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국가관'을 다룹니다.
순서대로 보시면, 그것에 대한 개혁주의적 관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국가와 정치 개념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 좌파나 우파들의 견해를 접하기 전에, 이 영상과 내용부터 보시길 그리고 성경을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 세속적 이념 또는 가치를 앞세워서 하나님께 접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오류가 너무나 많습니다.
* 교회와 국가의 관계 - 박재은 교수 (총신대)
https://www.youtube.com/watch?v=HWkZBo8NZdg
* 어거스틴과 칼빈의 교회와 국가 사상 ㅣ 안인섭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cpgKecjMW7w
-> 개혁주의 학술원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관련 논문(안인섭 교수님- 칼빈을 중심으로 한 자료)을 첨부(PDF, HTML)합니다. 아주 좋은 내용입니다. 무료 자료 그리고 공개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칼빈의 교회와 국가
안 인 섭 박사
<목차>
I. 들어가는 글
II. 칼빈의 교회와 국가사상의 배경
1. 16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황
2. 16세기 제네바
III. 칼빈의 교회와 국가사상
1. 성경 해석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와 국가 (로마서 13: 1-7 을 중심으로)
1) 칼빈의 로마서 주석 초판 (1540년)
① 위정자의 권위
②위정자의 책임
③복종과 저항
④악행자에 대한 국가의 처벌
2) 칼빈의 로마서 주석 제2판 (1551년)
①위정자의 권위와 복종
②위정자의 임무
3) 칼빈의 로마서 주석 제3판 (1556년)
①국가와 위정자의 권위
②하나님의 세상 지배의 대리자
③악행자에 대한 강경 처벌
④위정자에 대한 복종에 종교적 의미부여
2.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와 국가 :1536년판과 1559년판
비교를 중심으로
1) 국가의 기능
2) 국가 지도자의 의무
3) 악한 사람들에 대한 위정자의 태도
4) 다른 종파에 대한 태도
5) 권징과 목회적 돌봄
6) 국가의 신앙적인 책임과 권징
IV. 나오는 글
1. 소결론 : 칼빈의 성경해석(로마서 13:1-7)과 교회와 국가
2. 소결론 : 칼빈의 기독교강요 (1536년판과 1559년판)와 교회와 국가
3. 결론 : 칼빈의 교회와 국가
V. 참고문헌
I. 들어가는 글
최근 북한의 핵실험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남한과 북한, 그리고 주변의 4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불안정한 상황가운데 놓여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국가를 이해하는 태도는, 교회의 성도뿐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와 세계인의
실제적인 삶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교회는 그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 속에서 발전했으며, 신성로마제국과 중세
교회의 관계는 중세 교회사의 중요 페이지를 장식했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구교의 신학적 왜곡을 혁파하면서 성경적이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연결되는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들이 출발하는 역사적 발전이 역동적으로 맞물리면서,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의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국가의 쟁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정치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존재해 왔기 때문에, 교회사는
일반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일련의 신학적 전망뿐 아니라, 계급들, 사회들,
그리고 정부들의 정치적 사회적 갈망들을 포괄했던 전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기간이었다. 마침내 이 운동은 기독교와 그 종교개혁을 수용했던 사회들에게 근본적인 변화들을
출범시켰으며, 지역적 국가적 전통들을 창출했다. 이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신앙은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 역사적 결과물들을 도출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속에서 연구될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으며,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신학
연구는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져 왔다.
한편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세계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무장된 신정국가주의를 신봉하는
단체들의 실제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국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이슈로 현대인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국 교회는 한국 현대사의 발전 속에서 수적 부흥과 양적 성숙을 이루어 왔다.
개신교가 전래된 1880년대부터 한국 교회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 국가가 형성되는 고비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자임할 수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작금의 한국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
교회에 절실한 요청 중 하나는, 한국 사회를 향한 한국 교회의 "건강한 리더쉽"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을 믿는 교회들은 21세기의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개혁 교회는 그 신학적 근원이 되는
칼빈의 신학, 특별히 그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초점을 모으게 되는데, 왜냐하면, 교회의
지도자였던 칼빈은 중세 기독교 천 년의 문명이 해체되면서 유럽이 전혀 새로운 근대 사회로
재편되어 가던 16세기라고 하는 대 격변기에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상사에 중대한 토대를 놓았던 칼빈을 연구하되, 특히 그의 교회와 국가사상을 고찰하는 것은,
"신학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I. 칼빈의 교회와 국가 사상의 배경
1. 16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황
종교개혁은 유럽의 문화사에 있어서 중세와 근대 사이의 변천 시기이다. 따라서 칼빈의 교회와
국가 사상을 연구한다면, 후기 중세와 그 자신의 시대적 배경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중세는
교회가 조직화된 전체 사회와 동일시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역사적 시대들과는
구별되는 시기였다. 16세기의 초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실제로 그 시대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형성하면서 성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옐스마 박사(Prof. Dr. A. J. Jelsma)가
16세기 유럽의 환경을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내가 16세기 초의 카톨릭 주의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권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믿는다. 중세 후기에, 교회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체제로 자라났다. 그래서
그 체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높은 정도까지 결정했으며, 유럽의 사회적, 법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물론 종교적 삶을 조정하는 관료제도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았다.
종교개혁 시기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은, 또한 그 종교적 변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을 연구하기 위해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을 함께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버만(H.A. Oberman)에 의하면 칼빈은 박해의 위협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갔던
실제적인 한 명의 난민이었으며, 그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던 경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이처럼 칼빈의 역사적 경험과 그의 사상이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면서, 칼빈을 16세기의 역사적 문화사적 문맥과, 프랑스와 제네바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칼빈에 대한 재발견이 광범위하게 시도되고 있다.
2. 16세기 제네바
칼빈은 중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를 했던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면,
1536년부터 156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을 제네바에서 목회하며 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16세기 제네바의 상황은 칼빈의 교회-국가 관계에 대한 태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배경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칼빈의 도시 16세기 제네바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쉽게 제네바의 환경과 칼빈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사상과의 상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제네바는 카톨릭 주교와 사보이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방금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다. 그리고 베른이 제네바를 식민지화할지도
모르는 우려 속에서도, 제네바는 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네바 정부가 전통이 없는 젊은
정부였기 때문에, 그 도시의 자유는 종교개혁 유지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러므로
독특한 칼빈의 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III. 칼빈의 교회와 국가사상
1. 성경 해석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와 국가 (로마서 13: 1-7 을 중심으로)
주지하는 바처럼 로마서 13장 1장-7장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 사상을 가장
명확하게 천명해 주는 중요한 성경 구절 중 하나이다. 본 논문에서는 칼빈 자신이 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그의 로마서 주석의 여러 판들, 즉 1540년, 1551년, 그리고 1556년
판들을 비교하면서 고찰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칼빈의 성경 해석에 나타난 그의 교회와
국가사상의 발전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칼빈의 로마서 주석 초판 (1540년)
1539년 10월에 기록된 헌정사를 가지고 있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의 초판은, 1540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판되었다. 칼빈 자신이 성경의 가장 숨은 보배로 이끌어 준다고 극찬했던
로마서 주석의 초판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칼빈의 교회와 국가사상을 추출할 수 있다.
①위정자의 권위
칼빈에 의하면 위정자의 권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가장 초기부터 칼빈은
정치적인 권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의 로마서 13장의 주석에서,
칼빈은 모든 지상의 권력들이 존재하는 한, 그리스도의 왕국은 최고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던
급진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했다.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복종의 굴레를
떨어버리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으로서는, 정부의 권위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이 권위는 저항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점에서
칼빈은 일반 사람들 보다 더 높은 권위를 위정자들에게 부여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어떤 정치적
지도자도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의 로마서 주석에 의하면,
칼빈은 궁극적인 권위는 왕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②위정자의 책임
칼빈에게 있어서 위정자들은 선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보호해야만 하며, 악한 자들의 악을
제어해야만 했다. 칼빈은 이처럼 위정자들의 소명감을 일깨우면서, 그것은 인간이 파멸로부터
보호될 수 있기 위한 처방책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만약 정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공적 적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맥에서, 칼빈은 심지어 폭군이라
하더라도 인간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도울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사회에서 선한 사람들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 바로 위정자들의 책임이었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들이 권력을 소유했을 때, 그것은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한다. 결국 칼빈은
위정자들의 이중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정치 지도자들은 인간을 향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결정들은 국민들의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③복종과 저항
칼빈은 백성들은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위정자들의 지위는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위정자에 대해서 마치 하나님에게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권위에 저항하는
자들은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시기에 칼빈은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대리해서 행동하는 한,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④악행자에 대한 국가의 처벌
위의 진술들에 근거해서, 칼빈은 악인들이 선인들을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위정자들이
칼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왜냐하면, 위정자들은 신적인 과제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국가의 지배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위임한 검으로 하나님의 노를 집행해야만 한다.
왕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검을 사용할 때,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칼빈이
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악인들이라고 언급했을 때, 그는 국가의 정치적 질서에 도전하는 자들을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1540년까지는, 칼빈은 종교적인 혹은 교리적인 이슈에 대해서,
국가가 검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위정자들이 순수한 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검을 부여받았다고 보고 있지 않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비록 칼빈이 위정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에게 부여된 검에 의해서
악한 자들을 처벌할 것을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이 처벌을 종교적인 의견들과 관련해서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칼빈의 생애의 후반기에 기록되었던 그의 기독교 강요의 판들에 나타나
있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그의 태도를, 1540년의 로마서 주석 초판의 그것과 비교할 때,
바로 이점이 중요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위정자들의 책임에 대해서
기록했던 1540년까지는, 그는 어떤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정당화없이, 악을 행한자들을 처벌할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2) 칼빈의 로마서 주석 제2판 (1551년)
칼빈은 제네바에 처음 체재할 때부터 그의 임종시까지 제네바 정치와 그 시민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로마서 주석 초판 이후 주석들을 지속해서 저술해 나가는 동안,
제네바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점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사상은
그의 제네바에서의 정치적 위치와 관련시켜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칼빈의 지지자들이 제네바
선거에서 완승을 거둠으로 자신의 위상이 확고하게 된 1555년 이전과 이후가 주목해서 고찰되어야
한다.
①위정자의 권위와 복종
1551년에 출판된 그의 로마서 주석의 제2판에서, 칼빈은 한편으로 초판에서 표명한 견해를 계속
견지해 나가고 있다. 그는 위정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묘사하면서, 정부의 권리에
관해서 이전과 동일한 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 그러나 정부의 권리는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되었다.
그렇지만 칼빈이 정부의 권리에 대해서 새로 언급하기 이전에, 뉘앙스를 강화하는 문장들을
추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폭군들과 권력의 불의한 집행은, 마치 그것들이 무질서 속에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이, 임명받은 정부가 아니지만
칼빈은 폭군과 불의한 권력의 사용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진술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전보다 강조된 견해이며, 1540년의 초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다. 1551년 무렵의 칼빈은, 불의한 국가 지배자들의 신적 권위를
부정함으로,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신학적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한편 칼빈은 그의 로마서 주석 2판의 13장 9절부터 율법의 의도를 첨가해서 설명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율법의 중요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와 형제 사랑을 고취하기
위해서 지배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과 이 세상에서의 평화로운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1540년과 비교해 볼 때, 칼빈은 이전과 유사한 의견을 견지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②위정자의 임무
칼빈은 로마서 주석 초판의 13장에 한 개의 문단을 첨언하면서, 정치인들의 과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3장 10절에 첨가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재 의도하고 있는 것에 적용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위정자들은 평화와 정의의 수호자들이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해를 받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자는,
가능한 한 위정자들의 권력을 변호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의 적들은 해를
끼치는 성향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문단은 1551년판에 나타나고 있는데, 10절에 대한 칼빈의 첨가된 설명에 의하면,
위정자들은 사회 속에서 평화와 정의의 보호자들이다. 위정자들의 권력은 자유의 보존을 위해서
백성들에 의해서 보호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견해를 따르면, 권위에 해를
끼치려고 결심했던 자들은 정부의 적이다.
3) 칼빈의 로마서 주석 제3판 (1556년)
제네바에 대한 칼빈의 영향력은 1555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급성장했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칼빈의 로마서 주석 초판(1540년)과 2판(1551년)을, 1555년
이후에 증보된 3판(1556년)과 비교해서 연구할 때 매우 유용하다. 칼빈이 로마서 13장을 주석할
때, 그의 다양한 판들에서, 특히 가장 최후의 판인 1556년판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개정했는지를 고찰할 때, 그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 사상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그리고 심화되고
강화된 점 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①국가와 위정자의 권위
첫째로, 칼빈은 자신의 로마서 1장 1절 주석에서, 국가의 권리와 권위에 대해서 자신의 이전의
사고들을 견지하고 있다. 다음에 추가된 새 문단은 13장 1절에 대한 칼빈의 1556년판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방지하고 다른 악에 처방을 추구하는 것이 합법적이 듯이, 그 사도는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위정자들의 권리와 권위를, 인류를 위해서 유용한 것으로 대하고 존경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부과하는 처벌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께서 적법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정해 놓으신 수단이다.
칼빈에 의하면, 전쟁과 악을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는 군주의 지배권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는
위정자의 권위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위정자들의 권위에 대한 그의 후기의 견해는 초기의 사상과 연속성을
갖는다.
둘째로 칼빈은 세금의 사용을 요약하면서 6절에서 새 문장들을 첨언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정하는 조세의 용도가, 국왕들이 그들의 신하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해 준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세금의 사용에 관해서, 칼빈은 1540에 이미 그의 로마서 주석 초판의 6절 해설에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었다. 칼빈은 관원들은 세금에 의해서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평화를 지키고 보존하며, 악한 자들에게 대항하는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왕들은 그들의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금을
받았으며, 정치적인 지배자들은 세금을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않된다.
위에서 주어진 두가지 사항을 통해서 볼때, 칼빈은 1540년에서 1555년까지, 교회와 국가에 대한
그의 일관성있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래의 세가지 점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그의 보다 심화되고 강화된 입장을 주목해야 한다.
②하나님의 세상 지배의 대리자
로마서 13장 1절의 해석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세우신 이유와 정치적인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매우 짧은 한 구절을 제 3판에 추가했다. 아래의 강조된 단어가
그것이다.
우리가 위정자들에게 굴복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정하심에 의해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위정자)의 권력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자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저항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권력의 창설자 되시는 분(qui iuris politici author est)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은, 그분과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배하시기 위해서 위정자들을 세우셨다. 칼빈에 의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이며, 따라서 백성들은 그들의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세속적인 정치권력의 직접적 창시자가 되신 것이다. 칼빈은 이처럼 정치적인
권위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권을 부여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이곳이 국가 권력의 기초를
하나님에게 두었던 그의 이전의 원칙론적인 입장보다 한층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③악행자에 대한 강경 처벌
로마서 12장 4절의 해석에서 칼빈은 악을 행한 자에 대해서 검을 사용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의 초판에서도, 칼빈은 군주들은 검을 사용해서 개개인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는데, 이 경우 칼빈의 의도는 악한 자들이 해를 끼칠 경우에 대해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칼빈의 강조점은 그들의 국민들의 복지를 위한
위정자들의 책임감이었다.
그렇지만, 1556년에 나온 그의 로마서 주석 제 3판에서는, 칼빈은 그의 이전의 설명보다 한층
강화된 강조점을 보여주는 한 문장을 부가하고 있다.
… 그[바울]는 위정자들이 칼로 무장된 것을, 단지 쓸데없이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행악자들을 후려치기
위해서라는 (sed quo maleficos feriant) 점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행악자들을 후려친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1556년 무렵의 칼빈의 사상은 한 단계
강화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의 강조점은 악행자에 대해서 검을 사용하는 것을
강력하게 정당화하는 부분에 놓여있다. 위정자들이 검으로 무장하는 것은 단지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④위정자에 대한 복종에 종교적 의미 부여
마지막으로 칼빈의 발전된 점은 7절에 나오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복종 부분과 관계있다. 칼빈에
의하면, 왕에 대한 백성들의 의무는, 존경과 복종과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556년에 칼빈이 왕에 대한 백성들의 복종을 언급하고 있을 때, 그는 이전에는 없었던 강조점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단은 내가 앞서 설명했던 바를 확증하고 있다. 즉, 우리가 왕들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어떻던 간에, 우리들이 강요를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sed quia Deo gratum est obsequium).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자발적인 존경에 의해서 영예를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백성들이 위정자에게 복종할때, 그것은 단순히 강요에 의해서 실천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려지는 종교적인 봉사의 영역이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정치적인 지배자에게 순종하는 책임을, 종교적인 의무로 강화해서 해석했다. 1556년 무렵의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복종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정의로운 왕에 대한 복종의 타당성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1556년에 나온 칼빈의 로마서 주석 3판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보다 성숙되고 심화된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교회와 국가 :1536년판과 1559년판 비교를 중심으로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을 비교 연구하기 위해서, 이 주제와 관련된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은, 1536년에 바젤에서 출판되었는데,
그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은, 마지막 장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이중의 정부, 즉
영적인 정부(regimen spirituale)와 정치적인 정부(regimen politicum)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이 정부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수립되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지배하에 놓여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칼빈은 기독교인의 양심의 자유뿐 아니라, 복종도 강조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539년 판에 이르러, 중요한 신학적 틀이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조가 그 이후의 판에도 연결되고 있고, 1539년 이후에는 "교리문답서"에서 "기독교 사상의 핵심
요약서"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의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1559년)에는 제 4권의 20장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이 설명되어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기록한 일차적인 의도는 칼빈과 개신교인들은 왕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왕에게 순종하는 자들이며 정부 정복자가 아님을 프란시스 왕과 독자들에게
천명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혁명적인 재세례파들과 지배적인 카톨릭 세력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택했다. 칼빈은 사회를 위협했던 재세례파 혁명주의자들과 대조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시민정부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의 기독교 강요를 기록했던 것이다.
칼빈은 1536년부터 1559년까지 기독교 강요의 여러 판들을 출판했는데, 이 각 판들을
거듭하면서 칼빈의 사상은 점진적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각
판들을
비교하되,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관련된 어떤 내용들이 첨가 혹은 삭제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를
고찰한다면, 그것은 곧 칼빈의 신학적 뉘앙스나 강조점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536년에 나타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과 1559년에 출판된 마지막 판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그의 초기 사상이 결국 어떻게 강화되어 갔는가
혹은 약화되어 갔는가를 대조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1) 국가의 기능
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신적 기관이다. 칼빈은 이 국가의 기능을
명확하게 표현하기를,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며, 사회의 공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칼빈의 사상은 1536년에 출판된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 잘 나타나 있다.
1536년 당시의 칼빈은 국가의 기능은 인간의 삶 속에서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한편 칼빈의 1559년의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사회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해 주는 국가의
본래의 기능이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국가의 기능에 대해서 시종일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 1559년 판을 살펴보면, 칼빈은 국가의 역할에 또 다른 중요한
점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곧, "국가는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국가의 목적을 설명하는 동일한 곳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에는
나타나 있지 않던 국가의 종교적인 역할에 대한 설명이 1559년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편에는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고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존중하면서 보호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건전한 교리를 지키고 교회를 수호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초판이 나왔던 1536년과는 달리, 1559년 판에는, 신생 개신교 독립 도시인 제네바의
교회를 지도해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이 그의 국가관에 반영되어 있었다.
2) 국가 지도자의 의무
칼빈은 또한 국가의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무에 대해서도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국가의 정치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은
국가의 본래의 기능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그 사명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지도자들은 "공공의 순결과, 절도와 품위와 평화의 수호자요 또한 보호자로서 임명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런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국가 지도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의 그릇된
행위로부터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칼빈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국가의 지도자들은 현재
박해받고 있는 자들도 도와야 하고 수호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지도자들이 물리적인 권력을
부여 받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라고 칼빈은 보는 것이다. 칼빈은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가가
공공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악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강제권을 발동해서 처벌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1559년판 기독교 강요는 어떠할까? 칼빈의 1559년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1536년에 나왔던 그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국가 지도자의 책임에 대한
견해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국가의 지도자들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의 공적인 선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국가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다고 칼빈은 표현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정치인들은 사회의 공공의 평화를 증진하고 사악한 자들로부터 선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칼빈의 1559년 기독교 강요는 1536년의 초판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치 지도자의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정부와
그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주는 문장들을 많이 추가했고,
또
그
위정자들이 교회의 명예를 후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많이 확장시켰다. 칼빈이 확대한 내용들은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신앙적인 책임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위정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이 대표하는 하나님과 또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주권을 갖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성경 중에서 특히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회복하고 순수하고 흠이 없는 신앙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던 왕들의 이야기를 더
기록해 주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강요의 1559년판에 의하면, 국가의 지도자들이 인간 사회의 정의
만에 관심을 갖는다면 어리석다는 것이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고
확대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인데, 왜냐하면,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대표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3) 악한 사람들에 대한 위정자의 태도
칼빈은 1536년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로마서 13장 1-7을 인용하면서, 백성들의 왕에게
복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국민들은 국가의 왕에게 복종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점은 기독교 전통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다. 이때 칼빈은 "사람에게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사도행전 5장 29절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서는 이 사도행전 5장 29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1540년과
1551년 그리고 1556년에 출판된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정의롭지 못한 국가 지도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도행전 5장 29절을 이용하고 있다. 1536년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는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1540년 이후, 1551년과 1556년에 출판된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사도행전 5장 29절이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칼빈이 초기에는 혁명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점차 프랑스의 정치적인 상황이 개신교들에게 핍박을 야기 시키자,
칼빈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지배자에 대해서 순종하기 보다는,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1559년)에 가면, 칼빈은 국가의 지배자들이 폭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경건과 관련시켜서 설명하면서, 국가 정치 지도자들이 악을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되, 자신을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행악자를 추방하는 왕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을 보충했던 것이다. 칼빈은 한 나라 안에서 악을 행한
자들을 처벌할 때, 그것은 왕의 덕스러운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이 이런
구절들을 포함시켰을 때, 그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는 악을 행한 사람들 추방하는 것을 위정자의 덕행으로 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판(1559년)은 정부가 악을 행한 자를 추방하는 행위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네바에서 악행자를 추방하는 일이 칼빈 자신에 의해서 강조되었다는 것일까?
그러나 역사적으로 제네바 시 당국을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지는 않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난민 목회를 하고 있던 1538년에서 1540년 사이에도, 제네바는 계속
도덕적인 통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제네바 정치계에 미치는 칼빈의 실제적인 영향력이 확립된 것은,
칼빈을 후원하던 사람들이 1555년 시선거에서 압승을 하여 제네바 시를 실제적으로 운영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므로 제네바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악을 행한 자에 대한 위정자의
강력한 입장에 대해서, 적어도 칼빈의 기독교 강요 1559년판은 1536년 마지막 판과 비교해 볼 때,
보다 그 뉘앙스가 강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다른 종파에 대한 태도
칼빈은 진심으로 제네바에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길 원했다. 그의 모든 신학적, 목회적 역량이
이곳에 집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다른 종파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가 궁금하게 된다.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 초판 제 2장에서, 신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네 번째
부분에서 칼빈은 사도신경을 해설하고 있다. 칼빈이 거룩한 보편 교회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은, 바로 성도의 교제와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해설 부분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선택된 자들의 전체의 수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전체가 교회인 것이다. 칼빈은 선택된 사람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과 패역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은
구별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된 사람들을 알아 볼 수 있을까? 칼빈에 의하면, 우리와 함께 동일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되,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을 통해서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판단에 의해서 선택된 자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 따르면,
선택자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선택자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다른 종파에 대한 칼빈의 언급은 파문의 문맥에서 발견된다. 칼빈은 같은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현
교회에 거짓된 성도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칼빈은 다음의 세가지 이유가 있을 때 출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출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교회 안에 많은 범죄자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마치 교회가 악한 일을 범한 사람들과 사악한 사람들의 소굴로 여겨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악을 범한 자들의 타락함이 공동체 안에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출교는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범죄하여 출교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출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칼빈은 비록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서 처벌을
하는 경우에 라도,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진 사람들인 것처럼 절망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요컨대, 출교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칼빈에 의하면, 교회나 국가에 의해서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던 것이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터키 사람들, 사라센 사람들,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통 기독교 정통
신앙을 가르친다고 해서 카톨릭 사람들이 했던 바와 같이 "불과 물과 다른 일상 요소들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그들의 인간성을 부인하고 그들을 칼과 무기로 윽박지르는 방법"은 옳지 못하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칼빈은 다른 종파에 대해서 폭력과
강제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5) 권징과 목회적 돌봄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교회 연합의 결속력이다. 그로부터 떨어지는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하게 간주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영적인 성격은 교회 연합을 위한 중요한 것이
된다. 잘 조직된 이 교회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자신의 영역위에 거주하신다.
칼빈은 1536년에 제네바 신앙고백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거기에서 성찬의 준수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교회에서 선포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가시적 교회를 비가시적 교회와 구분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된 자들을
의미했던 비가시적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져 있다고 믿었으므로, 칼빈은 그의 학문적
에너지를 가시적인 교회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왜 칼빈의 교회론이 그 문맥상 실천적인
용어로 설명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가시적인 교회에 관한 문제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외적 수단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 외에, 칼빈은 교회의 참된 요소로서 권징을 부가하고 있다. 권징은
교회의 기능과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은 권징은 교회 구성원들 간의 교제의 끈을 강화시켜 준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컨시스토리에 교회의 구성원들을 조사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컨시스토리는 1541년의 칼빈의 "교회 규칙(Ecclesiastical
Ordinances)"에 근거해서, 1542년에 칼빈의 건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영향력 있는 상담
기구뿐 아니라 법령에 의한 법정으로 작용했다. 성인 거주민들이 (5인에서 7인)이 매년
컨시스토리에 소환되었다. 컨시트토리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제네바 공동체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수용 정도를 평가해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칼빈은 사회의 발전은 여성과 남성 시민 개개인의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의 개혁을 위한 장소로 간주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실천적이 되었다. 평화와 조화를 위해서, 칼빈은 그 권징권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회의 통치를 실천적으로 규정했고, 따라서 그는
신앙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다.
칼빈의 작품에 나타난 권징에 대한 교리적인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교회의 권징에 대한 그의
사상이 발전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기독교 강요의 다양한 판본에서, 칼빈은 권징의
실천이라는 주제에 대한 차이 있는 발전을 보여주었다. 그의 1536년과 1539년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권징이 "회집된 공동체"(gathered community)에 의해서 실천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었다.
그렇지만, 1543년 이후에, 그는 "교회 법정"(the church court)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효과적인 목회를 감당하기 위해서 건강한 권징을 가져야만 했다. 칼빈은
권징에는 세 가지의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권징은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칼빈은 생각했다. 만약 교회가 악을 행한 자들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교회는
범죄자들의 소굴로 오해될 수도 있다고 칼빈을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로, 권징을 받는 사람들은
권징을 통해서 그들의 행위가 교정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권징은 그
권징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교회의 구성원들을 타락으로부터 지키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권징을
통해서 교회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질을 높이기 위해서 격려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칼빈은 특히
교리와 주의 만찬의 순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오직 설교자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권징을 집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주의 만찬을 공동체를 위한 권고의 의미일 뿐 아니라, 하나의 교육으로 간주했다. 그는 주의
만찬은, 마치 빵 속의 각 곡식들이 완전히 혼합이 되어 서로 구분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연합을 강화시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제네바의 교회 지도자로서는, 교회의 순결을 보호하는 최후의 방법은 수찬금지였다.
수찬금지 되었던 사람들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칼빈은 성경에 의하면 수찬금지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찬금지가 수찬금지를 당한 사람들을 지옥에
집어넣는 궁극적인 정죄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미리
판단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수찬금지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 교회에서는 참된 말씀과 성례의 집행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 주교들의 권징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교황의 세속적이고 교회
내적인 사법재판을 수용하지 않았다.
칼빈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교회의 권징을 지속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제네바에 콘시스터리를 세웠는데, 이것은 장로들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장로들은
폭군의 출현을 예방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칼빈의 의하면,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의 권리의 범주는 수찬금지에 제한되는 것이었다.
교회는 어떤 세속적인 처벌을 시행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권은
국가의 권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제네바에서 실제로는 두개의 권위들이
칼빈이 확신했던 바대로 그렇게 명백하게 분리되지는 못했었지만 말이다.
6) 국가의 신앙적인 책임과 권징
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국가는 강제의 수단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킬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정부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킬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치적인 역할 역시
하나님의 뜻에 속하는 것이다. 국가의 책임이 칼빈에 의해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영적인 기능을 정부의 정치적인
지도자들에게 허용했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정치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변호하고 참 교리를 더럽히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국가의 세속적인 지배하에 있는 성직자는 죄인들을 훈련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국가 또한 죄인들을 처벌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제네바의 시민들이 또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혼돈이 발생하게 되었다. 실제로, 제네바
시민들은 교회의 구성원들이었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신앙을 고백해야 했고, 십계명에
복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약속하는 것은 또한 시민의 서약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징은 국가의 강제로 대체될 수 있었다. 범죄자들은 그 도시로부터 추방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출교는 제네바에서 국가의 법이었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권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콘시스터리의 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조직체는 매년 위정자들에 의해서 선택된 12인의 평신도 장로들과,
1542년에는 9인이었고 1564년에는 19인이었던 목사회(the Venerable Company of Pastors)의
모든 구성원들로 짜여져 있었다. 그들 모두는 위원회에서 선출되었는데, 소위원회(Little
Council)에서 2명, 60인 위원회(Sixty)에서 4명, 그리고 200인 위원회(Two Hundred)에서
6인이었다. 사실상, 권징의 책임은 컨시스터리 법정을 구성했던 장로들과 목사들에게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시스토리는 교회의 법정이었지 국가의 법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왜
제네바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어려웠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또한 국가의 종교적 역할도
설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제네바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신정론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으로, 칼빈이 리더쉽을 발취하고 있었던 동안에 제네바는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당국과 교회의 당국 모두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가지고 계시며,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적인 적용이 그 목적이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신정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칼빈의 견해에 의하면,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제네바의 정치 체제와 컨시스터리의 구성을 조사해 보면, 칼빈 당시의
제네바가 신정정치의 시대였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 옳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교회와
국가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에게 헌신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각 다른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
권위의 영역이 달랐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정부가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교회는 덕의 증진을 위해서 비폭력적인 교육을 통해서 사역을 했다.
사실상, 칼빈은 그의 삶의 거의 대부분을 제네바의 시민이 되지 않은 채로 살고 있었다. 그는
컨시스터리의 구성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 제네바에 미친
칼빈의 영향력은 그의 법적인 지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
명의 설교자로서의 권위를 통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1555년의 제네바 선거에서의 승리 이후에, 제네바에 미친 칼빈의 영향력은
점차 증가되는 추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 존재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IV. 나오는 글
1. 소결론 : 칼빈의 성경해석(로마서 13:1-7)과 교회와 국가
로마서 13장 1-7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중심으로 그의 교회와 국가 사상을 분석할 때 다음의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칼빈은 모두 국가의 권력과 위정자의 권위를 절대화 하지 않았고, 최고의 권위가 되는
하나님 밑에 귀속시켜 상대화 시켰다.
둘째 칼빈에 의하면, 위정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그 권위는 존중되어야
하며 복종되어야 한다.
셋째 칼빈은 공히 불의한 권력에도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강변하지는 않았으며, 불의한
지배자에 대해서는 불복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했다.
넷째 칼빈의 경우, 국가의 권위와 위정자에 대한 복종과 악행자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일면
연속성을 보여주면서도, 악행자에 대한 보다 엄격한 처벌을 점차 강화하는 등 국가의 소임을
점점 강조했다는 면이 주목된다.
다섯째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점차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그의 사상이
발전되었다. 이 현상에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격동기에 독립을 쟁취한 개혁주의 도시국가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 교회를 세워나가야 했던 교회의 신학자인 칼빈의 역사적 책임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여섯째 국왕에게 복종하는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다소 복잡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태도와 관련하여 칼빈은 두 가지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제네바의 정치적인 상황의
긍정적인 전개는 칼빈을 고무했으며, 그에게 적극적인 한 관점을 제공했다. 그러나 칼빈의 조국
프랑스 자체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상황들은 그에게 또 다른 강조점을 갖도록 했을 것이다.
1539년과 1540년에, 프랑스의 왕인 프랑스와1세가 내린 칙령으로, 프랑스 안에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로 취급 받게 되었다.
그
뒤를 이었던 앙리
2세(1547-59) 아래에서는 종교개혁 진영의 신자들이 이교도로 정죄되어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칼빈의 로마서 주석의 이후의 판들(1550년대)은, 정의로운 왕에 대한
복종을 더욱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 소결론 : 칼빈의 기독교강요 (1536년판과 1559년판)와 교회와 국가
기독교강요의 초판(1536년)과 마지막 판(1559년)을 비교하면서, 칼빈의 국가관을 고찰해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과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칼빈은 국가와 국가를 운영하는 위정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공적인 것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국가의 정당한 기능과 합법적인 정치 책임자를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허무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둘째로 국가의 기능과 관련하여 칼빈은 국가는 이 현실 사회 가운데 평화와 질서를 제공해 주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믿음으로 국가의 기능을 역시 실제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다른 종파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동시대의 다른 교회 그룹이나 신학자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덜 과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 시대에 로마 카톨릭을 신봉하는 국가들은
개신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교정할 것을 주장했지만, 칼빈은 단지 국가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바른 교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을 뿐이다.
넷째로 칼빈은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고 죄인을 교화하는 차원에서 권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중요한 것은 이 권징이 국가에 의해서 시행되는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목회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칼빈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설교를 통한 사람 개개인의 인격적 변화를 통해 영적인 감화를 주는
방식으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칼빈은 국가의 종교적 역할을 점차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경우 신생 독립
도시국가인 제네바는 내,외의 압력을 이겨가면서 그 종교개혁의 신앙을 지켜가야 했다. 또한 그의
조국 프랑스의 종교개혁 교회는 국가로부터 모진 박해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국가가
신앙을 보호할 것을 점차 강조했던 것이다.
여섯째로 칼빈이 합법적이고 정의로운 국가의 신적 기원 때문에 그것에 대한 존경을 강조했다고
해서, 불의한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칼빈의 경우 그의 후기에 가서는
정의롭지 못한 정부보다는 그 불의한 정부보다 더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 개혁주의자들이 국가로부터 겪고 있었던 고난이 심화되는 상황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보인다.
3. 결론 : 칼빈의 교회와 국가
종합적으로 볼 때 칼빈은 "교회의 신학자(Doctor Ecclesiae)"요 "역사의 신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 교회가 존재하고 있던 시대가 직면하고 있었던 역사적 과제를
깊이 숙고하면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으며, 그 과정에서 교회와 국가 사상의
방향과 강조점이 점차 심화되어 발전되어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칼빈의 사상을 보다 기본적이고 유형적으로 설명하기 위에서, 본
논문은 "영혼과 육체의 유비"라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칼빈은 자신의 삶 동안에 영혼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인간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간론을
받아들였다. 영혼과 육체가 그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
영혼과 육체는 서로 독립적인 "본체(객체)들"이다. 이 두 본체가 분리된 이후에, 즉 인간이 죽고
난 이후에는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살아 남아있다고 칼빈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혼의 수면(특히 재세례파들이 주장했는데)과 영혼의 죽음이라는 이론을 믿는
사람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영혼은 가장 높은 위치이며, 영혼(anima)은 인간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한편, 칼빈은 영혼은 육체의 생명과도 같다고 보았다. 영혼은 모든 부분들에 생기를 넣어주며, 그
모든 기관들을 각각의 행동에 적절하고 유용하게 한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 자신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플라톤의 입장이 보다 옳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영혼은 거룩하며 인간의 불멸의 부분이고, 육체는
일시적인 피난처이다. 따라서 칼빈은 영혼을 하나님의 실제적 형상으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그러나 불멸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영혼-육체의
이분법적 유비"라는 개념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칼빈 자신이 기록하듯이, "인간 안에는
두 세계가 존재하는데, 다른 왕들과 다른 법들이 그 세계를 지배한다." 하나는 "내적 마음에
존재"하며, 다른 하나는 "외적인 행동을 규제한다." 여기에서 칼빈이 영혼을 영적인 정부에,
육체를 국가에 비교하고 있는 것은 매우 명확하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인간은 이중
정부의 지배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영혼의 지배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 정부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국가의 권력은 완전히 구별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정반대되지는 않는다." 칼빈은 "경건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적인 부분"과,
"법을 제정하는 책임이 있고, 인간성과 시민성에 대한 의무가 있는, "일시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칼빈의 견해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혼과 육체가 한 전인(全人)에서 서로 나뉘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와 국가는 영혼과 육체처럼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은, 영혼-육체의 유비이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 혹은 양심과 외적인 행동의 관계를, 영혼과 육체의 유비를 가지고 이해했다.
육체는 영혼을 위해서 존재한다.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민 정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경배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국가는 또한 일반적인 평화를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경건한 교리와 교회를 변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사회 내에서 교회의 후원자가 된다. 칼빈의 이 견해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유럽이라는 콘텍스트 속에 존재했던 제네바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발전되었다.
칼빈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사상에서 종말론적인 특성 또한 영혼과 육체라는 그의 유비에서
비롯된다. 칼빈에게 있어 영혼은 영원하다. 반면 육체는 사멸하게 마련이다. 이와 동일하게
교회는 영원하며, 국가는 이 세상에서 한시적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칼빈이 국가를 교회 밑에 예속시켰다고 볼 수 없다. 단지 칼빈은 국가와
교회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도시 제네바에서 매우 독특한 교회-국가를 창출할 수 있었고 그는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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