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의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칼빈의 종교개혁 1차문헌에 관련자료가 있느냐(PDF, HTML 논문 첨부)입니다.
* 종교개혁은 단순히 '믿음'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없습니다. 이외에도 '자유', '예배' 등의 주요 키워드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통전적으로 다룬 좋은 자료입니다!
* '종교개혁 당시 니고데모파(종교개혁에 동의하되, 가톨릭교회의 미사에 계속 참여하는 부류 - 일종의 회색 지대)'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상황적으로 많이 다르지만, 개신교인의 정체성을 잘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미사를 드리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관련하여, 칼빈이 '자유'에 관해 이야기 한 것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 개념은 본 글에서 다루는 '니고데모 논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관련하여, 아래의 책을 추천합니다.
2023.11.27 - [추천 서적/교부서적 & 독서법] - 칼뱅의 자유론 - 박건택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황 정 욱 (한신대 교수)
칼빈(1536)
칼빈의 고백 신학의 근원을 추적해 보자.
칼빈이 그의 이름을 문학계에 알린 것은 1531년 3월 6일이 처 음이다. 부르즈(Bourges) 대학교는 오를레앙 대학교의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투왈(Pierre de 「Etoile)에 필적하기 위해 이 태리의 유명한 법학자 알치아티(Andreas Alciati)를 초빙했다. 그리하여 칼빈을 위시한 오를레앙의 학생들도 알치아티의 강의 롤 듣기 위하여 부르즈로 몰려 갔다. 그리하여 학생들 가운데 알 치아티 지지파와 레투왈 지지파가 생겼다. 1529년에 알부키우스 (Aurelius Albucius)라는 인물이 알치아티를 변호하는 책을 출 판하였다. 이에 칼빈의 친구 뒤쉬맹(Nicolas Duchemin)은 그들
臺 이 논문은 1992년도 교육부 지원 한국 학술진홍재단의 지방대학 육성 과제 학 술 연구 조성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지면 관계상 논문의 일부분만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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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스승 레투왈을 변호하기 위해 집필한 「Antapologia」의 서문 을 칼빈에게 부탁했다. 뒤쉬맹과 칼빈은 알치아티가 비겁하게도 알부키우스라는 가명을 써서 그들의 스승을 공격한다고 생각하 였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누군가 알부키우스를 알치 아티로 대치한다면 나는 긍정도 부정도 감히 할 수 없고 또 원하 지도 않는다. 그러나 몇몇 지혜로운 자들은 알치아티가 빌린 이 름으로써 도를 지나친 능변, 인내할 수 없이 혀를 놀려 댄 것이 보복 당하지 않도록 위장하려 했음을 감지하고 있다."I) 보하텍 (J. Bohatec)의 연구에 의하면 칼빈의 이런 생각은 오해로 밝혀 진다 알부키우스는 알치아티의 친구로서 1529년 바젤에서 「Andreae Alciati Jurisconsulti . in Stell am et Longovallium L. L. doctores defensio Aurelio Albucio autore」 라는 책을 출판했다? 진상이 어떻든 간에 여기서 우리 는 위선에 대한 칼빈의 첫째 반옹을 본다: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가면을 쓰는 것은 어릿광대 짓과 같이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행 동이다. 그러므로 알치아티는 가면을 벗고 정정당당하게 논쟁에
1) "Quad si quis mavult Alciatum pro Albbucio, ago nae affirmare ausim necvelim refellere : sed sagaciores quodam subodorantur Alciatum mutuatitio nomine voluisse dissimulari, ne dentata supra modum et impatientis linguae facundia talionis iure pensaretur." (CO 9, 785) 칼빈은 1532년의 세네카 주석에 서도 이 확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 "Ad haec respondeat quae valet Alciatus. modo ne sub Albutii persona scurrilliter ladat. (CO Sm 146)
2) J. Bohatec, Bude und Calvin. p.439, Anm.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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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할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알치아티의 양심과 자존심에 호소하 고있다.
칼빈은 1년 후에 쓴 세네카의 「De Clementia 주석」에서 추측 컨대 이 논쟁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벗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겉치레하는 위선 적인 인간을 가면 쓴 인간이라고 말한다 ... …. 오늘날 우리 시대 에도 내면적 악)에 젖어 있으면서도 외적으로는 정직의 표정과 가면을 내세우는 괴물 같은 인간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간 의 딸인 진리가 나타날 때 그들은 밀람처럼 녹을 것이다"3) 칼빈 은 ‘위선의 短命'4) 에 대해 주석함에 있어 기독교 윤리관을 근거 삼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상가 아풀레이우스(Apuleius), 소크라 테스, 키케로(Cicero)를 인용하고 있다. 고전 작가들에게 있어서 위선은 인간이 참된 자아를 감추고(dissimulatio) 거짓된 자아를 참된 자아인 것처럼 위장하는(simulatio) 이중의 기만 행위를 의 미한다. 그들은 타인을 기만하기 위해 정직을 가장하는 일을 혐 오했다. 칼빈은 인문주의자로서 위선에 대한 고전 작가들의 입장
3) ''Vnde ferre personam. quasi a natiua forma desciscere. Et
personatum hominem dicimus fucatum et hypocritam .
nonne et nestra aetate uidere est monstra quaedam hominum intercutivus vitiis madentium, prasferentium tamen externam speciem et larvam probitatis? Qui tamen instar cerae colliquescent, quum sese exserst veritas, quae filia est tempons. (CO 5, 27)
4) "Nemopotest personam diu ferre." 아무도 가면을 오래 쓸 수는 없댜
5) W. J. Borwsma는 칼빈이 위선을 혐오한 것을 그의 도덕주의 탓으로 돌 렸다. 또 도덕주의는 그의 율법 정신에 기인한다고 보았다(John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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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용했다.5) 여기에서 칼빈의 관심사는 개인의 정직성이다.
당시의 칼빈은 종교 문제에는 관심을 없었고 고백의 문제도 구 체적으로 생각한 바 없다 따라서 그가 악을 숨기고 덕을 가장하 는 것만이 위선이 아니라 사람이 믿으면서도 믿는 바를 입으로 말하거나 행하지 못함도 위선이라는 것까지도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6) 그러나 인문주의자로서 그가 옹호한 세네카. 키케로의 입장은 그의 고백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1533년 11원(Nicolas Cop) 연설 사건 전후하여 칼빈은 인문주 의 공부 외에 종교개혁 운동에 관심음 가지게 된다_7l 1년여간의 방랑 생활 끝에 칼빈은 늦어도 1535년 8월에 바젤에 도착했다.8) 우리는 이 시기의 칼빈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 그에 관한 자료를 살펴 볼필요가있다.
A Sixteenth Century Portrait. p.49. 57). 그러나 여기서 보건대 그의 윤리 관은 인문주의자로서 고전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는 것이 드 러난다. 여기서 그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정 직성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인간 양심의 문제였다
6) E. Saxer는 위선을 두 가지로 크게 나눈다 · 타인 앞에서 위장하는 시도 로서 이해하는 심리학적 이해와 자신과 신 앞에서 자기를 의롭게 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하는 신학적 이해. 전자논 인문주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후 자는 종교개 혁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Aberglaube. Heuchelei und Fro mmigkeit. p.99). 이 입장은 필자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한편 Saxer에
의하면 칼빈은 술어에 있어서 선자의 경우에 "hypocrisis"가 아니라 "simulatio. dissimulatio" 을 사용하여 후자와 구별하였다(ibid. p 101. Anm. 132) 본연구는 전자에 국한한다
7) 칼빈의 소위 말하는 회심 사건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내적 발 전 사건이라는 것이 A. Ganoczy. Q. J. Borwsma 둥 여러 학자들의 견 해이다
8) 바젤 도착 시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Der junge Calvin und seine Psychopannychia. p.128f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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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고 있는 1 차 자료는 별로 없다. 스트라스부르의 카피 토가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Martinanus Lucanius)라는 가 명의 칼빈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서신이 만일에 바젤로 보내졌다 고 한다면 우선 이 서신을 우리의 연구 범위 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고 이밖에 칼빈이 1535년 9월 11일 바젤에서 같은 가명을 사용하여 화브리 (Christophe Fabri)9l에 게 보낸 서 신을 다루어 야 할 것 이 댜 이 서 신 외 에 「Psychopannychia」 , 1535년 8월 23일에 바젤에서 탈고한 「기독교 강요」를 들 수 있다.
상거한 날짜 미상, 수신지 미상의 카피토의 서신은 그 서신의 내 용으로 볼 때 칼빈이 바젤에서 받았을 것이 가능성이 크다. 그 이 유는 이 서신을 보건대 카피토는 이미 칼빈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10) 칼빈이 프랑스를 떠난 후 스트라스부르를 거쳐서 바젤로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11) 이 때 칼빈은 카피토를 알게 되었다 고 보는 것이 연구자들의 추측이다. 그렇다면 이 서신에서 말한 대 로 칼빈은 카피토에게 자신의 첫 작품 「Psychopannychia」을 스 트라스부르에서 만났던 카피토에게 보냈을 것이다. 이 서신이 시 기적으로 언제인지 확정짓기는 곤란하지만 화브리에게 보낸 서신 보다는 앞서 있음은 이미 밝혀졌다.12)
9) 이 인물은 일명 Libertet로 불리우며 Bole의 목사이며 칼빈의 친구이다.
Fabri는 활렌과도 친교가 있었다(1535년 1월 12일자 Fabri의 서신 ’ Herminjard, 3. 245 참조).
10) Hermijard, III. p.242. n. 1 참조.
11) co 21, 57 참조.
12) 필자의 귤 Der junge Calbin und seine Psychopannychia. p.22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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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토는 이 서신에서 칼빈의 작품 출판을 만류한다. 그 중요한 이유는 프랑스 정국에 직면해서 작품의 주제가 가지는 논쟁적 성 격 때문이다: “그러나 양축이 믿음의 분수를 넘어서 논란하는 저 주제는 매우 언쟁의 소지가 클 것이다. 또한 주가 그런 오류를 고 집하는 것을 못하게 만든 유명한 저자들의 열성이 다시 불타올라 서 그들이 지금까지 수호한 믿음을 다시 고집하지 않을까 우려되 며 경건의 열심을 배격할까 우려된다. 그러면 마음이 연약한 자 들에게서 경건의 열심은 마치 무가치한 십자가처럼 쉽사리 사라 져 버릴 수도 있다."13) 우리가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카피토 의 평화적 통합주의적 입장이다. 그는 칼빈의 반박문을 계기로 열광주의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나 프랑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 가장 우려되는 일이다. 카피토의 우려는 그가 자신 의 동역자 부쳐. 멜랑흐톤과 프랑스 왕 간의 종교 대화 계획을 의 식하고 있다고 추측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미 플래카드 사 건은 진행되어 오던 종교 협상에 찬 물을 끼얹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교회는 상처를 입었다("afflictis ecclesiis"). 만일 칼빈이 논쟁적인 글을 내놓는다면 교회는14) 영
13) "Sed et argumentum illud, quia extra analogiam fidei utrinque tractatru, foecundissmum erit rixaru. Deinde sunt autores splendidi , quos dejecit Cominus a pertinacia istiusmodi erroris affirmandi , quorum studia veror ne incendantur, aut certe ne prorsus fidem quam hactenus coluerunt despondeant, aversenturque stuida pietatis, qure, ut crux alioqui fastidiosa, tenerioribus mentibus facile exhalant.· (Herminfard. III. p.244)
14) 이 교회는 Herminfard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랑스 개신교회룰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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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 수면설을 둘러싸고 지지자와 반대자 간에 새로운 분쟁의 소용 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무 신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종교 협상이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카피도는 이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기까지 누구든지 어느 편에 속해 있든지 간에 신학적 논쟁을 삼가고 오로지 교회 를 위해 유익한 굴을 쓰던지 아니면 절필하는 것이 낫다고 충고 한다: “나는 당신이 차라리 보다 호감이 가는 내용으로 글 쓰는 일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내 자신도 이런 분열 속에서 공공연히 무엇인가를 쓰는 일을 자제하였고 또 후회하지 않는다""", 또한 저 불안을 자아내는 수고가 자기의 일로 떨어졌던 것 보다는 차 라리 나의 한가로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15) 여기서 카피토 가 언급하는 바 “저 불안을 자아내는 수고’’는 아마도 역시 멜랑흐 톤과 부쳐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신구교 협상 계획을 암시하는 듯하다.16)
미할 수 없다(Herrninfard, III. p.244. 주 10 참조). 그런 주장은 시대 착오 적 생각에 불과하다. 아직 당시에는 종파, 교회의 구별은 없었다.
15) "Mallem etiam auspicarreris scribendi industriam in argumento plausibiliore. Temperavi mihi. nee penitet. quo minus in tantis dissidiis stilo in publicum quicquam
mandarem et sunt qui mallent nunc ocium maum quam
turbulentum istum suum laborem sibi obitgisse." (ibid) .
16) Herminjard는 이것을 Bucer에 의한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화해 시도 로 보았다(ibid., n. 9). 그러나 여기서 카피토가 언급한 인물이 부쳐 둥을 의미한다면 언급한 “저 불안을 자아내는 수고’’를 시기적으로 볼 때 부쳐 와 프랑스 왕과의 대화 노력으로 보는 것이 더 문맥에 맞는다 ... 불안을 자아내는“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카피토는 이 협상에 대해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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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카피토의 충고 때문은 아니었다.17)
우리는 Psychopannychia의 제 1 서문(1534)에서 이미 칼빈 이 카피토와는 다른 인간임을 발견한다: 칼빈에게는 카피토가 권 고했던 자제와 평화보다는 논쟁을 통한 진리 수호가 중요했다:
“이런 필요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침묵하고 모른 체한다면 내 가 진리의 배신자라고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내 작품 이 경험이 없는 자들과 별로 계몽되지 못한 자들뿐 아니라 피상 적으로 이 문제를 접한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큰 유익이 되리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내 신앙의 진술서를 모든 선한 인간들에게 보 이기를 주저치 않는다." 18) 여기서 “모른 체하다" (dissimu-lare) 와 함께 “침묵하다' (tacere)를 사용한 것은 위선이 침묵과 상통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위선이란 아는 것을 발설하지 않 는 소극적 언어 행위도 포함한다. 종교개혁 운동에 관심을 가지 게 된 칼빈이 그의 첫 신학 작품을 탈고하면서 침묵의 문제를 의 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가 진리의 수호를 위해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아마도 사건으로 당국의 추적을 받은 데서 연유한 것일지도
17)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필자의 글 ibid. p.20ff참조
18) ". · ·· · ·causam mihi habere non videor quin veritatis proditor dicar. si in tanta necessitate taceam ac dissimulem. Certe quando permagnum operae meae sum imperitioribus et minus exercitatis fore confido . nonnullum etiam et mediocriter eruditis. qui hoc argumentum levius attigerint: non dubitabo apud bonos omnes deponere fidei meae rationem······." (CO 5. 169-170) Psycho- pannychia의 제 1 서문 0534)에 대해서는 필자의 굴 ibid. Kap. 3. 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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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자신은 어떠한 범죄도 행한 일이 없는데 그를 범법자인 것처럼 추적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인식한 칼빈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진정으로 헌신 하기로 결심했음 것이다.19)
한편으로 그는 관용음 모르고 자신을 박해하는 교회에 대해 어 쩔 수 없이 굴종해야 하는 자신의 치지를 괴로워 했을 것이다. 16세기의 인간 칼빈은 자기가 속해 있는 母교회와의 관계를 쉽사 리 단절할 수는 없었다. 그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한 그는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대한 각종 의무를 이행했을 것이다.20)
그렇다면 「세네카 주석」에서의 위선에 대한 입장과 이런 태도 사
19) 우리논 칼빈의 하나님 섭리 경험윤 1534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여지는 한 서 신에서 반견한다: "Sed de iis viderit D
ominus. cuJus providentia
omnia melius providerit. Expertus sum quod non liceat nobis in longum prospicere·----·. Et he omnia manus Domini. cui si nos committimus ipse erit sollicitus nostri ." (Herminjard. Ill. p. 158) R신여 -미나 주의 섭리는 모든 것응 보다 잠 보살피니 수놈 이것들에 대해 돔볼 섯이다 나톱 우리가 먼리 내다볼 수 없다논 깃옹 경험했다. 이 모든 일을 주의 손이 행한니 우리가 :1에게 의탁하면 그는 우리를 돌봅 것이다.) 이 서신에 대 해 필자의 討 ibid. p.82 참조.
20) 1534넌 9원에 Bucer에 게 보낸 서신에서 칼빈은 말한다: "Tamen. cum non posset submittere diutius cervices isti voluntari servituti quam adhuc ferimus . demigravit ad vos in nullam spem reditus." 밑줄은 필자에 의한 것임) 〔번역 . 그는 우리가 지급까지 자발직으로 감수하는 저 예속 상태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 었기 때문에 귀국의 희망도 없이 당신들에게로 이주했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우리가 지금까지 감수하는 예속 상태는 카토릭 교회에 대한 의무를 의미한다) 이 서신에 대해 필자의 글 ibid. p. 85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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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는 불연속선이 생긴 것일까9 그렇다. 「Psychopannychia」의 칼빈은 종교적으로 양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엄밀히 말 해서 자신의 입장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칼빈이 진리 수호를 위해 침묵하지 않겠다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Psychopannychia」 를 당시 프랑스에서 출판하지 않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인 독불 대화의 성공에 대해 기대를 컬었던 것이 아니었을 까721) 아니면 종교개혁자로 변신하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는 과 정이었을까9 어쨌든 고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이때로부터 그의
21) 바로 이 런 이유 때문에 그가 프랑스를 떠나기 전 1534년 brlans에서 끝 마친 Psychopannychia의 草稿에 양면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Psychopannychia의 양면성에 대해서 필자의 글 ibid. p.321 이하 참 조. 또한 칼빈은 1562년 7월 1일 사무엘 하 5.17에 대한 설교에서 자신 의 생애를 다음과 갇이 회고하였는데 이것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Voila du temps que la tyrannie estoit au royaume de France, qu 'il ne faloit que dire le mot, les ennemys de l'Eglise de Dieu et de sa verit auoient tout gagn; cependant jamais il ne leur est venu en esprit ce qui pouuoit estre pour abolir l'Eglise de Deiu et son seruice. Et je puis dire qu 'il y a vingt ans et quasi trente, que j 'ay est en ces destresse la, que i 'eusse voulu estre quasi mort, pour oster ces angoisses de deuant mes yeux; pour le moins i 'eusse desir d 'auoir la langue couppe, pour ne point dire le mot. Car quand les ennemis de la verit se sont efforcez de l'aneantir(comme i 'ay dit), ilz n'ont peu trouuer le moyen." (Supplementa calviniana. 1. p. 122) 〔번
역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원수가 모든것을 이겼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독재 가 프랑스 왕국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와 그 예배를 파괴 하기 위해 무엇욜 할 수 있는지 저들은 결코 의식한 적이 없었다. 20년 전. 거의 30년 전에 나는 내 눈 앞의 고동들을 벗어나기 위해 거의 죽기를 원할 정도로 괴 로움에 처해 있었다. 나는 적어도 말을 할 수 없기 위해서 내 혀가 짤리기를 원할 정도였다. 진리의 원수들이 진리를 멸절하기 원했을 때 그들은 그 방법을 발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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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상황과 관련되어서 그 단초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댜 그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진정으로 위선 없이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 이 살아 있었다. 「Psychopannychia」의 초고 를 완성하고 나서 얼마 후 칼빈은 국외 망명을 단행했다. 이때 그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비로소 해결되었을 것이다.22)
바젤에서는 킴빈은 후에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술한 대로 학문 을 위한 여유와 마음의 안식 얻었다.23) 그는 아마도 이곳에서 프 랑스 왕과 멜랑흐톤, 부쳐 사이의 대화 계획에 대한 스위스 종교
수 없었기 때문이나〕 칼빈은 여기서 자신이 1533년 경 개종한 후 프랑스에 서의 경험담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당시에 결코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합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즉 그는 당시에는 여전히 명목적으로는 카 토릭 교회 소속원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양심에 따라서 살지 못함에 대해 내적인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캄빈의 나코데미즘적 과거에 대해 필자의 굴 ibid. p. 88f. n 262 군}조).
22) 신잉과 삶의 인치, 신앙과 말의 일치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를 찾욜 수 있나미 신앙 고백이란 단순히 교회가 가르친 옛 신조를 암송하는 것이 아 니라 ,L세적인 삶의 자리에서 자기 신념을 감추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 하눈 섯응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박해 시대에 있어서는 특별히 신앙 고백의 문제가 중대하였다. 고백은 순교룰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피하기 위해 신앙을 은폐하였다. 그 결과는 자신의 내면적 신앙과 외적 행동의 분열을 초래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 의 정체성은 문제될 것이다. 예수가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 음한 것이라고 한 말(마태 1.28)은 바로 인간의 통전성 파피, 인간의 자기 분열을 두고 이른 말이다.
23) "De mon cost, d'autant qu'estant d'un naturel un peu sauvage et honteux, j 'ay tousiours aim requoy et tranquillit, ie commenay chercher quelque chachete et moyen de me retirer des gens... Et de faict, laissant le pays de France ie m 'en veins en A/,lemagne de propos deliber, afin que l ie peusse vivre requoy en quelque c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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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자들의 부정적인 입장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24)
이 때 집필한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3가지로 이해한다: 첫째 율법으 로부터의 자유. 둘째 선행욜 할 수 있는 용기. 셋째 모든 외적 사 물로부터의 자유. 외적 사물(aotaq,opcxt)이란 모두 하나님이 인간 들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는 우리의 구원에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로마 14.14) 판단 의 척도인 우리 자신의 마음이 문제이다. 즉 마음 먹기에 따라서 외적 사물이 내게 우상 제물이 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외적 사물로부터의 우리 양심의 해방 에 있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웃과의 관 계 문제이다. 아무리 외적인 사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지라 도 우리의 이웃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에 자유는 육적인 방종으로 곡해되거나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25) 여기에 인간은
incognu, comme i avoye tousiours desir." (CO 31. 22-24) 〔번역 : 내 편 에서는 천성적으로 좀 비사교적이고 수줍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안식과 평안을 좋 아했다. 나는 사람들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다. 실제로 나는 계획적으로 프랑스 를 떠나서 독일로 갔다. 이것은 내가 항상 원하였던 대로 알지 못하는 구석에서 조용히 살기 위함이었다.〕
24)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부정적 입장에 대해서는 Herminjard. III. p.
340성46. 특히 주 8 참조
25) "Quare perverse interpretantur. vel qui suis cupiditatibus ipsam praetexunt ut bonis Dei donis abutantur in suam libidinem. vel qui nullam esse putant. nisi coram hominibus usurpatam. ideoque in ea utenda nullam infirmorum fratrum rat10nem habent. (OS 1. 228) 〔번역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대로 하나님 의 선한 선물욜 남용하기 위해 방종을 자유로 위장하는 자들, 혹은 인간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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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기체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칼빈의 입 장이 나타난다. 인간은 영혼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양심의 자유 를 발견하고 비로소 참 인간이 된다. 영혼과 행동의 일치 - 고백,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26) 자유란 무 엇을 행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소극적인 자유. 즉 이웃을 위하여 절제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27)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필요도 있고 때로는 자유를 절제할 필요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기준은 이 웃 사랑의 계명이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자유를 사용해야 하며 언제 절제해야 하는가9 칼빈은 주는 걸림돌과 받는 걸림돌로 구 별하여 말한다: 전자는 우리의 실수로 인하여 믿음이 약한 형제 가 넘어지게 만드는 경우이고 후자는 바리새인을 분노하게 만든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약한 형제를 위해서 자유를 절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아니든 간에) 우상 제물 을 외적 사물에 불과하다는 핑계 하에 우상 제물을 먹음으로써 이 문제에 확신이 없는 형제를 오도한다면 그것은 이웃 형제에
사용하지 않으면 자유는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 약 한 형제듄음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들은 자유믈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26) H. Scholl. ibid. p.85.
27) "Siquidem cogitare debebant. nihil se sua libertate novum consequi in hominum conspectu. sed apud Deum. et tam in abstinendo constitutam esse quam in utendo." (OS 1. 229) [번 억 그들은 자기 자유로써 인간 눈에 새로운 것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서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며 자유는 사용함에서만 아니라 절제함에서도 성립한다 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47
대한 사랑을 망각한 것이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이 웃욜 위하여 자유를(칼빈은 이것을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무절제로 본다) 단념할 줄 알아야 하다.
후자의 경우에는 우리는 반대로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 러나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누가 우리의 약한 형제이고 바리새 인인가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에게 바리새인들이 그의 말 씀에 분노했음을 상기시켰다. 주님은 그것을 무시해야 하며 그들 의 분노를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구룰 약한 자로 여겨야 하며 누가 바리새인인지를 확정 짓지 않는 한 문제는 불확실하다. 이 구별을 제거한다면 어떻게 자유의 사용이 - 그것은 항상 고도의 위험 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 에 - 분노하는 자들 가운데서 존립할 수 었을지 알 수가 없다."28) 여기서 칼빈은 약한 형제와 바리새인을 정강로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맹인 이면서 맹인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 이다(마태 15,14).29' 칼 빈에게 있어서 오늘날의 바리새인들은 누구인가? 바리새인들이 율법 문제로 예수와 충돌하고 그를 증오하여 십자가 처형에까지
28) "Admonuerant discipuli . eos serrnone ipsius offenses fuisse Respondet : egligendos . nee curandam esse eorum offensionem. Res tamen adhuc incerta pendet. nisi teneamus. qui nobis sint habendi infirmi et qui Pharisaei : quo discrimine sublato. non video quis prorsus restet inter offensiones libertatis usus. qui nunquam sine summo periculo foret." (ibid . p.230)
29) ..
······qma caec1 sunt duces caecorum.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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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고 갔고 또한 그의 제자들을 박해했다면 오늘의 바리새인들은 바로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수호하는 수구 세력들. 소위 교황 파(Papist)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칼빈이 요청하는 바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박해하더라도 자유를(즉 외적 사물로부터의 자유를) 포기하지 말아 야한다는것이다.
칼빈은 그의 주장의 정당성을 바울의 사례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바울은 가르침이나 실례를 통해서 우리의 자유가 어느 만큼 절제되어야 하며 혹은 분노에서 자유로워야 하는가를 매우 정확하게 정의했다고 보여진다. 그가 디모데를 자신의 공동체에 받아들일 때 그에게 할례를 주었으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허락할 수 없었다 ... …. 그가 디도에게 할례 주기를 거절할 때 염두에 두 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복음의 진리가 너희들 가 운데 존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들에게 결코 굴복해서는 안된 다."30) 바울이 선교적 목적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고 디도의 경우에는 할례의 무익함을 증언하기 위해서 오히려 할례를 거절 했다는 사례를 들어 칼빈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할례 의
30) 'Verum mihi clarissime definisse videtur Paulus. tum doctrina tum exemplis, quatenus vel moderanda sit libertas nostra. vel offendiculis redimenda. Timotheum cum in consortium suum assumeret, circumcidit: Titum. ut circumcideret. adduci non potuit· · · · · · Quid respexerit cum Titum circumdere fortiter abnuit, ipse testatur sic scribens:--···· quibus ne ad tempus quidem cessimus per subiectionem. ut evangelii veritas maneret apud vos." (ibid. p.230f.)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49
식인 교회의 미사 의식의 오류를 증언하기 위해 마땅히 미사 참 여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바올이 볼 때 할례는 아무것도 아닌 의식 행위였으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원에 필수 적인 의식으로 보았다. 그런데 칼빈은 미사에는 외적 의식 이상 의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로마 교회가 미사를 신성시하기 때문 에 종교개혁자들은 미사를 단순히 하찮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었 고 우상숭배라고 공격하였다.
미사가 신성 모독적 의식이라면 믿는 자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유를 포기해 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칼빈이 여기서 지시하는 복음의 진리는 바로 「Psychopannychia」에서 그가 논쟁을 통해서 수호 해야 했던 진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미사의 신성모독을 앞에 두 고 침묵을 지킴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배신이다.31)
그런데 프랑스에는 자신의 복음 신앙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하 여 미사에 여전히 참여하는 자들이 있다: "결코 자유를 사랑에 봉 사케 함이 없이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바울의 신중함을 위장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안식을 돌보기 위해서 자유에 대 한 모든 언급이 매장되기를 바란다. 자유를 자신의 유익을 위하 여 적절한 곳에서 절제하는 것 만큼이나 이웃 사람들의 안녕과 교화를 위하여 상호 간에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이웃을 위하여 중요하다."32)
31) 칼빈의 미사 공격에 대해서는 ibid .. p. 152ff 참조.
32) "Sunt qui Paulinam prudentiam simulant in abstinentia
so 韓國敎合史學合誌
이들은 이웃에 대한 배려를 핑계삼아서 자유를 포기한다. 이 때 그들은 바울이 우상 제물 먹는 자들을 비난하면서 한 말을 성서 적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저 달콤한 인간들은 가르침으 로든 삶의 모범으로든 간에 이웃에게 우유를 먹여서 가르쳐야 한 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웃에게 가장 악하고 파멸스러운 견해를 주 입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우유를 먹여 양육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만일 당시에 그들 가운데 미사가 있었다면 그 가 그들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겠는가? 그러나 우유는 독이 아니다"33)
이상의 서술에서 볼 때 주요 쟁점은 어느 경우에 자유를 사용하 고 또는 포기할 것인가이다. 칼빈의 적들의 생각은 미사가 단순 한 외적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면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 아무 허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스토인이 당분간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 그 들은 만일 자신들이 미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약한 형제들이 이것
libertatis, nihil minus quam in officia caritatis earn conferentes. Suae enim quieti ut consulant. omnem libertatis mentionem sepultam optant. cum non minus intersit proximorum. libertatem in eorum bonum et aedificationem interdum usurpare. quam pro ipsorum commodo, earn loco moderari." (ibid. p. 2.31)
33) "Et suaves homines. seu doctrina. seu vitae exemplo sit instituendus proximus. aiunt lacte pascendum esse. quern pessimis exitialibusque opinionibus imbuunt. Lactis potu se aluisse Corinthios Paulus commemorat. Sed si tum inter eos fuisset missa, an sacrificasset ad praebendum ipsis lactis pastum? At lac venenum non est." (ibid .. p. 231f.)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51
을 보고 신앙을 잃게 될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반문한다: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우유를 주는 것은 옳다. 그러나 미사가 어찌 우유가 될 수 있으랴? 미사는 하 나님 경배를 대치하고 빵과 포도주를 신격화하는 우상 숭배이며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제사로 볼 수밖 에 없다. 그러므로 칼빈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약한 형 제들을 오도하는 것이며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결국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미사에 관한 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결코 포기해서는 않된 다고 칼빈은 역설 한다.
여기서 칼빈이 중점을 둔 문제는 외적인 사물로부터 해방을 획 득한 영혼이 자기 신앙에 따라 행동하는가 였다. 이 문제는 자기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유에 상응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위선적인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그 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 즉 고백과 직결된 다.34) 물론 여기서 칼빈은 고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유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고백이다. 고백은 자기 목적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계명에 복종함이다. 그러므로
34) 종교개혁 제 2 세대인 칼빈은 신학적 특성이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보인 다. 루터 둥의 종교개혁 제 1 세대가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정적 주의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에 칼빈은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답변해야만 했다. 칼빈은 이미 기독교 강요 제 1장 "De lege"에서 신앙과 행위의 일치롤 역설한 다: "Non externa modo opera lege Dei praecipi aut prohiberi. sed cogitationes ipsas et intimos cordis affectus." (ibid ..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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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게서 자유는 단순히 영적인 자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표출되어져야 한다.
1535년 9월 11일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완성한 후에 칼빈은 친구 화브리에게 서신을 보낸다. 여기서 칼빈은 최근에 일어났던 한 소동을 언급한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분노를 느끼면서 나병 환자들에 관한 새로운 소동을 들었는지 거의 믿을 수 없을 것이 다. 이 사건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그 러나 그는 지속적인 위선으로 부풀어 있었으나 마침내 독을 내뱉 었고 박힌 화살을 피했다."35) 우리는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을 알 지 못한다. 그러나 1544년에 뉘샤텔(Neuchetel)에서 일어난 사 건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 나병 환자들은 사회로부 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삶에 필수적인 물질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할 뿐더러 육신적인 치유뿐 아니 라 심시어논 영적인 치유마저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한 목사가 이 붕행한 사람들에게 성만찬을 베풀었다. 이때 다른 목 사가 이 인에 반발하여 백성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켰다.36) 추 축컨대 이 민 사건이 1535년에도 일어났던 것 같다. 문맥으로 보 건대 이 소동음 인으킨 장본인은 성직자였다. 구약 성서에는 나
35) i/ix persuaderi possis quanta animi indignitate audierim tumultum istum novum de leprosis excitatum ab eo de quo nihil nihil unquam tale fuissem suspicatus. Sed tandem scilicet venenum quo diuturna dissimulatione turgebat evomuit et infixo aculeo fugit." (Herminjard. 3. p. 350)
36) Herminjard. 3, p. 350, 주 15-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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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이라는 나병 환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일화가 발견된다. 예수는 나병 환자들에게 깊은 동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치유 했고 제자들에게도 그들을 치유하라고 명령했다. 또 나병 환자들 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온 징조라고 선포한다 (마태 8,2: 11,5: 26,6: 누가 7, 22: 17.12). 또한 예수는 자기 제자 들에게도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라고 명령한다(마태 10.8). 칼 빈은 이러한 성서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나병 환자들에게 영적 인 양식마저도 거절하는 성직자를 비난한다. 여기서 “위선”이라 고 한 이유는 문제의 성직자가 나병 환자에 대한 혐오감을 은폐 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나병 환자는 사회에서도 소외당했을 뿐 아니라 그 성직자가 말하는 이웃 사랑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런데 도 그 성직자는 그리스도인올 자처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철저 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칼빈은 그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여전히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성직자 는 지금까지 말로만 이웃 사랑의 계명을 운운하였을 뿐이고 막상 그것의 실행이 요청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는 오히려 이 계명에 불순종함으로써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여기서 칼빈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을 내 이웃으로 고백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함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시금석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신앙은 내면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 없고 구체화,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칼빈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의 가시화, 죽 고백의 필요성을 숙고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 중간껄산:
인문주의자 칼빈은 위선에 대항하는 정직성의 중대성을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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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했다. 그후 그가 「Psychopannychia」를 집필했을 때 이 위 선에 대한 이해는 종교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칼빈은 자신을 위 험에서 구출하여 준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을 공격하지 않음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고 위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 그의 구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 라,·였다. 또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론에 서 이웃 사랑의 미명 하에 위선을 행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복 음을 통해 자유를 얻은 영혼이 그 자유를 외적 행동으로 옮기는 문제를 숙고한다. 그는 자유의 실천은 이웃 사랑의 계명의 관점 에서 요청된다고 보았고 자유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표출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기 목적이 아 니라 이웃을 위한 사랑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당시 칼빈은 아직 고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구체적으 로 고백의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칼빈은 1535년 9월의 서신 에서 한 성직자의 위선을 공격하면서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의 실 천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고백할 것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이 경 험은 신앙의 외면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결국 자기를 위험에서 구출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험, 그리고 이웃 사랑 의 계명에 대한 강조는 그의 고백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하겠다.
1536년 여름 칼빈은 바젤에서의 망명 생활 중에 재산 정리를 위해 프랑스에 다시 입국한다.37) 아마도 이 여행은 1536년 5월
37) 1564년 칼빈이 사망하던 해에 여호수아서 주석에 붙인 전기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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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에 공포된 Lyon의 사면 칙 령38)에 의 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칼빈이 두 공증인 앞에서 자기 동생 앙트 완(Antoine Cauvin)에게 유산 처분을 위임한 것을 지시하는 문 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39) 이 1536년 6월 12일자 문서에 의하 면 칼빈의 두 형제 샤를르(Charles Cauvin)과 앙트완은 노아용 (Noyon)의 두 공증인 앞에서 부모의 유산의 일부분을 매각하였 댜 이 문서에 의하면 칼빈(Jean Cauvin) 자신은 파리 샤틀레 (Chatelet)의 두 공증인 앞에 나와 동생 앙투완에게 부모의 유산 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리를 위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증 문서는 동 위임장이 6월 2일에 서명되었다고 밝힌다.40) 그러므로
칼빈은 이태리 여행에서 돌아 오는 길에 제네바를 경유하여 바젤, 스트라 스부르로 가려고 했으나 화렐에게 붙들린 것으로 되어 있다.(CO 21. 30) 그러나 1565년 칼빈의 여호수아서 주석 머리예 붙인 칼빈 전기에 의하면 칼빈은 이태리 여행을 마친 후 바젤로 다시 돌아와서 잠시 머문 후 프랑 스에 재입국하였다. (CO 21. 58) 즉 1565년의 전기는 프랑스 여행에 대 한 언급하지 않은 1564년의 전기 부분을 보충하여 준다. 양자의 전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칼빈은 이태리 여행 후 제네 바가 아니리 바젠을 거쳐 프랑스에 돌아 갔다는 것이다. 이 보도 외에 G Lopinus가 1537년 7월 15일에 칼빈에게 보낸 서신도 이 사실을 입증한 다. (CO 1Gb. 115: "Quum Basilea Lutetiam venisses") 그러나 우리는 이태리 여행 시기가 언제인지 또 그가 바젤에 다시 와서 얼마나 머물렀는 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문제이므로 이태리 여행 시기가 밝혀진다면 바젤에서의 2 차 체류 시기도 밝혀질 것 이댜
38) 제 2 장. 주 64 참조.
39) A. Lefranc. La jeunesse de Calvin. p. 190. 204 이하 참조
40) ibid .. p. 204-20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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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적어도 6월 1일에는 파리에 도착했음이 분명해졌다.41) 칼 빈은 파리에 돌아와서 앙트완을 고향 노아용으로 보내어 유산 정 리를 하게 함으로써 조국을 완전히 떠날 준비를 했다. 이것은 그 가 더 이상 프랑스에 대해 희망을 두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 는 칼빈의 유산 정리를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이루어진 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1534년에 성직록을 포기한 것에 이은 후속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그는 고향에서의 모든 사무 관계를 청산했다. 또 그가 프랑스를 떠날 때 그의 동생 앙트완을 데리고 떠남으로써 고향 노아용과의 인연은 완전 단절된다.42) 이것은 그 가 자신에게는 망명 밖에는 선택의 길이 없다고 믿었고 그대로 실천했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제 2 의 가능성, 즉 종교적 위선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대로 고백의 신학을 형
41) 칼빈은 5월 하순에 바젤을 출발하였다. 그는 사전에 리옹 칙령의 공표에 대한 정보를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는 당시 교통 수 단으로는 칙령 공표 후 하루 만에 바젤에서 파리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T.H.L. Parker는 Ferrara의 공작 부인 Rene가 칼빈에 게 안전 통행중 음 주선했거나 칙령 공표에 대한 정보롤 주었을 것으로 추축한다. (John Calvin. p. 52 참조) 그러나 이것은 칼빈이 훼라라에서 공작 부인과 친분 관계를 맺었음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편 같은 내용의 사면 칙령 (Couey 칙령)이 이미 1535년 7월에 공표된 적이 있었고 그것이 별 효려을 거두지 못했다면 같은 칙령이 반복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인이다. 다만 그 공표 시기가 문제였을 것인데 바젤에는 칼빈에게 사전 정보를 줄 수 있는 인물들이 그 주위에 있었을 것이다
42) co 21. 58 참조. Jacques Desmay는 캄빈이 동생 앙트완 외에 여동생 Marie, 성당 참사원 Henry de Collemont 둥 여러 고향 사람들을 데리 고 떠났다고 보고한다 CRemarques sur la vie de J. Calvin. p. 395: A Lefranc. op. cit .. p. 1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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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 온 그에게는 위선의 길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파리에 머물렀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1537년 7월 1.5일자로 G. Lopinus가 칼빈에게 보낸 서신에 의 하면 칼빈은 파리에서 여러 친구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눈 것 같 댜 또한 동 서신은 칼빈이 당시 독일 즉 스트라스부르로 갈 계 획이었음을 지시한다.43) 동칙령이 6 개월의 시한을 허용하였다면 칼빈에게는 적어도 연말까지는 조국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길어 보았자 2개월 가량 머문 듯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당 시 다가올 전쟁에 대한 준비로 파리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 때 문인 듯하다. 문제의 전쟁은 6월 2일에 독일 황제 칼 5세가 선포 함으로써 발발했다.44) 전쟁은 7월 중에 피카르디. 프로방스, 알프 스 지역에서 일어 났다. 그러므로 그는 전쟁을 피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7월 중에 파리를 떠났을 것이다. 칼빈의 보고에 의 하면 그는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최단로가 전쟁으로 두 절되어 어쩔 수 없이 제네바를 경유해야만 했다_45) 그가 제네바에
43) "Quum Basilea Lutetiam venisses. simul atque adventum tuum accepimus, te salutatum ivimus in hospitium, ubi tuo colloquio ita affecti fuimus, ut te unum ex universa Gallia, quae latissime patet. hactenus suspexerim, ita ut tibi Germaniam redeunti et nos itineris comites futuros amicis praedixenmus. (CO 10b, 115)
44) Histoire de France, vol. 5/2, p. 89 참조.
45) "Pource que pour aller Strasbourg, ou ie vouloye lors me retirer, le plus droit chemin estoit ferm par les guerres, i 'voye deliber de passer par yci legerement, sans arrester plus d 'une nuit en la ville ." (CO 3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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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것은 7월 하순이 될 것이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46) 칼빈의 보고에 의하면 본래 그는 종교개혁에 성공한 스트라스부 르에 가서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화렐의 강권에 못 이겨서 제네바
46) 칼빈 자신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제네바 도착 시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 댜 한편 이 문제에 관한 Beza의 두 보고에는 편차가 있다. 우선 그의 첫 번 선 기 에 서 : "et advint tout ceci l'an 1536 au commencement de Septembre"(CO 21. 30). 그러나 이 보도가 칼빈의 제네바 도착 시기를 지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상의 시작을 지시한다면 정확하다 다음 그의 두번째 선기에서 : "est designatus anno Domini MDXXXVI mense Augusto" (CO 2l. 126) . 왜 베 자는 지 금까지 의 9월 대신 8월을 언급하는가') :_1가 그 사이에 새로운 정보름 얻었을까9 우리는 그렇게 보 지는 않는다 베자는 칼빈이 도착하여 강의를 시작하기까지 한 달 정도의 시간적 경과를 추정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Colladon은 제네바에 거주하 는 프랑스 내사 Morlet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car il s'estoit retir Geneve, comme aussi y estoit demeurant monsieur Morlet, qui depuis a est ambassadeur du Roy vers les ligues" ( CO 21. 58) . 콜라 동의 보고가 정확하다면 이 인물은 7월 16일에 제네바 시에 신임장을 제 출하였으므로 칼빈은 7월 16일 이후에 제네바에 도착하였다.(P. Wernle, p. 9. 95, Anm. 40 참조)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A Pierson의 주장이다. 그는 칼빈이 7월 16일이나 17일에 제네바에 도착 했다고 본다 그는 근거로서 칼빈이 1536년 10월 13일자로 친구 다니 엘 에 쓴 서신응 들었다. 동 서신에서 칼빈은 3개월이나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자신이 제네바에 도착하여 며칠 머무른 후 여행을 떠났는데 그 바람에 서신을 전하기에 좋은 리옹 시장의 시기를 노쳤다. (당시 리용 시장은 8월 4일에서 19일까지 열렸다.) 그러므로 피에르손은 칼빈이 7월 하반부에는 제네바에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Studien over Kalvijn, p. 256 참조). 그러나 문제의 서신은 칼빈이 제네 바의 형제들에 의해 며칠 간 붙잡혀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Oum
Genevae diebus aliquot a fratribus detineor, .... --dum cognatum Artesiam Besileam deduco, ac in ipso itinere ecclesias multas offe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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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정착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전에 화텔을 만난 적이 없다.47) 그 럼에도 불구하고 화렐이 「기독교 강요」의 저자로서 칼빈의 이름 은 듣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대로 화렐은 이미 비레(Viret).48) 카피토. 화브리 등을 통해 칼빈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칼빈의 체류를 화렐에게 알린 것은 그의 친구 루이 뒤 띠 예(Louis du Tillet)였다伊 칼빈은 자신의 당초 계획을 포기함에 있어 상당히 주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납득할 만하다. 바 젤에 있을 동안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꺼려했을 정도로 조 용한 삶을 좋아했던 칼빈은 특정한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 보다는
quibus immorari aliquantisper rogor. elapsae sunt interim mihi nundinae Augustae. quarum tempus ad perferendas literas inprimis erat opportunatum." CO !Ob. 63) 7월 16일부터 보름 동안이나 제네바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한 도착 시기를 알수 없고 다만 그가 7월 16일과 리옹 시장 시작일인 8월 4일 사 이에 제네바에 도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7) A. Ganoczy은 칼빈이 바젤에서 화텔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Le jeune Calvin. p. 85) 이것은 근거가 없다:
48) 화렘의 동역자인 Viret는 바젤에서 칼빈과 만난 적이 있다(Herminjard.
vol. 3. 372f 참조)
49) "Adoncques un personnage, lequel maintenant s'est vilenement revolt et retoum vers Les Papistes, me descouvrit et feit cognoistre aux autres. Sur cela FareZ. · .. · · feit incontinent tous ses efforts pour me retenir." (CO 31. 26) 콜라동은 문제의 인물이 칼빈과 함께 프랑스를 떠났으며 이태리 여행을 같이 한 Louis du Tillet라고 말한다. 칼빈이 파리로 돌아 간 후 루이는 제네바로 왔다고 콜라동은 보고한다. (CO 21. 58) 그러나 칼빈의 보고를 본다면 양자는 헤어질 때 제네바에서 만나기 로 약속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양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루이는 프랑스 대사 Morlet du Museau가 제네바로 올 때에 그의 길동무로서 동행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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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학문 활동을 하는 것이 자신의 성격에도 맞는다고 생각 하였을 것이댜,,01 더구나 그는 정식으로 신학을 배운 적도 없고 아직까지 목회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또 그의 마음 속에는 지금까지의 삶의 패턴을 바꾸 고 새로운 삶에 도전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화렐의 설득에 의해서 제네바에 머무르기로 했으나 그의 보고에 의하면 “자신의 수줍음과 소심함을 고려해서 어떤 책임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511 이 말은 그가 전혀 아무 일도 하려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져 야 할 직무를 맡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처음에 맡은 임무는 성서를 가르치는 일이었 다.52)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그의 성격에도 맞고
50) "De mon cost, d'autant qu'estant d'un naturel un peu sauvage et honteux, i 'ay tousiours aim requoy et tranquillit, ie commenay
chercher quelque cachete et moyen de me retirer des gens Or que
ie n 'eussent point ce but de me monstrer et acquerir bruit, ie le donnay bien cognoistre, par ce qu ' incontinent apres ie me retiray de l: ioint mesmement que personne ne sceut l que i'en fusse l'autheur: comme aussi par tout ailleurs ie n 'en ay point fait de semblant, et avoye deliber de continuer de mesme iusqu ' ce que finalement maistre Guillaume Farel me reteint Geneve." (CO 31. 22-26)
51) " en sorte toutesfois que sentant ma honte et ma timidite, ie ne
voulus point m'obliger exercer quelque cerlaine charge." (CO 31. 26)
52) 1536. 9. 5 Registre du Conseil. vol. 29. f. 51 : "Mag. Gui!
Farellus exponit sicuti sit necessaria illa lectura qualem initiavit ille Gallus in S. Petro : propterea supplicat videri de ipso retinendo et sibi alimentanto. Super quo fuit advisum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61
책임질 일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제네바 시민들 은 초기에는 그가 프랑스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이름도 정 확히 몰랐던 것 같다. 칼빈이 로잔느 회의 참석을 마치고 친구 다 니엘에게 보낸 10월 13일자 서신을 보면 그는 제네바에 며칠 머 문 후에 그의 친척 루이 다르투와(Louis d'Artois)와 함께 바젤에 갔다.53) 아마도 이 3번째 바젤 여행을 한 이유는 옛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자기가 전에 남겨둔 물건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 기기 위함인 듯하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 오자마자 심한 감기에 걸려 누었고 병이 나은 후에 성서 강의를 시작하였다.54) 그것이 9월초가 될 것이다.55) 그후 칼빈은 제네바의 목회자들과 함께 10월 1일부터 8일까지 로잔느 논쟁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10월 16일에서 18일까지 베른 노회에 참석하였다.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칼빈은 교회의 가시적, 제도적, 형식적 인 면에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56) 그가 제네바
quod advideatur de ipsum substinendo." (CO 21. 204).
53) 상기 주 45 참조
54) "Porro Genevam simul ac me recepi , correptus sum vehementi catarrho, qui tanta vi in superiorem gingivam incubuerat. ut duplici phlebotomia bis repetitis catabotiis compluribusque fomentis nono demum die vix fuerit mitigatus." (CO 10b. 63)
55) A. Pierson은 칼빈이 병이 나은 8월 28일과 9월 5일 사이에 강의를 시작 했다고 주장한다. (op. cit. p. 256)
56) 「기독교 강요」의 Praefatio에서 칼빈이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대비시킨 것은 적대자들이 카토릭 교회의 외형성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자기가 옹호하는 교회가 통시적으로 하나 님의 백성과 일치함을 보이기 위함이다. 교회는 없었던 적이 없었다는 반 대자들의 주장에 대해 칼빈은 교회의 통시성에 있어서 외적 표적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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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일에 관여하고 이런 종교 회의에 참여한 후로 교회의 외 형적인 면에 보다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이런 변화는 1536년 11월에 칼빈이 화렐과 함께 작성한 제네바 교회 조직에 관한 조항과 신앙 고백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제네바 시는 칼빈이 도착하기 얼마 전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제네바는 그 당시 사보아(Savoie) 공작령에 속한 도시였 으며 시 주교는 사보아 공작의 하수인이었다. 제네바는 1534년 10월 정치적인 독립을 성취하였으니 종교개혁 도시 베른의 군사 지원은 제네바의 정치적 독립을 절대적으로 결정지었다. 제네바 의 종교개혁 여부에 베른의 지원이 달려 있었으므로 이 도시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동기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텔과 비레가 이 도시의 종교개혁을 실시함에 있어서 많은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시 정부는 종교 개혁을 수락했지 만 시민들은 여전히 타성에 젖어서 옛 종교적 관습과 생활 방식 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1536년도예 선포된 시 정부의 많은 결의들을통해 알수 있다:
3월 24일에 의회는 시민들이 도시 안에서 폐지된 미사에 참석
의 기준이 아니라고 역설하므로써 그는 외적 교회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통시적 교회. 하나님의 백성은 외적 형식과 무관한 비가시적인 교회였다. 이처럼 칼빈은 논쟁적 상황에서 어쩔 수없이 로마 교회의 외형성올 공격했지만 물론 전적으로 가시적 교회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제 6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칼빈은 영적 권세에 대해 논한 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가시적 교회에 대하여 적국적으로 서술하기 보다 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입각하여 카토릭 교회 성직자들의 권한의 한계 를 지시하고 교회의 무오성, 교회법에 대해 비판한다.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63
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57) 그러나 3월 31일 방드브르(Vandeuvres) 본당의 관리 사제는 매 일요일마다 미사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다른 본당에서도 같은 것 을 요청했으므로 시 의회는 모든 본당의 관리사제들을 다음 월요 일에 소집하기로 결의했다_58) 4월 3일(월요일) 시 의원 사보아 (Claude Savoye)가 모인 본당의 관리 사제들에게 복음에 따라서 살기로 결정한 것과 미사와 다른 교황파의 의식을 행하는 것을 금지한 것을 다시금 주지시킬 때에 사제들은 이에 동의하였다. 또한 화렐의 훈계를 들은 후 그들은 더 이상 미사나 다른 교황파 성 례전을 행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_s9> 4월 5일 의회는 관리
57) "Icy est este advise affin de vivre en meillieur unite et accord que Lon doebge faire deffence par les dizennes que nulz ne doebge aller oyr messe ny faire papal sacrement hors la ville quil noseroient faire dedans, aultrement quil y demeurent et seront estimez ennemys de la ville." (CO 21. 197)
58) "Le procureur de Vandeuvres au nom de toute la parroche ha requys que leur soit permise grosse clouche et toute Les dimenches une messe, par ce moyeng il sont contens de avoit tousiours apres ladite messe le sermon. Surquoy est este advise et pource que plusieurs aultres parroches demandent ainsy, est este resolu et arreste que Lon face venir tous les procureurs des parroches et tous Les prebstres avecque lungdi prochain et lon leur dira comment ilz se doibvent gouverner, puys apres lon leur pourvoitra des cloches .• (ibid.)
59) "Et touteffois affin que ii ne se ayent a arrester en erreur leur avons deffendu et deffendons par ces presentes que ce pendant et iusques ii nous ayent par les sainctes escriptures faict apparoitre quil 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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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과 함께 나타난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들에게 복음에 따라 살 것이며 사제들은 미사를 행하지 않을 것을 지시했다_60)
미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의 기록에 의하면 미사를 드린 사제들이 구금되었다_61) 5월 19일 화렐은 모든 시민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선하게 살 것을 권면하였고 이에 소위원회. 200 인 위원회는 각자 신앙의 새로운 종교개혁 정신에 따라 살 것을 결의했고 이 문제를 다음 일요일에 대위원회에 제 안하기로 했다.62) 5월 21일(일요일) 수도원에서 소집된 대위원회
doebgent faire ilz ne se doebgent empecher ny mesler de dire messe baptiser confesser esposer ny faire ny ministre sacrement que soit par lordre et ordonnance papale. en tant que ii cregnent nous desobeir." (ibid. 198)
60) 'Pourquoy nous Les avons exorte il doebgent vivre selon la sainct evangille et faict commandement que trestous doebgent oyr la predication de levangille sans en faire reffus et que Les dits prebstres des icy en avant ne doebgent plus dire de messes ny faire aultre papal sacriffice iusque a ce quil nous puyssent monstrer que aultrement se doege faire, · ·· · · ." (ibid. 199)
61 ) "Icy est este parle des prebstres detenus pour avoir diet messe contre Les deffenses et est este arreste et resolu que il soyent menez a Riva au sermon dimenche prochain a confesser devant chescung leur meffait etpar telz moyen leur sera pardonne." (ibid. 200)
62) "Icy est venu M' G. Farel · · ·· · · et apres avoir faict une grande admonition de bien vivre et selon dieu et mesmement de entretenir une bonne union entre le peuple et de chercher tous Les moyens pour cela faire, · · · · · Bur lesquelles choses est arretse que Lon doege assembler le conseil de deux centz et dire que lordinaire est de l'advys que Lon assemble ung grand conseil general pour y demander si chescung veult vivre selon la nouvelle refformation de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65
는 복음에 따라 살며 미사를 중지하고 다른 교황파의 우상을 금 지하며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의롭게 살 것을 결의했다.6:J)
7월 13일 그런데 제네바 교회의 장로가 여러 차례 미사를 집행 했음을 자백한다. 여기에서 市 문서는 미사를 행하는 자들을 “이 단적 도당’이라고 명시하고 있다_64) 7월 21일 또 다른 장로가 금 지령을 어기고 미사를 집행했다고 기록한다_65) 7월 24일 한 시민 이 설교를 듣지 않은 혐의로 의회에 소환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양심대로 하나님을 믿기 원하며 종교 개혁적 설교를 듣는 것을 강요당하기 원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이에 시의회는 그와 가족
la foy ainsy quelle est preschee · · · · · · Sur quoy est este resolu et conclu que lon se tient audit ordinaire conseil et que les choses soient mis en grand general conseil quil se debvra dimenche prochain assembler." (ibid. 200-201)
63) "sur quoy sans point daultre voix que une mesme est este generalement arreste et par elevation des mains en lair conclud et a Dieu promys et iure que trestous unanimement a layde de Dieu volons vivre en ceste saincte Joy evangellicque et parolle de Dieu ainsyn quelle nous est annoncee veuillans delaisser toutes messes et aultres ceremonies et abusions papales ymages et ydoles et tout ce que cela porroit toucher. vivre en union et obeissance de iustice.· (ibid. 202)
64) "Iacobus de Bonis presbyter. qui iuravit non amplius tractare illam hereticam factionem missalem, confitetur quod adhuc ab illo tempore citra celebravit plures missas in terra Genevae· · · · · · ." (ibid. 202-203)
65) 4. "Ibidem fuit loquutum quod ille presbiter de Malva, dictus don Iohan, celebrat contra deffensiones. Super quod fuit arretatum quod postquam facit contra deffensiones et ydlatrat capiatur." (ibid.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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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를 듣지 않을 것을 고집할 경우 10일 이내에 시를 떠날 것 을 명 령 했다_66) 9월 5일 화렐은 여 인들이 부르는 불건전한 가요 에 대해 보고했고 시는 그 가요를 금지 시켰다_67) 9월 8일 市는 슬프고 허황된 가요를 부르는 자를 처벌할 것을 경고한다.68)
66) "Idem foit petitus Io. Balard. quare recusat audire verbum Dei?
Qui respondit quod credit in Deum qui per suum spiritum ipsum docet. nee potest credere predicantibus nostris. Dixit. nos non posse cogere eum ad eundem ad sermonem contra suam conscientiam · · .. · · Omnibus auditis fuit sibi factum mandatum quod si non paruerit. cridis et iverit ad sermnem sicuti statutum est. ipse eiusque familia debeant exire civitatem infra decem dies proximas ab hac." (ibid.) 市의회의 이 조처를 놓고 A. Ganoczy는 종교재판소나 소르본에 비견할 만한 비관용적 결정이라고 비난한다. (Le jeunc Calvin. p. 104 참조) :L러나 당시의 혼란한 상황으로 보아서 이 추방 위인은 불가피한 섯이었댜 왜냐하면 市가 당사자에게 관용을 베푼다고 할 때 1롭 따르는 자들이 속출한 것이고 그러면 경국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 if모 돌아갈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조처는 위협에 불과했으며 신생에 옮겨지지 않았다 市는 당사자를 강제로 선교를 듣도록 완화 조처 :: 내,*}유음 8원 15일자 기록에서 볼 수 있다: "Fuit loquutum de Jo Balard et arrestatum quod mittatur quaesitum. et si recusaverit ire! auditum sermonem detineatur et per singulos dies ducatur ad serrnonem. Arrestum exsequatur super omnes sicut super Balard " (CO 21. 204) 그러므로 제네바 시가 종교재판소처럼 관용을 몰랐 다눈 비난? 납,.한함 수 없다
67) "Item conqucritur de carminibus quae mulieres inhoneste canunt per vias et civitatem. Super quo fuit arrestatum quod detur ordo ne sic fiat.'' (ibid. 204)
68) "Item fiant cridae ne quis canat cantilenas lugubres et vanas sub poena cortorii pro prima et coloris pro secunda." (ibid. 205)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67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제네바 市는 미사를 폐지하기는 했으 나 여전히 시민들은 미사를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삶을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전통적 체제는 파괴되었으나 제네바 시는 구체적인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종 교개혁은 미사 또는 불건전한 가요를 금지시키는 일과는 다른 것 이지만 사람들은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화렐 은 물론 개혁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직력은 부족했던 것같다.
칼빈은 자신이 제네바에 도착한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러나 얼마전에 교황파가 내가 언급한 이 선한 인물 「즉 화렐」 과 피에르 비레 선생에 의해서 이곳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일 들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시민들 가운데는 악하고 위험 한 분열과 파벌이 있었다_ .. 69) 전통적 규범 질서가 붕괴된 상태에 서 오히려 시민 도덕은 전보다 더 악한 상태에 떨어졌다. 여기서 칼빈이 말한 “시민들 간의 악하고 위험한 분열”은 아마도 종교개 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구교로 복귀하려는 사람들과 종교 개
69) "Or vn peu auparauant la Papaute en auoit este chassee par le moyen de ce bon personnage que i 'ay nomm, & de maistre Pierre Viret: mais les choses n 'estoyent point encore dressees en leur forme, & y auoit des diuision & factions mauuaises & dangereuses entre ceux de la ville." (Prface au Comrnentaires sur le livre des Psaumes) 비 교 : "Quand ie vins premierement en ceste Eglise il n '.Y avoit quasi comme rien. On preschoit et puis c'est tout. On cherchoit bien les idoles et les brusloit-on, mais il n '.Y avoit aucune reformation. Tout estoit en tumulte." (Discours d'adieu aux ministres 1564. CO 9. 89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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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 지지자들 간에 생겼던 분열로 보여진다.
칼빈이 제네바의 혼란 상황에 직면하여 개혁의 과제를 어떻게 설정했는가는 그해 11월 10일에 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 조직 에 관한 조항과 신앙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70)
먼저 이 교회 조직에 관한 항목들을 제안하는 이유는 제네바 교 회의 혼란에 직면하여 교회 정치의 가장 확실한 규범인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여 교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말한다.71)
70) "M. Gui!. Farellus proposuit articulos de regimine ecclesiae qui fuerunt lecti et super quibus fuit arrestatum quod articuli ipsi observentur integre et ruantur imagines in quibuscunque locis fuerint repertae et provideatur de praedicatis sicuti latius dicetur in ordinario consilio." (CO 21. 206) 이 시 의 회 문서 에 의하면 화렌은 11월 10일에 교회 조직에 관한 초안을 제출하였고 의 회七 그것들을 고려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200인 의회는 1537년 1월 16일에 이 뮤-서를 초안 그대로 채택하지를 않았다: "Icy est este parle et sont estes leuz Jes articles donnes par M· G. Fare! et Jes aultres predicans. Est arreste mettre en conseil de 200 nostre advys quest. que de la cene elle se face quattres foys Ian.-----·" (ibid.) Calvini Opera의 편집자에 의하면 이 문서의 제목은 「Articles bailles par Les prescheurs. 16. Ianuarii 1537」으로서 제네 바 시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으며 Jean P. Gaberel, 「Histoire de !'Eglise de Genve」 , T.1. Pice justif. p. 102에 수록되 어 있다. 이 시 문서는 초안의 저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화렐은 설교자의 대 표로서 그것을 제출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칼빈을 그 저자로 본다.(CO 10a. 5 참조)
71 ) "Que Les ordonnances par lesquelles son eglise est entretenue sont que elle soyt urayement et le plus prest que {ere se peult confermee a sa parolle qui est la certayne reigle de tout gouuernement et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69
이를 위한 중요한 과제는 첫째로 성만찬을 적어도 매 主日마다 거행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그 이유는 성만찬을 통해 믿는 자들 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함으로써 모든 약속과 위로를 받고 한 몸의 지체로서 평화와 일치 속에 살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행 전 2.46에 기술된 대로 미사가 도입된 후 폐지되기까지 성만찬은 초대 교회의 관습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예를 따라서 성 만찬을 자주 거행함은 믿는 자들의 경건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하다. 그러나 갑자기 성만찬을 자주 거행할 경우 그것의 거 룩한 신비가 경멸당할 위험이 있음을 고려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세 교회가 3 개월마다 돌아가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며 이 예식은 제네바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이를 위하여 적 합한 시간을 택하며 일 주일전에 공고한다. 또 그 신비가 경멸당 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의 사역자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72)
둘째는 성만찬에 사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참여함을 통해 마치 주의 교회가 사악한 자들의 집단처럼 보임으로써 주가 모욕을 당 하지 않기 위하여 출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 이미 주는 하나 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교정하도록 출교를 그의 교회에 지시했음을(마태 18) 말한다. 출교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 잘못 에 수치감을 느껴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출교는 사
administration mays principalement du gouuernement ecclesiastique. (CO 10a. 7)
72) ibid. 7-8. 성만찬을 거행하기로 제안한 제네바의 세 교회는 Saint Pierre. Rive. St. Gervais이다 한편 우리는 성만찬을 자주 거행하라 는 요구와 성만찬 이해에서 칼빈이 저자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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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오염되지 않고 그들의 예를 통 해 같은 잘못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73)
출교는 초대 교회에서 교회의 발전과 유익을 위해 잠시 동안 실 천되었으나 그후 일부 사악한 주교들이 이것을 독재적으로 남용 하여 왜곡시켰다. 그러나 출교는 본래 주가 제정한 것 중에서 가 장 구원을 위해 유익한 일이라고 말한다.74) 여기서 항목의 저자는 출교가 가지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이것을 본래의 목적대로 복 구시키고자 제안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을 기하고 있다.그러므로 저자는 다시 출교의 의도를 설명한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출교는 성서에 쓰여진 법 대로 실행되 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시 정부는 행실이 좋은 몇 사람을 선발하 며 이들을 시내 각처에 파견하여 시민들의 행동을 감시하게 한 다 이것은 장로의 직무에 해당되지만 여기서는 장로 명칭을 사 용하지 않는다. 이들이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상당한 악을 발견 하였을 때 먼저 그 사람에게 몇명의 목사와 함께 교정하도록 층 고한다. 이 충고가 효과가 없을 때 목사는 이들의 동의를 얻어서 그 사람을 교정하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음을 회의에서 공적 으로 선언한다. 이는 목사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출교 선언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때 비로소 출교를 선언할 수 있 다 출교된 표지로 해당자는 성만찬에서 제외되며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지 못하도록 다른 신도들에게도 공시한다. 그러나 그는 여 전히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설교를 통해 그가 회개할
73) ibid. 8-9.
74) ibid. 9-10.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71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75) 출교에 의해서 징계되어야 할 악은 바울이 언급한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 이웃이나 부모가 악을 인 지했을 경우 그들이 먼저 악한자에게 충고하고 이것이 소용없을 때 위에 언급한 파견 위원들에게 알린다. 교회는 이 징계 이상의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동의 하지 않고 마음 속에는 여전히 미신을 품고 있는 시민들이 여전 히 많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우선 출교당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정하는지 여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모든 시민들은 자 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시의 위정자들이 먼저 시범을 보여야 한다.76)
셋째, 시편 찬송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 찬양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 역시 성서가 보여주는 옛 교회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다. 시편 찬송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의 영광을 찬미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77)
넷째, 시민들을 순수한 복음의 가르침 안에 보존하기 위해 어린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해야 한 다. 이를 위해서 옛날에 교리 문답 교육이 있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멸과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함은 교 회에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제도는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초 교리를 모든 아이들이 배워 목사 앞에서
75) Ibid. 10.
76) ibid. 11-12.
77) ibid.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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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받도록 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신앙 문답 준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78)
마지막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혼인에 관한 모든 문제를 판단 결정하도록 위임하되 몇 목사와 협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원 회는 판단을 위한 규정을 만들 것이며 시 정부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79)
이상에서 본 대로 칼빈이 제일 처음에 성만찬에 대해 언급한 것 은 그가 얼마나 이 성례전을 중요시하였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초대 교회가 그러했듯이 교회를 무엇보다도 주의 식탁에 모인 공 동체로 이해하며 성만찬을 구원을 위한 은혜, 약속의 확증, 위로 의 가시적 표적으로 보며 성만찬을 통한 친교의 열매를 역설하였 댜 그러므로 그는 가능한 한 자주 성만찬을 거행할 것을 요청하 였던 것이다.
출교에 대해 특별히 상세한 규정을 정한 이유는 여전히 구교 신 앙을 고집하는 자들로 인한 종교개혁의 지지부진한 상태를 바로 잡으며 동시에 시민들이 새로이 알게 된 믿음을 고백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시편 찬양에 관한 규정은 시민들이 불건전한 가요를 부르는 것 을 선도하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저자는 음악은 인간의 귀를 즐 겁게 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고백하기
78) ibid. 12-13
79) ibid. 13-14.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73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성 서에 나오는 시편 가사 외에는 하나님 찬양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을것이다.
또 혼인은 카톨릭 교회의 7 성례전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칼빈 은 이미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혼인을 성례전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 바 있다.80) 항목의 저자는 이런 입장에 근거하여 혼인을 교회 성례전에서 제외 시켜 세속 정부에로 이관하였음을 본다.
성만찬의 매월 거행, 출교의 강화 및 감독관 임명, 신앙 고백 의 무, 시편 찬양 신앙 요리 교육 혼인 업무 이관에 관한 제안들은 종교 개혁을 위해서는 불충분하고 덜 구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제네바의 혼란한 상황에 직면하여 철저히 성서에 입각 하여 종교개혁을 진척시키기 위한 일차적 프로그램에 불과하였 다伊 제네바의 목사들은 개혁을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을 제안함 을 통해 제네바에서 카톨릭 미사를 폐지한 후에 발생한 영적 공 백 상태를 신속히 치유하고자 했다. 목사들은 신도들의 신앙을 양육하고 실천 여부를 감독하기 위해서 구체적 형식, 제도가 필 요했다. 이 항목의 저작권이 칼빈에게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칼 빈이 얼마나 기독교 강요 이후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는가 를 볼 수 있다: 칼빈은 교회는 양떼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온갖
80) OS 1. 222-223 참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혼인을 성례전이라고 주장함 으로써 혼인 문제를 교회가 주관했으며 세상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영적 인 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는 모든 인간사에 대한 교회의 월권 행위 를 위한 좋은 빌미였다고 칼빈은 본다
81) 이 제안들은 원안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관해서 1537년 1월 16일자 시의회 회의륵 참조, (CO 10a. 5: CO 21,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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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따라서 양떼를 책임지고 있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제 가시적 교회와 성만찬과 출교, 시편 찬송. 신앙 고백 등과 같은 교회의 모든 외형적 사건은 중요하게 되었다.
그가 성만찬, 출교, 입으로 하는 고백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카 톨릭 측의 비난, 즉 종교개혁이 행위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며 윤리를 부패시킨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였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들이 카톨릭 미사를 폐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시민들이 영혼과 몸으로써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만일 칭의를 가져오는 신앙이 외적 행위에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칼 빈은 형식적 종교에 대해 혐오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몸으 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 성이 되기를 원했다. 마음으로 믿는 신앙과 외적 고백의 상관성 은 하나님이 명령한 거룩한 신적 질서다.82) 칼빈은 제네바에서 종 교개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지근한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용 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시민에게 시편만으로 노래 부르며. 아이듬에게는 어릴 적부터 신앙을 가르치며 시의 당국자 를 포함한 모든 시민들에게는 신앙 고백에 서명하기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82) "Car nous voyons que lescripture nous a conjoinct tousjours la confession auecq la foy, et nous diet que si nous crayons veritablement de cueur a justice quil nous fault confesser de bouche a salut ce que nous auons creu." (CO 10a, 12)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75
이제 그가 화렐과 함께 만든 신앙 문답서의 내용을83) 살펴 본다 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 십계명. 선택과 예정, 신앙, 사도 신조, 주기도문, 성례전, 교직, 인간 전통, 출교, 세상 정부의 순 서로 되어 있다. 신앙 고백은 신앙 문답서를 발췌 요약한 것에 지 나지 않는다. 신앙 문답서를 「기독교 강요」 초판과 비교해 본다면 거의 그 순서가 일치한다. 여기에서 새로이 들어간 내용은 예정 과교직에 관한부분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사도신조의 제 4항목 거룩한 카톨릭에 대한 신앙을 논하는 곳에서 교회를 선택된 백성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그의 백성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외없이 소명과 칭의에서 드 러난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자들은 멸망할 수 없고 결국 구원 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예정되지 않은 자에 대해 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칼빈은 아담의 타락 이래로 시 작된 선택의 역사를 지시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영속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칼빈은 본격적으로 예정 론을 논한 것이 아니라 교회론의 맥락 속에서 예정을 취급하였다 고 말할 수 있다.84) 그러므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엄
83) 1537년에 출간된 「제네바 교회의 교리문답과 신앙 고백」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eue)에는 저자 이름은 언급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연구자들은 그 내용에서 미루어 볼 때 칼빈이 집필에 가담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OS 1. 363-368:
co 22, 5-6 참조
84) OS 1. p.86-8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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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한 의미의 예정론에 대해서는 아직 개진하지 않은 셈이다.
한편 1536년의 신앙 문답서는 예정된 자와 버립 받은 자를 구 별한다. 또 왜 하나님이 이렇게 두 부류의 인간들을 구별하는지 는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경륜은 거룩하고 의롭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들을 모두 멸망시 킬 수도 있었지만 그의 자비에 의해 일부를 멸망에서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자비의 그릇이고 버립 받은 자들은 진노의 그릇이다. 또한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되었고 그리스도가 생명이며 구원의 보증이므로 그를 믿음 안에 서 받아들이고 붙잡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다고 가르친다.85)
이상의 예정론에는 칼빈의 이후 예정론의 단초가 뚜렷이 드러 난다. 즉 예정론은 神論 안에서가 아니라 신앙론 안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 그러면 문제는 왜 칼빈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새로이 언급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구원의 확신 에 대한 언급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86) 즉 제네바의 시민들에 게 율법 준수를 통한 윤리적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그 동기 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을 주는 일이
85) co 22. 46-47.
86) "Car comme en Christ sont eleuz tous ceulx lesquelz ont este preordonnez a vie devant que les fondement du monde ayent este constituez, aussi il est celluy auquel le gaige de nostre election nous esz presente si nous le recevons et embrassons par foy_· (CO 22, 47) 〔번역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선택된 것 같이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이며 포옹한다면 그에게서 우리 선택의 담보가 우리에게 제공된다.〕
칼빈의 「두 서신」과 니코데미즘 77
었다. 만일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할지라도 구원 받을 확신이 없다 면 선행을 할 의지가 상실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그리스도에 대 한 믿음이 선택받은 증거라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선행을 위 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칼빈이 하나님의 예정을 역설함 으로서 윤리적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의 목사직에 대해서 목사는 백성에게 순수 한 교훈을 가르치며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 외에 또한 성결한 삶 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교회의 훈련과 질서 를 멸시하는 자들은 이단자와 같으며 교회는 목사없이 존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87) 이로써 칼빈은 교회를 통한 경건 훈련이 신앙 에 필수적임을 인식하고(그러므로 목사는 신도들의 윤리적 귀감이 되어야 한다) 신앙과 외적 행위 내지 고백의 일치에 대해 큰 비중 을 두게 되었다. 또 그리스도에 의해 파송된 목사에 대한 복종은 곧 그를 파송한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즉 목사는 그 리스도의 대언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교회가 목사없이 존 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옛날 사도들이 사라진 후 속사도 시대의 교회는 이단, 분파에 대결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때 교회는 감독에게 진리의 수호 자,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권위를 부여하였다. 신앙 문답서를 만든 칼빈은 어쩌면 속사도 시대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을 까?
돌이켜 보건대 제네바 교회는 카톨릭 교회의 후견과 통제에서
87) co 22,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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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남으로 인하여 종교. 윤리적 무정부 상태에 떨어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시민 법으로 이를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시민들을 종교개혁 신앙에 따라 살게 하기 위해서는 제네바 교회 는 사방으로 홑어지려는 양떼를 다시 교회에 모아 들이고 주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길들일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수행하기 위해서 제네바의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강력 한 권위를 요청하였다고 보여진다. 목회 경험이 없었던 칼빈이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영적 권위를 가능한 한 제약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에 비교한다면88) 이런 입장의 변화는 얼마나 놀라
운가?
결국 이상에서 본대로 칼빈은 제네바 교회로 온 이래로 자신이 종래 가지고 있었던 교회관을 수정하여 가시적 교회에 대해 보다 적극적 입장음 취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회를 단순히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하는 것으로 보 지 않는다. 교회는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이므로 그 지체들의 성 화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양떼에게 주의 말씀을 가 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훈계하고, 위로하고. 권면하고. 징계할 의무가 있다. 또한 교회는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할 책임도 있다. 이처럼 칼빈이 개인의 성화. 즉 신앙의 삶에 보다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면 이것은 그가 이미 전에 인식한 바 신앙에 있어서 고백이 필수적이라는 통찰이 그의 목회 경험에 의 해 보다 심화된 결과이다. 또한 칼빈이 교회의 외형적인 질서. 즉 교회의 성화를 중시하게 된 것도 바로 그의 고백 신학의 한 표현
88) 이에 대해서 OS 1. p. 234f.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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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자기가 믿는 바를 고백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신앙을 증오하며 「두 서신」에서 보는 대로 외형적인 신앙, 즉 신앙의 고백을 역설한다.89)
89) 칼빈이 어중간한 신앙 태도에 반대하여 기독교의 외형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였다. (E. Saxer. Aberglaube. Heuchelei und Frmmig- keit. p. 135. 특히 주 336 참조)
80 韓國敎會史學會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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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로 '니고데모파를 향한 칼빈의 설교'를 링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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