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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하임의 『개신교의 본질』에 관하여
열린개혁교회 담임목사 장창한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중반 서유럽게 득세하던 자연과학적 무신론 사조에 맞서 빗장을 닫아걸고 기독교신앙을 지키기보다 당시의 자연과학적 성취에 대해 열린 대화를 시작했던 칼하임은 계몽주의적 자연과학의 세기에도 납득되는 신학을 정초하려고 분투했다.
칼 하임은 1892년 독일 남부의 튀빙엔 대학교에 입학해 1896년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19세기 말 독일 개신교 주류였던 알브레히트 리츨의 신칸트주의 신학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경건주의 성경공부 모임과 에두아르트 퓌클러가 지도하던 선교단체인 독일기독대학생연맹에 참여했다. 1893년에는 슈바벤의 설교자 수양회에서 엘리아스 쉬렝크의 설교를 듣고 이성과 지적 인식 체계 전체의 중생을 경험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5년간 교구목회를 한 뒤 독일기독대학생연맹 실무간사로 활동했다. 1907년에 논문 “미래의 세계상: 철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신학의 대립”을 출간해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 경건주의 신학의 총본산인 할레 대학교에서 7년간 월급 없는 강사 생활을 했으며,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뮌스터 대학교 정교수로 취임했다. 1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련기를 보낸 뒤 스승 테오도르 폰 해링의 뒤를 이어 1920년 튀빙엔 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이후 1939년 은퇴할 때까지 튀빙엔 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58년 별세했다.
『개신교의 본질』이 직면했던 유럽의 종교적 상황
이 책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개신교도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 열풍에 자극을 받아 루터의 종교개혁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파헤친 칼 하임의 역작이다. 그는 기독교변증가임을 넘어 기독교회의 선교적 봉사를 양양했던 조직신학자이며 자연과학과 신학의 종합을 추구한 통섭적인 신학자로서, 자연과학적 인과율의 세계 속에 갇힌 무신론의 덫에 걸려 있던 서구유럽인들에게 기독교신앙의 정당성과 긴급성을 논증하는 데 투신했다.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유럽에는 범가톨릭 회귀 열풍이 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 사제이자 유명한 문인이었던 존 헨리 뉴먼 신부의 1845년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알베르트 폰 루빌의 1909년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서구유럽 개신교도들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가톨릭교회에 대한 향수를 폭발시킨 기폭제였다. 이 유명한 개종자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 여파인지 당시 독일에서도 가톨릭교회로 넘어가는 루터교 신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를 직시한 칼 하임은 이 책에서 가톨릭교회로 빨려 들어가는 루터교도들을 염두에 두고 루터의 종교개혁의 본질을 간결하고도 심오하게 설명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 향수를 느껴 역개종하는 독일 개신교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16세기 이래 독일의 정신적 통일을 저해했다는 오해를 받아 온 루터의 종교개혁의 본질을 천착하되, 다른 어떤 종교개혁 서적도 다루지 못한 깊이로 종교개혁가 루터의 정신사를 추적한다.
이 책은 개신교 독자들의 자아성찰을 도울 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앙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증대시켜 준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가톨릭교회와 견주어 볼 때 개신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특장과 매력, 그리고 개신교신학의 신학적 장엄미를 섬세하고 정치한 논리로 옹호한다.
『개신교의 본질』의 중심 주장
알베르트 폰 루빌의 선동적인 책 『거룩한 교회로 돌아오라!』가 있다. “‘우리 모두가 다시 가톨릭이 된다면!’이라고 절규하는 격렬한 감정”이 당시의 독일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관류하고 있었다. 전쟁에 패함으로써 영육이 피폐케 된 독일 개신교도들은 ‘우리의 내적 공허는 피안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신비한 매개물을 소유한 사제 중심의 거대한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가톨릭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왜 우리 독일인들은 고통스러운 분열 상태를 유지해야만 할까?’라는 의문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칼 하임은 ‘도대체 프로테스탄트적 경건성과 인생관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것은 실제 생활과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답변하려고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 절대주의에 대한 복고주의적인 향수가 가톨릭 부흥운동을 촉발시켰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계몽주의적 객관성과 세속주의가 상대주의적 도덕적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로 낙착되던 시기였다. 도덕과 종교의 중심영역까지도 장악해 버린 상대주의와 모든 개고간적인 진리마저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그 진리성을 해소시켜 버리는 역사주의는 반동적으로 역사 저편초월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둘째, 신비주의적 초월에 대한 향수가 가톨릭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18세기 이후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가 강조하는 객관성에 대한 갈망이 오히려 신비적 체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촉발시켰다. 자연과학 세계의 발굴과 탐사 성취로 인류문명을 향도한다고 자부하던 ‘순수이성’의 사도들도 기진맥진해 이 모든 ‘현상’ 세계 너머의 원시적인 생명력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 가톨릭신앙의 신비주의적 영성은 어떤 실증주의 철학이나 엄밀한 과학적 탐구도 가져다줄 수 없었던 초월적 세계와의 접촉을 체험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갈망에 응답했다. 가톨릭교회는 이 차안적 세계탐구에 지쳐 버린 영혼들에게 천상적인 황홀경과 성스러운 단순함으로 경험되는 아늑한 신일합일적 예배 분위기를 연출했다.
셋째, 가톨릭교회의 중세적 예배형식이 현대인들의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갈망을 일부분 충족시켰다. 삶의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는 상황이 절대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자극했던 것처럼, 로코코 양식과 나폴레옹 1세 제정시대 양식이 끝난 1870/71년 이래로 최악에 처한 서양예술의 무형식성은 유럽인들의 파편화된 삶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이 출생과 더불어 전통적인 예술양식과 생활양식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던 이전시대에는 알지 못했던 ‘형식과 양식에 대한 향수’가 서구유럽인들에게 촉발되었다.
넷째,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보편주의가 현대인의 근원적 영적갈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모든 도덕적-종교적 사상들을 두세 가지 이성적 진리로 환원시킨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에 맞서서 가톨릭교회는 모든 단계의 영적 종교적 층위를 다 제시하며 현대인들의 다양한 종교적 욕구에 응답한다. 가톨릭교회에는 자연종교의 원시적인 마술에서부터 엄격한 유대교적 율법종교 및 신비가의 섬세한 영혼의 서약에 이르기까지 종교사의 모든 단계가 잔존해 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종교적 상향추구 열정을 긍정한다.
칼 하임은 이러한 가톨릭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매력을 충분히 느낄 때만이, 루터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완전한 영향력 밑에 있던 사람들이 가톨릭교회로부터 탈출을 감행한 사건의 중차대성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교회 분열의 원인
칼 하임은 루터가 어쩔 수 없이 종교개혁자로 나서게 된 역사적‧신학적 이유를 해명한다. 칼 하임은 면죄부 남용 폐해에 대한 루터의 질문을 몰지각하게 매도하고 루터의 진정성을 배척한 가톨릭교회 당국자들의 누적적이고 연속적인 악행이 개신교 탄생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분석한다. 면죄부 남용 폐단에 대한 루터의 질문은 독일 농민들과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신음을 대변했기 때문에 루터의 문제제기에 대한 가톨릭 당국자들의 묵살은 독일 제후들과 독일 민중의 민족주의 감정을 격발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제도적 개신교회가 파생되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신구교 분열을 확정 짓는 교리적 대립의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가 있다. 이 대립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도적 특권과 사명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권을 보증한다고 여기는 마태복음 16:18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기인한다.
먼저, 1870년에 열린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말씀과 누가복음 22:31-32에 근거해 하나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최고 관할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베드로에게 직접 위임되었다는 것을 교리로 선포했다.
칼 하임은 마태복음 16:16-21 전체 단락을 삽입구절로 설명하거나 처음부터 반대되는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예수의 말씀을 완화시키려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해석 시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이 말씀을 신약성경 전체 문맥에 집어넣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 2장은 시편 118:22를 근거로 해 하나님이 세우시는 영적 건축물에 대한 마태봉금 16장 비유를 한층 더 확장시켜 진술한다. 베드로전서 2장의 “머릿돌”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에베소서 2:20이하는 “모퉁잇돌”을 집합적이고 유기적 의미로 파악한다. 요한계시록 21:14는 열두 사도를 “기초석”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구절을 함께 고려해 보면, 교회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 외에도 전체 교회를 위해 독특한 중요성을 지니며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전권, 즉 미래의 세계에까지 미치는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하임은 마태복음 16:18의 “반석”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사도들과 선지자 집합체라고 본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6:18의 반석 말씀의 효력은 어디까지나 베드로에게 국한된다고 본다.
즉, 그는 이 말씀이 교황들의 베드로 계승교리가 아니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본다. 즉 베드로가 사도로서 하나의 사명 즉, 전체 교회공동체에 대해 상속될 수도 없고 바로 다음 세대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존엄한 직분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그리스도 이해
베드로의 사도권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는 그리스도 이해에서 기인한다. 가톨릭교회는 부활승천해 세상을 권력적으로 통치하는 승리한 군주로서의 그리스도 이해에 집중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부활승천해 하나님 보좌에 앉아 성령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다스림으로써 세계르 ㄹ통치하는 영적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영적 통치는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과 신앙에 근거해 이뤄지는 통치를 의미한다. 이는 정신과 영의 영역과 관련된 일에서만 통치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의 시작과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사죄대권이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의 신적 사죄대권이 교황과 사제들에게 전유되었다고 믿는다. 반면, 모든 프로테스탄트는 예수의 사죄대권은 오로지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과 양심 속에 일어나는 내적인 사건을 통해 작동된다. 트로테스탄트에게 가톨릭교회는 세상질서를 요동시키는 이 고독한 인물 예수에게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거부했던 바로 그 권력통치적 보좌를 차지한 것처럼 왜곡했다. 프로테스탄트에게 예수는 되풀이하여 특이한 이방인처럼 과거의 심연으로부터 떠올라 와서는 사람들을 양심의 불안과 떨림의 길 위에 서도록 한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의 영혼에 대한 예수 통치의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이 보내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 영혼은 십자가에 달린 주,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케 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 복종한다. 실제, 영적 통치자인 그리스도는 권력과 무력 대신에 인간 양심의 자발성을 추동시켜 그분의 통치를 관철시킨다.
하나님을 향한 두 개의 대립된 길
가톨릭과 개신교의 첫 공통점은 두 종파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 아직도 여전히 세상을 긴장시키는 이 독특한 인물을 소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오늘날에도 역시 그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 그런데 두 종파의 공통점은 단지 성서적인 그리스도상만은 아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적인 믿음도 있다. 두 종파 모두 어떠한 이간도 결코 스스로 요구하지 못했던 전권, 죄를 용서하며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세상 죄를 해결할 사죄대권을 가졌다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와 더불어 두 종파의 세 번째 공통점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라면 그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두 종파의 대립적 이해
두 종파에게 세계사는 죽었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주역으로 활약하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가톨릭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반전은 이미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예수의 권력통치 시대에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세계정세의 긴장 해소는 현재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비로소 오게 된다. 그 결과 대립된 두 가지 그리스도상이 나타나며, 그것으로부터 모든 종교적, 도덕적, 문화적, 교육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상이한 견해가 발생한다.
예수 자신은 자신의 위대함과 사람들에 대한 내적 지배력을 지상 군주들의 권력 행사와 절대적으로 대조하고 대립시켰다. 그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2-44)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섬기는 종으로서 인자가 사람들의 양심에 행사하는 힘은 모든 정치적인 지배 즉, 모든 형태의 권력 행사 인간들을 강제력과 경찰력을 통해 명령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어떤 시도와도 완전히 대립된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섬김을 통한 내적 통치는 과거, 즉 예수의 생애에서 가난하고 비천했던 처음 짧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래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권력의시기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미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당시 교황의 요구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일탈하는 자에게 사형을 내렸다. 후에 교황권에 의한 시앙 강요가 화형과 종교재판이라는 다른 강제수단들을 통해서 한층 더 완벽한 체계로 집행되었다. 이후, 중세의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자면, 가톨릭교회는 권력 의존적인 사고에 대한 예수의 질책은 단지 예수가 가난과 수난의 시기를 보낸 최초의 짧은 시기에만 속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는 두 번째 시기, 세상 권력의 시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은 파문의 저주를 분순종하는 자들 위에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최고 교사로 절대적 존경을 받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일 한 이단자가 완교하게 저항한다면 그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할 것이며, 교회는 사형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제거하도록 그를 세상 법정으로 넘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설적 이해
프로테스탄트적인 그리스도 이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운명의 결정점이 되는 예수가 세상에서는 자신의 머리 둘 곳을 갖지 못했다는 것, 여우들과 새들만큼도 세상에서의 거주권을 갖지 못했다는 것,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지상을 거쳐 갔다는 사실 속에 존재하는 그 무시무시한 긴장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형태로 역사의 모든 비극을 관류하는 비할 바 없는 이러한 비극적인 갈등은 우리의 신념에 따르면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예수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행1:7)라고 말하는 그 시간, 이 세상에서의 권력문제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해결될 그 시간, 그 위대한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2:10 이하는 사탄의 권력을 정복한 후에 나타나기 시작할 이 위대한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라고 쓰여 있다. 세계사가 향하여 돌진해 가는 이러한 대전환적 ‘이제’, 즉 그리스도의 세상 지배가 실현되는 시점은 개신교적 신념에 따르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인 죄의 문제는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해결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문제인 권력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인간 존재의 두 번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세계대전 및 독일에 대한 뒤이은 죄책 전가와 같은 사건들을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직도 프로테스탄트는 예수의 유혹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권력정치의 어떤 승인도 거절해야만 했던 어려운 시험 기간 중에 있는 것이다. 초기의 군중 운집 후 점점 더 많은 제자가 그에 대해서 화를 내고 그로부터 떠나갔기 때문에 점점 더 고독하게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죽기까지에 이르렀던 예수의 그 좁은 수난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톨릭 예배의 중심요소인 권력적 그리스도에 대한 감동
만일 가톨릭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권력의 인상들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기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우리의 미적 감각, 모든 권력과시에 대한 우리의 타고난 존경과 찬탄, 우리를 도취시키며 매혹시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신비한 감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내다본 세계 상황의 긴장 해소 시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그 상황이 예수 당시와 아직도 동일하다면 사태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세상 지배를 실행하려는 이러한 응대한 시도는 유감스럽게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11:15)라고 말할 그 순간이 이미 온것이라면 그것은 장엄할 것이다. 이러한 순간이 도래했다는 환상만이라도 생겨난다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해방감을 느끼며 동경에 가득차서 환성을 올리게 된다. 교황제도의 매혹적인 매력은 여기서 발산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해결의 수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종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어려운 시험의 시기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믿음 안에 살고 있는 것이지 보는 것 속에 살고 잇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지상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저 순간을 끌어 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강제로 열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그의 능력으로 djEJᅟᅡᆫ 시간을 선택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을 압도하며 매혹하는 권력과시적 표현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단지 양심을 거쳐서만 가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권력적 표현과 모든 행복 욕구는 그에 비한다면 전혀 중요치 않을 정도의 강한 영혼의 진동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어떠한 대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목숨을 걸고 순결함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스라쳐 놀란 양심들’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본질은 매우보편적인 한 문장에 확실히 표현된다. 즉, 우리는 권력 인상의 경험이 아니라 단지 양심의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신비적 도취가 나를 덮치고 격처럼 나를 감동시켜 행복한 도취감 속에서 나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 또한 보다 높은 종류의 권력 체험이다. 이러한 신비적 도취는 그것이 인도 삼에서 뽑은 마취제에 의한 것이든 장엄한 음악을 통해서 생성된 것이든 양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한, 양심은 단지 탕진된 시간들에 대한 기억에 쫓길 때나, 선행을 해야 한다고 느낄 때에만 생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고하고 탐구할 때, 나의 정신이 진리를 추구할 때에도 활동한다. 그 둘, 즉 어떤 행위에 대한 책임감과 내가 헌신되어 잇는 세계관이나 학문적 견해나 사상에 대한 책임감은 서로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나는 권력의 인상들 및 신비적 도취 상태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험을 한다.
프로테스탄트적인 하나님 체험: 고독한 양심의 체험
권력 인상들과 신비적 도취 상태들은 집단적 암시하에서 공유될 수 있지만 ,진리의 인식과 양심의 경험들은 단독자적인 개인의 체험들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정신과 양심을 거쳐 가는 것이라면, 이러한 하나님 발견은 항상 완전히 고독한 정신의 행위이며 하나님과 내 양심 사이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이다. 다른 사람들, 친구들, 충고자들은 문지방까지는 나와 동행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를 홀로 남겨 두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의 영향력하에서 믿거나 체험하는 모든 것이 곧바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루터는 우리가 참다운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때, 즉 죽을 때에는 어떠한 높은 권위도 소용없게 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고 되풀이하여 역설한다. “비록 교황과 종교회의들과 성 교부들이 선서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할지라도, 악마는 즉시 너의 속으로 뚫고 들어가 ‘그들이 틀렸고 그들의 말이 자 못된 것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일단 그러한 의심이 떠오르면 너는 이미 굴복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에게는 절대적인 확신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3+2=5라는 것만큼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비록 모든 종교회의가 다르게 말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내 확신은 그렇게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이 말들에는 루터를 가톨릭교회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게 한 모든 것이 진술되어 있다. 그 속에는 종교개혁의결과 탄생한 개신교가 주장하는 하나님께 이르는 고독하고 고난에 찬 길이 그려져 있으며, 그 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우리는 먼저 개신교의 첫 번째 특징인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하겠다. 우리는 도취 상태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말씀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정신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적인 활동은 말씀들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하며 말씀으로부터 태어난다. 영적 감응과 말씀의 체득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신념은 부분적으로는 비록 상이하다 할지라도 모든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의 정신적 태도애서 특징적이다.
말씀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멸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제 4회 정경성서의 법령에서, “그리스도의 입에 의해서 혹은 사도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계승되어 현재까지 전달된 전승은 성서와 대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라고, 천명했다. 그밖에도 성서의 고대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 성서는 원전과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성서해석은 교부들이 합의한 견해와 교회의 권위에 종속되었다. 그럼으로써 처음부터 성서말씀에 대한 평신도의 영적인관계가 저지되었다.
가톨릭 경건의 본질: 범접할 수 없는 신성에의 참여
가톨릭교회는 예리한 개념 정의들로 매우 강력한 스콜라 체계들을 산출해 냈지만, 그럼에도 가톨릭 경건의 가장 깊은 본질이며 가톨릭 예배의 지향점인 신비주의는 말씀이나 인식의 정신적인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모든 말씀과 개념을 버려두고, 성녀 테리사가 “오, 예수여!”라는 감격적인 말로 묘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표상되지 않고 사고되지 않는 이러한 무형의 황홀경 상태는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남녀 신비가들에 의해 보는 행위와 듣는 행위보다 높이 평가된다. 신비가는 미사에서 한마디 말씀도 듣지 않고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신비적 예배의 본질적 특징이다. 사람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침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로부터 나온 이러한 장면들과 그때의 예수의 말씀들은 모든 말씀의 저편에 있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으로 영혼을 몰두시키기 위한 감각적 수단들일 뿐이다.
엑스타시의 정상에까지 올라간 가톨릭 경건의 위대한 남녀 대표자들을 고찰할 때면, 우리는 언제나 전체 종교사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갈등의 중심축을 이루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양자택일 앞에 서게 된다. 이러한 인물들의 그 천상적 도취가 한편으로는 실제로 하나님과의 접촉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인 삶이라고 지칭하는 그것, 즉 진리들의 표상, 파악, 이해와 말씀의 습득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분야에서는 무시되는 아마도 준비적 의미를 지니는 부차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양자택일 앞에 서 있으며, 둘 중 하나의 견해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가톨릭적 경건과 프로테스탄트적 경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 즉 우리의 전체 세계관이다.
물론, 가톨릭적 이간은 매우 깊이 사고하고 탐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의 중심은 결코 이러한 정신적인 사유 활동에 있지 않다. 이 중심은 정신적인 것 저편에 있는 어떤 것,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정신적으로 낯선 것으로 느끼는 그 어떤 것, 더 이상 말로 표현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속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발견의 기쁨으로 충분한 증거에 입각하여 사고된 가장 명료한 사상도 만일 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프로테스탄트적 견해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낯선 저 실체가 명령한다면 매 순간 희생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의 ‘함축적 신앙’
페터 로제거가 그의 평신도적 신앙고백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상기시키는 사상들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당연하게 이단이라고 비난받게 되었다. 예수는 개개인의 자아중심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성을 통해서 인류가 존속하며 개인의 희생적 죽음이 무수한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로제거는 성서와 교회의 문서들에 근거하여 그에게 동정녀 탄생을 설득시키려고 했던 선량한 주임신부 우르반의 관 옆에 그가 어떻게 서 있는지를 묘사한다. “나는 그 경건하고 신실한 영혼을 그토록 자주 흥분시키고 화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며, ‘내가 이미 99%를 믿고 있다면 왜 100% 전체를 믿지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것은 시비이며, 또한 모든 것은 해석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문자 그대로 그것을 해석한다면 나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까?”
로제거의 마리아론 역시 매우 단순하다. 로제거에 따르면 마리아는 구세주에 대한 불타는 갈망으로 가득 찬 처녀였다. 그녀가 어머니가 되던 시기에 이러한 거룩한 열정이 마리아를 가득 채웠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했던 것이다. 로제거에 따르면 성령은 그러한 열정이다. “그토록 자주 나는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불타는 갈망을 발견하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성령의 계시다.”
우리는 예수회 교단의 교육 속에도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그 문제가 있음을 이해한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그의 묵상수도의 원칙들을 제시할 때, “교회와 함께 올바른 방식으로 느끼도록 인도해 주는” 규칙들을 부연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정신은 자기 자신의 판단의 철저한 중지하에서 그리스도의 진짜 신부이며 우리의 성스러운 어머니인 가톨릭교회에게 복종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같은 모양이 되며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 만일 교회가 검다고 규정했으면 우리 눈에 희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검다고 선포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우리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그 빛 즉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꺼버리는 것이다. 모든 정신적인 활동 속에는 엄격한 진리감지력이 발현된다. 그 때문에 판단행위는 거의 항상 깊은 의심을 통과해 지나간다. 이러한 의심이 강제로 억압되고 억제된다면 정신은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그 지점으로부터 멀어진다. 우리는 완전한 정신의 명료함 속에서만, 즉 우리의 판단력과 진실한 양심을 온전히 지녔을 때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우리가 알게 된 가톨릭교회의 영적 생활의 세 가지 억압 양식은 모두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에서 위험한 걸림돌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영적 생활은 첫째, 정신적으로 저급한 의식몽롱 상태에 빠짐으로써 억압될 수 있따. 정신을 소멸시키는 두 번째 수단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참되다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층 더 위험스러운 것은 영적생활을 막는 세 번째 수단인데, 예수회의 교사들에 의해 복종훈련이라고 추천되는 이른바 자기 맹목화, 즉 우리에게 오는 항변들과 떠오르는 의심을 의지행위를 통해서 강제로 억제하려는 시도다.
양심의 종교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사상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이해하려면 루터의 영적 고투 역정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는 교회의 성사와 수도원 훈련을 통해서는 더 이상 평화를 발견하지 못한 ‘양심가책자’였으며, 옛날부터 수도원들의 가장 진지한 수도사들에게 빈번했던 ‘도덕적 쇄심증’이라고 불리던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중단 없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고자 시도했던 루터는 그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내적 불안, 즉 영혼의 구원을 못 받을 죄악을 범했다는 불안과 그의 참회는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며 자격을 갖추지 않고 성사에 참여했다는 두려움에 빈번하게 사로잡혔다.
루터가 양심가책으로 고통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무제한적 전체요구 의식, 즉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드린 것이 아니라는 가혹한 자기검열 의식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부 아니면 전무’ 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루터의 수도원 투쟁들의 근원이다. 기도를 할 때면, 그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너는 기도할 때 참으로 온전한 하나님 사랑에 의해 하였느냐? 그것이 없다면 기도란 단지 죄에 불과하다.’ 그는 제단의 성단소에 서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일 때면 깨달았다. 의도적으로 모이는 것이 강요되면 될수록 생각들은 그만큼 더 쉽게 산만해진다.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하는 것, 이것이 이미 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교회의 성사도 고해성사나 고해석도 그에게 아무런 평안을 마련해 줄 수 없었다. “그는 날마다 고해하며 가장 작은 일도 참회하며 과거의 일도 되풀이하여 참회”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양심의 각성이 개인들이나 전 민족 공동체에 임하면 항상 두려운 발견이 일어난다. 즉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들 속에도 우리의 예배 속에도 우리의 금욕 속에도 항상 동일하며 극복할 수 없는 은밀한 자기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강요된 헌신도 원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혼으로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무와 당위적 강제와 강압의 모든 불순물이 사라진 마음의 가장 깊숙한 열망으로부터 탄생한 의지만이 완전히 자유롭게 온전한 의지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강요된 것은 어떤 것도 보존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단지 온전한 마음의 자발적인 헌신만이 유효하다. 전부이거나 아니면 전무인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인간 내부에서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용서의 확신이 빛나게 되는 이러한 기적은 단지 믿음 안에서만 이해도리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일에 협조하게 될 어떤 종류의 정신적 업적을 의미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항상 정신적 공로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배제되도록 ‘믿음’을 묘사했던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나의 의로움이며, 그분 자신이 그 의로움의 본질이요 형체다.”라고 말한다. 믿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성전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포착한다. 믿음은 인간 마음의 어둠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절망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ㅁ루인 믿음이다.
제사장직의 종말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즉 제사장의 중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사 중심 교회의 신비적인 매개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는 뜻이다. 이점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립은 모든 상호 이해와 존중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소될 수 없다.
기독교의 전 역사인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미 처음부터 사제적 중재를 통해 인간의 양심을 장악하려고 했던 제사장들과 양심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예언자들 사이의 투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목자 아모스가 벧엘의 대제사장 아마샤에게 대항한 것이다. 이사야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의 갈등은 아모스와 아마샤의 갈등의 연장이었다. 이 두 예언자는 화려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야웨를 알고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예배나 제사 그 자체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제사드리는 의식이 제사장 계급의 손에서 양심을 마비시키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그 단순한 요구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된 상황을 겨냥했다.
루터는 제사장 계급이 양심ㅇ르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조교재판과 면죄선언- 중 면죄부 제도가 한층 더 위험하고 해악하다고 판단했다. 면죄부 제도의 본질은 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의 짐을 면죄해 준다는 주장에 있다. 루터의 교황제도에 대한 반대는 “그 불행한 사람들이 속아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게 축복받게 도리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생겨났다.
우리는 종교재판이라는 강제수단을 통해서든 면죄부라는 매혹적인 은혜의 보증에 의해서든 양심을 예속상태에 두기 위해서 제사장 계급이 사용하는 이 모든 수단에 복음의 이름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사죄대권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남겨 놓으셨다.
아퀴나스와 그를 계승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가톨릭교회 철학자들은 우리 인간들이 신존재 논즈으이 도움으로 하나님을 전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신존재 논증이란 소위 인간 정신의 제단 위에서의 ‘신의 현현’으로 사제가 하나님의 권능을 미사 제단으로 끌어 내려오는 행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미 이 점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모든 논증과 추론으로는 결코 유한성의 한계를 넘을 수 없으며 본성으로부터 역사 혹은 인간 정신으로부터의 모든 하나님 존재증명 논증은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영역이나 감각경험의 영역 안으로 확보해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칸트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 내로 동라가도록 명하는 인간 정신의 경계에 서 있는 파수꾼이다. 칸트가 설파했듯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은총을 증명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일까지도 오로지 자신의 권능 안에 남겨두셨다.
개신교 윤리
이신칭의의 복음은 인간이 절망의 심연 속으로 추락한다고 믿는 동안에 그는 영원한 팔에 붙들려 한ㄹ로 옮겨진다는 진리다. 전혀 강제 없이 가장 깊은 자발성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맞이하는 사랑, 전 영혼 가장 깊은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이웃사랑이 공적 생활에 작동하는 곳에 개신교 윤리가 구현된다. 이 고도의 자발적 하나님사랑은 율법이 지시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비범한 것을 준행하려는 갈망으로 드러난다. 루터가 말하듯이, “신자는 선한 행위를 행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전혀 묻지 않고 그 일을 이미 해버린다.” 이 현상이 모든 개신교 윤리를 발생시키는 기본 정서다.
가톨릭교회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의 계명을 실현하려는 세계사적 시도, 즉 세상 삶의 모든 영역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소금의 힘을 침투시키려는 시도였다. 세상에 하나님의 영을 침투시키려는 가톨릭교회의 사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적 이층세계관을 통해 성취된다. 기독교신앙과 은총의 세계는 상층부요 자연적 이성은 하층부를 구성한다. 아래층은 자연적 기초로서 생존경쟁, 법, 강제, 세계국가, 전쟁이라는 옛 인간성이다. 이제 이 아래층 ndl에는 하늘 쪽으로 솟아 있는 둥근 지붕처럼 위층이 놓여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인간성, 새로운 규범 순수한 천상적 사랑의 관리자인 가톨릭교회라는 국제적인 하나님나라다. 여기에서는 제사장 계급이 지배한다. 이러한 상부구조로부터 이제 인류의 영적 문화적 생활 전체가 경영된다.
그러나 지상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숭고한 사명을 다해야만 한다면, 먼저 하나의 조건이 성취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유’, 즉 행동능력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란 모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처리권, 결정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류를 관통하는 거대한 정신의 흐름들을 하나의 중심 지저에서 조정하며 감독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새로운 시작과 더불어, 데카르트 이래 철학적 사고의 새로운 각성과 경험과학들의 개선행렬과 더불어 확실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철학과 정밀한 자연과학은 조금도 감독받지 않고 완전히 무전제적으로 대상에 접근할 때만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중세의 통합된 문화 속에서 모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지배는 그리스도로부터 세움을 받은 제사장만이 은혜 주입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신앙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일단 제사장 계급의 전권이 추락했을 때, 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 중의 하나에 서게 되었다.
거룩을 독점한다고 여겨지던 성전이 붕괴되자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인간의 삶을 건축하는 데 공헌하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새로운 사상이었으며, 예배로서의 세상 직업에 대한 이해였다. 제사장 문화의 종말과 더불어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권력투쟁적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작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나라 속에서 모든 실존적인 투쟁의 바깥에 서 있지만, 다른 한편 세속적인 직업인으로서 투쟁의 한 가운데서 세속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 투쟁을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전기 작용 시에 음극과 양극이 만날 때처럼 고도의 긴장이 생겨난다. 바로 이러한 긴장을 통해서 신앙과 사랑의 능력들이 위력을 드러낸다.
개신교 교회
콘트탄티누스의 칙령으로 소급되는 중세국가는 진리문제에 대한 특정한 해결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국가는 어떤 특정한 종교가 진리이며 그 때문에 그것이 국가종교로서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었다. 진리문제의 어떤 특정한 판단을 국가법으로 만들려는 최후의 시도는 러시아의 차르 제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국의 거룩한 주교회의의 정교일치적 판결에 의하여 이단자들은 시비레아로 보내졌고 톨스토이(러시아 정교회 그리스도인)는 파문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신앙을 이런 방식으로 헌법에 수용하려는 시도가 포기되자마자, 새로운 국가이념, 프리드리히 대제의 눈앞에 떨올랐던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이념이 탄생했다. 이러한 국가는 사상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라는 원칙에 근거한다.
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국가생활과 세계문화의 주체적 각성이라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칼 하임은 주세 시대 전체에 걸쳐 교회가 가졌던 매력과 대중성의 근거였던 두가지, 즉 성별된 제사장직과 거룩한 공간, 거룩한 행위, 거룩한 대상의 붕괴에 직명해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정위하고 사제 또한 자신의 사역을 새롭게 정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칼 하임은 개신교회의 목사직이 특권보다는 자발적 희생의 직분임을 강조한다. 목사가 교구 일을 관리하고 설교하고 영혼을 보살피는 것은 단지 한 기관의 모든 조직화된 공동작업에 필요한 일의 분담 차원에서 그 의미가 있다. 또한 기독교는 현재 교회공동체가 그 연관성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원전들이 외국어로 쓰였기 때문에 교회공동체에는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명 원어로된 원서들을 읽고 역사적인 이해를 가지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부모의 모범이며 그들을 대표해 후세대에 대한 신앙교육 책임을 목사가 맡는다. 이러한 노동 분담의 이유 때문에 목사직이 요청되지만, 이는 아무런 초월적인 후광이 없는 평범한 제사장직이다. 그래서 목사직은 가장 희생적인 소명이며, 특히 현대 대도시에서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직분이며, 동료 시민들에게 감사를 가장 적게 받는 직분이 되었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자연인을 매혹할 수 있는 마지막 통치수단을 포기한다. 그러나 교회가 눈에 보이는 모든 권력수단을 의식적으로 포기하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참다운 본질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의해 포획된 모든 인간은 그가 비록 아무런 인간적인 중재 없이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 믿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믿음의 각성과 더불어 모든 시대 사람들이 속하는 교회공동체의 지체로서 존재한다. 그들은 인종, 국적, 계층과 계급에 무관하게 형제자매들의 친밀한 친교공동체를 구성한다. 이러한 형제자매적 결속력은 인간 사회의 인종, 계층과 계급 간에 세워져 있는 담들을 허물어 뜨린다.
하지만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교제도 모든 인간의 교제와 마찬가지로 가시적 수단인 행위와 말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도들의 교제인 이 교회도 어떻게든 조직화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실망스럽게도 루터는 교회정치와 행정문제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터는 새롭게 발견한 복음의 보화에 대한 기쁨에 넘쳐 교회의 외적 제도들, 그 영원한 보화를 지니 이 점토그릇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던 ‘사도적 이상주의’에 머물렀다. 루터가 영주들을 임시 주교들로 만듦으로써 지방 영주들을 이롭게 하는 정책들이 교회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곧 영주들의 종교회의와 영주 중심의 교회질서들이 생겨났다. 종교개혁 반세기 후에 이미 루터교 국가에서 교회는 영주 중심적 구가행정의 한 부문이 되었으며, 그 결과 교회는 이 세상 권력체제의 일부로 편입됨으로써 또 한 번 자유를 상실했다.
총평과 결론
실로, 또한 한편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개인의 양심’에 일어난 구원사건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우주적 공교회의 하나됨을 실현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못했다. 다시 말해,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도적 복음의 원음을 재생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사도적 교회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범개신교회는 루터적 양심에서 일어난 구원에 집착하느라, 또한 통속적으로 오해된 이신칭의 교리의 과도한 은혜를 강조하느라 교회의 하나됨과 기독교적 실천의 위력을 마땅히 언급해야할 만큼 강조하지 못했다. 종교개혁교회는 핵분열적 다종파, 다교단 현상을 낳았고 그 최악의 사례 중 하나가 한국 개신교회다. 다소, 현상학적으로 바라보는 면도 있으나, 결국 요약하면, 한국 개신교는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구원론에 집착한 나머지 세상 전체를 그리스도의 통치 대상으로 한 중세적인 사상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그 이후에 이어진 유럽의 후속적 종교개혁운동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직접적인 응답은 트리엔트 반종교개혁 공의회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가 주도한 로마 가톨릭의 세계선교화운동이었다. 단 한 번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와 그의 후계자들이 일으킨 유럽 종교개혁과 개신교 탄생에 대해 진지한 신학적 성찰이나 응답을 내놓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온 세상의 가장 밑바닥부터 가장 상층부까지 교회적 현존을 드러낸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는 영국성공회와 루터교회를 필두로 군소 개신교 종파들을 다시 흡수통합할 듯한 기세로 교회일치적인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우리 개신교도들 또한 종교개혁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성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은 로마가톨릭이 어둠이고, 개신교가 빛인 시대가 아니다. 신구교 각각이 엄청 변했다. 그 중에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더 많이 변화되었다. 그에 비해 개신교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원론적으로 되풀이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교리로 경직화시켜 현대 세계가 주는 여러 도전에 응전하는 데 다소 굼떴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 유효한 가르침을 부단히 반포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신학적 기상과 기풍은 이 세상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사목적 참여가 얼마나 투철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개신교회 중에서도 개신교회의 중심축 중 하나인 개혁교회의 목사로서 이러한 작금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면, 개신교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지금 배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수렴시키고 복속시키려는 스콜라 신학적 전체성일 것이다. 온 세상 모두를 다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게 개신교는 개교회주의, 타계주의적 개인구원론, 예정설 등에만 집착하지 말고 온 세상 만유를 다 품고 통치하고 구원하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복음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개혁교회의 가장 심부에 존재하며, 그 중심을 이루는 명제이다. 가난한 자들, 죽어가는 생태계, 불의와 탐욕으로 망가진 인류애적 국제친교를 회복하는 일, 곧 하나님나라의 대의에 복무하는 것이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원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모든 인간을 향한 ‘희생’과 ‘봉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러한 본질회복을 가장 먼저 신학에 특히, ‘성찬과 교회론’에 관해, 적용해야 할 것으로 주장한다. 시기적으로 한국에서 모든 설교하는 목사와 연구 및 강의하는 신학자는 ‘성찬과 교회론’에 투철해야 ‘가톨릭교회’에 제대로 응전할 수 있다. 100년 전 유럽과 5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났던 참사가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실천목회적으로 다른 것에 노력하더라도, ‘개신교의 본질’에서 다루어지는 사항들을 제대로 각각의 개신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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