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학원(합동 교단)의 역사와 정체성 -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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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원(합동 교단)의 역사와 정체성 - 기고문

개혁신학어벤져스 2023. 11. 28. 10:34
총신 신학(합동 교단)의 신학 배경  
장창한  
1. 구 프린스턴 신학  
먼저,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1812~1929)과 그 계보를 따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재편성되  
는 과정의 중심인물인 메이천 박사(1881~1937)를 위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배경을 논해  
보겠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설립된 1812년부터 신학교가 재편성된 1929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들 특히 프린스턴 신학교의 첫 교수였던 아치볼드 알렉산더(1772~1851)로부터 찰스 하지  
(1797~1878),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1823~1886), 벤자민 워필드(1881~1937)에 이르기까지  
프린스턴 신학교를 통하여 주장되고 교수되었던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전통을 일컬어서,  
1929년 이후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한 프린스턴 신학 전통과 분별하여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  
이라고 부르겠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교회사에 있어서 대부흥운동, 특히 제 2차 대각성운동  
의 결과로 1912년에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의 목사 양성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는 데 이성의 기능을 강조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칸트 이후의 근대주의적 반지성주의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 운동에서 드러난 반지성의  
경향을 동시에 배격했다. 이들은 정통 칼빈주의가 성경에서 가르친 교리 체계임을 믿고,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변호하는 데 진력했다.1)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에 크게 힘입고 있다. 그러나 메  
이천의 성경 권위에 대한 관심과 교회의 성경적 일치와 순결에 대한 관심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그의 선임자들이나 동료들이 제공한 신학 모델을 갱신한다. 그의 관점은 신실한 ‘개혁주의’와 ‘장  
로교’ 신학자의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곧, 교회론을 포함한 그의 신학적 시각은 주로 스코틀랜  
드 상식철학에 의해 강화되고, 정통 칼빈주의에 확고히 뿌리박은 프린스턴 신학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과 명료성에 대한 확신을 비롯하  
여, 그의 이러한 신념은 어릴적부터 견고하게 형성되어 온 것이며, 나아가 그가 자라온 남부지역  
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로 선임(1906년)되면서  
시작한 성경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특히, 당시 신약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자세히 살핀 연구 결  
과를 통해, 1915년에 이르러 그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된다.  
※ 1915년 5월 3일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신학 조교수로 취임하면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설의 제목은 “역사와 신앙”이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이다. (중략) 성경은 무엇보다 사건들의  
기록인 것이다.”  
관련하여,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확신은 메이천의 초기 논문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리고 이런 확신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부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메  
1) 특히,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와 워필드는 성경 원본의 문자 영감과 이로 말미암는 무오를 변호했다.  
- 1 -  
이천에게 기독교는 역사였고,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역사였다. 곧, 메이천은 기본적으로  
조직신학자가 아니었다.2)  
먼저, 메이천의 신학을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그가 언급한 바를 사례로 들고, 왜 프린스턴 신  
학교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도 차츰 언급하도록 하겠다.  
※ 메이천의 신학을 반영하는 어록  
A. 현대 신약비평  
-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예수는 공간적 거리와 신비로운 후광에 의해 미혹되기 쉬운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 의해서 천상에 속한 존재로 여겨  
졌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  
계 전체가 그 같은 망상에 뿌리박고 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B. 예수님에 관한 자유주의적 재구성을 비판  
- 현대 역사주의자들에 따르면, 초자연적 인간은 결코 존재할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현대 자연  
주의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세계는 불변의 법칙에 순응하며, 결코 끊어지지 않는 발전단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C. 역사와 경험을 통한 확증  
-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오직 개연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연성이야 말로 역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이러한 개연성은 적어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  
로 충분하다. 우리는 부활을 검증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부활 메시지  
를 가지고 있다. 검증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적 경  
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은 역사에 대해 직접성과 즉각성, 그리고 우  
리를 두려움에서 구원해 줄 확실한 친밀성을 더한다.  
당시에 유행한 신전통주의 신학은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1896~1986)의 이름과 연결되어있  
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외형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현대적 재기술이라고 주장하고 있으  
나, 극히 불투명한 어휘를 혼동하여 사용하거나 분명히 모순되는 진술에 사용했으며, 자유주의의  
기본적인 주장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반틸 교수는 신정통주의를 일컬어 “신 현대주의”라고 명명하고, 그것이 결국 근  
대주의 또는 구 자유주의 노선에 선 채 현대인에게 맞는 옷만 바꾸어 입은 것이라는 점을 바르  
게 지적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때로는 위기 신학, 때로는 변증법적 신학 등으로 불리며 실존주  
의에 대한 의존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주요 주창자들은 1939년 프린스턴 신학교에 초빙되어 조직신학을 교수한 스  
위스 신학자 에밀 브룬너(1889~1966) 외에 폴 틸리히(1886~1965), 독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  
2) 다만, 메이천이 프린스턴 신학교 재직시 워필드의 소천으로 비어 있던 변증학의 교수로 교수회에서 추대  
된 사실과 그의 후기의 여러 저술들로 말미암아 그는 변증신학자로 불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그는 1923년에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말하기를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  
은 기독교의 한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한 종교와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논쟁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천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해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주의”로 불려지는 것  
이 마땅하다고 한다.  
- 2 -  
(1884~1976)등을 들 수 있다.  
미합중국 장로교회사에 있어 구학파와 신학파의 분열과 연합(1837~1976) 이후부터 넓어지는  
교회를 지향해온 교회 내 자유주의자들과 소위 온건파는 유럽으로부터 쏟아지는 자유주의 물결을  
등에 업고, 당시 보수 신학의 아성이었던 프린스턴 신학교를 흔들기 시작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소위 ‘근본주의자 대 현대주의자 논쟁’에서 1925년을 고비로 보수주의자 등은 교회  
내 우위의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 이사진의 재편성에  
의하여 보수의 목소리는 ‘소수’의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침내 자유주의자들이 장로교회를 주도하게 되었을 때, 메이천은 복음전파를 현저하  
게 방해하고 있는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일치를 붙드는 것보다는 교회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메이천이 취한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메이천은 장로교 원리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또한 장로  
교회 헌법에 일치하게 행동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하  
였으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이라고 하는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것  
이다. 즉, 성경의 진리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의 헌신, 그리고 그 결과 자연주의적인 자유주  
의에 대한 메이천의 반대는 그 시대의 흐름과 철저하게 반목하게 하는 책임 있는 대응이요 크리  
스천 학자의 양심이었다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메이첸의 신학을 따른 한국장로교의 사람이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이다. 박형  
룡 박사(1897~1978)는 1923년부터 1926년 사이에 당시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의 요람이었고,  
메이천 박사가 활동하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확했고, 그의 제자요 성경신학자인 박윤선 박사  
(1905~1988)는 당시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을 포기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떠나 새로 설립된 웨  
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메이천 박사가 학장으로 있던 시기에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수학하였  
다.  
2. 신학지남과 신학교 논문으로 표현된 개혁신학 전통  
1901년에 개교하여 1907년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한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지남’ 창간호를 발행  
한 1918년 이래로, 일제하 1938년 일본제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로 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러  
나 1940년까지 초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발간된 ‘신학지남’ 논고들과 6.25동란 직후에 발간된  
1954년 이후의 ‘신학지남’ 논고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총회  
신학교)에서 발표된 조직신학 논문들의 신학사상과 흐름을 검토하고자 한다.  
1901년 4개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신학교를 대표하는 ‘신학지남’이  
발간된 것은 191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 기간 동안 조직신학분야에 주로 글을 발표한 분  
은 선교사 레이놀즈(이눌서)박사와 박형룡 박사였다.  
먼저, 이눌선 박사는 인문학사와 문학사를 동시에 받은 후에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위해 라틴어, 헬라어, 인도어를 공부하였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계속하지 못하고, 다시  
버지니아 주에 있는 리치몬드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학생 윤치호와 선교사 원두우 박사를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들었고, 1892년 미국 남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892년에 ‘7인의 선  
교개척대(남3인, 여4인)’에 속하여 한국에 왔다.  
이 박사는 한국교회를 위해 특히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하였다. 1895년에는 성경번역위원으로  
피택되고, 1904년 신약번역을 끝내고 1906년에는 개역하였으며, 같은 해 구약번역을 시작하였는  
데 창세기 및 시편을 번역하다가 기일 박사와 원두우 박사는 안식년이 되어 귀국하고, 1910년 4  
월에 이승주 씨와 김현삼 씨의 도움으로 번역을 마쳤다. 이리하여 1908년에 모교로부터 성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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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한다. 이 박사는 1906년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  
었고, 1931년에는 중국인 가옥명(치아 유 밍) 원저 ‘신도학’을 번역하여 조직신학 교과서(전체 6  
권)로 사용하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숭실대학 대리교장으로 1925년부터 1931년까지는 일제에  
의해 개편되어 이름이 바뀐 숭실전문학교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1933년에 선교 40주년을 맞이한  
이눌서 박사는 이후에도 1937년까지 꾸준히 ‘신학지남’에 기고한다.  
박형룡 박사는 1930년 평양신학교 교수가 된 이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총회신학교)에서 봉  
직한 1972년까지 43년의 긴 기간만큼이나 ‘신학지남’과의 인연도 길어서 첫 논문을 기고한  
1928년부터 마지막 논문이 실린 1971년까지 총 134편의 논문이 ‘신학지남’에 실려 있다. 그리  
고 1937년에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1934~35년)하고 돌아온 박윤선 목사의 논문이  
처음으로 19-5호(1937년)에 실려 있다. 박윤선 목사는 박형룡 박사가 1930년부터 가르치기 시  
작한 이래 193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때문에 스승과 제자 사이다.  
※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평생 사역하며, 당시 기독교에 대항  
하는 각종 이교사사들, 특히 유물론 사상과 진화론 및 유신진화론 등과 칼빈주의에 대항하는 신  
칼빈주의 등 현대자유주의 및 현대신정통 사상까지 일선에서 방어할 뿐만 아니라, 후학들의 교육  
과 교회의 사상적 지도 및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이 땅에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장로교 신학의 터를 견고히 하는데 진력했다.  
‘신학지남’이 복간된 1954년부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떠나게 된 1971년까지 박형룡 박사  
는 64건의 논문을 ‘신학지남’에 기고했다. 이 사이의 조직신학 교수들의 논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학지남’에 기고한 순서대로 살펴보면, 1950년대에는 명신홍 박사가 1954년에 기고하기  
시작하여 1971년까지 21건을 기고했고, 이상근 박사는 1958년에 첫 기고를 시작하여 1974년까  
지 6건을 기고했다. 이후에 1979년 개혁총회가 분리되고 1980년 개혁합신총회가 분리된 이후,  
유학전에 이미 ‘신학지남’에 기고하고 총신 신대원에 강사로 있던 서철원 교수는 1991년 이후부  
터 총신 신대원에서 다시 후학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외에 김길성 교수는 1979년과 1980년에  
총신 신대원에서 강사로 있다가 유학후 돌아와 1993년부터 기고했으며 최홍석교수는 1986년부  
터 기고했으며 이상원 교수는 1998년부터 기고했다.3)  
3. 청교도 장로교회 신학전통  
장로회 정치는 대의를 특징으로 한 교회 정치체제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의하면, 장로  
회 정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  
직하고 그 당회로 하여금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라  
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장로회주의는 장로들에 의한 치리요, 동시에 성직의 평등을 말하며,  
또한 성직자의 치리권과 평신도의 기본권을 균등하게 인정한다고 하겠다.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미국의 남장로교회(PCUS), 북장로교회(PCUSA),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에서 파송한 4개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이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  
교를 설립하고 목회자 양성을 시작하면서, 즉 이 땅에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선교사역에서 시  
작된다.  
장로회의 기원부터 살펴보겠다. 이는 성경역사의 상고대로 돌아간다. 이 제도는 모세(출 3:16,  
4:29, 30, 민 11:16)와 사도(행14:23, 18:4, 딛1:5, 벧전 5:1, 약5:14) 때에 일찍이 있던 성경적  
3) 2023년 11월 28일 현재 은퇴한 조직신학 교수 명단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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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이다. 장로회라는 말은 장로라는 말을 어근으로 한 것인데, 장로라는 말이 구약에 약 100회,  
신약에 약 60회 나타난다. 구약에 사용된 장로라는 용어는 모세오경에만 절반 이상 사용되었고,  
특히 두 단어, “자켄”과 “가돌”로 집약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로 초대교회 이후 매몰된 장로교회의 회복의 의미에서 장로교회의 시작은 종  
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회 또는 개신교에 속한다. 종교개혁자 루터(1483~1546)와 츠빙글  
리(1484~1531)와 칼빈의 종교개혁사상을 따르는 개신교에는 장로교회 외에도 루터교회, 성공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등이 있고, 이 개신교회들은 헬라정교회와 러시아 정  
교회가 중심을 이루는 동방교회와 로마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 또는 로마가톨릭교회  
(천주교회)와 크게 구분된다.  
그중 개혁파(또는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그들의 교회 정치의 전부가 성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  
장하지 않고, 다만 그 근본적 원리들이 성경에서 직접 인출된다고 말한다. 대체로, 개혁주의라는  
말은 중세 로마가톨릭의 경직되고 폐쇄된 성경이해와 해석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을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 칼빈으로 대표되는 개신  
교 학자들 중에서도 루터교와 구별되는 신학, 특히 요한 칼빈과 그의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신학을 일컫는 말로 오래 동안 사용되어 왔다.  
※ 유럽에서는 주로 개혁주의 라는 말이 통용된 반면에 영미계통에서는 칼빈주의라는 말이 사용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서로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으나 개혁주의라는  
말이 더 많이 통용되고 있다. 루터교는 독일전역, 특히 독일의 북부지방과 스칸디나비아에 거의  
독점적으로 확산되었고, 개혁주의는 칼빈이 목회한 스위스의 제네바 교회로부터 출발하여 유럽의  
여러 지방에 확산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라인지방,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북아일래드의 얼스터  
지방,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개혁신학의 고전적 표현은 개혁주의 교회들의 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불란서 신앙고백(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벨직 신앙고백(1561),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1566), 영국교회의 39개조(1562, 1571), 돌트 신조(1619), 웨스트민스터 신도  
게요(1647) 등이 있으며, 미국의 칼빈 신학교 교수 루이스 벌콥은 개혁파 또는 장로교제도의 근  
본원리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와 권위의 원천이시다.  
2. 말씀은 권위행사의 방편이시다.  
3.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부여하셨다.  
4. 그리스도는 대표적 기관들에 의해 이 권세를 행사하도록 준비하셨다.  
5. 교회의 권세는 우선적으로 지교회의 치리회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로교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장로교회는 교리적으로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다. 1963년  
제 48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어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 전체가 교회의 신  
앙고백이 되었다. 현재 미국의 기독교 개혁교회 및 화란 본국의 화란개혁교회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돌트 신경과 이외에 기타 개혁신경들은 우리 교회  
가 이미 우리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 외에, 추  
- 5 -  
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세계의 개혁파 교회와 교류시에 불편이 없을 것이다.  
2. 돌트 신경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개혁파 장로교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칼빈주의 5  
대교리는 1전턱 타락 2무조건 선택 3제한 속죄 4불가항적 은혜 5성도의 견인 등이다. 이 주제들  
은 개혁신학의 핵심주제이며, 돌트(도르트)회의를 통해서 정리되고, 이후 1643년의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 그대로 영향을 끼쳐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1647년)의 기초를 이루었다.4)  
3. 장로교회는 올바른 교회관에 근거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라는 사실의 인식과  
고백은 교회정치의 근본원리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다. 장로회주의는 제도  
적, 계급적인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참된 성도의 생활의 출  
발로 인식하는 성도의 교통을 강조하고, 신구약 교회의 연속성을 말하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그리고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고백한대로, 교회의 내적 교유한 속서으로서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말하며, 교회의 외적 표지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전파와 청취(요8:31, 32,47, 요일  
4:1~3), 성례의 정당한 거행(마28:19, 행 2:42), 권징의 신실한 시행(마18:18, 고전 5:1~5)을 말  
한다.  
4. 장로교회는 실천적으로 성경적 직임들이 바르게 회복 될 때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칼빈은  
교회의 4가지 직분으로, 목사, 교사, 장로, 집사를 제시하고,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년)에는 교  
사의 직분이 목사의 직분에 포함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후에 개혁파 교회는 목사, 장로, 집  
사의 직분을 통상직 중에서도 항존직으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에베소서 4장 11절과 디모데전서 5장 17절이 가르치는 대로, 다스림(치리)과 더불어 말씀  
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들은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행6:4). 이어, 장로교회는 교회 안에서 오  
랫동안 사라져버린 장로들의 직분을 회복시켰다. 따라서, 치리장로들은 목사의 동반자로서 그 제  
도가 표현하려는 성경적 정신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곧,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하는 기능은 주로 목사의 기능이요, 다스리는 일  
은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모든 장로들의 기능이다. 그리고 교회 안팎의 구제와 섬김의 사역을 담  
당하는 집사직에 대해서도 그 온전한 직분의 회복이 필요하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통상직원  
중 항존직에 속하고, 임시직으로 전도사, 전도인, 남녀 서리 집사, 권사 등이 있고, 준직원으로  
목사후보생과 강도사가 있다.  
4. 12신조에 나타난 고백교회의 전통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신앙고백은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다. 이 글은 위의 두  
가지 중에서 12신조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고자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헌법에 따르면,  
12신조는 서언, 신조, 승인 식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12신조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12 신조 개관  
1조: 신앙의 표준이 되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선포  
4) 안타깝게도 2023년 11월 28일 현재 많은 (신정통주의[신칼빈주의]로 요약되는)통합교단의 교회가 이  
러한 전통적 신학이 없이 기계적으로 그것을 신학과 목회에 대입한다. 이는 그동안 개혁교회를 지탱  
한 근본을 다 내어 버리고, 최신의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이론 하나로 오로지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실수에 해당한다. 비유컨대, 새로운 양자물리이론이 나왔으니, 그것으로 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이며,  
공장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친구관계는 어떻게 맺을 것인지 곧, 기본적으로 생활 중 제기되는 질문  
에 어거지로 답하려 하는 시도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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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하여  
3조: 성삼위일체  
4조: 하나님의 창조 5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첫 사람의 창조와 문화명령  
5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첫 사람의 창조와 문화명령  
6조: 아담의 타락과 그 죄의 결과  
7조: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석 : 그의 성육신, 두 성품,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심, 십자가에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중재대언사역, 재  
림 등을 언급함  
8조: 성령의 역사와 구속의 적용사역  
9조: 예정과 회개와 믿음, 구원, 양자됨, 거룩하게 하심(성화), 영원한 영광(영화)와 현세에서의  
구원의 확신 등을 언급하고,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세 가지 방도로 성경말씀과 성례와 기도  
를 언급함.  
10조: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로 말하고, 세례의 의미와 유아세례의 인정, 도  
한 주의 성찬의 의미와 유익과 성찬의 참여자에 대하여 망라한다.  
11조: 신자의 본분으로 믿는 자의 성화의 삶에 대하여 말하고, 주일에 대한 강조와 일반 인류에  
대한 관심과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재림의 소망에 대하여 말한다.  
12조: 최종부활과 의인과 악인의 심판에 대하여 말한다.  
즉,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의 공식적인 신조인 것이 분명하고,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교단에서  
사역할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승인할 자신의 신조인 것이 분명하고, 12신조와 웨스  
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고, 12신조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보완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12신조는 그 영어원문이 본래 인도의 영국선교사들이 준비한 것을 인도장로교회가 교회  
의 신조로 채택한 것을 12개 신조와 승인식은 그대로 두고, 앞에 나오는 ‘서언’은 일부 수정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와 독노회에 보고하고, 마침내 교회의 공적 신조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황재범 교수에 따르면, 1892년 인도 북부의 알라하바드에서 열린 인도 안에 전국적인 장로교 연  
합기구 구성을 위한 모임을 위해 각국의 7교회(스코틀랜드교회, 스코틀랜드자유교회, 미국장로교  
회, 미국개혁장로교회, 미국개혁교회, 아일랜드장로교회,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참석하고, 1875년  
에는 이 모임이 계속 되어, “인도장로교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르고, 1904년에 이르러는 준비된  
12신조를 채택하고, ‘인도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5. W.C.C 신학배격  
19세기말 미국 전역과 유럽을 휩쓸었던 일련의 부흥운동은 다수의 단체들을 탄생시켰다. 이 중  
에는 기독청년회(YMCA, 1844), 복음주의 연맹(1864), 기독여성 청년회(YWCA,1855), 세계기독  
학생회(WSCA, 1895) 등이 있다. 이후 복음 전도와 선교사역을 증진하기 위하여 수 차례 국제  
적인 대회들이 열렸으며, 마침내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1910년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이 대회에서 발전하여  
결국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만들어지는데, WCC는 화란  
암스텔담의 창립총회(1948) 이후, 1961년 ‘국제 선교협의회(I.M.C)를 병합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  
는 명실상부한 성교, 사회문제,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는 세계적 기구가 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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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가졌다.  
한편, 현재의 주제인 WCC신학과 관련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거나 동조한 사람들 가운  
데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나, WCC를 있게 한 단체나 기구의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 중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  
적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32년에 발간한 ‘성교 백년에 대한 평신도의 질의’라는 책에서 제시  
된 선교방향에 대하여, 당시 장로교 선교사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자신의 지지를  
이렇게 표현한 점을 들 수 있다. “직관의 신이야말로 참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인 종교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당시 교회 안에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선교사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깊이 침투한 사실을 여  
실히 보여준다.  
박형룡 박사는 WCC 문제로 통합이 분리되기 직전 ‘신학지남(1958)’에 실린 “에큐메니칼 운동  
의 교리와 목적”이라는 논문에서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수납된 WCC의 헌장에 담긴 교리적 진  
술에 대하여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대속적 속죄, 삼위일체, 성경, 이신칭의, 성령  
의 사역, 부활과 구원 및 멸망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이 헌장의 교리  
적 기초는 자유로이 해석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음을 언급한다. 즉, WCC운동은 표  
면적으로는 세계교회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 주  
도하는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에큐메니칼 운동인 것이 분명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  
이 진리대로 가르쳐지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안과 밖에서 현저하게 퇴조하는 결과  
를 낳게 된다.  
WCC안에는 연합운동을 위한 4개의 공동체가 있다. 1)카톨릭(천주교)과 세계교회협의회 공동체,  
2)신오순절교회들과 세계교회협의회 공동자문그룹, 3)기독교세계공동체와 세계교회협의회 공동자  
문위원회, 4)21세기 에큐메니즘 위원회 등이다. 그리고 WCC안에는 각종 교파들이 혼재해 있다.  
헬라정교회, 애굽의 콥틱교회, 로마가톨릭교회, 루터교회, 성공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개혁교회, 침례교회, 형제교회, 메노나잇교회, 모라비안교회, 그리스도교회, 하나님의 성회 등 각  
양 상이한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고백의 일치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편, 1991년 호주의 켄버라에서 열린 제7차 총회에서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정현경  
교수는 제3세계와 여성을 대표하여 ‘성령이여 오소서 온 누리를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발표  
하였는데, 정교수는 소복차림으로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무대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춤을 멈추  
고는 영문 초혼문을 읽으며 초혼제를 진행하기도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략)오소서! 애굽이 하갈의 영이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해서 착취  
당하고 버림받은 흑인여성입니다. (중략) 오소서! 잔다크의 영혼과 중세기 화형으로 살해된 무당  
들의 영이여!(중략) 오소서! 인간들의 금전욕에 의해서 고문당하고 착취당한 흙, 공기, 들의 영들  
이여!(중략) 오소서! 십자가에서 고문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 형제이신 해방자 예수의 영이  
시여!”  
또한, 한국기독교회회협의회(NCCK)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올려있는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인 구미정 교수의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에도 이와 유사한 혼합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략) 오, 하느님, 부처님! (중략)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조사  
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중략) 나무아미타불, 아멘.”  
위의 인용들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를 넘어서 혼합주의를 지향하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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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발표했던 위르겐 몰트만은 WCC 운동의 개신교 지도자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고를 부활신앙에서 재해석하고 기독  
교 신앙이 현대사회에서 가지는 ‘약속과 희망의 사고’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해방이란 정치적,  
혁명적 개념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 미래를 포괄하여 억눌린 자, 짓밟힌 자  
에게 뿐만 아니라, ‘억압자의 자유로운, 그리고 인간적인 미래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무산계급 뿐 아니라, 중산층과 특권층을 포함하여 시민대중이 현  
존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기득권의 노예상태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야 한다. 바로 이러한 민중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난 받고, 투쟁하는 교회가 민중의 교회라고  
몰트만은 주장하는 것이다. 즉,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실제적인 방향에 대한 지  
나친 관심으로 기능적 차원의 교회론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가 몰트만의 교회관에서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자체가 강조되기보다는 오히려 주  
변 사회의 변화나 선교적 필요성 등과 같은 문제들이 강조되는 이유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흘러가는 일반적인 흐  
름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론은 교회의 여러 가지 기능들을 정화해주는 본질이  
사일된 상태에서의 기능적 교회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교회를 존재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며, 교회의 본질보다는 기능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 땅위에 친히 세우신 초자연적인 제도인 교  
회의 모습 대신에 하나님은 이 땅의 수많은 수단이나 제도들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고 하는 다분히 세속화된 교회론이 대중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큐메  
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은 교회론은 당연히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데 그 강조점을 둔 ‘기능적  
교회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이러한 기능적 교회론은 교회의 순결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측  
면을 무시하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교회의 세속화를 가중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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