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조직신학을 분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 인간론을 중심으로 신학에 접근하는 경우, 고대서양철학사와 신학의 관계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학방법은 '인간으로서 신을 관찰한다'는 명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누군가의 당시 시대적 상황(Sitz im leben)을 반영하지요!
관련하여, 아래의 기고문은 개혁파 조직신학 인간론의 현대적 위치와 위상을 간단히 다룹니다.^^
현대조직신학의 동향과 개혁신학
- 『현대신학 지형도』와 개혁신학 인간론 서적을 중심으로 -
열린개혁교회 담임목사 장창한
I. 서론
시편 저자는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시8:4라고 말하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한다. 이는 많은 세대를 거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궁금증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됨(being)에 대한 진정한 답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인간됨에 대한 질문에 그 답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실존은 자기모순이나 소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신학과 인간의 인격에 모순점을 인정하면서, 창조의 영역과 구원의 영역 사이에서 인간을 이해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또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1958년 국영TV에서의 한 인터뷰를 통해 마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에 관한 진리는 그가 기이한 종류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기독교에 반대되는) 불가지론의 형태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비참함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틸리히의 관점과 비슷한 맥락으로 기독교 신앙이 특이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복잡한 인간적 인격이 피조되고 타락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를 통해, 지난 2세기 동안 철학과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론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고, 인간론을 기독론과 삼위일체론과 연관 지으려는 최근의 시도들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II. 본론
1. 전인적 인간의 탐구
인간의 인격에 대한 이전의 논의는 주로 ‘육체성’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작은 중요성을 가진다고 전제했다. 바로, “인격”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를 자연의 다른 부분과 구별해 주는 ‘이성’의 영역으로만 한정해서 논의한 것이다. 이는 어떻게든 인간을 동물보다 높은 존재로 표시해주는 인지적 기술(cognitive skills)로 논의의 방향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는 이러한 접근방법은 소수의 견해가 되었고, 현재 인간론에 대한 토론은 다양한 능력의 상호작용, 인류와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연관성, 그리고 ‘마음’과 ‘육체’의 복합적인 연관성을 강조하는 ‘전인격’에 관한 논의로 확장되었다.
(1) 칸트의 흔적 안에 살기 : 마음과 인간의 특수성
많은 사람들은 인간성을 단순히 인간을 높이려는 생각으로 논점을 바꾼 것에 대해 고대의 서구 기독교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레나이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칼뱅 등의 저작을 전공한 학자의 글을 총체적으로 읽으면, 그러한 방식으로 과거의 접근을 매도하는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신학자들의 인간적 인격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묘사는 매우 미묘하고 전인적인 견해를 전제로 한다.
결론적으로 교부들을 연구한 학자들이 지성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경향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과학적 진보와 철학적 질문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하게 하였다. 물론, 이는 신학을 인간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경향도 낳게 했지만 말이다.
많은 측면에서 인간됨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형성시킨 것은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와 같은 철학자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1600년대 초 교회에 영향을 주어, 개신교회가 출발하도록 만든 사상들을 키워냈다. 그 후, 인간됨을 사유하는 것은 호의하고, 사고하고, 의지(to will)할 수 있는 능력과 동일시된다. 달리 말해, 이는 인간성을 추론하고 의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된다. 관련하여, 이는 칸트의 기념비적인 대답을 통해 증명된다.
“계몽은 인간이 자초한 미성숙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미성숙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중략) 그러므로 계몽의 모토는 ‘열려고 하기를 감행하라(Sapere aude)!이다.”
이는 우리가 더 많이 ‘계몽’될수록 그만큼 더 인간적이 된다는 말이다. 칸트(Kant, 1724-1804)는 이전의 철학자의 인간성에 대한 서술을 정리 및 발전시켜, 자율적 이성의 용기 있는 사용을 강조한다.
관련하여, 칸트 이전의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자신이 생각한다는 범주적 한도 안에서, 자신의 영혼이 존재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는 신학적 인간론의 발전에 악영향을 미쳤고, 육체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확신 못하는 한계를 끌어내었다. 곧, 데카르트가 발견한 첫 ‘타자’는 하나님이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로크(Locke, 1632-1704)와 흄(Hume, 1711-1776)도 인식론에 대해 경험론적으로 접근한다. 이들은 인간이 고독하게 생각하는 존재라는 출발점에서 인간론을 서술한다. 즉, 이들을 넘어선 것이 칸트의 입장이며, 칸트는 경험이 선험적 개념을 가능하게 한다기보다 선험적 개념이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철학사에 제공한다.
칸트는 공간 또는 인과관계의 수동적 경험에 의해 공간 또는 인과적 필연성과 같은 개념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공간 또는 인과적 필연성과 같은 개념이 우리의 이성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기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이 또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일종의 이중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경험적 판단의 객관성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주관적인 개인적 지성의 필연적 기여도 강조한다. 달리말해, 칸트는 다른 사람들이 인간의 주관성을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칸트는 자신의 『미래 형이상학 서문』에서 우리의 지식이 객관적이라고 말하며, 우리 모두가 동일한 현상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성숙한 사람 안에 있는 동일한 주관적 과정에 의해 동일한 경험이 생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후에 모든 사람이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적 세계를 구성할 것을 포기한다. 인간은 각각의 문화와 성,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라 서로 다른 원칙을 이용하여 세계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현대신학에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존 맥머레이(John Macmurray, 1891-1976)는 1953년 기포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철학은 특징적으로 자아중심적이다.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첫째, 현대 철학은 하나님이나 세계나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아(Self)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둘째, 자아는 고립되어 있는 개인이고, 에고 또는 ‘나(I)’이며, ‘너(You)’는 아니다.”
이는 인간론의 출발점을 하나님의 창조적 로고스와 창조를 유지하시는 영이 아닌, 그 출발점을 인간적 지성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나의 경험을 해석하고, 내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는 인간론의 토대를 인간중심적으로 옮겨놓은 토대를 쌓는다.
(2) 슐라이어마허와 절대의존감정
사람들은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가 칸트로부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웠고, 또한 그가 함께 자랐던 모라비아 형제단으로부터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를 열심히 읽고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비판적인 수용이었다. 탄데카(Thandeka)가 요약한 슐라이어마허의 칸트 평전은 다음과 같다.
“칸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는 칸트가 이론적인 것을 실천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한 반면, 슐라이어마허는 그 둘을 결합시키려고 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느끼는 것을 함께 결합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에 슐라이어마허는 ‘경건(piety)’을 위한 철학적 공간을 창조했고, 경건이 적합하게 인식된 인간성의 중심에 경건이 놓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련하여 슐라이어마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는 것과 존재는 서로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존재는 알려지고, 앎은 존재하는 것을 안다.”
“감정이 없는 직관은 아무것도 아니며, 적합한 기원이나 적합한 힘을 가질 수 없다. 직관이 없는 감정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원래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처럼 슐라이어마허는 인간 경험의 큰 틀 안에서 사유와 이성을 사용하기 전에, 직관과 감정의 작용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론을 더 이상 다른 것들 사이에 놓여있는 하나의 논제(locus)가 아닌, 모든 논제들(loci)이 통과하면서 이해되는 바로 그 유일한 거리(avenue)임을 말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아에 집중할 때에도, 초월자(the transcendent)를 지시함으로써, 신학과 인간론을 종교적 ‘감정’ 안에서 연결한다. 이는 태고의 어떤 낙원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구하기보다, 인간이 ‘하나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그 의식이 우리의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에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슐라이어마허는 타락한 인간의 일반적 경험은 깨어지고 불안정하게 되었기에 ‘은혜의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에게도 한계가 있다. 온 인류가 이러한 절대의존감정을 흔들림 없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러한 절대의존감정을 전달받아 구속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중심적 신학을 만들어내는 기원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과 감정의 투사에 지나지 않고, 그 자체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슐라이어마허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감정을 고려해야한다는 견해는 우리가 신학적 인간론을 다룸에 있어서, 합리성과 의지 이상으로 그려야할 캔버스를 더욱 넓힌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3) 과학 그리고 인간의 형성 : 다윈과 프로이트
비록 칸트와 같은 철학분야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인간의 인격에 대한 개념을 인간 중심으로 재구성한 학문분야가 있다. 대표적으로 2명의 학자를 말할 수 있다.
제롬 브루너(Jerome S. Bruner, 1915-)는 이렇게 말한다.
“다윈과 프로이트 두 사람은 우리 시대의 인간 개념의 설계자들로서 대단히 특출한 사람들이다.”
또한,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는 『자연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학이 관찰한 모든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설계자에 대한 암시를 보여준다.”
이들은 인간이 우주에서 보는 분명한 ‘어떤 설계’로서의 특징‘을 통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언급 없이 당대의 자연과학의 능력으로 인간을 파악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자연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을 파악할 뿐, 성경이나 철학을 통해 인간을 파악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꾸게 된다. 관련하여 모튼 레비트(Morton Levitt)는 이렇게 말한다.
“다윈은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혁신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6)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과학을 통해, 인간의 기원만이 아니라 본성도 배울 수 있게 만든다. 프로이트가 인간론에 기여한 점을 요약하면, ‘상징의 역할과 정신적·감정적 복잡성에 대한 새로운 개방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고는 자신의 집에서 주인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움직이고 있는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힘을 언급한다. 이는 우리의 본성이 실제로는 계몽주의 시대가 당연하게 전제했던 것과는 다르게 훨씬 덜 합리적인 것을 보여준다. 또한, 프로이트는 신학적 인간학의 토론을 위해 새로운 요소(예_성, 인종, 사회경제학)를 포함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와는 다르게 프로이트는 신적인 것을 바라보지 않았고, 인간 본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초월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죄와 전인격을 논할 때, 자연학적·병리학적 토대를 기반으로만 다루도록 논의의 방향을 전환한다.
(4) 기독교적 인간론과 과학자들
신학자들은 성경과 자연 사이를 오가면서, 인간론을 발전시킨다.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는 고전적 신학적 자유주의를 지지했던 마지막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서 나름대로 ‘영과 인격으로서의 영혼’을 언급하며, 자연과학적 인간론이 인간론의 전부로 이해되던 시기에 신학이라는 신앙의 영역이 파고드는 틈을 벌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의 종교적 개념은 과학적 인간학 그리고 실험 심리학과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 오히려 영혼은 신앙의 대상이다.”
“영혼은 단지 사고될 수 있을 뿐, 경험적으로 제시될 수는 없다! 삶이 도덕적인 자유와 힘을 합치는 장소인 그 인격적 통일성의 중심은 관념(idea)이다!”
하지만 트뢸치는 한계를 가진다. 그는 신앙적인 진술이 자연과학적 진술을 수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자연의 책이 성경을 이긴 것으로서, 자연과학 안에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독교적인 인격성의 이상’으로 이해한다. 그는 인간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강한 확신을 하며, 영생을 위한 도구로 예수의 인격에 불멸성을 부여했다고 말한다. 이에 기존의 기독교적 인간론은 태초와 종말 사이에서 살아가는 긴장을 제공하며,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곧 윤리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 신학적 인간학을 지배하는 것에 모두가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오르(James Orr, 1844-1913)는 인간과 죄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현재의 인간론적인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를 굽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적인 인간론을 왜곡하고 있으며, 속량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르는 속죄 교리에 대해 교회가 점점 더 당혹했고, 이에 노골적으로 무시 또는 반대하기 위해 인간론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류가 상승하고, 개선되고, 존재의 사슬에서 위로 이동하는 것으로서 진화론에 근거한 인간론적 접근은 하나님을 ‘잉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오르의 진화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보수적인 신학계의 입장을 대변한다.
한편, 보수적이면서도 진화론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은 학자도 있다.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와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이다. 이들은 진화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토론에 친숙했고, 개방적이었다. 하지는 신학적·과학적 이유로 진화를 거절했고, 워필드는 더 큰 수용성을 보인다. 워필드는 오르와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창조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진화를 이해한다. 워필드는 성경에서 생명 진화의 과정에 관한 설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자연과학에 맞춰서 넣는 환원주의적 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인간 이외의 창조와 관련해서는 발전을 허용할 수 있지만, 인간이 진화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끝내 반대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의 견해다. 이는 진화론이 ‘도를 넘어선(garish)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독특한 창조로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임이 분명하다.
관련하여, 이후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더욱 나아가 종종 만년 보다 덜 된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며, 창세기 1-3장의 문자적인 역사성을 변호하는데 몰두하게 된다. 이는 진화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해당본문이 지니는 신학적인 중요성을 상실하는 위기를 초래했다.
신학과 과학 사이의 긴장감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육체와 영혼에 대한 토론은 대표적이다. 지난 150년 동안 점점 더 많은 신학자들은 기독교적 인간론을 지배했던 이원론을 의문시하거나 최소한 재고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인격을 말한다.
“없을 수도 있는 어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영혼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육체적으로 영혼이며, 다시 말해 그는 영혼이 있는 육체다.”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이원론을 거부하며, ‘비환원주의적 물리주의’나 ‘이중 측면의 일원론(dual-aspect monism)’과 같은 새로운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유물론적인 인간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간적 유기체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미 고전적인 이원론의 어떤 형태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이제는 인간을 다룰 때, ‘육체성(embodiment)’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자연과학은 신학적 인간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5) 상황과 맥락 안에 놓인 인간적 인격 : 특수성의 중요성?
인간에 대한 전인적 견해를 제시하려는 노력은 상황과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레이 앤더슨(Ray S. Anderson, 1925-2009)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결정과 심판과 약속 아래서 인격적·사회적·성적, 그리고 영적인 삶으로 경험되는 피조적 삶이다.”
즉,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며, 역사를 갖는 것이며, 몸으로 체현되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관찰하는 것이며 때로 전통적인 신학적 인간론이 지나치게 잠재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거나,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사각지대를 놓고 있지는 않았는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달리말해, 이는 신학적 인간론을 구성함에 있어, 비인간적인 질서와 차별을 만들어내는 가설들에 저항하면서 달려 나가야 함을 뜻한다.
2. 인간론 :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근거되어 있다?
(1) 칼 바르트 : 기독론에 기초한 인간론
바르트는 20세기의 인간의 기원과 과학적인 통찰력에 근거한 신학적 움직임의 방향과 달리 대단히 다른 방향으로 신학적 인간론에 접근한다. 이는 그러한 발견들이 인간론의 발전에 대해 신학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인간론의 출발점을 2번째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만이 “현실적 인간(real man)”이며, 그래서 인간과 인간 세상을 괴롭히는 죄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를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2가지 경우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가능하다.
바르트는 우주와 인간의 유기체적인 결정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신학적 인간론이 단지 우주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자신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신학적 지식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는 인류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받을 수 있고, 이러한 ‘부름’을 받은 인간만이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메카니즘은 참된 인간성을 일깨운다.
말씀에 대한 강조는 바르트의 기독론에서 기원하며, 우리를 특별히 ‘예수의 인성’으로 인도한다. 관련하여, 바르트는 인간론을 다루며,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신학적 인간론은 기독론 위에 건설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도 발견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 우리 인간의 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본성에 의존한다. 그에게 인간성은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관계성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육신이 되신 말씀의 현실성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인간중심적인 신학들에 저항하는 인간론을 전개한다.
둘째, 바르트는 인간론을 기독론으로부터 지나치게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조야한 방식으로 연역해내는 것을 경고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포괄적(generic)인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특수한(particular) 인간이다. 이에 우리는 참된 예수의 본성을 알기 위해 그의 참되고 완전한 인성을 희생시켜 타협하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이 때, 바르트는 그리스도께서 비록 죄를 범하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의 ‘타락한 본성’도 취하셨다고 말한다. 이에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을 완벽하게 취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킬 수 있다.
셋째, 예수의 인성 안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역설과 약속을 발견한다. 바르트에게 예수의 인성은 심판과 희망을 동시에 제시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안에서 ‘죄 없는 인성’을 발견한다. 이는 우리가 피하기를 갈망하는 ‘자기모순’, ‘자기기만’이 없는 인성이다. 예수 안에 있는 인간 본성의 무죄성, 순결성, 자유는 그리스도가 스스로의 본성에 낯선 죄를 짊어지고, 자기 자신을 우리와 함께 정죄되고 배척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인간적 본성 안에 있는 죄는 제거되고, 파괴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짐을 취하고 제거하심으로써, 인간 예수를 긍휼히 여기신 후 모든 인간에게도 긍휼을 베푸신다. 바르트는 이러한 과정 안에서 참된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넷째, 예수의 인간성은 관계적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위한 인간으로 제시됨과 동시에 인간을 위한 인간으로 묘사 될 수 있다. 바르트는 예수의 인성이 시작부터 그리고 다른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예수를 본래적, 배타적, 총체적으로 타자를 위한 인간으로 다룬다. 그는 큰 계명 2가지(하나님 사랑, 이웃사랑)를 언급하며 그리스도가 이를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성에 있어, 타인과의 상호관계를 우선적, 내재적,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2) 최근의 삼위일체론적인 강조점들
1894년 일링워스(J. R. Illingworth, 1848-1915)는 “인간적 인격성과 신적 인격성”이라는 제목으로 뱀톤 강좌(Bampton Lectures)를 진행한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인격성이 주체, 대상, 양자의 관계라는 삼중적 형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먼저, 그는 하나님은 자신 안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고 계시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그 다음에 타자들을 향해 인격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적 인격성과 인간적 인격성 사이의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함을 통해, 한 인간이 온전해지기 위해 개인을 넘어서 그의 밖에 있는 인간적인 관계를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관련하여, 현재 인간론은 삼위일체론과 연관하여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주제들에 이르기까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 존 지지울라스 : 존재 – 신적인 측면과 인간적인 측면
존 지지울라스(John D. Zizioulas, 1931-)에게 존재(being)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에 관한 질문과 분리 될 수 없다. 그에게 ‘존재한다(to be)’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 아버지, 아들,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존재론적 논의를 위한 적절한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존재 곧, 교제(in communion) 가운데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사랑과 자유 안에 존재하시며, 나아가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그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지지울라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론으로 나아가고, 이어 인간론을 다룬 후 구원론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인간은 자존적이 아니라 항상 의존적이다.
이는 지지울라스가 개인주의적인 육체적 구성요소보다 ‘관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간의 인격성이 있기 위해서는 신성이 전제 되어야 한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본성이나 실체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에 참여한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인간의 인격성은 오직 종말론적으로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에게 인격은 생물학적인 것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종말론적인 것을 소개함을 뜻한다. 이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실존을 포함하여, 현재의 존재가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모습으로서 현재 존재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말이다. 지지울라스는 이를 ‘성례전적 또는 성만찬적 인격성’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에게 성만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연합시킴으로서 우리의 생물학적 범주의 배타성을 초월시키고, 타자성을 지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여 하나의 인격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4) 현대 개혁신학에서의 인간론
개혁파 안에서는 인간의 구조를 어떻게 보는지의 문제가 논의된다. 1900년대에 들어와 삼분법과 이분법이 많이 논의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인간은 전인(단일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개혁파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흔적(Vestigia Dei)을 나타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다.
개혁파에서 성경은 인간을 과학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벌카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자들이 내리는 일반적 판단은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 관한 과학적 묘사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겅시다. 성경의 ‘인류학’은 인간존재의 여러 측면들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도 아니며 또한 철학적 인류학적도 아니라는 사실이..”
또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학, 지리학, 천문학, 농업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혹은 과학적인 심리학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중략) 비록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지라도, 성경으로부터 어떤 점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그런 심리학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중략) 영혼, 혼, 마음 그리고 정신과 같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대중적 언어로부터 차용된 언어들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도 있으나 다른 내용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 개혁파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배울 수 있음은 인정한다. 벌카우어는 성경이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에 혹은 그의 심리적인 구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여러 관계들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놓인 인간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후크마는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실제적 의미를 중요하게 제안한다. 그는 교회가 전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에 있어서, 마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의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듣는 자들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화되는 것이 중요하며, 실제적인 교회의 프로그램이 운동, 옥외활동 등 육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 구절과 교리에 대한 ‘틀에 박힌 지식’ 이상의 것을 주어야 한다. 이는 신자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함께 영육 통일체적인 사실을 반영한, 통전적(holistic)이고 포괄적인(comprehensive)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전인의 개념을 선교로 확장시켜서 선교에 적용해야 함을 물론이거니와 ‘가정생활(family life)’과 의학 분야에도 적용할 것을 말한다. 그는 영육통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에 관해 자녀를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여, 건전한 식이용법이나 적절한 신체 보호에 관한 건강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인의 개념을 심리학과 상담학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심리학적 연구에 의해 사람의 전인성(wholeness of man)이 강조되었고, 이는 ‘유기체 이론(organismic theory)’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후크마는 인간이 전인이라는 사실을 이곳에도 적용하여 정신적인 문제가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영적인 건강과 정신적 건강(spiritual and mental health)을 전인의 문제로 볼 것을 주장한다.
(5) 총신대학원에서의 인간론
최홍석 교수는 총신에 재직하는 동안 특히 인간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최홍석은 바빙크의 코멘트를 따른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존재에 근거한다. 행위는 존재에 뒤따른다.”
최홍석은 2005년 봄에 출간한 『인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좇아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를 받아들.. (중략)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사는 자들일 수 밖에 없..”
그는 『인간론』의 1-2장에서 서론을 다루고, 3장에서 인간의 기원문제를 논구하고, 4-5장에서는 인간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개혁주의적 이해를 밝힌다. 제 6장에서는 인간의 구조적인 본성 문제를 다루고, 7장에서는 행위 언약과 인간, 8장에서는 죄와 인간, 9장에서는 죄와 죽음(뇌사문제를 포함), 10장에서는 악과 고난, 11장에서는 도르트신경에 나타난 타락한 인간, 12장에서는 죄의 억제와 관련하여 일반은총(common grace)을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13장은 인간과 영성문제를 논하며, ‘하나님 형상 회복’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룬다.
그는 먼저, 창세기 1장 26-27절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며, 인간의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협의’에 근거함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에 집중하여, 양자의 의미와 관계를 밝힌다. 그는 이 두 단어를 서로 다른 것으로 오해하게 됨을 통해, 하나님 형상론에 대한 모든 왜곡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 용어 사이에 어떠한 본질적인 차이도 없으며, 성경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봄을 통해 자신의 주장처럼, 바빙크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두 단어의 의미의 차이를 둔다. 그는 ‘형상’이라는 말이 ‘de archetype’이고 인간은 그분의 모형 즉, ‘ectype’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모양’은 원형을 반영하는 그 형상의 상(象)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원형과 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그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은 형상이로되, 그저 그런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그는 어떤 면과 어떤 점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닮았는지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그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를 알 수 있는 암시를 몇 군데에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그는 창세기 1장 26절을 통해, 피조물에 대한 통치 혹은 주재권이 형상의 일면임을 주목한다.
둘째, 그는 남녀로 창조하셨음을 밝히는 창세기 1장 27절에서 ‘자신과 자신의 동료 사이에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성’이 있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다고 본다.
셋째, 창세기 1장 28절을 통해 하나님께 명령을 받으며,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킨다.
최홍석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로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야고보서 3:9의 말씀에 근거하여 타락한 인간에게조차도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았음’을 말한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성화의 과정을 거쳐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하나님 형상 회복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은사(Gabe)이자 과제(Aufgabe)이며, 성령의 내적역사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완성된다.
이를 정리하면 최홍석의 인간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속사의 긴장을 따라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음’을 언급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을 따르는 4가지 상태, 즉, 원래 상태, 부패상태, 은혜의 상태, 영광의 상태를 말한다.
둘째, 그에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거나 소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 형상은 인간의 본질이며 전인에 속해있다. 이는 인간성의 한 부분이나 기능으로 축소할 수 없다.
셋째,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 또는 ‘협의의 신형상과 광의의 신형상’으로 불리는 2개의 측면을 지닌다. 이는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이라는 원래의 의미 아래에 현대 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이 하나님께 바른 응답을 하는 것’,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서의 삶’, ‘하나님과 이웃과 피조물에 대하여 바른 관계속에 영위한 삶’,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화’ 등으로 다르게 해설될 수 있다.
넷째,그는 하나님 형상을 2가지로 보는 것은 타락 전과 후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다섯째, 그는 창세기 1장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골1:15; 고후4:4)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이웃, 나아가 자연을 향해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나타낸다는 후크마의 주장에 동의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명령을 듣고 순종하고, 책임지는 ‘인격적 존재’이며, 자신의 이웃에게 ‘동료’로 지음 받았으며, 자연 혹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로 지음 받은 것이다.
그는 이런 3가지 관계성(삼중적 관계성)이 하나님 형상 회복과 관련하여 중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그에게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오랫동안 수직적 차원으로만 이해하다가 현대에 이르러 수평적 차원으로 이해하려는 측면에 있어, 먼저 우선순위와 바른 차서를 따라야 함을 말한다.
둘째, 그에게 형상 회복은 은사이면서도 과제이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여야 하며, 더불어 역동적인 성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인격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말한다.
셋째, 그는 신형상론에 있어 바른 이해를 전제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영육이원론적인 생각을 벗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것의 회복을 위해 사명감을 가질 것을 말한다.
넷째, 그는 하나님 형상이 전인적이기에 그는 구원을 전인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을 말한다. 이는 성화 또한 인간 본성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억압하거나 정복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섯째, 그에게 형상에 대한 전인적 이해는 복음화와 문화적 사명을 갖는 불가분성을 갖는다. 그는 문화명령(창1:28)과 대위임령(마28:19-20)은 상호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 관계에 나타난 2가지 단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위임령에 나타난 ‘모든 것’을 단순히 기독교의 구원도리를 벗어나 문화명령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그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견지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하나님 형상 회복은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전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로써 깨어진 형상회복은 가능하게 되며, 그리고 그 형상회복에서만 본랮거인 인간의 아름다움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을 존경할 것은 없지만, 존귀하게 여겨야 할 존재임에는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6) 바르트와 지지울라스 비판
최홍석에 따르면, 바르트는 통치권을 하나님의 형상 자체에 근거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결과로 해석해야 했다. 그는 바르트가 창세기 1장 27절을 해석함에 있어, 인간과 그 동료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과 관계에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반하여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를 주장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바르트의 창세기 1장 27절 해석이 틀렸음을 논한 것이다. 또한, 최홍석은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유비만을 형상으로 이해한 것은 ‘실존주의적 경향의 초절주의’일 뿐임을 지적한다. 이는 바르트 신학의 핵심을 찌른 것이다.
지지울라스에 관해서는 김은수 교수의 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종속론’적 경향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지지울라스는 비록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인 질서의 문제로 삼위를 논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명확하게 성부의 ‘군주성’을 주장하며, 위격간의 비대치성을 만들고 있다. 이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에 의해 ‘조건적으로 정체성이 주어짐’을 말하고, 성부의 인격이야말로 유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구분을 가능케 하는 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은수는 그에게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 의해 ‘구성된 존재’로 제시됨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지지울라스는 개혁파에서 말하는 경륜상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적 질서와 순서를 ‘인격의 존재’에 적용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며, 이러한 인격적 관계가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적 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격적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함께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범죄 행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칭의, 성화 등 다양한 것들을 다룬다. 이에 ‘인격적 존재론’은 신선한 접근방법이지만, 여전히 이러한 모든 개념을 다루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강조할 수 있다.
III. 결론
계몽주의와 그 이후의 다른 사조에 반응하면서 신학자들은 인간론을 더욱 ‘통전적(holistic)’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분명히 피조물로서 인간은 자신들의 창조자와 동료 피조물에 대한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 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복합체다.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며,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한 대표적인 질문이 ‘관계’에 관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관계에 관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며, 여러 가지 위험한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그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인간론을 구성하여,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필자는 개혁파 신학을 믿고, 이를 근거로 신학에 접근하기에 최홍석의 입장을 옹호한다. 우리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견지하면서도 수평적인 신학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최홍석의 입장도 동일한 맥락에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건전한 진전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루터파의 교의학자 호르스트 푈만(orst G. Pohlmann)의 분류방식을 따르자면, ‘재생적 또는 요약적 기능’을 추구한 신학이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자로서 나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기본원리에 충실함과 동시에 ‘모든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omnis veritas ex deo sit)’라는 칼빈의 말에 근거하여 더 넓은 신학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참고문헌
한글저자
정서영,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 사상에 대한 비평 연구”, 「서울기독대학교 대학원」, 2008.
이상웅, “최홍석의 개혁주의 인간론 고찰”, 「한국개혁신학」, 2016.
웨슬리신학연구소, 『관계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서울: 아바서원, 2015).
외국저자
Kelly M. Kapic, Mapping Modern Theology, (Baker Academic 2012); 박찬호 역, 『현대신학 지형도』,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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