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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신학사상사가(아브라함 카이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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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신학사상가
아브라함 카이퍼에 관해
250421
장창한 목사
서론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헤르만 바빙크와 B. B. 워필드
등과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라고 불린다.1) 카이퍼의 신칼빈주의
(Neo-Calvinism)는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적 엄격주의와 더불어 자유교회 체제와 그
와 동반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인 현상에 있어서, 제네바의 귀족주의적인 초기
칼빈주의로부터 많이 벗어났다는 트뢸치(E. Troeltsch)의 평가와2) 반면, 한편으로는
칼빈주의의 정치적 발전을 체득했고, 개혁주의 신학의 근원을 당대의 언어로 재형성
했다고 보는 푸칭거(G. Puchinger)의 평가가 상존한다.3)
한편, 네덜란드(화란, 和蘭, 홀란트)의 칼빈주의자인 헤르만 바빙크(H. Bavinck)처럼
그를 16세기의 칼빈과 17세기의 푸치우스(Voetius)와 콤리(Comrie)를 따르는 전형적
개혁주의 신학자로 본는 평가가 있다.4)
필자는 카이퍼를 19-20세기 네덜란드에서 칼빈의 신학을 적용시켜, 인간의 자율성을
무한히 강조한 프랑스 혁명 이후, 급격히 세속화된 유럽의 정신세계에 하나님의 나라
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한 시도자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가 네덜란드 역사 속에
서 어떤 영향을 받았고, 또한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이에 한국의 신학적 사상의 흐름
에도 교훈을 주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을 것이다.
본론
1.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생성과 신칼빈주의
네덜란드는 17세기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가 독립을 각성하게 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의 신학이 소개되면서 부터다. 스페인의 필립 2세
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는데, 그의 스페인화와 가톨릭화 정책에 대항해서 네
덜란드의 칼빈주의자는 헤이즌 동맹을 결성하고, 독립전쟁을 벌여, 1648년 칼빈주의
국가로 독립한다. 이때, 1618- 1619년 칼빈주의 5교리가 도르트에서 제창되기도 한
1) 이상웅,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개관 1”, 신학지남(2013), 197
2) 안인섭, 『칼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의 사람』, 익투스(2015), 297
3) 안인섭, 『칼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의 사람』, 익투스(2015), 298
4) 안인섭, 『칼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의 사람』, 익투스(2015), 298
- 1 -
다.5)
그러나 1810년 다시 프랑스에 완전히 합병되며, 네덜란드는 사회적 불안정과 분열
세속주의가 팽창한다. 그리고 1813년 네덜란드 왕실이 옹립되나, 왕실 개혁교회는 사
회적 분위기로 인해, 권위주의로 변하며, 신학도 세속화 및 사변화된다. 이에 도르트
신조로 돌아가자는 1834년 ‘압스케이딩(분열, Afscheiding)’이 발생한다. 곧, 일단의
개혁교회들이 왕실 개혁교회와 결별한다. 이는 1854년 12월 6일 캄펜신학교를 세움
으로 학문성과 실천성을 겸비하게 했으며, 추후, 그것은 유명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인 헤르만 바빙크가 1883-1902년까지 그곳에서 교수로 재임하는 토양이 됐다.
이후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 영역주권을 주창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를 세우고, 이를 따르는 일단의 교회들이 1886년 네
덜란드 국교회를 떠나는 ‘돌레앙찌(슬픔, Doleantie)’가 발생한다. 이후, 압스케이딩의
다수 교회와 돌레앙찌의 교회가 연합하여 1892년 네덜란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를 형성한다.6)
2.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목회
카이퍼는 네덜란드의 개혁파 목사의 집에서 1837년 10월 29일 로테르담에 가까운
마아스슬롸이스(Maassluis)라는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얀 프레데릭
카이퍼(Jan Frederick Kuyper, 1801-1882)인데, 본래 무역 회사에서 근무하였으며
화란 조교 소책자 협회(the Dutch Religious Tract Society)의 지원으로 레이던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된 것으로 보아, 복음주의적이었다고 생각된다.7) 관련하여, 그는
1828년 호흐마데(Hoogmade)에서 목회를 시작해, 1834년 마아스슬롸이스, 1841년
젤란트(Zeeland)의 수도격인 항구도시 미덜브루흐(Middelburg), 1849년 레이던
(Leiden)의 한 개혁교회의 목사로 청빙 받아 목회한다.8)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영어에 능통한 아버지와 불어에 능통한 어머니로부터 가정교
육을 받던 카이퍼는 1855년 18세가 되던 해에 레이던 대학교(Universiteit Leiden)에
입학하여 고전문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문학사를 summa cum laude로 마친 후 신학
을 전공한다(1858. 11. 24. 입학.).
레이든 대학의 조직신학자로서 스스로를 “이성의 사도”라고 했던, 스콜턴(J. H.
5) 안인섭 교수의 2016년 1학기 총신대학원 ‘근현대교회사’ 수업 중.
6) 카이퍼는 1883년 국가 교회 총회가 목사 후보생들의 서약을 폐기하고, 그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약속만 있으면 어떤 신학적 입장을 지녔뜬지 아무런 제한 없이
받아들여져야 함을 자신의 헤르아우트(Heraut)지에 비판했고, 1886년 자유주의 목사들의
입교문제로 암스테르담 노회에 의해 제명당한다. 이에, ‘성경강독회(bible readings)’라는
모임이 번졌고, 전국적으로 200여 교회, 76명의 목사, 18만명의 교인들이 국가 교회를 탈
퇴한다. 이것이 돌레앙찌(the Doleantie movement)이다.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38-139
7)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20-121
8)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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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olten, 1811-1885)에게서, 스콜턴은 1851년 박사학위를 받고, 1852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꾸에넨-벨하우젠 학파라고도 불리는 문서가설을 제창한 아브라함
꾸에넨(Abraham Kuenen, 1828-1891) 교수가 구약학을 가르쳤고, 역사 신학은 그
리스도의 부활을 공공연히 부인하던 라우언호프(L. W. E. Rauwenhoff, 1828-1889)
교수가 1860년에 교수로 부임하여 가르친 것은 중요하다. 카이퍼 스스로 “신학부에서
내가 좋아하는 교수는 없다”고 했다고도 하지만 결국 레이던에서 받은 교육이 그를
뛰어난 목회자로 만들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9)
이후, 1859년 흐로닝헌(Groningen) 대학교에서 주관하는 논문 대회에 드 후리스 교
수의 권면으로 폴란드의 종교 개혁자인 얀 아 라스코(Jan a Lasco, 1491-1560)와 칼
빈의 교회론을 비교하는 논문을 라틴어로 쓰고 금메달을 받았으며, 관련하여 라스코
의 전집을 찾기 위해 마띠아스 드 프리스(Matthias de Vries, 1820-92) 교수의 부친
인 아브라함 드 프리스(Abraham de Vries)의 서재를 찾았던 것은 그의 학문적 소양
의 깊이를 잘 알 수 있는 일화일 것이다.10)
이상의 과정으로 학부를 마친 후, 카이퍼는 탈진과 신경쇠약 경험을 경험하여 독일
빗바덴 근처 카우프(Caub)에서 10개월간 휴양을 하고, 1861년 12월 정규 신학과정을
마치고, 1862년 국가 교회 목사지원을 했으며, 흐로닝엔에 제출했던 논문을 사용하면
서 스콜턴의 지도 아래에서 칼빈과 요한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로 25세에 신학박
사 학위를 받는다(1862년 9월 20일).
그 다음 해인 26세에는 5년 전 약혼했던 로테르담 출신의 요한나 헨드리카 스카이
(Johanna Henddrika Schaay)와 혼인했고(1863년 7월 1일), 헬덜란트(Gelderland)
주 베이스트(Beesd) 교회의 청빙을 받아 개혁파 목사가 된다.
이때, 그 시골교회는 카이퍼를 변화시킨다. 그들의 엄격한 보수성은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혁 교회의 진리를 지키고 있고, 그대로 구체적으로 생활하
고 있다고 카이퍼는 평가하며, 이에 역사적 개혁주의에 굳건히 설 것을 요구하는 그
들의 말을 카이퍼는 동의한다.11) 시골 한구석에 숨어 있던 농부들이 칼빈이 온전한
라틴어로 말했던 내용을 그들의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했던 것이다.
이후, 4년 동안 베이스트 교회에서 열심히 목회하던 카이퍼는 그가 30세가 되던 해
인 1867년 6월 가까이 있던 우트레흐트(Utrecht) 중앙교회(Dormkerk) 목회자로 청
빙 받는다. 여기서 카이퍼는 자신이 속한 우트레흐트만이 아니라 전국의 교회를 바르
게 해 보려고 각종 팜플렛 작성과 배포에 열심을 보여 교단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9)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22
10)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23
11)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당시 30대 중반인 독신녀 삐에쪄 발투스(Pietje Baltus)를
들 수 있다. 그녀는 카이퍼가 순수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카이퍼의 설교에
저항하는 의미로 출석을 거부하고, 카이퍼가 심방했을 때 처음에는 악수도 거절했다고 말
한다. 그녀와의 만남은 카이퍼가 믿음의 선조들의 영적인 유산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였고,
카이퍼를 현대적 자유주의에서 정통주의로 바꾸어 놓는 전환점(Turnign point)였다고 당시
카이퍼가 주필로 있던 일간 신문인 스탠다드(De Standaard) 지에 실린다.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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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869년 5월 우트레흐트 중앙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기독교 국가 교육 협
회”(The Dutch Society for christian Education) 전국 총회 모임 전야의 연설에서
카이퍼는 “국민의 양심에 고함”이라는 연설에서 신앙의 자유, 그리고 부모의 자율권
을 정부가 인정해야 한다는 교육적 주장이 담긴 설교를 했고, 본격적으로 흐론12)이
이끄는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와 관계한다.
그리고 동일한 해에 종교와 정치를 다루는 주간 신문인 De Heraut 지의 편집장이
던 슈바르츠(C. Schwartz) 박사가 카이퍼를 협동 편집인으로 임명하고 1870년에는
슈바르츠 박사가 세상을 떠나자 편집장에 이어 대표를 맡으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
유로운 교회와 자유로운 학교를 위하여”라는 헤르아우트 신문의 후신을 약 50년간 섬
기게 된다.13)
우트레흐트에서 목회한 지 3년 후인, 1870년에 카이퍼는 암스테르담 교회의 청빙을
받는데, 그는 취임 설교에서 에베소서 3:17을 본문으로 “우리 교회는 개혁교회가 되
어야 한다.”를 천명하며,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의 절반인 14,000명의 교구민을 지도
하는 직책을 맡는다. 동시에 전국 교회에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정통적 개혁신학을 융
성하게 활동하는데, 대표적으로 1871년 3월 14일에 행한 “모더니즘: 기독교 세계에
있어서 신기루”(Modernism: A Fata Morgana in the Realm in the Realm of
Christiannity)라는 현대주의 비판 강연이다.14) 이어, 1872년 암스테르담 당회에 속
한 17명의 장로들은 성명서를 내고서 자신들은 교회 직무가 허용하는 한 자유주의 목
사가 집전하는 모든 종교적 예배 그리고 기념식에 불참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3. 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참여
1874년 1월 21일 중간선거에서 카이퍼는 하우다(gauda)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이 된
다. 당시 하원의원은 종교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헌법에 따라 중앙 교회의 목사직의
명예퇴직을 하고, 장로로 추대된다. 그리고 1875년에는 국회의 업무로 당회에 거의
출석할 수 없게 되고, 스스로 1876년 장로직도 명예롭게 사퇴(honorable discharge)
한다.15)
그리고 스탠다드지를 1872년 창간하여,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의
천명을 계속하는데, 반혁명당의 하원의원으로 있으면서 1876년 2월부터 1877년 5월
까지 신경 쇠약 증세를 보여 요양을 하게 된다. 이후, 1877년 7월 하원의원직을 사임
하고, 1877년 12월 새로운 헤르아우트를 창간한다. 1878년에 반혁명당의 수장이 된
12) 흐론은 1801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레이던 대학교를 졸업했고, 역사학자, 정치 평론
가, 정치 지도자로 부각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면서 “혁명을 넘어 복음으로”라는
자신의 생각을 알리며, ‘반혁명당’을 창당해, 1871년 즈음에 6-7석을 차지한다.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29
13)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30
14)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31
15)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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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는 1879년 우트레흐트에 당사를 두고, 다음의 정치 원리를 선언한다.16)
“정치 영역에서도 반혁명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고
백한다. 국가의 권위는 교회의 결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공무원의 양심 속
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례에 의존한다.”
이에, 공교육과 마찬가지로 사설 종교교육기관도 공립학교와 동일한 권리와 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법 제정과 국민 투표권 확대, 노동권의 인정, 식민지 정책
의 개혁 등을 주장하며, 결국 1879년 치러진 하원의석 11자리를 확보한다.17)
3.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
카이퍼의 사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으로 요약되며, 자유대학교 설립을 통해 실현
된다. 이는 1880년 10월 20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의 새교회(De Nieuwe Ke가)에
서 자유대학교 개교를 기념한 다음의 연설이 중요하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다.”18)
이는 인간 삶의 영역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교육, 스포츠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서 소위 ‘영역주권’ 사상으로 불린다.
당시 네덜란드 교회는 상기 언급된 교회외적인 도전뿐 아니라, 교회내적으로도 에라
스무스를 승계하는 기독교 인문주의 흐로닝언 학파, 개혁파 정통주의를 부정하는 드
라 쏘세이(D. Cha. Dela Saussaye)와 훈닝(J. H. Gunning)이 주도하는 윤리신학파,
그리고 레이든 대학의 스콜턴(J. H. Scholten)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과 세상
과 분리고립된 재세례파적인 분파주의적 경향 때문에 위험에 처해있었던 이유에 의해
카이퍼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19)
이런 카이퍼의 주장은 곧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영역까지 사회와
인간 삶의 전영역이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이어지길 원하는 것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른 그리스도인의 적극적 사회 참여와 사회에서
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라 ‘일반은총’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20)
그리고 1618-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수립된 3개의 교리적 표준을 기준으로 기독교종
16)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34
17)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35
18) 박태현,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교”, 신학지남(2015), 179
19) 박태현,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교”, 신학지남(2015), 181
20) 박태현,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교”, 신학지남(2015),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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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대학을 설립하여, 당시 네덜란드 국가와 네덜란드 교회로부터 독립된 성경을 중심
으로한 칼빈주의적 인물양성을 목표로 네덜란드 사회에 윤곽을 드러낸다.
4.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상실현에 대한 도전
사실 카이퍼의 자유대학교 설립은 내외부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는 박태현 교수
에 의해 3가지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21)
먼저, 첫째, 당시 대학으로 인정 받기 위해 최소 5개 학부(신학, 교양, 법학, 의학,
자연과학) 중 3학부의 교수요원을 확보하는 것, 둘째, 10만 길더22)의 대학교 개시 착
수금의 확보, 셋째, 학생들의 법적인 자격을 부여하는 ‘공적 효력(effectus civilis)’의
확보 등의 내적 어려움이다.
또, 외적 어려움으로 첫째, 반대파 신학자들의 명분에 대한 비난과 둘째, 그들의 후
원금 모집에 대한 실제적 방해, 셋째, 기존 교단의 자유대 출신 신학후보생들의 사역
금지 등이다.
그러나 카이퍼와 그의 지지자들은 결국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다시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3)
첫째, 카이퍼의 정치적 역량이다. 그는 1878년 고등교육협회를 조직하고, 1879년 기
독교 정당인 반혁명당(ARP)를 창당하여 ‘민초들의 종지기’로서 참된 민주주의와 국민
을 위한 정치, 사회 개혁을 시도한다. 이는 1878년 카페이너 판 더 코펠로(J.
Kappeyne van de Coppello)의 학교법안에 대한 “국민 탄원서” 서명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 서명운동을 통해 반혁명 지지자들과 로마 가톨릭과의 연합을 이끌어
내어, 반혁명당의 확장을 이룬다.
둘째, 그는 언론인으로서 국민적 호응을 이끌어 낸다. 그는 기독교 주간지 「더 헤라
우트」의 편집장으로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불어 넣었고, 1872년 「더 스탄다르
트」를 창간 및 1877년 폐간되었다가 다시 「더 헤라우트」를 재창간시키며, 교회적 이
슈들과 정치적 이슈를 시기장소가 적절하게 다루어 세를 모은다.
1892년 돌레앙찌 사태이후, 1896년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스톤 강좌(L. P. Stone
Lectures)를 맡고,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칼빈주의 강연』으르 하고, 마침내 카이퍼는
64세가 되던 해인 1901년 하원의원이요 반혁명당 총재로서 화란의 수상이 된다. 그
리고 천주교당과 연정한 반혁명당은 자유대학교로 대표되는 그의 정치적 사상을 실현
시키기 시작하고, 마침내 반대파가 장악하고 있던 상원을 해산시키고, 고등교육법 개
정과, 노동자의 보상 범위 확대, 여성과 청소년을 산업적으로 보호하는 법을 만드는
24)
등 당시 화란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투쟁을 이어간다.
21) 박태현,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교”, 신학지남(2015), 189
22) 화폐단위(gulde[네덜란드어], guilder[영어])
23) 박태현,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교”, 신학지남(2015), 192-193
24)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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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는 1905년 선거에서 약소한 차이로 패하게 되고, 정치적인 생명을 잃어가며
다시 헤르아우트 지에 예배와 그리스도의 왕직, 반혁명 정치학 등에 관하여 책을 저
술하다가 1908년 다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반혁명당 의장으로 섬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그리고 83세에 중병으로 몸져 누워, 1920년 11월 8일 하늘의 부름을 받
는다.25)
5. 주요 저작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작가이다. 그의 저작들을 모두 다 읽고 정리한 룰만(J. C.
Rullman, 1876-1936) 목사의 세 권짜리 카이퍼 문헌집(Kuyper-bibliografie)에 따르
면 카이퍼의 저술은 223권이다.26)
사실, 아직도 카이퍼의 신학 사상을 종합적으로 해설한 서적도 없는데 이는 그의 저
작이 방대하고,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했으며, 헤르아우트 지에 연재한 것이 자꾸 편집
되어 출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하여, 카이퍼는 그의 교의신학을 『신학백과』
(Encycolo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있으나
출간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강의록으로 정리된 수준이다.27)
상기 언급된 대표적인 신학적인 저술로는 『왕을 위하여』(Pro Rege, 3권.
1911-1912)-De Heraut지에 1907-1911년에 연재,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연구서.
『신학 백과』(Encyclo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 3권,1894-1895;
21908-09). 『교의학 노트』(Dictaten Dogmatiek. Collegedictaten, 5권. 1902,
21910)- 학생들이 교의학강의를 받아쓴 것. 등이 있고, 이 외에도 칼빈주의에 관한
저술과 교회론, 기독교 정치, 성경연구 및 명상록을 저술한다.28)
중요한 것은 그의 칼빈주의가 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지난 100년간 지대한 영향력과
함께 많은 논쟁을 일으켰기에 그의 저작에 나타난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한눈에 보는 아브라함 카이퍼29)
화란 갱신교회의 얀 카이퍼(Jan Fredrik Kuyper) 목사의 장남으로
1837. 10. 29
마아스슬롸이스(Massluis)에서 출생
18세에 레이든(Leiden) 대학에 입학. 드 프리스(De Vries) 교수에게
1855
성경원어를 수학하는 등 문학과 신학을 공부
1858. 11. 24
레이든 대학 신학부에 입학. 스콜턴(Scholten) 교수에게 조직신학을
25)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통해 배우는 교훈들”, 교회와 문화(2014), 145
26) 이상웅,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개관 1”, 신학지남(2013), 223
27) 이상웅,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개관 1”, 신학지남(2013), 223
28) 이상웅,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개관 1”, 신학지남(2013), 224-226
29) 이국운, “아브라함 카이퍼 정치사상의 한국적 수용”, 신앙과 학문(2013),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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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레이든 대학에서 25세에 신학박사 학위(Th. D)취득. “요한 칼빈과 요
1862. 9. 20
1863. 7. 1
한 라스크의 교회론 비교연구”란 논문으로 국가로부터 최고상 수상
로테르담의 요안나 스카이(Johanna Hendrika Schassy)와 결혼.
베이스트(Beesed) 교회에서 목사로 장립받고, 동교회 시무 중 발투스
(P. Baltus) 부인의 감화로 자유주의적 현대신학에 회의르 ㄹ느끼고
정통 칼빈주의 신앙으로 돌아옴. 이 때, 카이퍼는 그의 사상적 스승이
며
칼빈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흐론
반
프린스터(Groen Van
Prinsterer)와 만남. 반 프린스터는 그가 창설한 기독교 정당(ARP)의
당수로 있었다.
1867-1879
1869. 9. 1
우트레흐트(Utrecht) 교회에서 12년간 목회
ARP 정당의 당 총재로 취임
암스텔담 중앙교회 목사로 시무.
ARP 소속의 일간지 스탠다드(De Standard)지를 창간하고, 주필로 취
임 후, 일생동안 언론인으로 삶. 또한, 기독교 주간지 헤라우트(De
Heraut)지의 편집인이 됨.
1870-1874
국공립대학의 무신론적 반기독교적 성향에 반하여 성경적인 기독교
사립대학 설립의 필용성을 주장함.
1874. 1. 21
1878. 4
하우다(Gauda) 지역에 출마해서 하원으로 당선
스탠다드 지에 ARP정당의 정책을 발표하고, 이듬해, “우리들의 계
획”(Ons Programa)이란 책을 저술하는 등 칼빈주의 정치원리를 정
립함.
화란의 교회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됨.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1880
를 설립하고 교수 및 초대 총장으로 취임. 개교 기념 강연으로 영역
주권(Souvereinteit in eigen Kring) 사상을 주창함.
다시 총장으로 재선됨.
1887
1891
1894
기독교사회협회를 창설
다시 하원의원으로 선출됨. 칼빈주의적 정치실현에 헌심함.
미국 프리스톤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음. 이 때, “스톤 강
1898
좌” 계획으로 칼빈주의에 관한 특별강연을 함.
내무부장관 겸 수상이 됨. 빌레미나(Wilhemina) 여왕의 명으로 전 내
1901-1905
1907. 10. 29
1909. 5. 10
각을 크리스챤으로 구성
카이퍼의 70회 생일이 화란의 국경일로 선포됨.
벨기에의 루방(Louvain U.)대학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및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음
헤라우드 지의 고정 칼럼자로 6년간 306편의 칼럼 기고로 “세계의 종
1912
말”이라는 대작을 남김
종신 상원의원이 됨
1913
1919
대작 “메시야”를 착수
83세를 일기로 서거
1920. 11. 8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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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는 한국교회에 날카롭고 뼈저린 교훈을 줄 수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외적으
로 이단과 타종교의 공격과 함께 특히, 잘못된 정치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내
적으로 교단간 그리고 교단 내의 권력다툼과 성적인 타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는 우리 합동교단도 예외가 아니며, 이에 현실적이고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여 누구
라도 납득할만한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신학적 토대를 구축하고, 목회현장에 시행
하는 노력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는 삶과 신앙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
는 한국교회에, 일상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어떻게 도래하게
만들지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종교로서 어떤 정치적 입장과 그것의 실제화에 관해
큰 영감을 준다.
카이퍼는 1905년 퇴임한 이후에도 네덜란드교회의 칼빈주의를 지탱하며, 아직도 네
덜란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는 정통보수신앙의 보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수학한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외에, 이 짧은 논고에서 다루지 못한 그의 사상과 영향력은 현재에도
네덜란드 사회에 남아 있으며, 간접적으로 한국교회에게 끼치는 영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관련하여, 더 많은 연구가 한국에서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를 바
란다.
끝으로 목회자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장차,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되
고자 기도하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디 이 짧은 논고가 그들에게 세상을 변
혁시키려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 소중한 계기로 작용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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