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적성해
적소성대
露積成海 積小成大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작고 적은 것이 쌓여 크고 많아진다.
슬기로운 신앙 생활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의 이야기
발 행|2022년 10월 25일
저 자|장창한, 윤선영, 윤다원, 장봉근, 윤다이, 백승엽
편집자, 펴낸이|장창한
펴낸곳|온고지신 북스
출판사등록|2021.01.08.(제2021-5호)
주 소|서울특별시 성북구 솔샘로 4길 18 601호
전 화|010-2210-6843
이메일|changhan3501@daum.net
ISSN|2765-6411
cr-ministry-institute.tistory.com
ⓒ 온고지신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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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매품
목차
먼 미래를 바라보며 준비하기
요즘 필자는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고민중이다. 가끔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많이 답답해 하고 그 방법을 찾기 힘듦을 깨닫는다. 경제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감당해야 할 일이 현재의 극복해야 할 상황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물론, 연구소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반영하여, 필자는 앞으로 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번 9월호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핵심적으로 하나씩 꾸준히 나아가야 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개혁신학이 자랑하는 교부학을 포진한 채 말이다. 필자는 신학을 할수록 또한 목회를 할수록 교부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문제에 관해 자신들의 글 곳곳에서 이미 다루었음을 확인했다. 물론, 이는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이 드러내고 경험하는 어떠함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필자는 천천히 다양한 현대교회에 필요한 주제를 점차적으로 『슬기로운 신앙 생활』에서 다루어야 함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신학적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예이자, 방향등이 될 것이다.
칼빈의 서신에 나타난 그의 생애 경험과 신학적 토대
전 총신대학교 교수인 박건택이 지적하였듯, 칼빈의 서신들은 그의 신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적인 이유로 한국개혁교회에서 등한시 여겨졌다.1) 그리고 이러한 현상적 결과는 칼빈에 대한 이해가 한국개혁교회에서 매우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저하되도록 유도했다.2) 서신들 곧, 편지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칼빈의 내면과 사적인 행동을 솔직하게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데도 말이다. 실로,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생동감’을 그것을 통해 역력히 드러낸다. 칼빈의 서간은 2022년 현재 더 이상 늦어지지 않도록 반드시 한국개혁교회에서 충분히 연구되어야 한다.3)
이를 위해, 필자는 이번 호에서 칼빈의 서신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며, 대략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물론, 이는 원문수준에서 분석되어야 마땅하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작업으로서 일종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임을 고려해야 한다. 실로, 이는 원문수준에서 그것을 진행할 경우 얼마든지 세계적인 논문으로 쓰여질만큼 중요하다.4)
관련하여, 필자가 선택한 『칼뱅 서간집』 1권은 박건택 교수의 여러 저작 중에서도 매우 우수하다. 그는 칼빈이 20대에 주고받은(1530-1538년 사이) 편지들을 『칼뱅 서간집』 1권에 거의 번역하였으며, 덤으로 철저한 주석을 첨부한다.5) 이는 한 사람이 모두 집필했다고 보기 어려운 질적 양적 쾌거이다. 아마,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감히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이제 필자는 『칼뱅 서간집』 1권 일부에 나타난 칼빈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대략적으로 분석하며, 향후 추가적인 연구의 필요성까지 강조하려 한다. 흔히, ‘기독교강요’를 집필한 기계적이고 냉담해 보이는 칼빈이 과연 그의 편지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해도 좋다.
결론부터 말하면, 칼빈은 삶에서의 작은 경험들을 토대로 그의 신학체계를 구축했다. 그것이 돈에 관한 것이든 친구에 관한 것이든 로마가톨릭교회를 대하는 것이든 질병에 관한 것이든 계시에 관한 것이든 책을 집필하는 고난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6)
1. 칼빈이 프랑수아 다니엘에게(1번 편지)
“자네는 이윤을 위해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무상으로 베풀기 때문이네.”7)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이 평소에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위해, 자주 돈을 빌렸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칼빈은 무상으로 무엇을 제공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을 것이다. 칼빈은 무엇을 선물로 주는 자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직접 또한 구체적으로 또한 장기간 경험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유형물에 해당하는 돈 뿐만 아니라 무형물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마땅한지로 이어졌을 것이다.8)
2. 칼빈이 프랑수아 드 코낭에게(2번 편지)
“비록 세상에 드러낼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중략) 예리한 사람들은 이미 알키아티가 자신의 지나치게 날카로운 웅변과 참을성 없는 혀로 인해 동일하게 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 가명으로 숨기를 원했으리라는 것을 간파했답니다.”9)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누군가가 글을 쓴 목적부터 알아야 그의 글을 정당히 비판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동시에, 이는 칼빈에게 어떤 글을 씀에 있어, 머리말 또는 서론부에서 철저하게 무지한 자들의 공격을 대비했음을 추측케 한다. 실로, 칼빈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철저하게 여러 글의 머리말 또는 서론부에서 밝힌다.10)
“그러나 먼저 그는 자신이 쓴 책이 불완전하고 잘못된 형태로 사람들 손에 넘어가는 일이 없기를 원했습니다.”11)
또한, 칼빈은 다른 사람의 글을 비판하는 데에 그것의 완성도를 중요하게 따져야 함을 전제한다.12) 곧,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프랑수아 드 코낭에게 글의 완성도가 중요함을 전제하고 강조한다. 이는 칼빈의 글을 읽을 때, 그가 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연구하도록 유도한다.13)
“그러나 최근 우리의 대화와, 보다 앞선 우리의 빈번한 편지들을 통해 나는 그대가 레투알-그대도 그의 강의를 들었거니와-에 대해서 얼마나 훌륭한 견해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서 얼마나 존경스럽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가 이 논쟁에 어떤 종류의 편견도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4)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반복적인 대화를 통해, 어떤 글에 포함된 누군가의 신학적 견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칼빈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편견의 제거를 강조한다. 칼빈은 소통이 없이 누군가의 신학적 견해를 비판하는 것은 편견을 제거하지 못한 오류에 해당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와의 꾸준한 소통을 필요로 한다고 전제한다. 나아가, 이는 칼빈이 자신의 글을 쓰고 어떤 신학적 주장을 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소통과 편견의 제거에 공을 들였는지를 추측케 한다.
3. 프랑수아 다니엘이 칼뱅에게(3번 편지)
“자네는 편지 끝에 내가 약정된 식사에 참석하지 않고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을 원망하고 있더군. 나는 실로 마음이 아프지만 내 잘못을 인정한다네. 출발을 다음 날로 미뤘더라면 좋았을텐데! 자네가 뒤누이의 법무관에게 쓴 내 편지들을 통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다만 자네가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네.”15)
프랑수아 다니엘에 따르면, 칼빈은 주위 다른 사람의 감정을 눈치있게 잘 파악했고, 그것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주위에 표현했다. 추측컨대, 칼빈은 평소 타인과 자신의 감정을 치밀하게 관찰 및 비평하여 자신의 글을 꽤나 직설적으로 썼을 것이다.16) 실제 칼빈의 서적을 분석하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함에 있어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표현했을지언정, 혹자가 그에 대해 오해하듯 기계적으로 또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는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4. 칼뱅이 니콜라 뒤슈맹에게(4번 편지)
“차분하게 심사숙고한 뒤,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어. 즉, 자네가 오랜 친분과 매일의 교제 가운데 내게 품어 왔던 모든 존경심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다는 것과 자네의 성품이 빈틈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상냥하고 정중하기 때문에 자네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보다 경솔한 짓은 없다는 것이라네.”17)
여기서 칼빈은 누군가의 신학적 견해를 제대로 비평하기 위해, 매우 신중해야 함을 전제한다. 칼빈은 누군가의 신학적 견해를 비평하는 것이 그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침을 안다. 아마, 칼빈은 뒤슈맹의 집에서 하숙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로 그것을 판단하는 방법과 그 와중에 요구되는 세밀한 대인관계 파악 및 관련된 상황 대처 능력을 키웠을 것이다.18)
“왜냐하면 내가 진지하게 자네들에게 돌아가려 했을 때 내 아버지의 병환이 이 지체를 야기했기 때문이네. (중략) 하지만 결국 회복의 가능성이 없었고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의무감에서 비롯된 내 기다림은 연장되었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난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될거야.”19)
칼빈도 평범한 누군가의 아들로서 살았다. 칼빈도 평범한 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구성원으로 성장했고, 교육받았고, 특히, 부모의 병환을 돌봤다. 이는 칼빈의 글을 이해함에 있어, 그 기저에 존재하는 평범함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문구들은 그의 글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접근루트를 제공할 수 있다.
“자네 벌써 문학과 교수들 중에 자네 이름을 신고했는가? 수줍음 때문에 자네가 게을러지지 않기를 바라네. 잘 있게. 소중한 뒤슈맹,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나의 친구여!”20)
칼빈은 평범한 우리네 친구의 모습도 가졌다. 특히, 이는 뒤슈맹이 문학과 교수와 전혀 무관함에도 이러한 말을 건낸 것으로 여실히 드러난다. 칼빈은 친구에게 장난을 걸거나 농담을 건네기도 하며,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익살스럽게 드러낸다. 이러한 문구들은 그의 글에서 일상적인 친구에 관한 또는 하나님에 관련된 친구 개념을 드러내는 그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접근루트를 제공할 수 있다.
5. 칼뱅이 니콜라 뒤슈맹에게(5번 편지)
“자네에게 만큼은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나에 대한 자네의 너그러움을 믿고, 오직 자네만을 의지하겠네. 내 형-나는 내 채무자들이 청산한 돈을 그가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네-은 늘 그랬듯이 태만하여 내 기대를 무시했다네. 이제는 하루에 한 시간도 채 견디지 못할 만큼의 궁핍이 나를 압박하고 있지.”21)
해당 문장에서 형은 칼빈의 친형이 아닌 함께 동거동락한 칼빈 주위의 나이 많은 누군가를 의미한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앞서, 함께 하는 사람의 중요성과 사역의 안팎 문제 핵심에 재정이 있음을 알았다. 이는 그가 종교개혁에 뛰어들었을 때, 그를 교회의 재정적인 운영과 인적인 운용에 관해 고민하도록 만든 일종의 사전연습에 해당했을 것이다.22) 관련하여, 이는 그의 글에서 나타난 친구와 동역자와 교회재정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하나의 접근루트를 제공할 수 있다.
(이어, “나가며”에서 계속됩니다.)
I. 서론
1. 부동산(땅, 토지)으로 해석되는 κτήματα23)
개역개정성경의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은 원어인 κτήματα가 번역된 단어이다.24) κτήματα25)는 일반적으로 한국어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언어에서 재산(Property) 또는 재물(Posession)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번역된다.26)
하지만, κτήματα를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5:1에서 κτῆμα는 영어 성경인 DRA, 독일어 성경인 EIN, LUT, 프랑스어 성경인 BFC, 네덜란드어 성경인 LEI의 경우 이를 농작할 수 있는 땅 또는 토지(Land, Estates)와 관련된 단어로 표현된다.27)
관련하여, 먼저, 현재 총신대학교 교수인 신현우는 κτῆμα를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 그것이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에서 사용된 용례를 히브리어 구약성경인 BHS와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것이 의미하는 범주를 성경 안에서 좀 더 확실하게 좁히기 위함이다.28) 참고로, 그는 잠언 12:27, 23:10, 31:16와 욥기 20:29, 27:13와 호세아 2:17와 요엘 1:11에서 κτῆμα가 토지(Land, Estates)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29)
또한, 신현우는 κτῆμα가 신약성경에서 총 4회 사용되며, 마가복음을 제외하고 마태복음 19:22과 사도행전 2:45, 5:1에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어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단어가 다른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연구하는 것이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밝히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 물론, 그는 이를 κτῆμα에 마찬가지로 적용한다.
신현우는 마태복음 19:22이 마가복음 10:22과 병행구절임을 강조하며, 마태복음에서 κτῆμα를 신명기 27:17에 근거하여 누군가가 과도하게 소유하고 있는 토지(Land, Estates)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30) 그에 따르면, 해당 마태복음 본문에 나타난 청년은 지나치게 많은 κτῆμα를 소유했으며, 그것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31)
또한, 신현우는 해당 사도행전 본문들에서 사용된 κτῆμα를 토지(Land, Estates) 또는 집(House)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사도행전 4, 5장이 독자로 하여금 κτῆμα를 토지(Land, Estates)로 이해하게끔 지속적으로 χωρίου(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지적한다.32)
신구약성경 이외에도 신현우는 구약외경과 요세푸스의 저작을 살피며, 마가복음 10:22에서 사용된 κτήματα의 의미를 토지(Land, Estates)로 해석해야 함을 증명하고 강조한다. 관련하여, 그는 자신의 주장에 주석학적 증명을 더하기도 한다. 그는 테일러(V. Taylor)와 레인(W. L. Lane)과 스웨테(H. B. Swete)와 페쉬(R. Pesch)와 만(C. S. Mann)과 브랫처(R. G. Bratcher)와 나이다(E. A. Nida)가 마가복음 10:22의 κτήματα를 토지(Land, Estates)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언급한다.33)
물론, 신현우는 κτήματα를 토지 등의 부동산(움직이지 않는 재산)으로 해석하지 않고, 유동산(움직이는 재산)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그의 저작 곳곳에서 밝힌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듯 만약 마가복음 10:22와 마태복음 19:22에서 κτήματα가 유동산으로 이해된다면, 이는 율법에서 지나치게 많이 가진 것으로 규정할만한 것이 아니므로 문맥적으로 예수님의 발언에 논리성이 떨어진다.34)
결정적으로 신현우는 이어지는 마가복음 단락(마가복음 10:23-31)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토지 즉, 전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개역개정성경의 마가복음 10:29에서 전토로 번역된 ἀγροὺς는 마가복음 10:22에서 사용된 κτήματα와 평행구절로 볼 수 있다.
신현우에 따르면, 마가복음 10:23에서 재물로 번역된 χρήματα가 마가복음 10:22에서 재물로 번역된 κτήματα를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유대인 청년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깜짝 놀란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마가복음 10:22의 κτήματα를 토지(Land, Estates)로 해석해야 유대인 청년이 율법의 규정에 스스로가 맞지 않음에 낙심할 수 있으며, 동시에 마가복음 10:23의 χρήματα를 그것보다 더 큰 범주인 재물(Posession)으로 해석해야 제자들이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6) 곧, 그는 마가복음 10:22에서 사용된 κτήματα라는 단어를 한국어 토지(Land, Estates)로 해석한다.
2. 마가복음 10:22의 구원론적 의미
필자는 신현우의 주장에 동의하며, 그것을 구원론적 논의로 확장하려 한다. 곧, 마가복음 10:22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결과물로서 소위 지나치게 많은 토지(Land, Estates) 다시 말해, 지나치게 많은 부동산의 소유를 경고한다. 관련하여, 많은 성경해석자들이 주장하듯 해당 마가복음 본문은 개인의 구원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부동산 소유에 대한 개인적 관점을 다룬다. 달리 말하면, 해당 성경본문에서 지나치게 부동산 소유욕을 가진 자와 특히, 이를 전제로 실제 지나치게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자는 구원(Salvation)을 확신할 수 없다.
미리 밝히자면, 필자는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토지(Land, Estates) 자체를 많이 구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갈 때, 현상학적으로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다만, 필자는 대부분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을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욕구를 보이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넘어, 구원론적으로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려 한다. 대부분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많은 부동산을 가지려 하며, 그러한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데에 진력하여, 자신의 신앙없음을 증명한다. 현세적 또는 내세적 구원을 확증하지 못한 채, 그저 부동산 소유권만을 확증하며 말이다.
3. 부동산(땅, 토지)에 대한 이념 논쟁의 배제 필요성과 새롭게 정의한 그것의 공공성(Publicity)37) 개념
성경은 어떤 성경본문의 문맥적 필요에 따라, 때로는 개인적 구원에 대해 때로는 공동체적 구원에 대해 다룬다. 이때, 성경은 그것이 둘 중 무엇을 타겟으로 했든 상관없이 책임감 있는 역할을 그것들 각각에게 부여한다.
예를 들면, 개인적 구원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누군가의 믿음의 유무와 직결됨을 또는 공동체적 구원에서 특정 집단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 집단 내 구성원 또는 그 집단 밖 구성원 또는 어떤 다른 집단에 실천하여 구원받은 공동체임을 드러내어야한다.
참고로,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부여하시고, 이를 근거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하에서 세상을 사용하는 권리를 주셨다.38)
곧,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면, 그 모든 종류의 피조물에 대하여, 그것들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그것들이 잘 유지되고 성장하도록 노력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물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그 또는 그것에게 허락될 수 없다. 그 또는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대리인 즉 청지기로서 그것들을 돌보는 데에 본분을 다한다. 그라면, 자신의 구원을 걸고, 그것이라면, 공동체의 정체성을 걸고, 그것들을 특히 부동산을 적절히 사용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신학적 전제를 바탕으로 부동산을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부동산에 공공성(Publicity)을 부여해야 한다고 바꾸어 표현하려 한다. 분명히 누군가가 가진 부동산은 신학적으로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의 것이다.
곧, 필자가 본론에서 말하려는 이 공공성 개념은 온전히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에서 출발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적절한 부동산 사용39)에 대한 개념은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기존에 갖고 있는 자본주의적40) 또한 공산주의적41) 가치체계와 그것이 형성되는 토대에서 전혀 다르다.42) 이는 누군가가 선험적으로 가진 이념적 전제를 배제해야 필자가 언급중인 부동산의 공공성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음으로 귀결된다.
실로, 인간이 만든 어떤 종류의 이념과 가치체계도 성경이 인간에게 제안하는 삶의 원리에 우선할 수 없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것들은 단순히 성경에 기초한 삶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 또는 참고적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하다. 필자는 행여나 그것들이 누군가가 내세에서 맞이할 구원 또는 현세에서 누리는 구원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만약 자신의 선험적 가치체계로 필자의 글을 반박하려는 자가 있을 경우 자신의 신앙유무를 점검하기를 조언한다. 안타깝게도 위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Ⅱ. 본론
개혁교회는 인간43)의 토지44) 사용과 소유를 논의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 논의를 선행한다. 개혁교회에 따르면,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토지를 창조하여, 그것이 인간에게 사용되도록 했다.45) 개혁교회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대표적인 실체인 지각(地殼)을 만들어, 하나님을 닮은 인간 특히 그리스도인46)에게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도록 곧, 제한적으로 사용하게 했다.47) 그렇다. 이는 개혁교회에서 토지에 대해 올바로 접근하는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명제이다.
1. 토지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위한 전제 – 토지의 창조 목적, 인간에게 허락된 토지의 사용권과 소유권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은 창세기 1:1에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본질적 주인임을 선언하며, 땅에 대해 에레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48) 참고로, 이외에 구약성경은 땅을 싸데, 아다마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땅에 대한 다양한 명칭은 하나님이 문맥의 필요에 따라 땅이 존재하는 특별한 이유를 드러내기 위함이다.49)
관련하여, 조형욱에 따르면, 그중 싸데는 그 중에서 가장 작은 개념으로 농업적인 생산과 소유가 가능한 땅을 주로 의미하며, 이것에서 더 확장된 개념인 아다마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땅을 주로 의미한다. 그리고 싸데, 아다마를 모두 포함하되 더 확장된 개념인 에레츠는 하나님의 현세의 창조물이자 나아가 내세의 창조물로서의 개념까지 염두해야 하는 땅을 주로 의미한다.50)
이때,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핵심적으로 땅에 대한 각기 다른 명칭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소유권과 그것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이 그곳에 사는 인간에 의해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점검 및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땅의 이름을 다양하게 나누고, 그것들을 문맥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 중심적으로 인간이 땅을 소유하고, 활용해야 함을 확인 및 강조한다.51) 곧, 하나님은 땅에 그러한 여러 특별한 목적과 존재이유를 부여했고, 이를 성경에서 여러 다양한 단어로 땅을 표현하며 그것이 사용된 문맥에서 인간에게 여러 특별한 반응을 요구 또는 의도한다.
물론, 이를 합리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을 선제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는 토지도 피조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먼저, 개혁신학52)은 인간의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과 관련해, 다른 기독교신학과 구별되는 독특한 관점을 지닌다. 바로, 인간을 하나님의 일그러진 모상(模像)으로 본다는 점이다.53) 개혁신학은 인간의 소유권을 설명할 때,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모상 즉, 형상과 모양을 반드시 전제하며,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개시한다.
다시 모상부터 상세히 설명하겠다.54)
개역개정성경 창세기 1:26에 ‘형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히브리어 첼렘55)과 라틴어 이마고(Imago)에 해당한다. 또, 동일 성경본문의 ‘모양’은 히브리어 데무트와 라틴어 시밀리투도(Similitudo)에 해당한다.56)
초대교부인 이레니우스57)와 터툴리안58)은 전자를 인간의 자연적 특징으로 후자를 인간의 초자연적 특징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전자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이성(理性)이라 주장하며, 이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59) 또한, 그들은 후자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잃게 된 신적 이성(理性)이라 말하기도 했다.60) 참고로, 이는 직관적인 사고의 결과물로서, 인간에 대한 그들의 이해방식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인간론61)의 중추(中樞)를 이룬다.62)
이후,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신학은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견해를 한층 독자적으로 발전시킨다. 대표적으로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5장에서 초대교회 교부 이래로 진행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관한 논의를 매듭짓는다.63) 요약하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 그것들을 굳이 독립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64) 해당 성경본문을 통해 타락 이후에 인간이 잃어버린 즉, 인간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어떠함이 있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 정리했다.65)
핵심적으로 개혁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모상이 어느 정도까지 남아 있는 존재로 이해하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근본적으로 주종66)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사람의 생존과 존엄에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로서 특정 신학적 전제로 말미암는 직관적 결론에 해당한다.67)
그리고 다른 인간에 대한 사용과 소유에 대한 개혁신학의 이러한 전제는 토지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을 설명할 때에도 긴밀히 적용된다.68) 상세히 말하면, 개혁신학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다룸에 있어, 인간이 토지 자체의 사용과 소유에 더불어 그것을 통해 발생하는 다른 인간에 관한 사용과 소유를 통합적으로 고려한다.
관련하여, 개혁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상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으나 그것이 일그러진 상태이기에, 인간이 토지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에 관해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어떤 문제69)가 생길 수 있음을 경계한다. 즉, 개혁신학은 창세기 1:28에 근거해 인간이 토지를 만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이를 바르고 적절하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도 있지만, 반면, 죄로 인해 그것의 제대로 된 실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고려한다.70)
자! 그렇다면, 성경이 인간의 올바른 토지 사용과 소유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서술하며, 또한 성경은 잘못된 토지 사용과 소유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서술하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토지가 피조물임을 전제로 그 자체의 사용과 소유에 대한 또한 이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다른 인간의 사용과 소유에 대한 옳고 그름을 성경본문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71)
주요 성경본문은 창세기 1:26이다. 성경은 이를 통해 토지와 하나님의 일부 모상인 인간의 관계를 정의한다. 관련하여, 창세기 1:26에는 ‘다스리다(라다)’라는 단어와72) 창세기 1:28에서 ‘정복하라(카바쉬)’라는 단어가 등장한다.73) 하나님은 해당 성경본문에서 하나님의 일부 모상인 인간에게 토지(또는 땅)를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2가지 명령을 내리며, 토지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한다.74)
개혁신학은 전자를 설명하기 위해 땅에 적용한 성경의 25번의 용례(用例)를 분석하여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1:26, 28, 민수기 24:19, 시편 29:15, 이사야 14:2, 6, 에스겔 29:15 등이 있다.75)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가축, 온 땅, 땅에 기는 모든 것 등 총 5가지를 다스리도록 인간을 창조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은 토지에 대해 자세한 부연설명을 덧붙이며, 그것들을 토지에서 지배(rule)76)하라고 명령했다.
이어, 개혁신학은 후자를 설명하기 위해 땅에 적용한 성경의 13번의 용례(用例)를 분석하여 설명한다.77) 대표적으로 민수기 32:21-22, 여호수아 18:1, 역대상 22:18 등이 있다.78)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토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기를 바라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정복하다라는 표현에 이방민족과 그곳에서 행해진 문제점을 지닌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主權)이 인정되고, 토지에 대한 인간의 청지기적 삶이 실현되는 즉,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실천되는 곳임을 전제한 ‘제압하다(subdue)’79)라는 뜻이 들어있다.
나아가, 종합적으로 2종류의 해당 성경본문들을 모두 살펴보면, 그 이유와 과정과 방법이 어떻든 잘못된 토지의 사용과 소유는 특정하고도 반복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80) 또는 비자발적81) 의지와 상관없이 또한 사회법82)에 근거한 상호합의에 상관없이 소수로의 토지의 집중화를 통해 다수가 희생됨을 의미한다.83) 이는 토지를 주신 본래의 목적인 소위 피조물들을 다스림(Ruling)과 하나님의 대적들을 정복함(Subduing)과 전혀 무관한 결과로서, 단순히 개인의 욕구를 채우는 용도로 토지가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또한 대표적인 표식이다.
예컨데, 성경에서 언급된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관한 나쁜 사례 2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토지에 관한 2개의 본질적인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성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먼저, 대표적으로 아모스 2:8, 5:11은 그러한 문제에 직면한 북이스라엘에 내려진 하나님의 경고를 다룬다.84) 관련하여, 아모스는 주전 8세기 초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강대국 앗수르는 다메섹과 전쟁을 벌여, 다메섹을 멸망시켰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그 틈을 이용해 경제적으로 영토적으로 발전했다. 실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를 거치며, 왕권과 국력을 매우 강화했다.85)
문제는 그러한 격변의 과정에 올리브기름, 포도주 등의 수출 품목의 생산을 강화하고, 휴한지(休閑地)의 양을 줄이며, 즉, 경제성장 중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밀, 보리 등의 생필품의 총량이 줄어들고 단가(單價)가 폭증한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러한 변화는 다수의 북이스라엘 농민들에게 토지를 저당잡거나 헐값에 팔 수 밖에 없는 선택을 가져왔다.86) 물론, 소위 힘 있는 유대교인이라는 탈 또는 가면을 쓴 비신앙인들의 욕심에 근거하여 말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동시대를 살았던 남유다의 이사야 선지자도 경험했다. 당시 남유다는 상기 언급된 북이스라엘과 비슷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이에, 이사야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이사야 3:14-15, 5:8-10에서 사회의 부와 권력을 거머쥔 소위 힘 있는 유대교인이라는 탈 또는 가면을 쓴 비신앙인들에게 비슷한 예언을 했다.87)
특히, 후자의 성경본문은 심각한 흉년이 들어, 대지주라 할지라도 파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수사학적으로 경고한다. 당시, 고대 근동 전역에서 관개 시설이 잘 된 지역은 어떤 씨앗을 심었을 때, 대게 수확을 10배로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해당 성경본문은 씨앗을 심었을 때, 수확을 10분의 1로 거둘 것이라 말한다. 이는 언어유희로 남유다 공동체의 약자를 하나님의 법이 아닌 단지 사회법에 근거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대지주들에게 그들이 처참한 결과를 맞을 것임을 수사학적으로 암시한다.88)
즉, 성경은 토지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2개의 본래 의도로 사용되지 못할 경우에 곧, 토지로 재화를 생산하되 그와 관련된 선한 관계89)를 맺지 않거나 또는 토지에서 이방인의 나쁜 관습을 제거함이 아닌 역으로 그것을 들여와 적용하는 경우에 예를 들어,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 또는 이념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에 심판을 경고한다.
자! 혹시, 그렇다면, 성경은 관련된 좋은 예를 들고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내용일까? 최소한 누군가가 땅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려 노력한 예는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통해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대한 모범과 현대적으로 적용가능한 원리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토지를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소유하려 노력한 경우를 소개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토지를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하려 노력한 대표적인 예가 있다.
바로, 느헤미야 5:1-6, 9이다. 해당 성경본문은 느헤미야를 통해 유대 혈통의 귀족들과 민장들을 비난한다. 이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다른 유대인들의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늘 그러하였듯 그들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 중인던 바사왕국 곧, 이방 나라의 나쁜 관습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 또는 합법화한다. 그렇게, 그들은 그것에 근거하여 동족들에게 높은 부채이자90)를 부과한다.
관련하여, 느헤미야는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할 것이라 말하며, 그들에게 동족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쫓으라고 명령했다. 곧, 느헤미야는 토지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원래의 의도로 사용하도록 곧, 토지로 재화를 생산하되 선한 관계를 맺고, 토지에서 이방인의 나쁜 관습을 제거하기를 예를 들어,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 또는 이념을 중심에 두고 토지를 악용하지 않기를 유대인들에게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그렇다. 조형욱의 주장처럼,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현대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느헤미야 시대는 처음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대해 기록한 각각의 구약성경본문91)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느헤미야가 과거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대해 기록한 각각의 구약성경본문을 당대의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여, 그 근본되는 가르침을 어떻게 계승(繼承)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그는 토지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대한 권한을 당시대에 알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92)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느헤미야를 본받아 토지를 사용하고 소유함에 있어, 세상의 법보다도 우선하는 하나님의 법이 있음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토지는 원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용되어야 한다.93) 그것이 사회법적으로 통념적으로 어떤 행정처리를 요구하든 말이다.
특히, 토지의 사용과 권한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해치지 않음과 이방습관의 그것으로의 침투 거부를 전제로 용납된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이념과 경제원리와 정치제도일지라도 그것은 특정 인간집단94)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낸 특정 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 그것이 오용되어 토지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독(毒)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관해, 누군가의 현세와 내세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을 결정할 수 있다.
2. 토지 사용과 소유에 관한 현대적 논의와 이를 위한 개혁신학적 전제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우주의 만물95)을 창조하시고, 이를 경영하는 분이라 말한다. 이때, 개혁신학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이 우주의 만물96)을 만든 이유다.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개혁신학은 모세오경에서 서술된 희년법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는 현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주의 만물 중에서도 토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소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97) 희년법에 따르면, 토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 또는 구속사역의 도구이자 그것이 펼쳐지는 장소임이 그 첫 번째 존재 목적이다.98)
김회권이 언급하듯 토지는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99) 그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것은 누군가가 먹고, 자고, 가정을 이루고, 돈이라는 각종 재화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간이다. 즉, 이는 성경에서 다루는 토지의 개념이 현대적으로 단순히 농사를 짓는 농지(農地)가 아닌 아파트나 상가나 오피스텔 그 밖의 모든 종류의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현세를 살아가는 물리적 터전에 해당함을 의미한다.
실로, 김회권과 비슷하게 개혁신학은 성경에서 다루는 토지의 개념과 그것의 존재 의미를 현대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장차 미래에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이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분석하여, 그들 모두에게 각각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찾는다. 개혁신학은 이를 통해 각 세대가 토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제 본고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신구약성경에서 다루는 토지의 개념을 생존을 위한 재화창출을 위한 현대적 개념인 부동산에 적용할 것이다. 나아가, 본고는 신구약성경에서 다루어지는 토지 사용방법의 구체적인 현대적 적용점에 관해 언급할 것이다. 이는 한국을 넘어, 전세계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관한 매우 합리적이며 생산적이며 구체적인 답변이 될 것이다.
(이어, “다음 호 또는 다음 부록 호”에서 계속됩니다.)
< 다시 해 봐! >
- 윤 선 영 ㅡ
요즘 같이 업무들이 복잡하고 섬세하며 전문화 된 시대에서는 웬만큼 세련되고 능숙하게 일 처리를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설 곳이 없어진다.
“그것도 못해?”, “아직도 수준이 이것 밖엔 안 되나?”, “그만두게! 다른 사람 시킬테니까.”, “나가 봐!”
이런 말들은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렇게 단칼에 자르듯 내리치는 말은 듣는 당사자의 심장을 세게 내리 누르고 펌프질하여 솟구치는 혈액이 얼굴을 붉게 달아 오르게 하며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게 한다. 그 뒤에 따르는 절망감과 자신의 무능함을 향한 뼈저린 질타는 그것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종친 것 같음을 느끼게 하는 깊은 한숨과 좌절의 늪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하지만, 쓸쓸히 문을 나서는 그에게 등 뒤에서 들리는 “다시 해 봐!”라는 제 2의 목소리는 얼마나 사람을 생기있게 하는가?
“예, 다시 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더 정신을 차려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절대로 실망시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이미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 충전 100%이다. “다시 해 봐!” 라는 말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결코 그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해 봐!”는 주님의 넉넉하신 마음과 닮아 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던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도...
예수님이 주시는 “다시 해 봐!”의 기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빛나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을까? 하기야 제 2의 기회도 저버린 가룟 유다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다시 해 봐!”의 신선한 바람이 성질 급하고 요구하는 것 많고, 사람을 무시하기 일수인 사회생활에서 뿐 아니라 주님의 넉넉한 마음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 교회 안에서와 크리스챤들 사이에서 더 많이 불어 넘쳤으면 좋겠다.
성경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3:13~16
개역개정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제목
낙심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해요!
요약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선한 일이라 표현하며, 데살로니가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그것을 행하도록 권면해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사랑으로 권면해야 한다고 말해요!
단어 설명
선(13) : 착한 일, 여기서는 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함
순종(14) : 순순히 따름
권면(15) : 좋은 말로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충고함
평강(16) : 걱정이나 슬픔이나 고통 등 힘듦이 없음
관찰하기
1.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어떻게 권면해야 하나요?(15절)
1번 친구 :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나도 사실 하기 싫지만 그냥 하는거라고!”라고 말하기
2번 친구 : 화난 표정으로 주먹을 쥐며, “너 같은 사람은 혼나야 해!”라고 말하기
3번 친구 : 기쁘고 행복한 표정으로 “너도 나와 함께 하면 좋을거야!”라고 말하기
정답 : 3번
2.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을 무엇이 아닌 무엇으로 여겨야 하나요? 자음 힌트를 참고하여 문장을 완성해 보세요(15절).
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같이 권면하라
정답 :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생각하기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 데살로니가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해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계속 있었어요. 이때,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하라고 말했어요.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망하고, 화날 수 있어요. 가끔, 하나님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꾸준히 감당하고, 하나님의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권면하는 어린이가 되어요!
느끼기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 무슨 느낌이 드나요?
결심하기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에 어떤 것이 있는지 적어보고(친구에게 전도하기, 교회에서 봉사하기, 헌금을 정기적으로 하기 등), 실천하기로 결심해요.
기도하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세요!
필자는 최근 연말정산 서류와 헌금위원들의 헌금 감사를 한다고 머리가 아프게 숫자와 명단을 확인하였다. 연말정산 서류와 재정 감사는 교회 재정부에서 하는 업무였지만 작년 교적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이전에 있던 재정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새 교적 프로그램을 모르는 재정부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보통 교적프로그램이 재정관리프로그램과 같이 연동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에 필자는 교적을 열어 성도들의 연말정산 서류들을 때며 헌금 상황들을 살피고, 교회 재정이 잘 맞는지 살펴야했다.
필자는 교회 회계 사무원이 된 기분으로 열심히 교회 재정을 검토하고 성도들의 기부금영수증과 연말정산 서류들을 떼어주었다. 그러다보니 성도들의 헌금상황과 직분들이 눈에 너무 선명하게 들어와 자꾸 그 성도를 보면 헌금한 금액이 떠올랐다. 이렇게 행정업무를 한 달간 하다가 보니 마음의 어려움이 생겼다. 목사로서 ‘내가 회계 사무원도 아닌데…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과 헌금을 할만한 성도들이 헌금생활을 하지 않고, 헌금을 적게하거나 성실히 하지 않으면 그 성도들을 볼 때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부목사로서 재정, 행정, 시설 관리, 차량, 방송 등의 기능적인 사역을 맡은 부목사들은 다 한번씩은 해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부목사로의 사역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부목사로서 사역을 ‘교회 행정이 먼저냐? 성도의 영혼이 먼저냐?’ 어디에 중점을 두는 것이 맞을까?라는 필자는 기능적인 사역과 핵심적인 사역에서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역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기능적인 사역이 수반되지 않으면 영혼을 돌보고 위로하는 사역을 할 수 없고, 영혼을 돌보는 핵심적인 사역만 하게되면 교회의 행정과 일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부목사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사역이며 부목사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연구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필자는 부목사는 어떠한 리더십으로 교회를 섬기고 사역을 해야할지 부목사의 위치와 가져야할 자세 담임목사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해보기로 하였다.
1. 부목사에 대한 이해
1) 교회 안에서의 부목사의 위치와 가져야할 자세
교회 안에서 담임목사와 관련한 부목사의 위치가 바르게 설정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우리는 부목사의 바른 위치를 공생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공생은 가까운 관계 혹은 연합으로 두 비슷한 기관이 함께 사는 것을 말하며, 특히 두 생물체가 서로 이득을 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공생에서 두 생물체는 기본적으로 독립하면서 어떤 것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꿀벌과 토끼풀의 공생에 있어서 꿀벌은 토끼풀로부터 꿀을 얻고 토끼풀은 꿀벌에 의해서 번식한다. 토끼풀은 석회와 같은 광물질로 성장하고, 토끼풀은 흙에 질소를 보내준다. 이들은 독립적이면서 생존을 위해 상호 의존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담임목사는 독립적 존재이지만 협력 사역을 위해서는 부목사와 의존해야 한다. 부목사도 안수 받은 독립적 목사이지만 교회 사역을 위해 담임목사와 상호 의존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1)
이런 의미에서 부목사는 “고용된 손”이나 “임시로 채용된 하수인”이 아니라 협력사역을 위해 독립적으로 일하는 동역자인 동시에 팀을 위해 담임목사에게 의존하면서 일하는 교역의 협력자이다.2) 부목사는 이와 같이 교회에 담임목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협력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부목사의 위치는 총회 헌법에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필자가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의 총회헌법에서는 부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부목사는 위임 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3)
총회 헌법에 정의된 부목사의 규정을 보면 부목사의 주된 사역은 위임 목사를 보좌하는 것이고 사역 기간은 임시직으로서 매년 당회장의 청원으로 노회의 승낙을 받아 시무계속 청빙을 받아야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부목사들은 대부분 위임목사(담임목사)를 보좌하며 협력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주된 사역이다. 그렇기에 부목사는 위임목사가 되기 전까지 부교역자로 사역하는 교회의 담임목사를 통해 자신의 목회적 철학을 세우고 목회 경험을 쌓아 가야한다.
각 교회 안에서 부목사들은 대부분 젊은 목사들로 장래에 각 지역 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사람들이다.4) 이러한 부목사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배우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이해하며 사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담임목사의 권한의 어떤 영역이나 혹은 담임목사적인 이미지를 월권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하며 부목사로서 자기 위치를 인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부목사로서 목회 현장에서 성급한 판단을 할 것을 미리 예방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부목사가 빨리 담임목사가 되고 싶은 나머지 너무 빠르게 자신의 성장을 시도하거나 그 자신의 위치가 아닌 월권적 권위를 취할 때 공동체 안에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부목사는 자기의 위치를 인지하고 겸손한 자세로 사역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젊은 부목사들이 가져야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인내, 적응의 시기, 말하기보다는 듣기, 일을 위한 지도를 받아들이기, 다른 동역자들과 마음을 열고 사귀는 것,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태도, 성실함 등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부목사로서 목회 기능의 한 분야를 책임 전달하여 권한 위임을 받았다 하더라도 교회 전체 목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부분으로서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담임목사와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보고하고 안건은 교역자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5)
2) 부목사의 인격과 영성
부목사는 업무적인 부분에서 전문성도 갖추어야 하지만 목회자로서의 인격과 영성을 갖추어야한다. 부목사로서 담임목사를 보조하는 것이 주업무이지만 성도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잃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부목사는 업무에 있어 전문성과 동시에 말씀과 기도를 통한 영성과 지성, 그것을 뒷받침할 체력이 필요하다.
한편, 성경에서 부목사의 인격적 자질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성경에는 부목사라는 단어가 없지만, 목사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목회자의 자질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다. 먼저 성경에 목사의 자질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①책망할 것이 없고(딤전 3:2, 딛 1:6-7) ②한 아내의 남편으로서(딤전 3:2, 딛 1:6) ③절제하며(딤전 3:2) ④근신하며(딤전 3:2, 딛 1:8) ⑤잘 가르치기며(딤전 3:2) ⑥술취하지 않고(딤전 3:3, 딛1:7) ⑦다투지 않는 자(딤전 3:3, 딤후 2:24) ⑧돈을 사랑하지 않고(딤전 3:3, 딛 1:7) ⑨완고한 고집이 아니며(딛 1:7) ⑩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고(딛 1:7) ⑪선을 좋아하고(딛 1:8) ⑫의로우며(딛 1:8) ⑬거룩하며(딛 1:8).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인 동시에 인격적 지도자이다. 영성은 인격을 통해서 표현되며 성도들은 목회자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다.6) 그러므로 부목사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사역하는 목회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7)
또한, 부목사가 행정과 기능적인 일 때문에 영적으로 침체되고 무기력해질 때가 많다. 그 때에 ‘주저 앉느냐, 다시 힘을 내 달려가느냐’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그의 영성 훈련에 있다. 목회자의 생활과 사역은 분명하게 성령의 내주와 그의 능력에 의해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8) 그렇기에 부목사에게 있어 영성은 더욱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전 4:7을 통해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딤전 4:5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라고 조언한다. 바울이 자신이 낳은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는데 그 비결은 “말씀과 기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목사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으려는 노력과 더불어 매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경건훈련을 통해 영성을 유지해야한다. 이러한 거룩한 노력들이 모여 인격과 영성을 겸비한 부목사가 될 수 있다.
3) 협력 사역에서의 부목사의 역할
교회가 부흥되어 교세가 확장이 되면 부목사들도 교구를 관리하고 교인들을 관리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 이에 부목사는 교인들이 교회에 소속감을 가지고 각 예배에 참여하도록 권하며 봉사하는 모든 일에 일꾼들을 세워야한다. 교구 안에 성도들은 직분자가 되고 일꾼이 되기 시작하면 성도들은 자신을 양육하고 영적 지도자인 당 부목사를 자신의 담당 목회자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사역에 담임목사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 교구담당 부목사는 담임목사의 협조를 요청한다. 또한 담임목사님의 설교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 담임목사가 주일 낮 예배의 설교를 감당한다면 부목사들은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등의 설교를 부분적으로 맡게된다.9)
또한, 교회 전도, 선교전략에 있어 담임목사는 부목사와 협의를 통해 당회의 의결로 교회의 일년 성장목표와 전체적인 목회 구상을 구체화하게 된다.10) 행정 분야의 부목사는 이렇게 세워진 방대한 교회의 연간 행사와 일정을 조절하고 원활하게 하는 행정적인 일을 담당하며 교회 전체적인 흐름을 바르게 유지하는 일을 담당한다. 교회력에 따른 각종 행사를 진행시키며, 특히 분산된 각 분야의 프로그램들을 적절하게 수렴 조절하여 담임목사에 의한 목회 방침에 합일되도록 해야한다.11) 최선의 교회행정은 교회의 프로그램이 추구하는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이용가치 있는 기술을 요구한다. 이에 교회에 최적화된 교적 프로그램을 숙지하고 활용해야하며, 성도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시스탬을 운영해야한다. 또한 성도들을 훈련하여 일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표가 있다. 그렇기에 교회 행정은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해야한다.
2. 바람직한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관계
부목사의 첫 번째 업무는 담임목사를 돕고 지원하는 업무이며 두번째는 담임목사에 대한 공격을 막고 지키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담임목사의 업무적 과중함을 덜어주기 위해 각 분야에 있어서의 분담을 말한다.12)
그리고 후자는 부정적인 비판으로부터 담임목사를 보호하며 담임목사의 입지를 잘 지킬 수 있도록 자랑하고 칭찬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 업무는 사실 부목사의 위치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를 말하고 있다.
한 가지는 ‘완전한 목사’로서의 위치이고 다른 한 가지는 철저히 보좌하는 그룹의 일원으로서의 위치이다. 대다수 교회의 부목사는 이 두 가지 위치가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한 부목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못하고 후자만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임택진 목사는 “한국교회 부목사를 말한다.”라는 대담을 통해 부목사는 원래 담임목사를 도우러 왔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하며 그 관계를 다음의 세가지로 비유하여 말한다.13) 첫째, 부부사이와 같았으면 좋겠다. 부부라는 말은 이해심 있는 관계로서 부목사는 담임목사의 뜻을 받들어 이해를 통해 일에 임하고, 담임목사는 부목사의 고충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였으면 좋겠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존경했던 관계를 뜻한다. 셋째, 친구 사이 같았으면 좋겠다. 동역자와 같은 의미로서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닌, 피차에 우정을 가지고 인정이 서로 통하는 관계를 말한다.
담임목사는 담임목사로서의 위치와 역할이 있고, 부목사는 부목사로서의 고유한 위치와 요구되는 기능이 있다. 담임목사의 민주적이며 인격적이고 포용력 있는 리더십과 부목사들의 협력적이고 창의적인 업무자세는 사역에 있어서 기능적임과 동시에 핵심적이다.14)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부목사로 상호 동역자로 위해서 부름 받았기에 서로를 더 존중하고 세워주어야한다.
정리하자면, 부목사로서의 바람직한 리더십은 담임목사의 동역자로서 교회 사역에서 협력의 원리를 고수하여 담임목사님의 목회를 조력하는 헬퍼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에 상호 존중하고 의존함으로 교회가 주 예수 안에서 부족함과 연약함을 서로 감당하며 더 화목하고 평안함으로 서가는 것이 바람직한 리더십의 모습일 것이다.15)
필자는 이번 페이퍼를 진행하며 부목사로서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담임목회를 나가기 전 반드시 한번은 고민하고 부교역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아야할 시간들이 필요하였는데, 앞으로 담임목회를 할 때에 부교역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함께 협력하여 사역해야할지를 그려보는 시간들이 되었다. 특별히 선임행정을 하는 입장에서 담임목사와 성도들을 잘 중재하고 교역자들을 잘 중재하는 행정 사역이 필요하고 동시에 목사로서의 본질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필자는 더 성숙한 부목사의 모습과 동시에 헬퍼십으로 목사님을 잘 도우며 사역을 해야겠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비극의 결말 3장
김한철 변호사는 더 이상 지체 않고 가슴 속에 넣어 둔 유언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죽을 날을 위해 제가 유언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 남편이 나에게 주고 간 재산이 살아있는 이에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유산을 물려 줄 자식들을 먼저 떠나 보냈으니 어쩌면 이 돈은 내 남편의 형제들에게 돌아가는 게 맞는 이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먼저 소영언니. 언니에겐 참 고마운 것이 많습니다. 일년에 다섯 번 있던 제사를 없애 준 것도 언니라는 걸 알아요. 항상 저 혼자 고생한다고 마음 써 주셨죠. 언니네 집안일도 바쁠 텐데 꼬박꼬박 명절이며, 제사며, 저를 도와준다고 제일 먼저 오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언니의 꿈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죽는 거라고 하셨죠? 논현동 건물은 언니랑 애들이 같이 살기에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삼성동 건물 임대료는 언니 요양비용, 기문이, 기영이 생활비까지 해도 넉넉하겠지요. 기문이는 한 번 자기 일이다 싶으면 끝까지 성실하게 잘 해내는 아이니 건물 관리를 맡겨도 안심입니다. 기영이는 마음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아이가 돈 걱정 안하고 속에 있는 것들을 글로 써서 사람들을 위로해 줄 날 반드시 올 겁니다.
김한철 변호사는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유언을 읽어 내려 갔다.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한기문은 복잡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이혼한 후로는 자신을 진심으로 인정해 주는 말 같은 건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설사 들었다 하더라도 그게 그들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기문도 알고 있었고. 예상치 못한 큰 어머니의 따뜻한 말들이 한기문의 심장을 쿵 내려 않게 만들었다. 유산을 기대하며 가졌던 이기적인 계획들이 조금씩 한기문의 머릿속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소영을 알고, 또 그녀의 아들 한기문과 한기영을 아는 김서라 여사는 자신이 남기는 유산이 해가 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가장 알맞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김서라 여사의 생각대로 한기문의 입에선 한 마디의 불평도 나오지 않았다.
문 옆에서 핸드폰 시계를 켰다 껐다 하며 유언 내용을 듣고 있던 김혜영은 한기문의 어머니인 마소영에 대한 유언을 듣고 속으로 열불이 터졌다. 한기문을 믿지 못하는 탓이었다. 김혜영은 유언장 공개가 끝나면 이 모든 내용을 이모는 물론이고 기영에게도 곧바로 알리리라 다짐했다. 그래도 김서라 여사가 한기문의 가족들에게 제시한 내용은 꽤 합리적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돈으로 쥐어 줬다면 한기문은 지체 없이 그 돈을 이상한 사업으로 탕진할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김혜영의 머리 속엔 평생 가족들을 괴롭히기만 했던 한기문을 골탕먹일 방법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김서라 여사의 유산을 받아 기고만장 해질 한기문을 상상하면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만약 그때 김한철 변호사의 입에서 김혜영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김혜영은 그 기분 나쁜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론 혜영아, 지영이가 없으니 너에게 지영이 몫을 주고 싶구나. 지영이가 처음 암에 걸렸을 때 네가 그 좋은 선생이라는 직업도 내려놓고 엄마 수발 든 거 잘 알고 있다. 너도 나이 들어 가는 마당에 암이 재발한 엄마를 끝까지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도. 처음 시집에 들어와 힘들어 하는 나에게 지영이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어. 지영이랑 나는 시누이, 새 언니가 아니라 자매였다. 네가 심성이 고운 건 아마 네 엄마를 닮아서겠지. 딸이라고 당연한 게 어디있겠니. 지영이 옆을 끝까지 지켜 줘서 고맙다. 심신이 지쳐 있을 너에게 복잡한 일을 맡기고 싶진 않구나. 너에게는 현금 50억을 남기마.
한기문은 자신의 것과 달리 정확히 계산이 되는 엄청난 돈에 눈이 두배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건물의 시세가 얼마나 되는지 핸드폰으로 재빨리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기문은 인터넷으로 알아본 두 건물의 시세가 김혜영이 받은 50억보다 조금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한 후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우리 엄마가 언닌데 좀 더 받는게 맞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반면 김혜영은 김한철 변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말한 후부터 한기문의 존재는 저 방 구석으로 던져 버린지 오래였다. 방금 들은 유언을 김서라 여사의 목소리로 바꾸어 자신의 귀 속에 넣었다가 혀끝으로 다시 꺼냈다. 그리고 김서라 여사의 고맙다는 말을 속삭이듯 계속해서 반복했다.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끝까지 지켜줘서 고맙다. 남편도 자식도 직업까지 포기하며 엄마의 수발을 들던 자신을 이해한다면서도 불편해 하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마지영의 암이 재발했을 땐 가족들이 마지영의 노쇠함에 안도했다는 사실도.
하지만 마지영은 김혜영의 하나뿐인 엄마였고,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엄마를 쉽게 잃을 순 없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부모를 잃은 사람은 고아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가장 사소한 신변잡기에도 마음을 다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 나의 엄마. 긴 시간 병수발을 드는 와중에도 김혜영은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절절하게 소중했다. 다만 엄마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걸 진심으로 슬퍼할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김혜영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혼자 무너지곤 했다.
간병의 고단함을 토로하지 않은 건 엄마인 마지영을 지키는 김혜영만의 방식이었다. 사람들이 엄마를 곤란한 사건으로 보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솔직한 심정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한기문의 동생, 한기영 정도 밖엔 없었다. 기영은 깊고 다정하며 단단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은 기영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김서라 여사가 김혜영이 간절히 바랐던 그 말을 남겼다. 고맙다는 말을. 김혜영은 자신이 소중히 지켰던 엄마 마지영과의 시간을 자신과 똑같이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이 있음에 가슴이 떨렸다.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는 상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리고 따듯하고 행복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김혜영을 마덕호가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누이를 지켜준 누이의 딸을 향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반면 김한철 변호사는 그런 김혜영의 변화를 일부러 모른 척 하며 유언을 계속 읽어 나갔다.
세 번째로 덕호 도련님. 남편이 마늘 사업에 손을 뗀다고 했을 때 사실 제일 속상하셨을 분이 도련님이란 걸 압니다. 형제들 중 가장 영특해서 일본에 유학까지 가 농업기술을 배우셨잖아요. 마늘 사업에 손을 떼겠다고 남편이 선언했던 날, 그 밤에 찾아와 형님 앞에서 목 놓아 울던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쓰리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가진 의성 농업기술연구소 주식 전량과 현금 20억을 드립니다. 늦었을진 모르지만 도련님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일들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김한철 변호사는 목이 탄지 옆에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시 끊긴 상주 방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한기문과 김혜영은 그 동안 작은 아버지인 마덕호의 속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마덕호는 시간이 멈춘듯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깊이 오열했다. 다리를 주무르던 손등에는 마덕호의 눈물이 떨어져 기름기 없이 움푹 파인 뼈마디 사이에 고였다.
사실 친척들을 선동해 죽어가는 형님 앞에서 김서라 여사를 협박하게 했을 때도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다. 아니, 사실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땐 뭐든 자기 멋대로 결정했던 마덕춘의 인과응보라고 생각했으니까. 한사코 싫다고 했던 일본농업학교 유학도 사실상 형님이 밀어 붙여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병씨 마늘 개발에 성공했을 땐 그래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 약간의 애정이 생길 수도 있었는데……. 마덕춘은 마늘 사업에 손을 뗀다는 말 한마디로 또 마덕호의 마음을 짓밟았다. 마덕호는 죽을 날을 기다리며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던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가 타오르는 걸 느꼈다. 당연하게 내 억울한 값을 받겠다 생각하고 왔는데 나는 지금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나는 형님을 미워하고 있지 않았나. 마덕호는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형님이 살아 계셨다면, 하다 못해 형수라도. 그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내 마음이 지금 왜 이러냐고. 하지만 진심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들을 보내고 마음을 다 잡지 못했던 그 순간에도 나를 끝까지 지켜준 너에게 내 모든 걸 남기고 싶구나. 남들이 뭐라고 해도 너는 내 또다른 자식이었다. 내 남은 땅과 현금 모두를 내 사랑하는 만복이에게 남기겠다. 만복이가 살아 있을 땐 재산관리는 하던 대로 김한철 변호사가 맡고, 만복이가 죽은 후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모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도록 하겠다. 만복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익숙한 사람 손에 길러져야 한다. 영인아 부탁이니 만복이를 잘 돌봐다오. 만복이를 돌봐 주는 사례는 매달 200만원씩 김한철 변호사가 송금하는 걸로 하마. 우리가 살던 집은 당연히 영인이 너에게 주겠다.
“……여기까지가 유언의 내용입니다.”
마지막 유언을 들은 한기문, 김혜영, 그리고 마덕호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야말로 섬광 같은 충격이 모두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래도 38년을 함께 살고, 그 중에 15년을 남편도 없이 자신을 수발해 주던 며느리인데. 내심 이영인에게 많은 몫이 돌아갈까, 만약 그렇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었던 한기문조차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김서라 여사가 이영인과 살던 시골집은 유산이라고 하기도 우스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만복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만복이가 누군지 짐작도 못하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고 마덕호는 김서라 여사가 그동안 가족들 몰래 자식이라도, 아니 어린 양자라도 들였나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내 아무리 생각해도 만복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데, 도대체 만복이가 누구요?”
이미 눈물이 말라버린 마덕호가 나무라듯 물었다. 김한철 변호사는 다가올 폭풍에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에 옆에 잠들어 있는 개를 쳐다봤다.
“여기, 얘가 만복입니다.”
한기문, 김혜영, 마덕호는 입이 떡 벌어졌다. 처음으로 모두의 생각이 하나로 합쳐졌다. 이 무슨 개 같은 소리인가. 한기문과 김혜영이 동시에 일어나 소리쳤다.
“말도 안돼!”
한기문과 김혜영은 서로의 생각이 같다는 걸 눈빛으로 확인한 후 전쟁에 돌입하려는 태세를 갖췄다. 마덕호도 내내 유지하던 양반다리를 풀고 그들에게 힘을 보탰다.
“나도 다른 건 다 참아도 사람도 아닌 짐승한테 유산을 준다는 게 용납이 안돼. 이건 바로 잡아야겠어.”
“유언장 오픈하기 전에 서명한 거 다 기억 하시죠? 그대로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김한철 변호사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한 말들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뒤집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소모전은 서로에게 득이 될 게 없었다. 하지만 한기문, 김혜영, 마덕호의 눈빛은 이미 전쟁터에 선 장수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일보직전이었다.
틀니란 치아가 상실된 부위에 수복해주는 의치로서 환자가 직접 장착 및 탈착이 가능한 보철물입니다. 틀니 사용을 통해 저작 기능이 개선되고, 뿐만 아니라 발음과 미적인 부분도 일부 개선됩니다.
틀니는 본인 치아가 하나도 남지 않은 경우 ‘완전 틀니’, 남아 있는 본인 치아가 있을 경우 ‘부분 틀니’, 상실된 치아에 임플란트 기둥을 심고 그것에 지지를 받는 ‘임플란트 지지 틀니’ 등이 있습니다.
틀니를 사용함에 따라, 틀니 자체도 마모 및 변형이 되지만, 잇몸 뼈와 남아있는 치아의 상태도 변하게 되므로, 틀니와 구강 건강을 잘 관리하셔서 틀니를 편안하게 오래 사용하시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틀니를 잘 못 관리하게 되면, 잇몸 염증 및 출혈, 구취, 틀니와 잇몸 사이 음식물 끼임 등을 호소하게 됩니다. 실제 틀니 사용자분들을 만나게 되면, 올바른 틀니 관리법을 아시는 분이 많지 않으신데요. 틀니 사용 시 구강 건강 관리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잘 닦기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닦으셔야합니다. 매 식후 마다 구강과 틀니를 칫솔로 닦아주셔야 합니다. 이때, 치아 및 잇몸은 일반 칫솔과 치약으로 닦으시되, 치아가 하나도 남지 않았더라도 잇몸, 입천장, 혀, 구강 내 뺨 부위 등을 잘 닦아주셔야 합니다. 틀니는 틀니 전용 칫솔을 이용하여 흐르는 물에 닦아주셔야 합니다. 틀니 전용 칫솔은 양면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 칫솔보다 더 크고, 한쪽 부위는 좁은 곳도 잘 닦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때 주의하실 점이, 치아를 닦는 치약으로 틀니를 닦으시면 안 됩니다. 치약에는 연마제가 있어서, 틀니에 작은 홈이 파이게 되어 세균이 자라기 쉽게 됩니다. 따라서 틀니 전용 치약을 쓰시거나, 연마제가 없는 주방용 세제를 이용하여 틀니를 닦으셔도 괜찮습니다. 틀니를 잘 닦지 않으면 곰팡이 및 세균으로 인해 잇몸 등 구강에 염증이 생기는 의치성 구내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끔 틀니를 서서 닦으시다가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떨어뜨려서 틀니가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틀니 세척 시에는 낮은 곳에서 수건 등을 바닥에 깔거나, 큰 통에 물을 담아두시고 그 위에서 닦으시길 바랍니다.
보관 및 소독
주무실 때는 틀니를 입 안에 넣지 마시고, 물에 담아 보관하셔야 합니다. 밤에 틀니를 입 안에서 제거함으로써 잇몸도 틀니로부터 휴식을 갖게 되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됩니다. 틀니를 물에 담아 보관하는 이유는, 틀니는 구강의 젖은 상태에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건조한 상태에서 변형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밤새 틀니가 입안에 있게 되면, 세균이 틀니에 번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연구에 의하면 틀니를 착용 한 채 자는 경우, 틀니에 있던 세균이 폐로 유입되어 흡인성 폐렴의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소독을 위해 틀니를 끓는 물에 삶으시면, 틀니의 모양이 변형되어 구강에 맞지 않게 됩니다. 때문에 끓는 물에 삶으시는 일이 없으셔야 합니다. 소금물에 오래 담아두는 것 역시 틀니에 변형을 초래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주무시기 전에 알약 형태의 의치 세정제를 매일 사용하시면 청결한 틀니 관리에 도움이 됩니다. 의치 세정제는 일반적으로 10분 정도 물 컵에 틀니와 함께 넣어 사용하시되, 제품별로 사용법이 조금씩 상이하니 사용설명서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의치 세정제를 사용 하신 후에는 깨끗한 물로 칫솔질을 하여 헹궈낸 후 틀니를 사용하시길 권장합니다.
틀니 접착제
틀니 접착제의 경우, 치과의사와의 주기적인 관리 및 상담의 전제 하에 사용하시길 권장합니다. 틀니 접착제는 움직이는 틀니로 인한 불편감을 어느 정도 줄여주지만, 치과의사의 검진 없이 장시간 사용시 오히려 구강 건강을 해하게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됩니다. 또한, 하루 동안 사용한 틀니 접착제는 가능하면 매일 구강과 틀니에서 제거하시고, 필요시 새로운 접착제를 사용하셔서 청결하게 사용하시길 권장합니다.
처음 제작된 틀니
틀니를 처음 제작한 경우, 저작 시 통증 및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음이 어색하고 이물감이 드실 수 있는데, 차차 적응이 될 것입니다. 초기에는 식사에 적응하실 때까지 부드러운 음식을 드시고, 앞니보다 양측 어금니 위주로 씹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틀니에 적응한 후에도 6개월~1년에 1번은 치과를 방문하여 틀니 및 구강 관리를 받으셔서 건강하게 틀니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 오늘은 틀니의 관리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올바른 틀니 관리를 통해 구강 건강을 유지하고, 편안한 틀니 사용 및 틀니 수명을 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VID-19 시기에 더욱 필요한 백일해 백신
저는 최근에 출산을 했습니다. 임신 32주차 쯤,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백일해 백신 맞기를 권해서 백일해 백신을 맞았습니다. 첫째 임신때도 백일해 백신을 맞았었는데요, 이번에도 맞아야 할까요?
백일해 백신은 단독백신이 아닙니다.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3가지 백신을 동시에 맞아야 하는거죠. 저는 백일해 백신을 맞기 위해 파상풍과 디프테리아 백신도 함께 맞은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Td/Tdap백신을 10년마다 재접종하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7년에 맞았는데 2022년에도 또 맞은 셈이네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백일해는 백일동안 기침을 한다고 하여 백일해라는 이름이 붙은 병입니다. 어른들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아기들, 특히 신생아들에게는 위험한 질병입니다. 엄마가 백일해 백신을 맞으면 그 항체가 태아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임산부에게는 매 임신마다 권장되는 백신입니다. 다른 가족들은 1회 Tdap을 접종했다면 굳이 재접종 시기 이전에 추가접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Td/Tdap백신을 10년마다 재접종해야 하는 이유는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항독소 농도가 대부분 10년이 지나면 최소 방어 농도까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백일해 면역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접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현재까지의 권장사항으로는 그렇습니다. 향후 변동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처음 Tdap 예방접종을 하였다면 10년마다 Td 접종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소아형 백신(TdaP)도 있습니다. 소아형 백신은 7세 미만의 소아에게만 사용하도록 허가되어 있습니다. 성인형 백신은 소아형 백신과 비교해서 파상풍 독소나 백일해 독소의 용량은 비슷하지만 디프테리아 독소의 용량은 훨씬 적게 들어있습니다. 성인에게서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면역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성인은 성인형 백신을 맞으시면 됩니다.
예방접종으로 병을 예방하고 건강하게 한해를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들어가며”에서 이어집니다.)
6. 칼빈이 프랑수아 다니엘에게(6번 편지)
“편지 배달인의 병(病)도 -그는 위험한 병에 걸려 리옹에서 약 12일간 앓아누워 있었다는군- 그 편지가 내게 속히 배달되는 것을 방해했네. 그러는 동안에 장날은 지났고, 나는 편지를 빨리 보낼 수 있는 호기를 놓쳐 버렸네.”16)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병(病)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어떤 일17)의 진행이 느려지는 것을 언급한다. 관련하여, 이는 칼빈이 병 자체를 무조건 하나님의 저주 또는 벌 등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칼빈의 서신에서 병은 그 자체의 경우, 그저 누군가의 삶에서 특히, 사역에 관해서 종종 일어나는 가치중립적 사건이다.
7. 칼빈이 클로드 드 앙제스트에게(7번 편지)
“오늘날 조금이라도 보다 숙련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서둘러 그들의 재능의 기록들을 출판함으로써 후대에 저명한 이름의 기억을 물려주기 위해, 뛰어난 명성에 대한 야망에 사로잡혀 경쟁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로부터 무엇인가 쓰고자 하는 광적인 방종이 나오는 바, 이것은 즉시 후회라는 동료를 동반합니다.”18)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글쓰는 능력19)을 지닌 자들의 야망을 꿰뚫어 보며, 그 야망으로 말미암는 문제를 알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칼빈이 다양한 선후배 종교개혁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바 중 하나로 그것을 다루게 유도했을 것이라 추측케 한다.20)
“다시 말해서 미숙아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낳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너그러운 독자들뿐 아니라 신중한 독자들이 나의 방식과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꾸며야 합니다.”21)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이 자신의 신학적 무엇인가의 집대성을 중요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적 체계에 관함을 넘어, 다양한 독자들이 그것에 동의할 수 있도록 적절히 포장되어야 함을 포함한다.22)
“내가 아는 한 이 사람[세네카]은 지극히 박식하고 웅변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그러한 다작의 천재가 자신의 손이 미치는 곳에서 가져올 수 없었던 학문의 영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물리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일부에 속하는 자연의 신비에 대해 완벽하게 알았습니다. 윤리에 몰두할 때는 그 분야에서 최고로 군림하며 마치 자신의 경기장을 달리는 듯했습니다. 웅변 연마에 관해서는 수사학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경우엔 언제나 고대사를 기억했습니다.”23)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소위 일반계시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인정하는데, 관련하여, 심지어 이교도에 해당한 세네카에게 사용된 그것을 포함한다. 그렇다. 해당 문장에 따르면, 칼빈은 하나님 안에서24) 현대적 개념의 물리학에 또는 인문철학에 관한 논의와 그것의 수용이 신학적으로 가능함을 곧, 그것들 자체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평가를 내리지 않았음을 전제한다.25)
“이것은 나의 나 된 모든 것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대에게 빚진 것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내가 소년이었던 당시 그대의 집에서 교육받고 그대와 함께 같은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내 삶의 첫 교육과 문학에 있어서 매우 고귀한 그대 가정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26)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어렸을적 앙제스트 가문에서 (신학을 포함한) 학문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음을 클로드 드 앙제스트에게 감사한다. 관련하여, 여러 서적에서 앙제스트 가문이 향후 가톨릭교회에 계속 머물렀던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칼빈의 반응은 매우 중요하다. 즉, 칼빈은 신학적으로 다른 심지어 대립되는 관점을 가졌더라도, 누군가를 향해 인간관계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와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27)
나아가, 그것들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편지28)로 기록하는 칼빈의 모습은 자신이 가졌던 신학적 노선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29)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신학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곧, 자신의 신학에 가톨릭교회를 넘어서는 논리성과 그로 말미암는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런 편지를 앙제스트 가문에 속한 친구30)에게 쓸 수 없다.
8. 칼빈이 [필리프 로레]에게(8번 편지)
“자비로 말일세.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고 지금 그 비용을 다시 메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중이라네. 이런 사정으로 몇몇 교수들에게는 그 책을 읽어 줄 것을 간청했고, 부르주에 있는 한 친구에게는 학교에서 이 책에 관한 공개 강의를 위해 강단에 서도록 권하기도 했네. 자네 역시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내게 호의를 보여도 괜찮으이.”31)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책32)을 출판해야 한다는 의지와 확신을 드러낸다. 물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감당해야 할 현실적 어려움을 각오하고 경험한 채 말이다.
당연히 칼빈은 친구33)에게 재정적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쓰며, 자신의 사역을 왜 또한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내적 고민과 그로 말미암는 감정적 갈등을 경험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칼빈은 사역34)의 진행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생히 경험했으며, 이를 통해 실제로 사역에 필요한 필수 조건 중 하나인 재정의 채워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
9. 칼빈이 프랑수아 다니엘에게(9번 편지)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 마침내 인쇄되었네. 나의 돈과 노력으로 말일세. 들어간 돈은 이제 사방팔방에서 회수해야만 하네. 게다가 내 명예가 굳건히 서는지도 주의해서 살펴야 하지. 자네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편지를 써서 그 책이 얼마나 호의적으로, 혹은 냉담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내게 알려주게나. 그리고 랑드레를 설득해서 [그 책을]강의하게 해보게. (중략) 뒤슈맹에게 부탁할 때마다 응답이 없기에 그에게는 쓸 말이 없네. 그가 편지를 보낼 때까지 나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 것이네. (중략) 쿠아파르에 대해서는, 저만 아는 녀석이라는 것 외에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35)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자신의 책36)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관련하여, 칼빈은 실제적으로 책의 출판 성패가 자신의 재정과 명예에 직결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곧, 칼빈도 현실적으로 사역37)의 성패와 그에 따라 바뀔 자신의 처지를 내다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38) 곧, 칼빈은 충분히 종교개혁 사역의 지속성을 위해 사역현장의 변화를 살폈다.
한편으로, 칼빈은 실제적인 사역의 성취에 도움을 주지 않는 친구들을 향한 섭섭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감정적 경험은 향후 칼빈이 사역의 성취와 그에 따른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가져올 변화를 신학적으로 정립 및 현실적으로 대비하고, 관련된 내용을 여러 자신의 신학서적 곳곳에 반영하여 그것들의 논리적 또한 대중적 완성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0. 프랑수아 다니엘이 칼빈에게(10번 편지)
“실비우스의 집에는 요즘 발렌티우스라 불리는 내 조카가 있다네. 그의 부모 말에 따르면 그는 최근 수사학 강좌에 초청되었다고 하네. 그는 내게 편지를 써서 앞으로의 공부 방향에 대해 의견을 물었네. 여유 있을 때 그가 라틴어에 얼마나 진전이 있는지, 그리고 저 강좌가 가능한지를 알아봐 주게나.”39)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 따르면, 칼빈은 친구의 사소한 부탁까지 들어줄 수 있는 여유와 따뜻한 성품을 가졌을 것이다. 실로, 아무리 친한 사이라하더라도 일면식도 없는 먼 사이인 누군가40)의 그것도 그 누군가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학업에 관해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은 드물다. 아마, 칼빈은 친구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어렵지 않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그것에 흔쾌히 도움을 주는 인품을 가졌던 것 같다.
11. 칼빈이 프랑수아 다니엘에게(11번 편지)
“주일이 되어 건강을 회복한 나는 동행하겠다고 나선 코프와 함께 수녀원에 갔다네. 자네의 희망대로 자네의 여동생이 수녀원 생활을 하기 위해 서원할 수 있는 날을 수녀들과 함께 정하기 위해서 말이야.”41)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서 칼빈은 수녀원 또는 수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가톨릭교회에 무조건적인 존재론적 반대를 선언 또는 주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칼빈의 신학을 올바로 이해함에 있어, 반드시 한국개혁교회를 포함한 전세계 개혁교회에서 고려되어야 한다.42) 일부 한국개혁교회는 칼빈의 서적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여, 가톨릭교회와 무지성적 대립각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43)
“코프가 수녀원장과 함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자네 여동생의 마음을 타진해 보았네. 혹 목을 굽힌 것이 아니라 목이 꺾인 상태로, 우유부단하게 저 멍에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말일세. 나는 그녀에게 마음속에 갖고 있는 생각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으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권유했네. (중략) 하지만 난 지나치게 자신만의 결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그녀에게 몇 마디 훈계를 했네. 스스로에 대하여 성급한 약속을 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필요한 모든 도움을 위해 우리의 존재와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능력[행 17:38]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이지.”44)
해당 문장이 사용된 부분에 따르면, 칼빈은 소위 부르심에 관하여 누군가의 능동성 또는 자발성을 중요하게 점검한다. 칼빈은 사제나 그에 준하는 신앙생활에 입문(入門)하려 하는 자에게 그것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 철저히 스스로의 마음과 의지를 점검해야 함을 전제하고 강조한다. 아마, 이러한 경험은 종교개혁후기로 이어져 목사직에 관한 소명을 확인하고 실제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관한 신학적 서술45)을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46)
(이어, “다음 호 또는 다음 부록 호”에서 계속됩니다.)
칼빈의 서신에 나타난 그의 생애 경험과 교훈
누군가의 신학적 집대성을 이루는 토대는 그가 평소에 경험한 일상에서 온다. 현재의 누군가는 주변의 상황과 그것을 기반으로 느낀 경험의 결정체이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교부와개혁신학목회연구소와 열린개혁교회도 언젠가 크게 장성하여 한국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연구소와 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보며, 필자와 동역자들은 순간순간 경험했던 상황과 당시의 내적갈등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다만, 현재에 집중하여 그것을 천천히 쌓아가야 함을 전제로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일상에서 필자를 포함한 모든 주위의 동역자들이 한걸음씩 천천히 하나님과 더욱 동행하고 있다. 그것은 먼 훗날 현세를 넘어 내세에서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평소 성실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수많은 추억을 쌓고 있다. 소위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이번 호에서 시작되듯, 우리는 칼빈의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 그러한 연구의 열매를 한국개혁교회에 전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 일어나는 각종 사건을 『슬기로운 신앙 생활』을 통해 기록할 것이다. 칼빈이 그러하였듯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또한 하나씩 쌓아가며 말이다.
1)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10.
2) 관련하여, 이번 호의 칼빈에 관한 내용은 칼빈의 신학적 토대를 이루는 생애를 깊이 묵상하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처한 종교적 시대적 문화적 지역적 상황에 매몰되지 않게끔 나아가 그들에게 칼빈을 바라보는 유쾌한 경험과 생산적인 또는 능동적인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3) 특히, 칼빈의 서신에 관해 다른 기독교회 특히,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이미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는 자신들의 신학을 보호 및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돌파구였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안타깝게도 개혁교회는 기독교강요 등 칼빈 신학의 결과물만을 교회 안팎에 기계적으로 전하는 데에 오래동안 전념했다. 이는 한국에서 특히 그러한데, 그 이유는 미신과 그것을 뒷받침하던 맘모니즘적 종교 토대를 기반한 한국의 역사적인 상황에 근거한다. 실로, 한국개혁교회를 포함한 전세계 개혁교회는 향후 칼빈 서신에 관한 많고 꾸준한 연구를 통해, 칼빈 신학의 토대를 이루는 학문분야를 든든히 세워, 한국인의 개혁신앙을 보존해야 한다.(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11.)
4) 안타깝게도 이를 모두 수행하기에는 필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매우 제한적임을 밝힌다.
5)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16.
6) 칼빈의 편지들을 분석하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슷한 내용들을 연결하며 그 변화를 연구하는 것도 칼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에 크게 유익할 것이다. 물론, 이는 칼빈의 편지들을 분석하는 작업의 선행을 전제할 것이다.
7)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18.
8) 일반적으로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돈은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면서도 대표적인 도구 중 하나다. 특히, 돌려받을 수 없는 자에게 베푸는 생활비가 그러하다. 칼빈은 친구가 그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통해 그러한 상황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다.
9)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1-22.
10) 이는 한 권의 책 전체에서도 그러하고, 각 권에 포함된 소주제의 세부 내용에서도 그러하다. 아마, 기독교강요 등의 칼빈의 저작을 읽어본 사람은 이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11)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2.
12)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2.
13) 예를 들면, 글의 서론부에 사용된 수사법을 들 수 있다.
14)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3.
15)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4.
16) 이는 칼빈의 글을 분석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칼빈의 화법 또는 문체에 관한 연구는 칼빈의 서적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 그 향방을 결정한다. 곧, 이미 출판되어 알려지고 연구된 칼빈의 서적과 함께 아직 그렇지 못한 칼빈의 서적을 토대로 그의 화법과 문체에 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이 분야에서 로마가톨릭교회에 뒤쳐진다면, 개혁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 로마가톨릭교회에 앞선다면, 개혁교회는 더욱 공고하게 정체성을 보존할 것이다.
17)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6.
18)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6.
19)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7.
20)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7.
21)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8.
22) 물론, 칼빈은 이때,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고 크게 위로받는다. 아마, 칼빈은 친구가 어려운 사역상황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한편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23) 다양한 기독교 교파 중에서도 개혁교회는 철저한 사본학(성경원문복원학)적 고증을 강조한다. 이는 성경의 정확한 원문복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해석학적으로 논할 수 없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24) 마가복음 10:23에서 재물로 번역된 단어는 χρήματα이다. 이는 κτήματα와 다른 단어로서 재물(Posession), 부유함(Wealth), 돈(Money) 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학자들 간에 큰 견해차가 존재하지 않는다.(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65.)
25) 이는 복수형 표기이며, 이것의 단수형은 사도행전 5:1에서 사용된 κτῆμα다.
26)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47-248.
27)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48.
28) 하나님은 일반적인 당대의 단어를 성경에서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특정한 성경안에서 제한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성경의 전후 문맥을 통전적으로 파악함을 통해 알 수 있다.(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52.)
29)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52-255.
30)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57
31) 해당 마태복음, 마가복음 본문에서 κτῆμα에 대한 소유를 내려놓는 것은 소유욕을 버려, 실제로 κτῆμα를 적절하게 처분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해당 성경본문과 관련된 신명기 본문은 율법에서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대표적인 것으로 토지를 다룬다.
32)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58
33)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62
34)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64
35) 제자들은 유대인 청년에 비해 거의 토지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36) 신현우, 재물인가, 토지인가? 마가복음 10:22의 본문 비평, 주해와 번역, Canon&Culture, 2008, 265.
37) 필자는 본고를 통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을 통해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하는 측면에서 그것이 공공성을 가진다고 주장 및 표현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이든 공산주의이든 사회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공공성 개념과 그 출발점이 다름을 의미한다.
38) 여기에 본고에서 강조하는 바인 부동산이 포함된다.
39) 본고는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부동산 사용과 매매에 대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각각 강조한 서로 다른 의미의 단어로 정의 및 사용하겠다.
40) 본고에서 이는 유무형의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생각하여, 개인인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우선시 하도록 돕는 것을 강조한 시장체계를 의미함.
41) 본고에서 이는 자본주의와 구분되어 재산의 공동체적 소유와 배분을 강조한 시장체계를 의미함.
42) 필자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선재적으로 가진 경제적 이념을 배제하기 위해, 누군가를 소개 및 추천하고자 한다. 바로, 일반은총론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개혁신학을 적용하고 발전시키려한 아브라함 카이퍼(A. Kupyer)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신학과 목회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정치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현재 카이퍼의 저작이 한국개혁교회에 점차 번역 및 소개되고 있다. 이는 한국개혁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축하할만한 일이다. 물론, 한국개혁교회는 이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의 경제관념에서 편향된 자본주의적 또는 공산주의적 개념을 수정 및 보완하기 위해, 카이퍼의 생애와 저작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이명헌, 카이퍼의 재정정책관 – 아담스미스와의 비교, EU학 연구, 2015, 121.)
43) 이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포함한다.
44) 이후 본고에서 토지는 땅과 부동산을 의미하는 주요 교호(交互) 단어이다.
45)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iv.
46) 칼빈은 레위기 25장을 주해하되, 희년을 적용하는 대상을 자신이 살던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필자는 이를 강조하고 싶다. 이는 칼빈이 해당 성경본문의 적용 대상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유무에 따라 구분했음을 전제한다. 칼빈 당시 종교개혁의 시대적 영향으로 인하여 그의 저작을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설명하는 용도로 곧잘 이해 및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필자는 이를 칼빈이 오히려 참된 믿음의 유무를 기준으로 그 대상을 적용할 수 있음을 강조했음으로 이해 및 해석해야 함에 집중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93.)
47)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iv.
48)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11.
49) 3가지 단어가 모두 사용된 창세기 47:20을 주해하면, 각각의 단어에 대해 향후 필자가 동의한 내용이 옳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외에 동일한 경향의 내용이 창세기 6:7에서도 발견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17-18.)
50) 이들에게 어느 것이 좋거나 나쁘다는 개념은 없다. 이들을 굳이 연결하여 이해할 필요는 없으나, 성경을 읽을 때 좀 더 쉽게 이들을 구별하고 이해하기 위해 굳이 개념의 범주가 작은 것부터 정리하였음을 밝힌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19.)
51)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20.
52) 향후 본고에서 개혁신학은 개혁교회가 가진 전통적인 신학적 명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53) 전통적으로 인간에 대한 정의는 각 기독교 교파에서 해당 교파의 신학이 시작되는 지점 중 하나로 이해된다. 이는 단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각 기독교 교파별로 다름을 통해 알 수 있다. 개혁교회의 그것에 대한 논의는 차후 상세히 다루겠다.
54) 필자는 성경본문에 따라, 형상과 모양의 순서로 각각을 설명하였다.
55) 본고에서 히브리어 원어는 본문으로의 삽입 어려움으로 생략한다.
56) 해당 성경본문의 해석은 향후 논의를 이끌어 가기 위해, 매우 중요하기에 필자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그것에 대한 해석부터 언급하려 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29-30.)
57) 초대교회 안디옥학파를 대표한다.
58) 초대교회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표한다.
59)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33.
60) 이때, 전자와 후자는 서로 독립적인 개념이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33.)
61) 신학적으로 중세 로마가톨릭 인간학은 현대 로마가톨릭 인간학의 주류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전통적으로 로마가톨릭 인간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전제하되, 그 이성을 수직적으로 계층화한다. 이러한 계층화는 각각을 인간이 스스로 해당 영역에 이를 수 있느냐 또는 없느냐의 유무를 설명하는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 예컨대, 로마가톨릭 인간학은 인간이 그중 가장 높은 수준의 영역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즉, 성령의 내주로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34-35.)
62)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신학적으로 최초로 하나님과 인간의 불연속적인 측면과 연속적인 측면을 설명하고자 해당 성경본문을 주해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는 그들의 인간론을 올바로 또한 생산적으로 이해하는 핵심이다.
63) 개혁신학은 칼빈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여, 향후 그의 독특한 인간학을 조직신학적 관점에 적용 및 응용한다.
64) 실제로 성경은 모양 또는 형상을 교호(交互)적으로 사용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43.)
65) 칼빈은 죄를 지었으나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신적 특징을 흔적(Lineaments)으로 표현한다. 참고로, 이는 중세 가톨릭 인간학적 이해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는 이를 이성으로 표현하되 계층적으로 나누지 않고, 총체적인 하나의 것으로 설정한다.
구체적으로 칼빈은 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졌던 온전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일부분이 원래와 달리 기형적으로 일그러져서, 선악의 구분에 대해 하나님과 같이 그것을 온전히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온전한 지성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즉, 성령의 내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45.)
그렇게, 선악의 판단에 대한 인간의 이성이 소위 ‘온전하지 않다’라는 명제는 칼빈 이래로 개혁신학의 인간론에 전제된 각종 주요 세부명제를 유도해 왔다. 실로,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신학논리에서 다룰 때, 이를 전인격적(全人格的) 존재로 전제한다. 이는 인간의 형이하학적인 부분과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긴밀히 연결되어 서로 뗄수 없으며,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의미한다. 개혁신학은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인간의 신적 초월로의 가능성과 한계를 서술한다.
66) 일반적으로 주인은 종을 소유한다. 이러한 개념은 개혁신학에서 애초에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개혁신학은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그 어떤 종교와 기독교 교파보다도 당연시 함을 의미한다. 개혁신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포함하여, 그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소유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67) 개혁신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남은 하나님의 형상을 임의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 이래로 서구 사회에 현대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20.)
68) 인간은 토지를 통해 다른 인간을 소유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이 토지 자체를 소유함에 관하여 독립적이면서도 연관적인 관계를 지닌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관련되어 정밀한 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 물론, 개혁신학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에 대해 유일하게 대답하였으며, 이를 본고에서 최초로 부동산과 관련지어 자세히 논하였음을 밝힌다.
69)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생존과 존엄을 곧 남아 있는 하나님의 모상을 소위 ‘파괴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70)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 기독교 교파별로 이를 해석하는 방법론적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이는 전체 피조물을 포함한 인간의 토지 소유에 대한 서로 다른 신학적 명제를 도출한다.
참고로, 이러한 현상은 개신교회 내에도 상이하다. 대표적으로 개혁교회와 달리 루터교회는 죄로 인해 인간에게 아무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즉, 이성적 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개혁교회의 관점에서 이는 당시 면벌부 또는 면죄부를 주장할 수 있었던 로마가톨릭 교회의 인간학에 대한 지나친 반동으로 말미암는다.
번외로 현대신학자 브룬너와 바르트가 현대의 철학적 신학적 논쟁을 끌어들여 독특한 인간학을 전개하기도 한다. 다만, 이는 본고에서 심화하여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다. 핵심적으로 그 어떤 현대신학자일지라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인간에게 얼마나 어떻게 남아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그 논지가 수렴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37-41, 59.)
71) 개혁교회는 독특한 인간론적 관점을 전제로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신학적 목회적 대답을 성경본문으로부터 찾는다.
72)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3.
73) 창세기 1:28에 다스리다라는 표현이 1:26에 이어 반복되기도 한다.
74) 개혁신학은 두 단어를 구분한다. 이는 개혁신학의 독특한 성경분석방법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차후 논의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4.)
참고로 하나님의 일부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토지에 대한 사용과 소유에 대한 개혁신학의 관점은 단어와 문맥에 근거한 성경신학적 분석에 근거하며, 이는 전체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토지에 대한 사용과 소유를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75)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3.
76) 용례적으로 이는 고대의 선한 지배자와 선한 피지배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바로, 전자는 후자를 지배하되 배려하고, 후자는 전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것이다. 즉, 이는 토지를 통해 인간들이 재화(財貨)를 생산할 때 그들 안의 선한 관계를 전제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4.)
77)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6.
78)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7-68.
79)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69.
80) 대표적으로 사업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토지를 저당잡는 것을 들 수 있다.
81) 대표적으로 흉년으로 인해 돈이나 노동을 갚기 위해, 토지를 저당잡는 것을 들 수 있다.
82) 물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토지의 정당한 매매 절차를 규정한 사회법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해당 시대와 장소에 살아가는 인간이 임의로 정한 것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83) 사실, 성경에 나타난 관련된 대주주를 향한 심판의 예는 대부분 비자발적인 어떤 거스를 수 없는 이유로 공동체 내의 약자가 토지를 저당잡는 경우를 다룬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79.)
84)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79.
85) 여로보암 2세가 통치 당시 북이스라엘의 국력을 전반적으로 신장시킨 것은 맞지만 그것은 백성 개인의 올바르고 행복한 신앙 생활과 무관했다. 그 중심에는 백성들이 토지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사용과 소유에 관한 관념이 없었던 점이 중요하다. 이는 성경이 여로보암 2세의 치세를 비중있게 서술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79.)
86)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80.
87)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81.
88) 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81.
89)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요함.
90) 특히, 이는 기근으로 인해 먹을 곡식을 확보하기 어렵거나, 나라에 상당한 세금을 내려는 상황으로 말미암는다.
91) 극적인 예를 들면, 모세오경의 기록시점은 느헤미야가 생존한 시대와 약 1000년의 간극을 갖는다. 아무리 시대의 발전이 더딘 구약시대라 할지라도 이는 상당한 시대적 문화적 철학적 변화를 전제한다.
92) 느헤미야가 느헤미야서에서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관한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들을 종합하면, 특정한 구체적 명제를 도출하기 위한 기본적인 원리가 존재함을 곧, 위의 명제를 도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93) 관련하여 조형욱은 올바른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역대하 36:21에서 하나님이 가나안에 70년 동안 안식을 주셨다는 표현을 가나안 땅에서 잘못된 토지사용을 일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겨난 것으로 해석한다.(조형욱, 토지에 대한 사람의 소유권에 관한 연구 – 개혁 신학적 관점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07, 82.)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나안 땅에 주어진 70년의 안식이 토지의 본질적 존재목적과 올바른 사용방법을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강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은 현세와 내세를 아울러 구속사적으로 토지를 올바로 사용하도록 논의하는 신학적 시발점이 될 수 있다.
94) 비신앙인에 해당함.
95) 본고에서 이는 모든 형이하학적인 것을 포함하여, 모든 형이상학적 개념과 그것의 실체를 의미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우주라는 개념을 다룸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96) 특히, 토지를 들 수 있다.
97) 김회권, 구약성서의 희년사상과 사회윤리적 함의(含意), 신학사상, 2004, 131.
98) 이외에도 토지의 존재 이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다. 이는 개혁신학에서 충분히 가능한 바이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렇게 해야만 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토지의 가장 중요한 존재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개혁신학의 기본관점을 반영하여야 곧, 구속사적 참여와 관련하여 토지를 우선적으로 논의해야 마땅하리라 주장한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개혁신학의 특징상 토지에 대한 각종 신학적인 논의가 올바로 개시될 수 없다.(김회권, 구약성서의 희년사상과 사회윤리적 함의(含意), 신학사상, 2004, 131.)
99) 김회권, 구약성서의 희년사상과 사회윤리적 함의(含意), 신학사상, 2004, 135.
1) 박은규, "효과적인 공동교역: 원리와 시행방안[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관계를 중심으로]," 신학과실천, 제6호(2003): 25.
2) 박은규, "효과적인 공동교역: 원리와 시행방안[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관계를 중심으로]," 26.
3)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헌법, 정치 제4장, 목사의 칭호 참조.
4) 박태흥, "공동교역에서의 담임목사의 역할" (석사학위논문,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26.
5) 박태흥, "공동교역에서의 담임목사의 역할," 27.
6) 최상호,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목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2000), 34.
7) 최상호,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목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 34.
8) 이주영, 현대목회학(서울: 성광문화사, 1985), 71.
9) 고훈, 교회 성장을 위한 팀목회(서울: 베드로서원, 1996), 68-69.
10) 윤두혁, “부목사의 기능,” 월간목회 (1979.2): 33.
11) 고훈, 교회 성장을 위한 팀목회, 69.
12) 박태흥, "공동교역에서의 담임목사의 역할," 34.
13) 임택진, “특집대담-한국교회를 말한다,” 월간목회 (1985.12): 29-30.
14) 고훈, 교회 성장을 위한 팀목회, 73.
15) 박태흥, "공동교역에서의 담임목사의 역할," 36.
16)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29.
17) 문맥적으로 칼빈의 서신(=편지) 사역에 해당함. 칼빈은 친구들과 서신을 주고 받는 일상을 종교개혁이라는 사역의 연장으로 여겼다. 이는 현대의 목회자들이 개인의 일상을 섬기는 교회 사역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18)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31.
19) 구체적으로 신학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각종 학문적 출중함을 의미함.
20) 그도 그럴 것이 칼빈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인간의 욕망을 (특히, 성취 또는 영광으로 바꾸어 말할법한 것을) 죄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이를 경계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적 경향에 익숙하고 능통했을 것이다. 추측컨대, 그것에 대한 경계는 칼빈과 대적한 여러 당대의 가톨릭 신학자와 관련 될 가능성이 크다.
21)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32.
22) 이는 칼빈의 각종 서신에 드러나는 그의 신학적 가르침과 그것에 적용된 수사법을 통해 확인된다.
23)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34.
24) 누군가의 신앙유무와 무관하게.
25) 오히려, 당시 이방인들로 말미암는 일반계시를 특별계시의 하위 개념으로 주로 설정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조직신학을 고려할 때, 이러한 칼빈의 표현은 당시 독자들에게 상당한 놀라움을 줄 수도 있음을 강조하는 바이다.
26)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35-36.
27) 관련하여, 칼빈이 자신의 인간론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비록 일그러졌으나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바는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했을 수 있다.
28) 이는 『세네카 관용론 주석』의 서문이기도 하다.
29) 요즘 한국의 자칭 개혁교회들은 개혁신학에 대한 무지로 기독교회 전체에서 고립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각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각 교회를 스스로를 점검함으로 확인될 것이다. 그러한 교회들은 부단한 노력과 스스로를 향한 도전으로 칼빈이 앙제스트 가문에 관한 언급을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낸 개혁신학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전제로 그들에게 배타심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개혁신학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30) 대게 친한 친구관계에서 종교적 견해차이를 드러내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이를 먼저 드러내는 것은 상대의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배려를 전제한 설득이 가능함을 전제한다.
31)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37.
32) 『세네카 관용론 주석』임.
33) 박건택에 따르면, 필리프 로레로 추측됨.
34) 칼빈이 장래에 감당할 여러 사역을 포함하여, 특히, 출판사역을 들 수 있다.
35)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39-40.
36) 『세네카 관용론 주석』임.
37) 특히, 출판사역에 해당함.
38) 이는 칼빈이 자신의 미래를 예상한다는 말에 해당할 뿐이다. 이는 칼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 어떤 시도도 전제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일상과 그로 말미암아 이러날 일을 예상하는 평범함을 반영한다.
39)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41-42.
40) 프랑수아 다니엘의 조카를 의미함.
41)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43.
42) 첨언하면, 칼빈의 수녀원 또는 수녀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개혁교회의 신학체계를 더욱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마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신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교회구조적으로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개혁교회는 이들을 상대적으로 비주류로 인식하고, 이에 일절 연구하지 않는 중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분야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장차 개혁교회에 여성신학, 여성종교지도자 등을 중심소재로 다방면의 기여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43) 관련하여, 그런 주장을 하거나 성도들을 선동하는 목회자의 경우 무지와 더불어 개인적인 탐욕(돈, 권력 등의 현세적 각종 가치)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44) 박건택, “칼뱅 서간집1”, 크리스천 르네상스, 2014, 43-44.
45) 이 서신에서도 간접적으로 나타나듯, 칼빈은 성직(聖職)에 관한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을 확인하도록 프랑수아 다니엘의 여동생을 유도한다.
관련하여, 그녀의 외적 소명 여부는 칼빈의 개입으로 확인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프랑수아 다니엘에게 수녀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정에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어떤 견해 또는 입장을 전달했을 것이다.
46) 아마, 부르심과 무관하게 칼빈의 서신에서 드러난 각종 종교적 순종에 대한 관점을 연구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 아래에 이전에 PDF파일을 첨부한 내용을 링크합니다.
2022.10.24 - [매거진(슬기로운 신앙 생활)/공개 자료] - 슬기로운 신앙 생활(WISE FAITH, 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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