 그들과 친밀하게 여긴다. 하지만, 요즘 청년들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미 교역자의 생각을 다 파악하고 있다. 교역자가 은혜받으면, 청년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교역자가 세속적인데 관심이 많으면, 청년들도 따라가고, 교역자가 은혜받는데로 가면, 청년들도 그렇다. 물론 청년특유의 문화를 이해하는데에, 일정한 부분 참여하고, 공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교역자가 중심을 바로잡고 올바른 진리로 인도할떄에 그 청년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다.  

 필자는 성도로써의 청년의 시기를 겪다가 사역에 임하게 되었다.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취업에 대한부분, 직장생활의 어려움, 이성문제와 결혼에 대해서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이 겪는 것들을 먼저, 경험해보았다. 그 어려울 때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감이 아니라, 주님을 통해서 영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 지금 시대에 진정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부족한 식견으로 고민해본다.

 

 

 

 
나가며 
종교개혁의 최전선, 어린이 
장창한 / 열린개혁교회 담임목사 
 
 장창한 목사는 종교개혁시대 교부들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장성한 그들의 어린이 사역방법 및 신학관을 연구하여, 현대적 신학과 목회에 필요한 교훈을 얻으려 한다. 그에 따르면, 지금 한국개신교회의 다음 세대가 마주한 상황은 분명히 종교개혁시기의 그것과 비슷하다. 다각도로 격변하는 시대는 개혁교회의 다음 세대들에게 이전처럼 많은 것을 요구한다. 

 

 

 종교개혁시대 어린이 신앙교육 연구의 필요성 

 다음 세대 중에서도 특히 어린이 세대47)는 모든 공동체에 있어서, 그 공동체의 존속여부를 결정짓는다. 이러한 사실은 개혁교회를 포함한 그 어떤 교회에도 적용된다. 

 또한, 어린이 세대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역동적으로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 개혁교회를 포함한 그 어떤 교회의 어린이 세대도 활발하게 연구되어, 그들에게 알맞은 신학적 목회적 대안이 끊임없이 개발되어야 한다. 

 실로, 격변하는 어린이 세대에 깊은 관심과 전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면, 현재 아무리 강성한 기독교회라할지라도 미래가 어둡다. 최근의 급격한 각종 변화들을 고려하면, 아마, 그러한 교회들은 향후 50년내에 매각될 것이다. 교인(敎人)이 텅텅비어서 말이다. 

 여러 해결방안 중 필자는 종교개혁시대의 지도자들이 어떤 어린이 또는 어린이 세대 신앙교육을 받았으며, 이를 경험으로 그들이 어떤 어린이 또는 어린이 세대 신앙교육을 제안 및 실행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48) 종교개혁시대 교부들의 그것들을 연구한다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기틀을 놓았던 격변의 시대를 지혜롭게 헤쳐나간 선조들의 강인하고 끈질긴 원동력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개혁교회는 다분히 다른 기독교회의 도전을 받고 있으며, COVID-19로 인해 종교개혁시대에 버금가는 큰 언어적인 또한 문화적인 또한 사회적인 또한 철학적인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 참으로 한국개신교회의 다음 세대가 마주한 상황은 분명히 종교개혁시기의 그것과 비슷하다. 

  

 종교개혁자들이 경험한 어린이 신앙교육 

 단적으로 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매우 적절하고 지속적인 신앙교육을 받았다. 루터는 유아기에 ‘유아 영세’를 받았으며, 이는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인 부모를 두었음을 암시한다.49) 또, 낙스는 지역의 중요한 예배당과 수도원이 있었던, 즉, 신앙에 관심이 많은 주위 환경을 바탕으로 신앙을 성장시켰다.50) 이외에,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칼빈은 루터와 낙스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소를 둘 다 갖는다. 칼빈은 당시 대성당이 있던 도시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부모님은 올바른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이 매우 큰 인물이었다.51) 

 즉,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선한 영향력을 받아, 또한, 그들의 영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토대로 신앙적으로 바르게 성장했다.52) 

 

 어린이 신앙교육에 대한 칼빈의 관점과 사역적 전제 

 칼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린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대표적으로 칼빈은 유아(乳兒)들을 ‘언약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상징적인 또한 동시에 실제적인53) ‘의례’를 즉, 유아세례를 강조했다. 이는 칼빈의 어린이에 대한 신앙교육의 관점과 사역의 주목적을 잘 드러낸다. 요약하면, 칼빈은 어린이 신앙교육의 핵심 중 핵심으로 ‘유아세례’를 두었으며, 그것의 시행을 어린이 사역의 본질이자 시발점으로 삼았다.54) 

 구체적으로 말하면, 칼빈은 ‘유아세례’를 시행할 수 있는 본질적인 근거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성화될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칼빈은 어린이도 충분히 성화될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5) 성인과 마찬가지로 유아를 포함한 어린이 신앙교육은 칼빈에게 매우 당연한 것이며,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어린이 신앙교육이 불필요하다는 통념으로 말미암아 칼빈 당시의 어린이 신앙교육이 취약했음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파격적인 관점 또는 주장이었다.56)  

 

 칼빈의 어린이 신앙교육 사역의 내용적 장소적 핵심 요소 

 칼빈은 어린이 신앙교육 사역을 내용적으로 2개의 큰 기둥으로 즉, 경건과 교리로 구분했다. 칼빈은 이 2가지를 어린이 신앙교육 사역의 핵심 요소로 두었으며, 이들은 장소적으로 가정57)과 교회를 통해 집중적으로 시행된다.58) 

 먼저, 내용적으로 ‘경건’은 쉽게 말해, ‘습관’에 해당한다. 칼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제로, 성경을 읽는 행위와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모든 종류의 행위를 항상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단, 칼빈에게 경건은 주로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전제하되,59) 교회에서 공적으로 그것이 최대한 주관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내용적으로 ‘교리’는 칼빈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방향키’에 해당한다. 단, 칼빈은 이를 구원론적 가르침과 구원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에 관한 가르침으로 나눈다.60) 관련하여, 교리는 1541년 칼빈이 교회에서 어린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제 2차 교리교육서’ 즉,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서’61)에서 종합적으로  정리된다.62)  

 이후, 중요한 것은 칼빈이 위와 같은 내용의 어린이 신앙교육이 시행되는 장소이다. 칼빈은 어린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행하기 위해, 2가지 장소를 강조한다. 바로, 교회와 가정이다. 

 먼저, 장소적으로 교회의 경우, 칼빈은 어린이들의 ‘들음’을 강조한다. 칼빈은 어린이들에게도 장성한 성인과 동일하게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이는 천천히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에 쌓아가 적절한 시기가 되었을 때, 그의 내면에서 불타오를 수 있다고 즉, 본격적으로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63) 

 이어, 장소적으로 가정의 경우, 칼빈은 부모의 자녀를 향한 온유와 친절과 비억압 즉, 자유를 전제적으로 제공해야 함을 강조한다.64) 칼빈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당대의 일반적인 또는 전형적인 부모상을 모두 파괴할 것을 요구하며, 무엇보다 자녀와 부모의 유대관계를 일차적으로 잘 쌓기를 권한다. 그는 신앙교육을 현실적으로 어느 수준으로 성취하는 것은 충분히 좋은 유대관계를 토대로 또는 전제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65) 

 

 칼빈의 어린 시절과 어린이 신앙교육 사역이 현대 한국개혁교회에 주는 교훈  

 한국개혁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특히, 그 중에서도 어린이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적인 또한 문화적인 또한 사회적인 또한 철학적인 상황에 올바로 또한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오로지,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것만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난관(難關)을 극복하는 비책(祕策)이다.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상황은 기존 세대가 살아가는 또는 살아온 상황과 분명히 다르다. 실로, 현재 COVID-19의 지배하에 모든 것이 급격히 변하는 중이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단순히 문화적으로 또는 감성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접근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는 사역은 불필요하다. 이는 자만이자 낭비일 뿐이다. 물론, 다음 세대에게 엄청난 돈을 쏟는 것조차 많은 한국개신교회가 행하지 않지만 말이다. 

 아직, 다수의 한국개신교회는 기존 세대들과 관련된 사역을 활성화하여, 당장 필요한 교회의 재정부터 채워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안타깝게도 이는 한국개혁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한편으로 틀린 말이 아니지만, 한편으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말이다. 비록, 고통스러울 지라도, 아니, 나아가, 한 교회가 죽음의 위기를 겪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기존 세대의 작은 소시민적(小市民的) 만족66)을 위해서가 아닌,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또는 더욱 하나님을 만나야 할 다음 세대를 위해서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또한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재정과 역량을 사용해야 할 때다.67)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숨을 건다면, 일부만 전투하지 않는다면,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해결책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의 구원을 인정하는 유일한 기독교회다.  

 종교개혁자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가정 또한 주위 환경으로 말미암아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나아가, 그들의 어렸을 때의 경험은 그 다음 종교개혁자들을 낳을 수 있는 원리와 실제를 발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중 특히, 칼빈은 장소적으로 가정과 교회68)에 또한 내용적으로 경건과 교리에 어린이 사역의 중심을 두었다. 이는 어린이에게 종교개혁자들의 가정과 교회가 입체적으로 어린이의 신앙성장에 노력했음을 전제 및 의미한다. 이러한 큰 틀에서의 원리 또는 교훈을 유념하여, 현대개혁교회에서 새로이 시대와 개교회의 상황에 알맞게 각 가정과 개교회를 타겟으로 한 ‘전략과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를 기도한다. 지금이라도 개혁교회의 구성원들은 나의 자녀와 나의 개혁교회와 한국개혁교회의 다음 세대들에게 충분히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도하며, 또한 역사하실 줄로 확신한다.

 

 

 

 

 


1) 이는 이전 호에서 발행할 때 언급했던 것이나, 필자는 이를 다시 엄중하게 강조하려 한다. 

2) 어린이의 신앙교육에 관련하여, 많은 대형교회에서 QT지와 제자훈련 프로그램 등을 수립 및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다음 세대 중 어린이들을 향한 높은 수준의 신학적 이해를 채워줄만하지 않다. 관련하여, 필자의 이번 호의 ‘나가는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아마, 진행 중인 한국개신교회의 어린이 교육에 관련하여, 목회자들의 신학수준과 목회방법을 잘 아는 경우, 필자가 쓴 글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것이다. 

3) 최근 UNIST 총장이 인터뷰한 내용만 봐도 그렇다. 이제 교회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을 맞추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모든 관심과 노력과 재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 평범한 사회와 대학에서도 이제 ‘기존의 학습 및 교육’과 관련된 ‘낡은 사고체계’를 벗어던져야만 말그대로 ‘생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https://newsis.com/view/?id=NISX20211125_0001664925&cID=10814&pID=10800, 2021.11.26) 

4) 물론, 이는 참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먼저 적용된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당연히 부동산 소유에 대해 진지하게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옳고 그름을 고민한다. 

5) 김유준, 루터의 경제사상, 한국교회사학회지, 2018, 142. 

6) 김유준, 루터의 경제사상, 한국교회사학회지, 2018, 142-143. 

7) 김유준, 루터의 경제사상, 한국교회사학회지, 2018, 143. 

8) 역지사지의 개념이 없는 사람은 기본적인 인간됨이 갖추어지지 않은 자로서, 논의에서 제외하도록 한다. 물론, 사람들마다 처한 형편과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타인을 상대함에 있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드러내어야 할 모습은 이처럼 강조됨이 마땅하다. 

9) 그리스도인은 되도록 임대를 놓는 다주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투자를 빙자한 자본주의적 가치에 자신을 흠뻑 적신 결과일 수 있다. 

    임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임차인 그리스도인들과 하나의 공동체인 비가시적인 교회로 생존 및 존속한다. 비록, 그 둘 사이에 현실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이 보이더라도 말이다. 이는 임대인과 임차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임대료 측정 및 납부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고려하도록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10) 이는 단순히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이다. 이곳 말고도 대한민국은 부동산과 관련하여 곳곳에 이러한 통념을 가진 지역이 널리 분포한다. 

11) 물론, 독자들은 굳이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춘 동네가 아니더라도 원리적으로 그러한 동네에 루터의 견해를 적용할 수 있다. 필자는 가장 와닿을 수 있는 예를 들고 싶었을 뿐이다. 

12) 또는 매매가가 될 수 있다. 단, 본고에서는 ‘임대 및 임차’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도록 한다. 분명히 임대 및 임차와 매매는 다른 거래방식으로서 서로 다른 정교한 신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13) 현재 한국사회의 어떤 임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임대료를 책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부동산을 임대해서 수익을 남기는 수준이다. 여기에는 2021년 12월 현재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자유시장 경제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 고려하여 임대료를 결정하는 것이 성경에서 제시된 부동산 임대의 원리가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 필자에게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참고로 꼭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비가시적인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모상(模像)이 있음은 부동산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추후, 필자는 이를 따로 서적으로 출판할 예정이다. 

    관련하여, 여기서 짧게 발히면, 부동산 문제를 풀기 위한 핵심축 중 하나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상(模像)’이 있느냐를 고려하는 것이다. 성경은 신앙인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모상(模像)’임을 즉, 하나님이 공유하도록 하신 것에 대해 일정한 또는 최소한의 권리를 가짐을 전제한다.  

14) 고리대금업은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지정하신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다.(김유준, 루터의 경제사상, 한국교회사학회지, 2018, 143.) 

15) 이는 기독교 국가를 의미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루터가 국가에 제안한 것을 인용 또는 실행할 수 없다. 

16) 종교개혁시대에는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최소한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위해 복지활동을 한다는 명제를 국가가 그리스도인을 위해 복지활동을 한다는 명제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함을 뜻한다.  

17) 단, 루터는 『약탈하고 살인하는 농민무리들에 반대하여』에서 비록 토지 투기로 인해 피해를 입은 농민일지라도 폭동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루터가 하나의 이념에 편향적이지 않게 신학을 전개한 것과 모든 그리스도인 전체의 생존과 존엄을 그의 신학적 틀에 두었음을 보여준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49.) 

18) 특히, 현재 전세 또는 월세를 사는 대부분의 임차인은 은행 또는 가족 또는 누군가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기본적인 보증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임차인은 매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 다주택자에게 매달 돈을 강탈당한다. 임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고려하여 앞으로 만날 임차인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그것만 전제된다면, 사실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어떤 상황속에서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임대인에게 현실적으로 큰 경제적 손실이 따를 수 있지만 말이다. 

19)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 다주택자가 특히 그리스도인 임차인으로부터 지나치게 이익을 남기려 한다면, 이는 고리대금을 시행하는 것과 사실상 같다. 고리대금은 가장 대표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이다. 이는 돈을 빌린 사람에게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저 돈을 빌림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모든 문제와 책임을 홀로 감당하도록 한다. 

20)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79-180. 

21) 이는 다른 초대교회 교부들도 마찬가지다. 크리소스톰과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암브로시우스와 바실리우스도 이러한 주장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의 부유함과 빈곤함의 격차를 토지의 소유문제와 관련하여, ‘인과관계’로 이해한다. 소유욕과 자비심을 대조적으로 여기는 관점은 전체 초대교회 교부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특히,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작을 분석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거나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하는 부자는 논리적으로 현대판 부동산 투기꾼에 해당할 수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경제적으로 구제하지 않는 행동을 믿음의 열매가 없는 것 즉, 애초에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과 동일하게 여겼다. 이는 실천을 강조했던 당대의 신학적 경향으로 말미암는다.(최현욱, 크리소스톰에 있어서 빈부의 문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43.)  

22)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79. 

23) 크리소스톰은 당시 사도행전 2장을 설교하며, 누군가가 진정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룸을 깨닫는다면, 부유한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 경제적으로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즉, 크리소스톰에게 이러한 마음을 갖지 못한 자는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니다.(최현욱, 크리소스톰에 있어서 빈부의 문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16, 19-20.) 

24) 크리소스톰은 그들이 비참함이나 굶주림, 압류, 독촉, 체포, 강제노동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음을 해당 저작에서 언급한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0.) 

25) 김유준에 따르면, 크리소스톰은 부동산 투기로 인해 얻는 막대한 이득에 빠진 부자들의 삶의 형태를 당시 평범한 농업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생존과 존엄에 대한 배려가 없었음으로 요약한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2.) 

26) 크리소스톰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부유함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2.) 

27) 김유준은 크리소스톰이 그의 저작에서 부동산 투기를 당시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다룬다. 이는 여러 기록을 참고했을 때, 신약성경 본문이 예수님 당시의 부자들을 그러한 맥락에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유준은 좋은 통찰력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달리 해당 성경본문을 해방신학적인 관점으로 다룬다. 김유준은 크리소스톰이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구도로 설교를 했다고 일반화시켜 주장하지만, 필자는 이를 당시대의 부유하고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설교 목적과 대상에 대한 이러한 해석학적 관점의 차이는 각 기독교 교파가 가지는 조직신학적 특성에 기인한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4.) 

    필자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빈부격차에 대한 관점을 개혁신학적으로 본고에서 풀이했다. 그들은 토지의 분배와 관련된 신학적 내용을 언급함에 있어, 항상 개인의 구원론적인 차원을 전제하며,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와 문제를 언급할 때 이를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전제한다. 독자들은 크리소스톰을 해석함에 있어, 누구의 견해가 논리적으로 합당한지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28) 요즘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기독교 사회학자들은 정량적인 차원에서 토지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이는 핵심을 완전히 빗나갔다. 부동산을 포함하여 재물에 관한 정량적인 분배방식에 집중하는 것은 한편으로 필요하지만, 이는 결국 매우 일시적인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에 불과하다.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의 주체인 ‘인간의 생각’을 바꾸려는 접근이 요구된다.  

29)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공기, 물, 불, 태양, 토지(부동산)를 대표적으로 꼽는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소유하도록 허락하셨으며, 특정 소수가 이를 독점하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고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유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8.) 

    크리소스톰과 동일하게 바실리우스도 『내 곳간들을 헐어라』 p.34 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태어나 자연에 속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심을 강조한다.(조현진, 부동산 인질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가톨릭 평론, 2018, 133.) 

    이는 초대교회 당시에 부동산 투기로 말미암은 인간의 생존과 존엄의 상실에 대한 문제가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있었음을 의미한다. 놀랍게도 크리소스톰은 토지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즉, 하나님의 모상(模像)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전제한다.  

30) 구체적으로 그는 후자를 언급함에 있어, 모든 그리스도인이 존엄을 누려야 함을 특히 강조한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8.) 

31)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어떤 분명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어떤 그리스도인 공동체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를 이루기 위해, 소속처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아픔과 기쁨을 반드시 함께 공유한다. 이러한 관계설정 자체를 부정 또는 거부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32)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9. 

33) 크리스소스톰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 이처럼 반강제적으로 토지의 반환을 당대의 임대인들에게 명령한 이유가 있다. 이는 그가 부동산 투기로부터 얻은 이익의 일부를 공동체에 환원하는 것만으로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현실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이 살았던 시대는 루터당시와 다르게 사회 구조가 상대적으로 복잡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당시는 루터당시에 비해 더욱 그리스도인 공동체 개념이 체계적이지 않아, 공동체를 통한 체계적인 불로소득의 공유 또는 재분배가 불가능했다. 물론, 본고에서 이미 언급하였듯, 큰 틀에서 크리소스톰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90.) 

34)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9. 

35)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89-190. 

36)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연구, 신학사상, 2016, 190. 

    물론, 다주택자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 임차인으로부터 이미 과도한 이익을 남겼을 경우, 이러한 해결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만큼 철저히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배상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아마, 그의 신앙의 크기에 즉, 하나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한 사랑의 크기에 맡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역동적인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 현실적으로 적당할 것이다. 

37) 이는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직장 또는 직업 등의 일거리를 주셨기에, 그는 해당 직장 또는 직업에서 맡은 바를 성취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과정과 결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전제한다. 

38) 루터와 이전의 교부들은 토지소유와 빈부격차를 직결해 구원론적으로 이해한다. 이는 실제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 경제적으로 자비를 베풀 마음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이 많았기 때문이다.(최현욱, 크리소스톰에 있어서 빈부의 문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41-48.)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만 그 관계를 이해한다면, 어디까지 경제적인 자비를 베풀지와 어디까지가 합법적인 경제활동인지에 대한 논쟁이 생길 수 있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53, 155.) 

39) 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53, 155. 

40) 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53, 155. 

41) 이는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각각 구분되는 경제적 영역이 존재되면서도 중첩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53, 155.) 

42) 고리대금 수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3) 이는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중첩되는 경제적 영역이 존재하면서도, 각각 구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54.) 

44) 칼빈은 신명기 24:1-6을 주해하며, 그들의 생존과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즉 토지를 포함하여 그와 비슷한 어떠한 종류를 빼앗는 자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 강조하기도 한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54-155.) 

45) 관련하여, 칼빈과 츠빙글리는 그들의 설교에서 최대 5%로 이자율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61.; 이오갑, 종교개혁자들의 경제관, 사회이론, 2017, 68.) 

    사실, 5%는 당시 대부업의 관례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이자율에 해당한다. 심한 경우 채권에 대해 최대 60%의 이자율을 적용한 지주 또는 채권자들도 있었다. 5%는 종교개혁시기의 물가상승률을 고려했을 때, 거의 채권으로 이익을 보지 못하는 수준에 해당한다.(이오갑, 종교개혁자들의 경제관, 사회이론, 2017, 62-63, 74.) 

    이는 약과다. 나아가, 칼빈은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 이자를 못받을 것이 확실한 경우에도 그에게 채무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이오갑, 종교개혁자들의 경제관, 사회이론, 2017, 74.) 

    칼빈 이외에 루터는 상환의 가능성을 따지되 최대 8%로 이자율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칼빈처럼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고려한 것이다. 이때, 루터는 칼빈보다 급진적으로 모든 종류의 대부업에 있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인 간에만 일어나야 한다고 적시했다. 이는 루터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성에 근거하여, 대부업에 관한 신학적 견해를 설정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이오갑, 종교개혁자들의 경제관, 사회이론, 2017, 62.) 

    물론, 종교개혁시대의 교부들은 예외적인 상황에 관해, 즉, 예를 들어, 돈을 떼어먹거나 갚았다고 우기거나 하는 등의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일방적 계약파기 등에 관한 섬세한 대응 가이드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는 교부들이 가지는 대표적인 신학적 한계 즉, 시대적 한계를 보여준다. 개혁신학을 포함하여 모든 신학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 논의가 진행되고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마무리된다. 이는 현대에 적절하게 논의 및 연구되어야 할 바이다. 

46) 이외에 칼빈은 상공업과 농업 등 모든 산업분야에서 어떤 근로자가 받아야 하는 임금에 대해, 반드시 최소한 그 근로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책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이 또한 칼빈이 기본적으로 어떤 경제활동에 관하여, 인간이 누려야 할 생존과 존엄을 강조했음을 잘 드러낸다.(김홍섭, 존 칼빈의 경제, 경영 사상과 현대적 적용에 대한 연구, 한국항만경제학회지, 2015, 161.; 이오갑, 종교개혁자들의 경제관, 사회이론, 2017, 69.) 

47) 필자는 어린이 세대를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하고 한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청년부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의 다음 세대 중, 특히, 현대 한국의 초등학교 저학년까지(3학년까지)를 어린이 또는 어린이 세대로 설정하려 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저학년(3학년까지)은 사춘기가 오지 않아, 신앙적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마치, 흰 바탕을 가진 도화지에 해당한다. 실로, 그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목회적으로 사역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이 급격히 많아진다. 사춘기로 말미암아, 그것이 무엇이든 성경에 근거지 못한 특정한 사고가 경직될수록 또는 증가할수록 목회(牧會)는 어려워진다.  

48) 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59. 

49) 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59-160. 

50) 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0. 

51) 대표적으로 칼빈의 부모들은 칼빈이 12살이 되자, 그에게 성직을 받도록 했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0-161.) 

52) 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1. 

53) 개혁교회는 유아세례에 존재하는 이러한 2가지 동시적 측면을 맥락에 따라 논리적으로 각각 다룬다. 관련하여, 칼빈의 ‘성례의 유효성(efficiency)’에 관한 관점을 공부(工夫)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2.) 

54) 이는 의례적으로 또한 교회의 양적성장을 위해, 의무적으로 또한 비신학적으로 유아세례를 주는 한국개신교회에 경종을 알린다.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유아를 ‘언약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즉,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로 인증 및 선언하는 데에 있다. 이는 단순히 말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며, 또한, 실제적으로 유아세례를 공포함과 동시에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성인 그리스도인처럼 그리스도인의 권리와 의무를 누리게 또는 소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55) 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3. 

56) 이는 칼빈 이후 다음 단계의 종교개혁을 준비할 수 있었던 칼빈의 놀라운 통찰력을 드러낸다. 칼빈으로 말미암아 제네바에서 끊임없이 종교개혁의 불이 타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 모든 교회에서 소홀히 여겼던 어린이 즉, 다음 세대를 향한 구원론적 기대에 기인한다. 이는 개혁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다. 어린이의 성화에 소망과 당위성을 부여함으로 말미암아, 개혁교회는 본질적으로 어린이 사역과 어린이 신학을 끊임없이 발전시킬 수 밖에 없다. 그 어떤 기독교회에서도 어린이의 성화가능성을 즉, 달리말해 구원의 가능성 또는 확실성을 이처럼 강조하지 않는다. 

57) 종교개혁 당시 개혁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의 핍박에서 벗어나, 온 가족이 피난 또는 이주하여 생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어린이를 포함한 하나의 가족 전체가 개혁신앙을 지키고자하는 ‘유대감’을 전제로 이를 일사분란하게 뭉쳐있던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칼빈이 어린이 사역을 제안 및 실행 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는 올바른 가정내 신앙교육을 희망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교훈을 줄 것이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9.)  

58) 칼빈은 어린이의 신앙교육에 가정과 교회 외에 학교를 중요하게 다룬다. 이때, 교회와 학교는 칼빈에게 가정과는 무관하게 상호보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존재들로 다루어지며, 칼빈은 어린이 사역에 있어, 학교를 통해 신앙교육에 필요한 ‘일반학문(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을 습득하여, 교회에서 신앙을 증진시키도록 한다. 칼빈에 따르면, 그것이 교회 내에서 또는 교회에서 직할로 운영되는 학교의 존재목적이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70.) 

59) 칼빈은 가정을 하나의 작은 교회로 전제한다. 그는 일반적인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가정과 교회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는 신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다시 말해, 칼빈은 공적인 교회 안에 각 가정이라는 작은 교회가 존재한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9.) 

    칼빈에 따르면, 부모는 제 1의 신앙교육자로 자녀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칼빈에게 이는 자녀들의 신앙훈련 또는 신앙교육에 누가 1차적으로 권한과 책임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의미한다. 물론, 공적인 교회의 지도아래에서 부모는 자녀를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하지만 말이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70.) 

60) 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5-166. 

61) 이는 현대교회와 달리, 단순한 신앙 가이드북처럼 사용되어 끝나지 않는다. 이는 교회에서 어린이의 교리암기를 확인하는 ‘교본’으로서, 종교개혁시기 개혁교회는 이를 통해, 어린이의 신앙상태를 심사(審査)했다. 이는 교회에서 시행하는 일종의 공인시험이었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68.) 

    칼빈은 교리문답서를 만드는 데에 있어, 어린이들이 던질 수 있는 질문에 중점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어린이가 가질 수 있는 신앙적 질문에 가정과 교회가 연합하여 대처하고자, 어려운 신학적 내용을 목회현장적으로 매우 쉽고 직관적으로 풀이했다. 이는 가정에서 충분히 쓰일 수 있는 것으로서 자녀교육의 일선에 있는 바쁜 부모들을 위한 맞춤형 ‘교본’으로 기능했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72.) 

    기독교강요와 달리, 칼비은 의도적으로 교리를 상기 언급한 2개의 가르침으로 나눈다. 원래, 칼빈은 굳이 교리를 2개로 분류하여, 각각 다루지 않는다. 물론, 칼빈을 포함한 현대개혁교회도 사실 이 모두를 유기적으로 언급하며, 충분히 논리를 제시한다. 다만, 이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알맞은 신앙교육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62) 여기서도 칼빈은 ‘제 2차 교리교육서’ 즉,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서’를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 교회와 가정이 지속적이고 유기적으로 노력해야 함을 전제한다. 

63) 이는 내용적으로 경건과 교리를 모두 포함한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71.) 

64) 역시, 부모들이 가르치는 것에 내용적으로 경건과 교리가 모두 포함된다.  

65) 칼빈은 기계식으로 또는 억압적으로 또는 암기적으로 신앙교육에 임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당대의 일반적인 부모상과 완전히 다르며, 가정이라는 장소적 또한 상황적 특수성을 반영한다. 실로, 부모와 자녀는 특수한 관계이기에, 이로 말미암는 가정이라는 특수한 교회는 그러한 근간(根幹)을 유지함과 동시에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지만, 조직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반드시 조직을 구성하는 근간을 보존함을 전제한다. 즉, 칼빈은 당대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처음 시도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사역을 요구했다.(장화선, 종교개혁기의 어린이 신앙교육, 신학지평 15, 2002, 172.) 

66) 필자는 개교회 또는 각 교회의 기존 세대가 다음 세대에 관해 소위 늘 해오던 방식을 사용하여, 매우 미미한 사역적 열매를 얻어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자아도취적 정신승리에 불과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까지 표현되는 상황이 개교회에서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물론, 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적당한 수준에서 적절하게 역사하시지만 말이다. 

67) 필자는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가 활동하는 것들을 개교회에서 참고하기를 바란다. 분명히 개교회는 더 좋은 사역방식을 발굴 및 추진할 수 있다. 필자는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의 활동을 통해, 큰 틀에서 한국교회 다음 세대의 목회 전략을 제안하는 중이다. 

68) 언급하였듯, 칼빈에게 이는 학교라는 신앙교육을 위한 후원기관을 전제 및 포함한다. 칼빈이 교회와 교회가 운영 및 설립한 학교를 중요하게 여겼던 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교회는 신앙의 증진을 위해, 이를 보조할 수 있는 주요한 교육기관을 반드시 두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러한 언어적인 또한 문화적인 또한 사회적인 또한 철학적인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사역자를 고용하여, 짧은 시간(예_설교, 강좌 등) 안에 핵심적인 신앙교육을 교회에서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한국에서 기독교학교를 운영할 수 없거나 운영하기 어려워진 현대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최선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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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 [매거진(슬기로운 신앙 생활)/공개 자료] - 슬기로운 신앙 생활(WISE FAITH, 21년 12월호)

 

슬기로운 신앙 생활(WISE FAITH, 21년 12월호)

슬기로운 신앙 생활(WISE FAITH) 12월 호가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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