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성경해석학 개론(기고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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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성경해석학 개론(기고문2)

개혁신학어벤져스 2023. 9. 9. 11:44
개혁교회 성경해석학 개론(기고문2)  
3. 개혁교회 성경해석학의 역사적-문화적 배경  
요약  
신약에서 전통적으로 바울의 저작으로 알려진 13개의 서신이 있다. 그가 기록한 서신들 중에서  
가장 후대의 서신인 디모데후서 마지막 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이 가까움을 직감하  
고 자신의 느낌(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4:9))들을 전달한다. 특히, 연이어 4:21에서 바울은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라고 덧붙인다. 달리 말해, 바울이 디모데가 자신을 보러 오기를 원한  
다는 구절들 이면에 놓여 있는 역사적-문화적 문맥에 대한 이해만이 바울의 청원이 담고 있는  
깊이와 정서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관련하여, 대부분의 복음주의 성서학자들은 디모데는 바울이 로마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에베소  
에서 사역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로마와 에베소는 서로 수백 마일이 떨어져 있었고, 배로 여행하  
는 것은 9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는 위험스러운 것이었으며, 11월 초부터 3월 초순까지는 이러  
한 여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만일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두기고를 통해 여름에 보냈다면, 디모  
데는 로마까지 긴 여행을 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즉,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안다면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에베소의 일들을 잘 처리하고서 네가  
할 수 있는 한 속히 배를 타라. 만일 네가 겨울이 오기 전에 지금 떠나지 못한다면, 뱃길이 닫히  
게 될 것이고, 너는 시간 안에 여기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 디모데야, 그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여기 도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정서와 강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이 되기 이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의 독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셨  
으며, 그들의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물론,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원래 당시의 이치에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성경을 읽고 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으로 역사적-문화적 배경은 성경저자, 당시의 성경독자, 그리고 본문 자체에 관계된 모든  
역사적-문화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먼저, 성경저자의 경우 하나님은 자신의 영감된 말씀의 직접적인 원천으로 인간 저자를 삼아서,  
그를 통해 역사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인간 저자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관  
련하여, 우리는 저자는 자신의 책을 언제 기록했으며, 그는 어떤 형태의 사역을 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한다.  
예컨대, 이는 호세아의 수치스러운 아내 고멜을 통해 설명된다. 호세아의 결혼이 어떻게 그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을까? 고멜과의 그의 가슴 아픈 결혼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  
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 혹은 통로가 되었다. 고멜이 호세아를 거절했던 것 같이, 그  
렇게 이스라엘은 그들의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거절하고 이방신을 따라 갔던 것을 말이다.  
또, 저자의 배경과 사역에 관해 아는 것과 관련하여 갈라디아서의 어조와 내용으로부터 사도 바  
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형태의 복음을 향한 그  
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안다는 것은 또한, 성경 독자와 그들이 처한 제반사항을 안다는 것  
을 포함한다. 하난의 예로 마가복음을 보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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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와 제자도의 필요성을 핵심적 주제로 강조한다. 많은 학자들은 마가의 원래 수신자들은 로마  
근처에 있던 교회였으며, 마가는 그들을 준비시켜서 주후 60년대 중엽 네로 황제에 의해 겪게  
될 핍박을 감당케 하고 있다고 믿는다. 즉, 고난 중에서 끝까지 믿음 가운데 인내하도록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마가는 어떻게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 중에도 믿음 가운데 인내하셨는가를 강조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의 예언 사역이 주전 627년경에 시작해서 주전  
586년경에 끝났다는 점을 알면 도움이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아 왕의 통치하에서의 부흥  
과 회복, 앗수르의 멸망, 바벨론 제국의 탄생, 예루살렘의 최초의 포위(주전598/97년), 그리고  
주전 586년경의 이스라엘의 멸망 등을 목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 29:11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  
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인데, 이는 이미 하나님의 훈육 즉, 주전  
597년의 포로기를 경험하고 있던 자들에게 예레미야가 주었던 서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즉,  
유다의 불순종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최종적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소  
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문화적 문맥에는 본문과 관련한 다른 역사적-문화적 요소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  
어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 경제적 요소들이 있다. 먼저, 본문이 상정하고 있는 지리 혹은  
지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면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0:20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는 표현이 나온다. 예루살렘이 대략 해발 2500피  
트에 있고, 여리고는 대략 해발 800피트임을 안다면 그 내려간다는 표현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  
고 이 두 지역 사이의 여행은 거의 20마일 정도로서 강도들이 숨을 만한 수많은 장소들이 있는,  
바위투성이의 험준한 시골 들판 길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지리적 상황을 알게 되면,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얼마나 손쉬운 일이며 사랑하는 이웃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  
통스러운 일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들에 관한 것이 중요하다. 에베소서 5:21~6:9의 경우,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그리스-로마 가족법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로마 가족법은 남편들에  
게 아내들이 복종하게 만들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코 사랑을 남편의 의무 중 하나로 열거하고 있  
지 않다. 이에 반해서 에베소서 5:25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  
사 자신을 내어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로마 가족법의 관행을 깨고 있  
다.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에게 복종하라(5:21)’는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  
은 심지어 훨씬 더 급진적 일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인 요소들과 종교적인 요소에 관해서는 룻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룻기를 이해하려  
면, 친족-속량자(기업무를 자)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나오미와 그녀의 며느리인 룻이 모두 남편  
을 잃은 뒤에, 그들은 보아스를 만났는데 보아스는 이들의 친족-속량자임이 판명된다. 이 점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보이겟지만, 보아스는 법적으로 볼 때 가족의 성을 보유하면서, 룻과 결혼함  
으로써 나오미의 죽은 두 아들에 대한 상속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룻과  
결혼을 하게 되고, 이후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 관하여 경제적인 이슈들(바울과 실라가 귀신을 통해 미래를 예언하는 한 하  
녀를 만난 것)과도 부딪힐 수 있고, 정치적인 이슈들(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바울  
과 실라에게 그 다음 일어난 일들, 감옥에서 얼마를 보낸 후에, 관원들은 바울을 위시한 선교사  
들로 하여금 그 도시를 떠나라는 영을 전한 것과 로마 시민을 공적으로 때리고 그것도 재판 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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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옥에 가두는 것)도 존재한다. 즉, 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본문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실체로 다가오며 큰 상관성과 적실성을 드러내 보여준다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배경연구와 관련한 위험성들이 존재한다. 우선 부정확한 배경 지식과 정보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마태복음 19:23~24을 하나의 예로 들어,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  
어가기 어렵다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고 말씀하신다. 한번쯤 ‘낙타의 문’이 작은 문으로써, 낙타가 싣고 있는 짐을 내려놓고 무릎 높이  
로 자세를 낮추면 이 문으로 낙타가 지나갈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의 문제점은 이런 류의 문이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본문의 배경을 본문의 의미 위에 두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공부할 때,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에 관해 연구해보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신은 배경적 지식에 대한 매료와 집착 때문에 이 비유의 요지, 즉 하나님은 교만  
한 자들을 정죄하시고 겸손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비유의 요점을 놓칠 수도 있다.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요점은 역사적 잡동사니 정보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의  
미를 더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대 사실들의 기계적인 자료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이해를 위해 배경 정보에 대한 탐구 가운데 빠져들어, 결국 해석에 관한 당신의 심장과 마  
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반드시 적합한 시각과 전망 속에서 성경의 배경연구를 수행해야 한  
다. 우리는 역사적-문화적 문맥 그 자체를 하나의 끝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의 의  
미를 파악하고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도구로 연구해야 한다.  
관련하여, 적적한 성경사전들과 성경 백과사전들 주석과, 배경 주석들, 구약과 신약 역사연구서  
들이 있다. 또한 고대의 삶과 문화에 관한 특별한 연구서들이 있다. 이외에도 컴퓨터 소프트웨어  
와 인터넷이 있으니, 조심하고 유의해서 정평 있는 저자나 학자들이 쓴 것들을 참조하면 본문의  
현대적 상관성과 적실성에 대해 우리의 이해를 더욱 증진시켜 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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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혁교회 성경해석학의 궁극적 효용  
요약  
우리가 어떤 문헌의 본문을 읽거나 구두 메시지를 들을 때, 대게의 경우 저자나 혹은 화자의 마  
음을 쉽사리 읽을 수 없다. 단지 우리는 단편적으로 써진 메시지나 구두 메시지를 중심으로 생각  
및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 해석의 경우, 곧, 특별히 연구의 대상으로 오직 기록된 개개의  
본문을 가진 경우, 우리의 목표는 전체 본문의 의미를 최대한 조직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이해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어성경 본문이 의도하는 것을 구문론적으로 듣고자 노력  
해야 한다.  
1. 의미의 계층들  
특정 본문은 하나의 의미를 갖는가, 혹은 몇 가지의 의미를 갖는가? 아니면 무한정한 의미를 갖  
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의 5가지가 존재한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더 나은 선택  
사항인지는 대답이 그리 간단치 않으며, 정말로 복잡한 문제이다.  
A. 성경 저자들은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의도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의미-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원래의 독자들에게 의도했던 의미-가 주해의 유일하고 적법한 대상으로 남는다. 신약 저자들이  
구약 본문에 대해 무슨 일을 행했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 주해를 본문의 원래적인 역사적 의미에  
국한시켜야 한다.  
B. 성경저자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몇몇 저작에서 여러 가지 의미나 혹은 여러 계층의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이들 본문들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으며, 후대의 독자들은 이들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C. 성경 저자들은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의도했다. 그러나 이 의미로 인해 후대의 독자들의 본  
문 이해 방식이 제한받을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해란 언제나 본문과 독자 사이의 창조적인  
상호 작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독자-반응”이란 과업이다. 그래서 후대의 독자들이  
-신약의 저자들처럼-원래의 문맥 속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D. 성경 저자들은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의도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부가적  
이고도 숨겨진 의미를 성령께서 본문 속에 넣어두셨다. 신약 저자들이 구약 본문을 사용했을 때,  
여러 곳에서 그들은 이러한 보다 충만한 의미, 즉 센수스 플레니오르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러  
한 과정은 현대의 해석자들에게 반복될 수도, 반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E. 성경 저자들은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의도했다. 그러나 후대의 독자들이 독창적인 주해상의  
기법들을 사용해서 원래의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가적인 합법한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 기법들은 미드라쉬, 페숴, 혹은 모형론과 같은 유대의 해석 방법론들을 포함한다. 비  
록 전혀 해독할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임의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그러한  
연관 관계가, 원래의 본문과 후대의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절차는 오늘날 반복  
될 수도 있고 반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2. 본문의 의미  
A. 본문의 의미의 정의 : 본문의 의미란 본문의 단어와 문법적인 구조들이 저자나 편집자의 의  
도에 관해서, 또한 원래 독자들의 이해에 관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많은 책들이 누구에 의해 써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며, 더욱이 어떤 책들의 구성  
은 아마도 일련의 편집자들이나 ‘교정자’들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책들을 현재의 완성된 형태, 즉 정경이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 놓은 사람(혹은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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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공동체)에 대해서 편의상 이야기 할 수 있고, 또한 실제 이 완성된 형태만이 영감된 계시의  
자격을 소유한다.  
즉, 우리의 목표는 이런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해 영감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찾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목표인 성경 본문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  
정함에 있어서, 몇몇 종류의 성경책들은 시나 은유적인 언어의 경우처럼, 본문의 ‘표면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B. 독자 중심의 해석의 도전 : 자신들의 필요와 자신들에게 내재된 선이해를 기초로 해서, 독자  
들과 해석자들은 본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해 낼 수 있다. 해석자나 독자는 본문의 의미  
를 결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의미를 독자 중심의 해석 과정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해석자의 관심을 본문 이면에 있는 실체에 둠으로써, ‘본문을 독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영향  
을 미치는 의미의 형태’로 이해하게 됨을 뜻한다.  
즉, 독자 중심의 해석은 본문을 분석함에 있어서 더 많은 관심을 현대 독자의 역할에 두고 있  
다. 하지만 이 목표가 우리가 앞서 논의한 ‘해석학적인 나선’의 일부인지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본문의 의미만이 성경이 지닌 사실에 대한 적법한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오직 원래의  
저자와 독자들이 의도했고 이해했던 의미를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을 때만이, 우리는 해석상  
의 통제권들을 행사할 수 있다.  
C. 역사성의 문제 : 만약 어떤 본문이 당시의 문학적 그리고 문헌상의 관행들에 따라 참된 역  
사를 기록해 놓았다는 취지를 보이고 있으면, 우리는 그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라고 결  
론내릴 수 있다. 다른 한편, 만약 장르에 대한 본문상의 단서들이 창작 쪽을 가리킨다면, 우리는  
그 본문을 허구의 창작 쪽으로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곧, 원래의 저자는 자신의 사건 기사를 어떻게 읽기를 의도했는가, 즉 원래의 저자와 독자들은  
그 기사를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하다. 개개의 내러티브들은 사실적인 요소와 창조적인 요소  
를 모두 담고 이 직선의 어느 지점에 놓인다.  
어떤 경우든, 문학적인 차원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드러내 주며, 중요한 깨달음을 제공한  
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으로 가능한 이러한 의미를 끝까지 고수하고자 하는 그 이유로, 성경 저  
작들의 진정성이나 신학적인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의 관점에서 그  
들의 저작들에 우리의 채널을 맞추고자 해야 한다.  
3. 적법한 독자 & 해석의 인준  
본문의 의미 내에 있는 다양성에 대한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어떤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올바른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예를 들  
어, 사실 유아 세례론자들과 침례주의자들 모두는 자신들이 올바른 해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도 모두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논쟁 가운데 있는 모든 입장들은 관련 본문의 의미에 대한 보다 나  
은 혹은 보다 개연성이 있는 이해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해석에 있어  
서 우리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와 대상으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이는 본  
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복음주의적 견해  
를 전제로 해서 본문의 의미에 일치 되어야 지나친 비약을 방지할 수 있음을 의도한다. 즉, 통제  
와 제한하는 일들은 반드시 믿음의 공동체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해석은 고립해서 이루어지  
지 않아야 하며, 역으로 반드시 공동체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다. 이는 물론, 꼭 원래의 의미에 제  
한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예수님 및 신약의 저자들이 항상 구약 본문의 문자적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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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의미에 자신들을 국한시키지 않듯이, 우리는 서경 본문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독창적인’ 사용  
의 여지를 열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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