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수납'으로 증명되는 '신앙의 유무'에 관하여 - 자크 엘륄의 파롤(parole) 개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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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수납'으로 증명되는 '신앙의 유무'에 관하여 - 자크 엘륄의 파롤(parole) 개념을 중심으로

개혁신학어벤져스 2023. 11. 11. 13:19

 이 논문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를 다룹니다. 이 논문은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거부하는 태도를 핵심으로 설명하되며, 관련하여, 예수의 그들을 향한 평가를 '세속적인 지혜에 기반한 판단'으로 요약합니다.

 특히, 이 논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 간의 진정한 의사소통 부재를 강조하며, 예수의 말씀이 왜곡되고 비틀려 전해질 때 문제가 발생함을 지적합니다. 나아가,  현대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가 세속적인 성공과 권력을 추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이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강조합니다. 곧, 이 논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진실한 의사소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 논문에서 '파롤'은 일반적 개념으로 '말씀'을 의미합니다. 자크 엘륄의 '말(word)'에 대한 통찰을 재미있게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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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의 죽음 (parole) - 이상민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의 죽음 (parol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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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1
1)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이상민(서울대 불문학교육 박사과정)  
논문초록  
대 또는 현 세상이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돌아섰고 침묵하는 나님과의 단절상태(déréliction)에 있다고 보  
크 엘륄(1912-1994)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현상과 징조들 중 하나로서 ‘말의 죽음’을  
제시한다. 엘륄에 의하면 인간 언어의 위기로서 의 죽음어의 내용에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엘륄은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을 언어의 위기로 간주하는데, 즉 인간 언어의 위기가 나님과의 단절상태거라  
이다. 일상적인 평범한 언어가 어떤 것을 담아 옮기고 창조와 의사소통의 경로가 되는 것은, 언어가 더 깊은  
실재 위에 근거를 둘 때이고, 존재들 사이의 더 근본적인 관계 위에 근거를 둘 때이다. 그런 실재와의 관계란 인간  
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말(parole)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을 할 때 인간은 그러한 언어를 거부하기도 하는데, 엘륄은 구조화되고 닫쳐진 자신들의 언어 체계를  
세운 유대인들을 예로 든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그 자체 안에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이 자유와 진리  
포하러 올 때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에 진정한 의사소통의 부재로 나  
타나는 의 죽음,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을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데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은 예수  
을 곡해하고 왜곡하여 자신들의 걸림돌이 되는 예수를 제거하려한다. 그 현상이 여전히 교회 내에 존재하여 하  
나님이 교회로부터 돌아서서 침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 말하도록 강력히 요청하는 투  
쟁적인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주제어 : 하나님과의 단절상태, 말의 죽음,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침묵  
I. 서론  
II.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와 그 현상들  
III.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현상  
IV. 결론  
1. Ⅰ. 서론  
고대 로마법을 전공한 법학자인 자크 엘륄은 사회학자, 철학자, 신학자, 환경운동가, 프  
랑스 개신교 전국위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긴다. 그는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의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중심축으로 삼아, 기독교에 대  
한 성찰과 비판을 하면서 기독교인의 소명과 책무를 강조한다. 또한 자신의 저서를 통해  
기술, 선전, 정치, 혁명, 대도시, 돈 등 현대 사회의 현상을 분석하고, 본래 모습에서 벗  
어난 기독교를 역사적 측면과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엘륄의 연구 작업은 밀  
접하게 유기적으로 배치된 두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한 측면은 사회학적 연구와  
기술에 관한 저서이고1), 다른 한 측면은 신학적 연구와 성서에 대한 주석이다.  
2008년 3월5일 접수; 2008년 4월8일 수정; 2008년 4월19일 게재 확정  
1) 엘륄은 사회학자들이 하듯이 그저 세상을 단순히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적 실재(實在)적  
하려고, 기술, 돈, 국가, 도시 등과 같은 현상들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속한 세상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전념한  
본래 모습에서 벗어난 기독교는 기계 문명과 정보화로 인해 피폐된 사회와 세상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순응할 뿐 아니  
라,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러한 맹목적인 추종(追從)을 강조하면서 모순을 재생산해 내고  
있다. 엘륄은 그러한 기독교에 대해 "기독교적인 사회와 교회의 발달을 통해, 성서에서  
우리가 읽는 것과 전혀 반대되는 사회와 문명과 문화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가?(Jacques Ellul, 1984: 9)"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다음 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독교가 급속히 지속적으로 본래 모습에서 벗어나고 왜곡된 원인이 하나님의 돌아섬과  
침묵 즉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에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와 함께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부활한 성자(聖子)와 자신의 영  
(靈)에 의해 자신을 나타낸다면,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의 영속성을 보장한  
다면, 도대체 어떻게 모든 것이 결국 그렇게 빨리 지속적으로 왜곡될 수 있었을까? …  
성령이 기독교인 및 교회와 더불어 존재하고 또한 존재했다면, 우리는 그런 끔찍한 왜곡  
을 목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이 물러났고 침묵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가? 그것은 『잊혀진 소망』2)에서 언급하려고 했던 것이다.3)  
엘륄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현상들 중 하나로 말(parole)의 죽음을 제시한다. 본고  
에서는 우선 엘륄이 주장하는 ‘하나님과의 단절상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 현상으로  
서 ‘말의 죽음’의 예들이 마태복음에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볼 것이다.  
2. Ⅱ.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와 그 현상들  
가. 1. ‘하나님과의 단절상태’  
1) (1) ‘하나님과의 단절상태’ 시대  
엘륄의 견해에 따르면 현 시대 또는 현 세상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에 있다. 즉 하나님  
이 우리로부터 돌아섰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 두는 하나님과  
의 단절상태시대에 우리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두로부터 돌아선 것  
이 아니라, 아마 개인의 삶 속에서는 존재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  
대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어떤 개인들에 의해 가깝게 체험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  
의 말(parole)이 어떤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게 한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병의 치유와 같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는 기적이 여전히 일어나기  
다. 또한 그 현상들에 의해 우리 사회가 끌려가는 방향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그 현상들이 종속된  
숨겨진 논리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세상의 도전에 응할 수 있는 기독교 윤리의 조건과 목  
적들에 대해 고찰하는데 몰두한다. 그 기독교 윤리의 첫 목적이 우리가 속한 세상을 특징짓는  
폭로하는 것이다. 엘륄은 인간이 현실에서 감지하고 겪는 물질적 실후에 존재하면서 그  
우하고 결정짓는 것을 영적 실주한다. 엘륄은 "영적 실재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자연적인 인  
적 실재를  
물질적 실재  
간은 그 영적 실재를 스스로 볼 능력이 없다. 자연적인 인간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의 겉모습들만을  
름이다. 인간은 그러한 겉모습들 속에서 기술적인 수단들을 가지고 도덕적인 판단 기준에 따라 일을 하  
려고 애쓰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더 거짓되고 복잡한 상황들에 이를 따름이고 심지어는 문명의 붕괴에 까지  
이를 수 있다.(Jacques Ellul, 1988: 24)라고 하면서,  
적한다.  
적 실재스로 파악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상황  
2)잊혀진 소망 L'Espérance oubliée은 엘륄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신의 저서로서, 본고의 주된 내용  
이 그 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혀 둔다.  
3) Jacques Ellul (1984), La Subversion du christianisme, Paris Seuil, 19.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3
때문이다. 또한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기적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단적으로 체험된다. 하나님은 개별 인간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과학과 정치로부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님과의  
단절상태황에 있는 것은 기독교 국가이고 교회이다. 교회 내에서도 어떤 이들의 개별적 경험이나  
증언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그 증언은 들리지도 않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은  
채, 하나님은 교회를 향해 침묵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침묵과 어둠 속에 칩거했음  
한다. 따라서 엘륄은 나님과의 단절상태나님의 말이 오늘날 더 이상 선포되지 않는다는 사  
실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그러한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기독교  
인들과 교회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엘륄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대의 특징을 다음 같이 지적한다. 즉 인간이 어떠한 진  
리도 분별하지 못하고, 힘이 제어되지 않으며, 선과 악 사이의 혼동이 지속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려는 어떠한 욕구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언어는 죽어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에게도 침묵한 채로 있다. 인간은 온갖 뻔뻔함을 드러내고, 온갖  
공포를 경험한다. 고뇌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고뇌만으로도 파멸될 정도로 고뇌가 커진  
다. 인간은 그런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대를 자신 안에서 체험하며 느끼고 있다는 것  
이다. 따라서 엘륄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대를 "그 시대는 우리의 짧은 지혜로 하나  
님이 죽었다고 평가하는 시대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벗어나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냈던 개념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인간이 스스로  
를 성인(成人)이라고 오만하게 말하지만, 자신이 비참한 고아임을 발견하는 시대이다  
(Jacques Ellul, 2007: 727)."라고 표현한다.  
2) (2)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예  
엘륄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대에 대해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상황을 그 예로 든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가망성에 대해 유대인들이 가졌던 근본적인 두려  
움이 나타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표현 중 "돌아서지 마십시오."라는 외침은 최상의 궁  
극적인 기도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견뎌 내지만, 하나님이 돌  
아서는 것을 견디지 못함을 드러낸다. 즉 하나님이 돌아서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단  
절상태를 예견하고 그 상황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결정적이고 비  
극적인 상황은, 적(敵)이 존재하는 것도 적이 승리자라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정치적 불  
행 또는 경제적 불행도 아니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그런 재난을 하나님의 분노의 탓  
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버림(abandon)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돌아서고 하나님의 말도 선지자도 더 이상 없는 상황이 문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  
재하는 한 모든 것은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돌아서면 모든 것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엘륄은 이스라엘의 비극으로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대의 예를 성서 이외에서도 제시  
한다. 그것은 예수 이전 시대에 침묵하고 있던 하나님의 말을 회복하려고 애쓴 이스라엘  
의 시도들이다. 예수 이전 200년에 정경(正經)은 종결되고,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에 하  
나님의 말로 받아들일 만한 하나님의 말이 더 이상 없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을 회복하려고 애를 쓴다. 또한 소위 외경(外經)이라는 저  
서들로 계시를 연속시키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끌어 올리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엘륄은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렸습니까?"라는 예수의 외침에서 그런 하나님의 침묵과  
버림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 절정을 발견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두려워했  
던 하나님의 돌아섬이자 하나님의 심판인 버림은 결정적으로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입각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침묵의 가능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엘륄의 견해이다. 예수가 이미 버림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버림도 침묵도 부  
재도 있을 수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예수의 그런 외침을 통해 하나님의 버림의  
궁극적 가능성이 결정적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 2.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현상들  
엘륄은 현 시대와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현상과 징조들을  
제시한다. 닫힌 세상, 비합리의 폭발, 뒤바뀜, 가치들의 변질, 말의 죽음, 마법적인 것으  
로의 회귀, 경멸, 의심, 조롱 등과 같은 세상에서 현상들을 그 예로 든다. 또한 교회 안  
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징조들로서 교회의 평범함과 메마름, 세상에 대한 추종,  
기독교의 국가화와 대중화, 교회의 성공주의와 제도화 등이 제시된다.  
1) (1)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일반적인 현상들  
인간은 닫힌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데, 인간이 느끼는 유폐와 무기력의 원인이 사회 및  
세상의 구조가 점점 더 엄밀해지고 고정되는데 있다고 엘륄은 파악한다. 또한 닫힌 세상  
속에서 비합리의 폭발역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현상으로서, 그런 비합리는 객관적  
으로 존재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인간이 체험하고 느끼는 것 사이에 있는 모순으로 규정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불안전(不安全)에 대비하려고, 근본적으로 비합리적  
인 행위들인 온갖 종교들과 신심들4)에 뛰어든다고 엘륄은 지적한다.  
뒤바뀜은 원래의 의도가 그 반대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즉 뒤바뀜은 어떤 것이  
든 조금이라도 성취되면 원래 의도했던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말한다. 뒤바뀜의  
4) 엘륄은  
와  
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  
심(信心)분한다. 엘륄은 종교를 계시에  
대립시켜 "종교는 올라가고 계시는 내려간다.(Jacques Ellul, 2006: 166)"라는 표현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올라감으로써 신에게 도달하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다는  
것, 그것이 종교의 전부이다. 하지만 성서적인 하나님은 내려가기를 택했고 인간의 수준에 있기로 정했으므로,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이다. 계시는 그런 하나님과 관계되므로 종교와 반대되고, 계시 전체는 예  
에서 완전한 의미를 가지고 완성된다. 그러나 종교는 늘 힘의 형태로 표현될 뿐 아니라, 사람들은 좀 더  
많은 힘을 가지려고 신을 개입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륄은 "온갖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이 행해지고 그런  
종교들을 통해 전 세계적인 재난과 불행이 일어난다. 그래서 인간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잔인한 전쟁을  
한다. 자신의 진리를 확신하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강요하기를 원한다. 또한 그 진리로 오류들  
리치기를 원한다. 결국 종교는 늘 분열과 증오와 몰이해의 요인이다.(Jacques Ellul, 1987: 194)"라고 지  
적한다. 또한 엘륄은 "기독교 역시 대중화와 이교화(異敎化)를 통해 집단적 이념 곧 종교가 되고 말았  
.(Jacques Ellul, 1984: 51)"고 주장한다. 엘륄에 의하면  
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략 해  
당하는 것을 지칭하는 반면에, 라는 용어는 종교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준거로 삼는 온갖 태도 및  
비기독교적인 체험을 준거로 삼는 온갖 태도를 지칭한다. 하지만 엘륄은 신앙과 신심의 구분이 믿는 대상에  
대한 다음 같은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과 동행에 의해 또한 인간과 함께하는 활동에  
의해 지칭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속성을 통해 계시된다. 또한 그런 하나님에 대해 드러난  
째 확실한 모습은 해방자로서 계시된다는 것이다. 엘륄은 "신앙이 인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결코 주지  
않는 반면에 신심은 그 답을 준다는 점으로 나타난다(Jacques Ellul, 2006: 134)."라고 하면서, 그것을 신앙과  
신심들을 구별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기준으로 제시한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5
현상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은 가치들의 변질인데, 그것은 모든 분야에서 어떤 상황이  
뒤바뀐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행하는 바를 정당화하려고, 가치의  
의미를 뒤바꾸며 예전 가치를 사용한다. 자신이 하는 일과 주변의 일을 판단하는 고정된  
지표(指標)가 가치들의 뒤바뀜을 통해 인간에게서 사라진다. 그래서 인간에게 선과 악을  
분리할 명확하고 확실한 판단기준이 없어진다. 가치들의 변질또는 가치들의 뒤바뀜이  
말의 죽음으로서 언어의 위기라는 현상에 부합된다. 언어의 위기는 언어의 내용에 의  
미가 없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지고, 언어의 붕괴로 연결된다. 엘륄은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을 언어의 위기로 간주하는데, 인간 언어의 위기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증거라는  
것이다.  
2) (2)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징조로서 불모상태  
엘륄은 인간을 불모상태로 이끌어가는 다양한 경로인 마법적인 것으로 회귀, 경멸, 의심,  
조롱 등을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징조로 제시한다. 인간은 불안정하고 복잡한 미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미래를 붙잡으려고 애를 쓴다. 그 때문에 인간은 미래를 밝히거나  
미래를 변경할 수 있는 능력을 마법적인 것에서 기대하면서, 미래를 드러내고 보장해주  
는 마법사나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를 향해 달려든다. 엘륄은 이 시대의 인간이 의식적이  
든 무의식적이든 그토록 다른 사람을 경멸했던 적이 없었다고 간주한다. 인간은 정복하  
거나 지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내면적으로 파괴하며 사물로 취급할 뿐 아  
니라, 더 나아가 타인을 영적으로 파괴하여 부정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엘륄은 경멸’과 다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람을 짓누르는 의심’을 이 시대의 현상  
중 하나로 제시한다. 인간에게 어떠한 비판 정신도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의심  
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것이 거짓이라 판단하지만, 그러한 방  
향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에는 그것은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엘륄은 경멸과 의  
심의 당연한 결과였던 ‘조롱‘은 어떤 것에 대한 날조를 전제로 한다고 지적한다. 다수에  
의해 공격을 받는 사람은 여론에 의해 만들어진 조소와 치욕 전체를 짊어지는데, 그 사  
람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고 그런 자로 선정된다는 것이다.  
3) (3)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징조들  
엘륄은 교회가 성령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이지만, 성령이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곳이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끔 만드는 잘못된 일반적인  
흐름에 주목하면서, 몇 가지 흐름을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징조로 제시한  
다. 그것은 교회의 평범함과 메마름, 세상에 대한 추종, 기독교의 국가화와 대중화, 교회  
의 성공주의와 제도화 등으로 나타난다.  
엘륄은 미지근함과 무력함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평범함이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에 협력할 뿐 아니라 양심과 타협하는 온갖 행동을 받아들이는데서 기인된 것으로 간주  
한다. 그런 평범함이 교회에 만연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의 잘못도 아니고 특별한  
죄악도 아니다. 그 대신 그런 평범함이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에서 기인된 것으로 엘륄은  
파악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징조로서 메마름은 기독교적인 증언이 효력이 없  
고 기독교적 메시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엘륄은 성령이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증거로서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을 들 뿐 아니라, 다음 같은 두 사실  
을 제시한다. 첫째 종교적 정신의 증가이고, 두 번째는 기독교 지식인들에 의해 시도된  
언어와 성서해석학에서 탐구이다. 엘륄은 그 예로서 성서 해석에 사용되는 구조주의 언  
어학을 드는데, 그것은 성서 본문의 의미를 없앨 뿐 아니라 나아가서 성서의 전체적 의  
미를 제거한다고 지적한다.  
세상에 부합하는 교회의 경향으로서 세상에 대한 추종의 주된 양상은 교회의 성공주의  
와 제도화, 기독교의 국가화와 대중화, 교회의 타협과 세상에 대한 정당화로 나타난다.  
따라서 엘륄은 다음과 같은 때를 교회가 계시로부터 크게 벗어나고 협잡을 하는 때로 간  
주한다. 즉 교회가 인간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축복하느라 시간을 보낼 때이고, 또한 교  
회가 인간들이 올바른 길에 있으며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입증하러 다  
가 갈 때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로부터 돌아선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엘륄은 "모든 교회들은 교묘하게 국가의 권위를 존중했고 그 권위를 흔히 지탱  
했다. 또한 추종(追從)을 주요한 덕목으로 만들었으며, 사회적 불의들 및 인간에 의한 인  
간의 착취을 용인했다(Jacques Ellul, 1998: 15)."고 하면서, 교회가 사회적인 흐름이 됨  
으로써 타협을 행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그런 타협과 정당화를 통해 교회는 세상의  
의지를 표현하는 형태들 중 하나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교회의 도움을 받고, 결국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활동력을 더 이상 나  
타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권력과의 결탁에서 비롯되는 기독교의 국가화는 교회가 세상에서 권력을 대표하는 모든  
것과 일종의 동맹을 맺기를 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다음 같은 확신에 기초한다. 곧 성  
령의 능력에 힘입어 세상의 권력들이 정복될 수도 다는 확신이고, 또한 복음과 교회와 선교  
해 권력들이 사용될 수도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본래의 의도와 반대 현상이 일어나는데, 권력에  
의해 침투되고 권력의 부패에 의해 진리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것은 교회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대중화는 교회의 성공을 통해 또한 권력을 잡은 사회 계층과 교회사이의 결탁  
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 현상은 교회의 제도화와 관련하여 설명된다. 대량으로 증가하  
는 신도들을 받아들일 교회의 방식을 찾아야 했으므로 대중 교회가 시작된다. 그래서 신  
도들을 이끌고 올바르게 성서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사제들이 필요했던 것은 물론,  
사제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며 교육할 고위성직자들이 필요했으므로, 교회의 계급제도는  
피할 수 없는 길이 된다. 교회는 관리해야 할 부(富)의 문제와 함께 신자의 숫자 문제와  
권력과 관계의 문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제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회 제도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사실이고, 국가 제도에 의해 오염되  
어져 만들어진 조직이란 사실이다. 결국 기독교의 대중화를 통해 계급제도를 중심으로  
교회의 제도화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며 강화된다는 것이다.  
3. Ⅲ.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현상  
4.  
-말(parole)의 죽음  
가. 1. 말(parole)의 죽음  
1) (1) 언어의 위기와 말(parole)의 죽음  
학술적 연구들을 통해 언어에 대한 분석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언어는 인간과 과학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7
과 사회의 중심에 위치하여 온갖 성찰의 주요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치  
밀한 연구들은 거의 전적인 형식주의로 반드시 귀결된 엘륄은 강조한다. 결국 언어의 위기  
어의 내용에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것은 언어의 붕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엘륄  
리가 기술 사회 속에서 단어들이 더 이상 말(parole)이 되지 못하는 언어의 비극적 위기 한가운데  
다고 파악한다. 또한 언어의 위기가 존재하는 것은 많은 이유들에 기인하지만, 그것이 결국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부재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언어 분석에 있어 현재의 극단적인 동향은, 언어에 진  
정한 자율체가 있고 인간은 일종의 대변인일 따름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엘륄은 그러한 주장과 관련  
하여, 언어에 대한 다음 같은 부정적인 분석을 예로 든다.  
실제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언어는 사회적 맥락이 담긴 의미와 내용과 통사(統  
辭)와 구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말해지는 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다른 구  
조들 중 하나의 구조이고, 구조로서 스스로 작동한다. 가 말할 때, 는 어떤 것을  
말한다는 환상을 가진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를 통해 언어가 말하  
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말한다."라고 하지 말고, "그것이 말한다."라고 해야 한다. 그  
런 작용 속에는 말하는 주체가 없다. 마찬가지로 담화(discours)가 전해지는 사람도 ’  
가 아니다. 그 사람 역시 의사소통 체계 안으로 들어온다. 언어 관계 속에는 이웃이 없  
고, 작동하는 구조의 두 요소만이 있다.5)  
만일 위와 같은 분석이 정확한 듯이 보인다면, 그것이 다음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엘륄은 간주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만남의 부재 및 의 부재라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위치한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사물화(事物化)되어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엘륄은 언어가 그렇게 되었다면, 더 이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  
소통을 전할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가 소리 내는 단어들은 말이 될 수 없  
다. 메시지나 또는 말이 있으려면, 말하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그 순간 자신의 인격이  
움직이게 해야 한다. 따라서 말하는 자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  
고, 듣는 자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음이 현재 언어가 처한 위  
기라는 것이다.  
또한 엘륄은 말이 인격(personne)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말은 자체의 말 속에서 전체적으로 취해진 활동 중인 인격이 더 이상 아니라, 그와 반대  
로 그 인격을 은폐하는 수단이요 스스로를 숨기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은  
자아(soi)의 표방이나 자아의 드러냄이 더 이상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거하지 않은 순수  
한 소리가 된다. 결국 어떠한 인간도 실제로 말의 위기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지만, 말의  
위기를 아주 잘 체험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분명히 그러한 언어를 늘 사용하지만, 그것  
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라는 것이 엘륄의 견해이다.6)  
2) (2) 하나님의 침묵과 말(parole)의 죽음  
엘륄은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을 언어의 위기로 간주한다. 즉 인간 언어의 위기가 하나  
5) Jacques Ellul (2007), L'Impossible prière, Le défi et le nouveau, Paris La Table Ronde, 691.  
6) 엘륄은 그러한 실용적인 측면에서 의사소통의 예를 다음 같이 들면서, 그런 경우에는 위기가 감지되지 않지만  
결국 그것 역시 언어가 죽음에 이른 징조라고 설명한다. "가 정육점 주인에게 고기를 달라고 할 수 있고 내  
하는 바를 그가 이해하는 한, 물론 위기는 없다. 평범하고 일상적 의사소통을 위해서 체계는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가 지속된다는 인상을 정확히 준다. 그러나 그런 평범함 너머로 갈 수 없다. 사람들은 언  
어가 점점 더 부적당하고 시대에 뒤져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선전으로 인한 의미의 평가  
절하나 또는 기괴한 조롱이, 언어가 죽음에 이른 징조들임을 알아차린다(Jacques Ellul, 2004: 39)."  
님과의 단절상태의 증거라는 것이다. 엘륄은 언어에 대한 과학적이고 구조적인 분석 및  
기호 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언어를 기호체  
계와 구조로 고착시킬 때, 나타나는 문제도 지적한다. 그 문제는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의사소통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호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깊고 교묘하게 기호들의 체계가 분석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죽  
은 도구에다 가치를 다시 부여하려고 몹시 애쓰기 때문에, 기호들의 체계는 분석된다.  
따라서 인간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의미를 체계로 대체하는 것일 따름이다. 구조  
에 대한 그런 연구는 어떻게 그러한 것이 작용하는지 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연구  
를 통해서 언어가 작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언어가 작용한다는 것은 곧 의사소통 수  
단이 되는 것이고, 결국은 진리의 전달체가 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의사소통이란 인  
간 자신의 언어가 참된 정보를 다른 언어에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진정한 의  
사소통이 하나님의 말(parole)인 메타언어7)로부터 나오곤 했음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는 것이다.8)  
엘륄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가 오직 하나님에 대해 말하도록 만 예정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인간의 언어가 오직 설교의 도구가 되는 것으로만 예정되어 있지도 않다. 인  
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말 위에만 그 근거를 두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상적인 평범한  
언어가 어떤 것을 담아 옮기고, 창조와 의사소통의 경로가 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때이다. 즉 언어가 더 깊은 실재 위에 그 근거를 둘 때이다. 또한 존재들 사이의 더 근  
본적인 관계 위에 근거를 둘 때이다. 그 실재와의 관계 덕분에, 언어는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실재 및 관계는 인간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말이라는 것이  
다. 간혹 하나님이 말을 할 때도 있지만, 인간은 그러한 언어를 거부한다고 엘륄은 지적  
한다.  
엘륄은 구조화되고 닫쳐진 자신들의 언어 체계를 세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을 담은  
언어인 예수의 언어를 듣지 못할 뿐더러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그 예로 든다. 즉 "  
왜 당신들은 나의 언어(langage)를 이해하지 못합니까? 왜냐하면 당신들은 나의 말을 들  
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마귀를 아버지로 두었습니다."라고 예수는 유대인들에  
게 말한다(요한복음 8장 33-34절).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고 자부  
하고, 결국 바깥에서 생겨난 말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에 의해 여기서  
공격을 받은 것은 유대인들이 드러내는 태도이다.9)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부자(父子)관계  
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그 자체 안에 세우기 때  
문에, 하나님의 말이 자유와 진리를 선포하러 올 때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7) 메타언어(métalangage)는 어떤 언어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엘륄의 표현대로  
메타언어를 하나님의 말로 간주할 수 있다.  
8) 엘륄은 인간이 진정한 의사소통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말을 알려고 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언어 분석을 통  
어를 기호체계와 구조들로 고착시킬 때, 그 결과가 언어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나무를 예로 들어 다음 같  
명한다. "자양분을 공급하는 토양이 없다면,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도 시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의 구조와 조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의 다양한 부분들과 각 요소의 기능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식물의 동화작용을 알아낼 수 있으며, 수액과 줄기 사이의 관계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뿌리들이 필요한 것을 취하는 부식토에 의해 영양 공급이 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  
어 있다. 그것은 언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Jacques Ellul, 2004: 98)."  
9) 세례 요한 역시 그러한 유대인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새  
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속으로  
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하나님은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마태복음 3:9).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9
하나님의 말을 담은 언어인 예수의 언어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 체계도 자체로 충족되고 일관성 있게 구조화  
되어 있다고 엘륄은 간주한다. 하지만 그런 의사소통 체계는 실제로 비(非)의사소통의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 분열의 증거이자, 서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증거이다. 즉 하나님의 말과 관계가 단절될 때, 인간들 사이에 의사  
소통은 반대의 뜻과 오해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그런 하나님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 역시 침묵한다는 것이다.  
나. 2.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10)  
위에서 제시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의 현상으로서 말의 죽음은 마태복음에서 자주 나  
타난다. 하나님의 말(parole)의 강생(降生)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와 진리의 말을  
제시하는데도, 유대인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즉 유대인들은 불충분하  
고 그 자체로 닫쳐진 실체로서 형성된 언어의 존재에 의해, 하나님의 말을 담은 예수 그  
리스도의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1) (1) 구조화되고 닫쳐진 체계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 예수에게 데려오자,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안심하라.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중풍병자에게 말한다. 그러자 몇몇 율법  
학자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라고 속으로 말한다.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서 "어찌하여 당신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  
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쉽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당신들에  
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라고 덧붙이면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가지  
고 집으로 가라."고 말한다(마태복음 9:1-6).  
예수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인 줄을 모르는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말  
에서 신성 모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가 그런 말을 한 목적이 예수 자신이 죄  
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인데도, 율법학자들은 그 점을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말을 선포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  
이 자신들 앞에서 선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화되고 닫쳐진 자신들의 언어 체계  
속에 갇힌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말을 듣지 못할뿐더러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제자들과 함  
께 식사를 하게 된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어째서 당신들의 선생님은 세리  
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가?"라고 제자들에게 묻는다. 예수는 그 말을 듣고 "건  
10) 여기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특정 성경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한글 성경  
Bible par Louis Segond로 참조하여 옮긴 것이다.  
동번역랑스어 성경 La  
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으나, 환자들은 의사가 필요하다. 당신들은 가서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호세아 6:6)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  
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한다(마태복음 9:10-13).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타내는 의  
문은, 자신들의 태도와 예수의 태도가 전적으로 상반되는데서 기인한다. 즉 바리새파 사  
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으며 경건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  
는데 반해, 예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린다는 것  
이다. 또한 예수가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경건이나 제사보다 죄인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를 하나님  
은 더 원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직접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바리  
새파 사람들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11),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그런 말에 귀를 기울  
이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즉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준수와 소위 경건한 생활과 제  
사 의식에 결부된 언어 체계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말로서 외적으로 돌발하여 자  
신들에게 제시될 수 있는 어떠한 진리의 말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안식일인 그 날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자, 거기에는 손이 오그라진 사람이 있다. 사람들  
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가?" 라고 예수에게 묻는다. 예  
수는 "만일 당신들 중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  
이에 빠지면 그것을 끌어 내지 않겠는가? 하물며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더 귀중한가! 그  
러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고서,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  
쳐준다(마태복음 12:9-13).  
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단지 안식일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서 예수와 바리새파 사  
람 사이에 진정한 의사소통이나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을  
담은 예수의 말이 진리의 말로서 그들 앞에 전해지고 선포되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자  
체로 충족되고 구조화된 닫쳐진 언어 체계 속에 갇혀 그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  
들은 오로지 안식일에 일상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만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에  
게 순종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옳다."  
라는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 외부에서 생겨나고 전해지는  
그러한 진리의 말을 듣기조차 할 수 없다.  
2) (2) 전통과 율법의 고수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다가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라!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고 있다."라고 예수에게 말한  
다. 그 때 예수는 다윗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차려진 거룩한 떡  
곧 진설병(陳設餠)을 받아 간 사건을(사무엘상 26:1-6) 예로 들고, 또한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만큼은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들면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을 반박한다. 그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신들  
이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11) 사람들이 귀신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예수에게 데려 오자, 예수가 귀신을 내쫓자 그 벙어리는 말을 하게 된  
다. 이것을 본 군중들이 놀라서 "이스라엘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라고 하지만, 바리새파 사  
람들은 "는 귀신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 것이다."라고 오히려 말한다(마태복음 9:32-34).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11  
주인이다."라고 하며, 바리새파 사람들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한다(마태복음 12:1-8).  
당시에는 사람들이 허기를 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밭에서 곡식을 따는 것은 허용되  
어 있었지만, 안식일에는 일상적인 일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바리새파 사람  
들은 후자에 저촉된 제자들을 비난한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  
야 한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 아  
니라 그들에게는 어떤 트집을 잡아 예수를 비난하고 나아가서는 예수를 제거하려는 의도  
가 있음을 예수는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자일 뿐 아니  
라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말을 일축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  
수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자이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할 때,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예수가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그들이 모른다고 지적하듯이, 그들은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는데 전념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임  
으로써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에게 와서 "당신의 제자들  
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고 있는가?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묻는다. 예수는 "당신들은 왜 당신들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계  
명을 어기고 있는가?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기만 하면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그  
와 같이 당신들은 당신들의 전통을 핑계로 하나님의 말을 무시하고 있다."라고 그들에게  
대답한다. 또한 예수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  
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이  
사야서 29:13)." 라는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태도를 비판한다(마태복음 15:1-9).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 역시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일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태도가 어떤 불순한 동기나 의도에 의해 변질되는 순간, 전통이나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그것은 죽은 시체와 같이 아무 생명력 없이 존재  
함으로써 단지 어떤 것을 속박하고 얽어매는 것이 된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런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고 거기에 얽매일 때, 그들은 어떠한 진리의 말도 파악할 수도 없고 받아  
들일 수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전통과 율법을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뿐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상태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예배는 헛된 일이 될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그들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계명을 하나님의 계명인 듯이 가르치는 잘못을 범한다.  
3) (3) 예수의 권능에 대한 부인  
예수가 귀신이 들려서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자, 사람들이 놀라 "이  
사람이 혹시 다윗의 후손 메시아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귀신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라고 헐뜯는다. 예수  
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을 알고서, 자신의 기적이 성령을 통해 일어남을 강조  
한다. 예수는 "어느 나라든지 자기들끼리 나뉘어 싸우면 망할 것이다. 어느 도시나 가정  
도 나뉘면, 제대로 서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다면 사탄이 자  
신을 대적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사탄의 나라가 설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하  
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당신들에게 온 것이다."라고 바  
리새파 사람들에게 반박한다(마태복음 12:22-28).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가르칠 때,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  
제사장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예수가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 누가 그런 권한을 주  
었는지 묻는다. 하지만 예수는 세례 요한의 권한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들에게 질문함  
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즉 예수는 "나도 당신들에게 한 가지를 묻겠다.  
만일 나에게 대답하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가?"라고 그들에게 반문한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권능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요한을 예언자로 생각하는 군중들이 두려워  
서 자기들끼리 의논한 후 어쩔 수없이 "우리는 모르겠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 역  
시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당신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그들에게 선언한  
다(마태복음 21:23-27).  
위의 내용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의 권능을 전혀 인  
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즉 예수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자 사람들이 그가 메시야가 아닐  
까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예수가 귀신 우두머리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  
다고 비방한다. 그들은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예수가 누가 준 권한으로 가르치는지  
를 문제 삼는다. 백성과 군중들은 예수의 권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반면에, 비교적 지  
도적인 위치에 있는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에게 걸림돌이자 방해 요인이라고 생각한 나머  
지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로 말로써 자  
신의 권능을 행하는 예수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에게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당신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 예수의  
선언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 역시 침묵하기로 작정한다는 것  
을 드러낸다.  
예수는 예수 자신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말  
을 하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그들  
이 함부로 하는 말이 성령을 거역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들이 무심코 내뱉는 사소한  
말일지라도 그 말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고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음을 강조한  
다. 즉 심판의 날에는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 말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지기도 하고 단죄받기도 한다는 것이다(마태복음 12:32-37). 예수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을 담은 예수의 말을 부인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권능에  
의해 일어나는 기적은 예수의 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그런 기적이  
성령을 통해 일어나는 것을 부인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말이 된다.  
따라서 성령을 거역하며 함부로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말의 죽음으로  
부터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심코 내뱉은 사소한 말일지라도 성령  
을 거역하는 말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의 날에는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  
다는 점이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말의 죽음이 해소되지 않는 한, 성령  
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4) (4) 예수에 대한 조롱과 모욕  
겟세마네에서 붙잡힌 예수는 율법학자와 백성의 원로들이 모여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13  
집으로 끌려간다. 대제사장들과 전체 의원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예수를 고소할 거짓  
증거를 찾으려고 한다. 많은 거짓 증인들이 나왔으나 아무 증거도 얻지 못하던 중, 마침  
내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그것을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말을 했다."라고 증언한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당신은 아무 대답이 없  
는가? 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답변은 무엇인가?"라  
고 예수에게 묻는다.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대제사장이 "내가 살아 있는 하  
나님에게 맹세하고 당신에게 명령하니 우리에게 말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인가?"라고 예수에게 묻는다. 예수는 "당신이 말한바 그대로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  
게 선언하는데, 이제 이후로 인자가 전능한 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  
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한다!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다. 여러분 모두가 이 사람이 하나님  
을 모독하는 것을 들었다. 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  
바닥으로 때리면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예언자 노릇을 해 보아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아라."고 하며 조롱한다(마태복음 26:57-68).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운다  
는 사람아,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당신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  
라!"고 하면서 예수를 모욕한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  
이 사람이 남들은 구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우리가 그를 믿겠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이  
원한다면 그를 당장 구원해 줄 것이다. 자신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말이  
다."라고 하면서 예수를 조롱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똑같은 욕을  
예수에게 한다(마태복음 27:39-44).  
체포되어 끌려온 예수에 대한 그러한 조롱과 모욕은 예수의 말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이  
해하지 못한데서 근본적으로 나온다. 즉 예수가 자신이 죽어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암  
시한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함으로써, 그것  
을 예수에 대한 불리한 증언으로 삼는다. 그 뿐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인가?"라는 질문에 예수가 그렇다고 하자,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은 예수의 말이 진실한지 아닌지 전혀 확인하지 않고서,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에 따  
라 예수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면 당신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라고 하거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그를 믿겠다."라고 십자가  
에 못 박힌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비  
난하는 것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그러한 조롱과 모욕을 통해 예수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  
되고, 그들의 말은 예수의 말과 근본적으로 단절된다.  
5) (5) 예수의 물러남과 침묵  
예수를 죽이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의를 알아차린 예수는 거기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서 그러한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마태복음에  
는 그것이 "내가 선택한 종을 보아라. 내가 그를 사랑하고 기뻐한다.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인데, 그가 이방 사람들에게 정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울부짖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꺾  
지 않을 것이고 꺼져가는 불꽃도 끄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정의가 이기게 할  
것이다. 모든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소망을 걸 것이다(이사야 42:1-4)."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그러한 태도 및 위에서 인용된 성서 구절은 나님과의 단절상태상으로서 의 죽음과 밀  
접히 연관되어 있다. 즉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을 죽  
이려고 모의하자 그들을 피하기로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을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고 그들로부터 결정적  
으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은 바로 예수 자신에  
대해 증언하지도 말고 선포하지도 말라는 당부이다. 그리고 "투지도 않고 울부짖지도 않으며 그의 소  
리를 들을 수 없다"은 더 이상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침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  
나님과 인간 사이에 더 이상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과 관계가 단절될 때, 또한  
인간이 그런 하나님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와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관계는 나님과의 단절상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몇몇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대답한다. 즉 "악하고 지조 없는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지만, 선지  
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보여줄 기적이 없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  
던 것같이, 인자도 사흘 밤낮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  
나 이 세대 사람을 단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라고 대답한다(마태복음 12:38-41).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려고 요나의 행적에 빗대어 자신이 사흘간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  
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에게 기적을 보여 달라는 그들에게 정말 필요  
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그들 앞에 있는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다. 요나보다 더 위대한 예수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에 의해 단죄될 수밖에 없으며, 예수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  
는 그들로부터 물러나 침묵할 수밖에 없다.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한 후, 그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넘겨준다. 총독 앞에 선 예수에게 총독이 "당신이 유대인의 왕인  
가?"라고 묻자, 예수는 "네가 말한바 대로이다"라고 대답한다. 대제사장과 원로들이 예수  
를 고발하지만,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빌라도가 "이 사람들이 여러 가  
지 죄목을 들어 당신을 고발하는데 그 말이 들리지 않는가?"라고 예수에게 말하지만, 예  
수는 총독이 매우 이상히 여길 정도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마태복음 27:11-14).  
대제사장과 원로들이 예수를 고발하는데도, 예수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  
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하나님의 말로부터 멀어지는 인간의 모습은  
예수의 그러한 침묵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예수가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멀리하고 그들에게 침묵한 것은, 그들이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권능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모욕한  
데 있다. 하나님이 돌아서고 침묵함으로써 인간에게 유발된 하나님과의 단절상태는, 예  
수가 유대인들로부터 그렇게 물러나고 그들에게 침묵한 것에서 유추될 수 있다.  
5. Ⅳ. 결론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15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향해 드러내  
는 악의에 찬 비방과 적대감은 예수가 진정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데서 물론 기인  
한다. 그 점과 아울러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말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이 직접적으로 그렇게 선포되리라  
는 생각을 결코 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문자화시킨 율법만을 하나님의 말  
씀으로 간주하면서, 자신들의 율법 지식에 의거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  
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즉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이 예수를 통해 거  
기서 선포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왜 비유로 말하는지 물을 때, 예수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마  
태복음 13:13). 다시 말해 그들은 스스로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으며, 마음 문을 닫  
고 깨닫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것들  
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보여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마태복음  
11:25-26). 소위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고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  
는 하나님의 말이 들려지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12) "우리의 짧은 지혜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평가하는 시대가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시대이다"라는 엘륄의 말처  
럼, 인간은 자신의 한정된 지식과 지혜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단절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 사이에 진정한 의사소통의 부재(不在)로 나타나는 ‘말의 죽음’  
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  
도의 말을 곡해하고 그 말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걸림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  
려고 한다. 문제는 그러한 현상이 지금도 기독교와 교회 내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성서에서 하나님이 본래 드러내어 선포하려는 말씀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설교자의  
자의적인 취향에 따라 또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어 적당히 윤색되고 해석  
된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 문제이다. 더욱이 교회가 세속적인 성공과 권력을 지향하고13)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받아들이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은 그곳에 있을  
12) 그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 역시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시대의 변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  
님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말한다(고린도전서 1:20-21).  
13) 엘륄은 세속적인 권력과 성공을 지향하는 교회에 대해 그 특성을 선전과 결부시켜 다음 같이 설명한다. "교  
회가 선전을 받아들이면 그런 결정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생긴다. 우선 그와 같이 전파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교회가 그런 수단에 의해 행동하는 즉시, 기독교는 온갖 다른 이념이나 또  
른 세속 종교의 차원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은 실제로 교회가 자신의 이념으로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념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 이  
념은 단지 기독교적인 어떤 원리들이나 어휘를 지닌 어떤 주의(主義)이다. 다른 결과는 이념이 교회 자체에  
대해 생긴다는 것이다. 이념이 선전을 이용할 때, 교회는 온갖 다른 조직체처럼 성공한다. 이념은 대중들을 장  
악하고, 집단 여론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인 운동의 방향을 설정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겉모습  
뿐인 기독교와 관계를 맺게 한다. 그것은 오늘날 비(非)기독교화 된 세상에서조차 여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그  
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거짓된 교회가 된다. 교회는 전형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인 힘과 영향을 얻고, 그럼으로  
상에 통합된다(Jacques Ellul, 1990: 253-254)."  
자리가 없다. 교회가 그런 것을 계속 추구하는 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걸림  
돌이 되므로 제거되어야하는 존재이다.  
교회 내에서 그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일반화된다면, 과연 성령이 거기에서 활동하고 정  
말 하나님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러한 곡해와 왜곡 때문  
에, 하나님이 교회로부터 돌아서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의 모습과 교회 내  
에서 나타나는 상황들을 미루어볼 때,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교회로부터 돌아서서 침묵하고 있다면, 허공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  
는 우리의 예배와 온갖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따라서 최우선으로 우리가 해야 할  
긴급한 기도는, 돌아서서 침묵하는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우리에게 말하  
도록 강하게 요청하는 투쟁적이고 끈질긴 기도가 아닐까?  
참고문헌  
Jacques Ellul (1984), La Subversion du christianisme, Paris: Seuil.  
_____________ (1987), Ce que je crois, Paris: Grasset & Fasquelle.  
_____________ (1988), Présence au monde moderne, Lausanne: Presses Bibliques Universitaires.  
_____________ (1990), Propagandes, Paris: Economica.  
_____________ (1998), Anarchie et christianisme, Paris: La Table Ronde.  
_____________ (2004), L'Espérance oubliée, Paris: La Table Ronde.  
_____________ (2006), La Foi au prix du doute, Paris: La Table Ronde.  
_____________ (2007), L'Impossible prière, Le défi et le nouveau, Paris: La Table Ronde.  
Abstract  
La mort de la parole dans  
l'Evangile selon Matthieu  
Sang Min Lee(Seoul National University)  
Selon Jacques Ellul(1912-1994), le temps présent ou le monde actuel est dans la  
déréliction. C'est à dire que nous sommes entrés dans le temps où Dieu s'est  
detourné de nous et se tait. Ellul désigne les phénomènes ou les signes qui  
dérivent de la déréliction, parmi lesquels la mort de la parole en est un. La crise  
du langage, elle se traduit par la mort de la parole. La mort de la parole se  
caractérise par le fait que le langage n'a pas de sens. Ellul considère le silence de  
Dieu comme la crise du langage. Autrement dit, la crise du langage humain, c'est  
la preuve de la déréliction. Que le language fonctionne, c'est à dire qu'il devient le  
moyen d'une vrai communication et à la limite le porteur de la vérité. Le plus  
banal language quotidien ne porte que quelque chose, ne transmet quelque chose,  
n'est voie de création et de communication que dans la mesure où il repose sur  
une réalité plus profonde, sur une relation plus fondamentale entre les êtres, grâce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parole)의 죽음  
17  
auxquelles il peut remplir cette fonction. Et cette réalité, cette relation, c'est la  
Parole de Dieu, adressée à l'homme.  
Quand Dieu parle, parfois l'homme récuse ce language-là. Comme cet exemple,  
Ellul cite les Juifs qui ont établi leur système clos et structuré. Ils ne peuvent me  
me pas comprendre le language porteur de la Parole de Dieu, le language de Jésus.  
Lorsque la Parole de Dieu vient pour annoncer la vérité en meme temps que la  
̂
̂
liberté, ils ne la reçoivent pas, parce qu'ils ont fondé leur language en soi. Et  
quand l'homme récuse cette Parole de Dieu, alors aussi Dieu se tait. La mort da  
parole dans l'Evangile selon Matthieu, qui se traduit l'absence d'une vrai  
communication entre Jésus et les Juifs, provient du fait qu'ils ne reçoivent pas la  
parole de Jésus. En plus, les Juifs tentent d'éliminer Jésus qui est leur pierre de  
scandale, en se méprenant sur la parole de Jésus et en la déformant. Le problème  
c'est que ce phénomène existe encore dans l'Eglise. Si, de ce fait, Dieu s'est  
détourné de l'Eglise et se tait, il nous faudrait le combat de la prière avec lequel  
nous exigeons de Dieu qu'il retourne vers nous et nous parle de nouveau.  
Mot-clé : la déréliction, la mort de la parole, la parole de Dieu,  
le silence de D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