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제사'와 '추도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 이유 - 논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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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자료/추천 신학 논문

그리스도인이 '제사'와 '추도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 이유 - 논문 포함

개혁신학어벤져스 2023. 11. 20. 10:59

 제사그로 말미암아 파생된 추도 예배신학적으로 큰 문제를 낳습니다.

 특히, 이들은 동양에서 매우 영향을 끼치는데, 아래의 논문은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처방법을 원론적으로 제언합니다.

 핵심적으로 제사와 추도 예배는 '동양 선교'를 위해, 폐지 및 변경되어야 합니다.

 -> '추도 예배'에 관해, 이전에 업로드한 자료를 참고하시고, '제사'에 관해 가장 아래의 논문(PDF, HTML)을 읽어보세요! 추도식을 잘 설정&사용하면, 웬만한 문제를 다 해결하고, 오히려 선교의 발판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22.12.09 - [연구소/오픈 자료실(연구소 & 교회)] - '추도 예배'와 '추도식으로의 전환 필요'에 대해 - 순서지 첨부

 

추도 예배란? - 추도식으로의 전환 필요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추도예배가 아니라, 추도식을 드리는 것이 좋다. 원래,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이 유일한 ‘예배의 목적’이다. 추도예

cr-ministry-institute.tistory.com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pdf
0.43MB

 


 

157  
KRJ 50(2019) 157-187  
조상제사에 관한  
1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배 춘 섭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교수, 선교신학  
1 서론  
조상제사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논의할 때 중요하게 제시되는 주제  
2
중 하나이다. 복음은 타문화권에 전파될 때 의도치 않은 복음의 오해나  
논문투고일: 2019. 11. 14  
논문수정일: 2019. 12. 09  
게재확정일: 2019. 12. 10  
*
1
최근까지 조상제사에 관한 다양한 논문들이 출판되었다. 비록 조상제사가 역사학적 관점  
에서 자주 다뤄졌지만,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복음과 문화의 상관관계속에서 조상  
제사 문제를 Text 중심으로 심도 있게 논의한 논문은 흔치 않다. 예를 들어, 상황화 신학자 로버  
트 슈라이터(R. Schreiter)혼합주의이중 종교체계에 관한 논의를 통해 타종교를 이해하  
지만, 본 연구는 타종교를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선교적 대안을 찾는다, 이것  
은 저자의 의도(Intention)가 기독교의 돌파구를 유교사상을 전승한 조상제사 분석을 통해 추구  
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요한네스 헤르만 바빙크(J. H. Bavink)의 엘렝틱스(Elentics)  
이론처럼 선교전략의 한 대응으로서 복음을 통해 문화가 변혁됨을 추구하는 선교전략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2
본 연구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문화 속의 타종교를 이해하고 접근해야  
158 개혁논총  
왜곡이 발생한다. 이것은 현지인이 내부자적 관점으로 복음을 재해석하  
여 수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선교사가 타문화권에서 이런 해석과정을 인  
지하지 못한 채 복음을 무분별하게 문화변용적 입장에서만 전한다면, 현  
지인은 기독교의 복음을 외국종교로 인식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선교의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한국일은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신학적 고찰: 복음과 문화의 관점에  
라는 그의 논문에서 선교현장에서 직면하는 조상제사의 문제를 다음  
과 같이 논의한다.  
조상제사의 문제는 선교현장에서 직면하는 가장 예민한 주제 중 하나이다.  
특히 아프리카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기  
존의 조상제사의 전통과의 충동이나 갈등이 적지 않게 발생했으며 그로 인  
하여 초기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족, 친지, 마을 사람들로부터 많  
은 박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현상은 120여년 전 우리나라 초기 선교시  
대에만 속한 현상이 아니라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 특히 제주도나 유교문  
화권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경상남도 안동지역 혹은 시골지역에서는  
3
여전히 제사문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나타난다.  
이처럼 조상제사는 여전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선교의 기민한 주제  
로 꼽힌다. 실제 조상제사는 국내복음화에 상당한 걸림돌이며, 동시에 복  
음과 문화의 관계에 있어 상황화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일례가 되는 것이  
할 것인가?”에 관한 선교학적 접근과 실천적 방법론을 다룬다. 이것은 선교사가 문화우월적인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를 벗어나 타문화의 세계관을 이해함으로써 복음이 왜곡되거나  
상황화 되는 위험을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음은 복음과 문화에 과한 다양한 신학적 견지의  
논문들이다. 참고) 이정순, “조상제사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신학과 실천」 통권30호  
(2012): 67-90; 김중은,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성경적 조명,” 「교회와 신학」 통권42(2000):  
12-30; 이정배, “제사와 예배-조상제례의 신학적 재구성,” 「신학과 세계」 통권61(2008): 154-  
185; 강경림, “중국과 한국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조상제사 수용과정,” 「신학지평」 통권  
12(2000): 85-106; 배요한, “유교의 조상제사관에 관한 고찰,” 통권45(2013): 405-431.  
3
한국일,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신학적 고찰: 복음과 문화의 관점에서,” 「장신논단」 통권12  
(2005): 400.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59  
. 이것은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를 무시한 채 복음을 전해서는 불가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가 서양의 종  
교이자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종교이다라고 인식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  
가 조상을 향한 제의적 예()를 고유의 한국적 미풍양속(美風良俗)으로  
여기기보다, 단순히 우상숭배로 치부하여 전통적인 유교의 관습을 거부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전통적 관  
습에 따른 조상제사 예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비록 사회가 문명화  
되고 세속화되었다고 할지라도, 한국 사회에서 조상제사는 여전히 존재  
하며 끊임없이 여러 모양으로 행해지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한국 사회에  
조상제사가 여전히 성행하는 이유와 조상제사의 역사 그리고 기독교적  
4
관점을 고찰하고 어떻게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  
인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조상제사  
최성수는 “조상제사가 갖는 신학적인 문제”에서 조상제사에는 사람들  
이 지니는 기대지평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대지평으로 인해  
사람들은 조상제사가 기독교 정신에 위배 됨을 지각(知覺)하면서도, 조  
상을 향한 제의를 쉽게 떨치지 못한다고 부연(敷衍)한다. 그는 조상제사  
의 비기독교적 관점에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또한 죽은 자에 대해 윤리적인 행동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살아  
4
개혁주의 신학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할 것. 문병호, “개혁주의란 무엇  
인가?: 신학과 신앙의 모델,” 「개혁논총」 27(2013): 61-93; 양현표,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신  
사도 개혁운동,” 「개혁논총」 30(2014): 229-261; 신경규, “종교 다원주의의 제 이론과 개혁주  
의적 평가,” 「개혁논총」 3(2005): 1-17; 서철원, “개혁주의와 장로교회,” 「개혁논총」 34권  
(2015): 9-25.  
160 개혁논총  
있는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기독교 윤리적으로  
타당치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조상제사속에는 죽은 자의  
삶의 연속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하게 보자면 그것은 죽은 자에 대  
한 태도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조상제사에 대한 신학적인 여러 비판  
들은 신학적인 논의가 생략된 채 단지 조상제사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만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요컨대 조상제사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을 수정하기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데 부  
5
족하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최성수는 현대 사회에 조상제사가 그치지 않고 만연한 이유를  
조상제사에 속한 기대지평 가운데서 찾는다. 그리고 조상제사에 깃든 기  
대지평은 다름 아닌 씨족공동체 속에 묶인 혈육적 가족의식이라고 정  
의한다. 그는 조상제사의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두 가지 요소 때문에 사람  
들이 조상제사에 종속된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조상제사가 효의 연장’  
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조상제사를 통해 가족공동체 의식이 회복된  
6
다는 기능적 요소이다.  
먼저 효의 연장으로서의 제사는 유교적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조상제사는 유교가 강조하는 가족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의  
미를 지니는데, 사람들은 제사를 통해 개인적 소속감뿐 아니라 내면적 정  
(淨潔)을 경험하게 된다. 정진홍은 유교 안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조상제사 의식(儀式)을 통해 구성원들이 현세 속에서 거룩함과 구원을  
7
경험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유교가 개인  
의 존재적 근원이 가족공동체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아울러 삶의 방향과 목적을 발견하는데 상당한 영  
향력을 끼친다. 이런 이유로, 후손들은 조상제사를 함으로써 향후 자신들  
5
6
7
최성수, “조상제사가 갖는 신학적인 문제,” 「기독교사상」 통권 42(1998): 120.  
최성수, “조상제사가 갖는 신학적인 문제,124-129.  
정진홍, “개신교의 관혼상제,” 『기독교와 관혼상제』, 박근원 편 (서울: 전망사, 1985), 54.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61  
의 자손으로부터 영원히 기억되고 존중받기를 갈망하는 기대지평이 생  
성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조상제사의 기능은 가족공동체 의식의 회복이다. 이것은 후손  
들이 조상제사를 행함으로써 죽은 조상들과 만남을 갖고, 그들을 통해 현  
세의 가족공동체의 의식이 더욱 강화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범은 이  
런 조상제사의 기능을 상황화 신학의 범주 안에서 문화적 관점의 변형된  
신학사상을 제시한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공동체  
의 성격으로 제시된 것을 인지하여 조상제사를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비  
추어 이해될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 죽음에 착안하여,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산 자와  
8
죽음 자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박종천은 조상제  
사 안에서 기독교의 성찬예식을 바라본다. 그는 조상제사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인 사역에 근거해 충분히 기독교적으로 토착화되어 교회 안에  
정착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김관봉은 관혼상제(冠婚喪祭)  
의 책자에서 제사의 의의를 당연한 듯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제례는 한 마디로 조상숭배 제의라고 말할 수 있다. 조상숭배는 자손으로서  
도의적으로 마땅히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조선 5백년 동안 치국이념  
으로 형성되어 민속화는 물론 가신신앙(家神信仰)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사  
, 가족, 성품, 사고구조에까지 확고히 뿌리 박혔다. 그래서 흔히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고, 조상 없는 자손이 어디 있겠느냐?』고, 조상숭배 관  
념이 통념화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게  
한 근본이 되었다. … 그러므로 형식의 단을 보완하여 5백여년 간 지켜졌으  
,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이 놀라운 현상, 즉 제례(祭禮)를 오히려 장려해  
9
야 할 것이다.  
8
이상범, “조상제사에 대한 복음적 조명,” 『기독교와 관혼상제』, 박근원 편 (서울: 전망사,  
1985), 98.  
김관봉, 『冠婚喪祭』 (서울: 태서출판사, 1980), 180-181.  
9
162 개혁논총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가족들이 부모가 소천하면 제패를 만  
들어 집안에 모셔 놓고 죽은 조상을 섬긴다. 그러면서 조상제사는 가문의  
뿌리를 지탱하며, 가족공동체의 당연한 예절로 인식한다. 이것은 조상제  
사의 기능이 인류학적 관점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반하여 오랫동안 체계  
화되고 유지된 이유임을 알 수 있다. 실제 한국일은 “조상제사의 문제는  
종교성을 논하는 차원만이 아니라, 가족과의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사회  
적 요인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거부하는 심정적 요인, 제사문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초신자의 입장, 신앙이 궁극적 대상을 선택하는 영적 대결  
10  
의 차원까지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이며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다” 고 말  
한다. 이것은 선교사가 조상제사의 영역권에서 그들의 내부자적(emic)  
문화화 세계관을 재고하지 않고, 단순히 외부자적(etic) 선교사의 관점에  
서 복음을 전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조상제사의 기원  
한국의 조상제사는 중국의 제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한국 조상제사의  
기원은 유교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 논어』 에서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방법을 세 가지로 묘사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효자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공손히 봉양해야 한다. 둘째, 효자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여 상()을 치러야 한다. 끝으로 효자는 돌아가신  
11  
부모의 상을 마치면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런 죽은 조상과의 밀  
접한 관계는 전통적 규범과 예절을 강조하면서 도()와 조화를 이루고  
자 하는 중국인의 세계관과 상당히 맞물려 있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  
10 한국일,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신학적 고찰: 복음과 문화의 관점에서,401.  
11 孔子, 論語, 도광순 역, 『논어』 (서울: 문예출판사, 1977), 14-15.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63  
)의 책을 보면 사당참례, 삭망참례, 시제, 기제, 이제, 묘제, 연준절사,  
12  
천신등 여덟 가지 종류의 제사가 나열 된다.  
조상제사에 관한 문헌은 중국 하()나라와 상()나라 때 정식으로 제  
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엔 부모에게 직접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라, 뛰어난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 풍습이었다. 그러나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던 풍습은, 자신들의 조상이 훌륭하다는 것을 드러  
13  
내기 위해 점차 각 귀족가문의 조상제사로 돌려졌다. 이것은 조상을 위  
한 제사가 아니라, 자기 가문의 명예와 권력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것  
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이 같은 현상은 평민들에  
게도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조상제사는 풍수지리설(風水地  
理說)과도 연계되었는데, 이유는 조상제사를 명당(明堂)에서 지냄으로  
, 각 가문이 왕실과 귀족의 권위와 버금가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송()나라에 이르러, 성리학자 주자(朱子)는 이론  
적으로 조상제사의 사상 체계화하여 조상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도록  
영향을 주었다.  
한국은 신라나 고구려 때 위대한 왕에게만 제사를 지낸 바 있다.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13세기 고  
려 말()에 중국의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사당(祠堂)을 짓기 시작했다.  
사당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서 휼륭한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된 후 국교(國敎)는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바뀜으로  
, 조상제사는 더욱 사회에 보편화 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는 서  
(庶民)의 가정마다 가묘(家廟)가 존재했다. 집 안에는 사당을 만들어,  
방 앞에 신주(神主)를 두어 거기에 절을 했다. 그리고 사람의 영정(影幀)  
12 김관봉, 『冠婚喪祭』, 181.  
13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256.  
164 개혁논총  
이나 그림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다가, 나무토막에 이름을 써서 신주를  
만들었는데, 훗날 신주는 위패’(位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추  
14  
후에는 종이를 접어 지방’(紙榜)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었다.  
손봉호박사는 조상제사가 한국 고유의 풍속이 아니라 중국에서 전래  
된 양식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사가 한국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풍속이  
라는 것이다. 본래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해 오던 전통이 아니고 13세기  
이후에 그것도 억지로 본래 왕가에서 제사를 지내라는 강요에 의해 생겨난  
풍속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본래 한국 사람이 해오  
던 버릇도 아니다. 단지 유교에서 들어온 풍속, 그것을 정착시킨 것에 불과  
15  
한 것이다.  
이렇듯 유교적 조상제사는 본래부터 한국의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온  
미풍양속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풍속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앙 역시도 비전통적인 양식으로서 한국에서 배척될 사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불교(佛敎)는 인도에서 비롯되었고, 유교  
(儒敎)는 중국 역사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기독교가  
기꺼이 한국적 정서에 융합될 가능성이 존재함을 뜻한다. 만일 기독교가  
한국인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불교와 유교의 사상 역시도 마  
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상은 한국의 정서와 문화에 얼마  
든지 토착하여 변혁적 가능성이 존재함이 명백하다.  
윤여빈은 그의 책 『우리 예절 바로 알기』에서 우리나라가 현대화되면  
서 변천된 조상제사 역사를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14 이종윤, “조상숭배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답,”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이종윤 편 (서울:  
엠마오, 1995), 23-26.  
15 손봉호, “제사와 현대문화,”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이종윤 편 (서울: 엠마오, 1995), 38.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65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3품관(2급 이사관) 이상은 고조부모(4  
)까지, 6품관(5급 사무관) 이상은 증조부모(3)까지, 7품관(6급 주사) 이  
하 선비들은 조부모(2)까지 제사를 지냈고, 보통 서민들은 부모 제사만  
지냈다. 조선 중기까지는 윤회봉사(輪回奉祀)라고 하여 차례로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고, 분할봉사(分割奉祀)라고 하여 제사의 일부를  
나누어 맡기도 하였다. 또한 아들이 없을 경우 외손봉사(外孫奉祀)도 실시  
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고조부모(4) 까  
지 조상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나 1969년에 제정된 가정의례 준칙에서는 조  
16  
부모(2)까지만 지내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상 살핀 바처럼 한국의 조상제사는 오늘날에 이르면서 차츰 간소화  
되고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제사는 세 가지 이유  
로 사람들의 문화에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그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조상제사는 문화 인류학적 기능을 통해 공동체 의식의 연합을 추구한다.  
둘째, 조상제사는 사회정치학적 기능을 통해 국가 및 집단의 중앙집권적  
통합한다. 끝으로 조상제사는 종교현상학적 기능을 통해 죽은 조상들의  
17  
도움을 받아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런 조상제  
사의 기능은 필연적으로 기독교가 조상제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신학  
적 접근을 했는지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4 조상제사와 기독교  
한국의 초창기 기독교인 천주교와 개신교는 조상제사에 관해 본질적  
으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지닌다. 초기에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이교적인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강하게 거부했지만, 차후 로마 교황청의 결정이 번  
복되어 문화적 차원에서 수용 가능한 제의로서 통합되었다. 반면 개신  
16 윤여빈, 『우리 예절 바로 알기』 (서울: 농민신문사, 2000), 140  
17 배춘섭, 『기독교와 조상숭배』 (경기: 목양출판사, 2010), 65-73.  
166 개혁논총  
교는 문화보다 복음적 차원에서 시종일관 조상제사의 수용을 반대했다.  
4.1 천주교의 조상제사 관점  
『 천주실의』 의 저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조상제사를 단순히  
유교적 전통의 관습으로 인식하여 천주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  
았다. 이와 달리 프란시스칸(Franciscan) 선교단과 도미니칸(Dominican)  
선교사들은 조상제사를 미신과 종교적 행위로 간주했다. 이런 이유로  
1715년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유교적 조상숭배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  
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 제사문제에 관한 청원서』 를 교황 베네딕트 14세에게 보내어 조  
상제사에 숨겨진 비기독교적이며 이교적인 종교행위를 고발한다. 그러  
자 교황 베네디트 14(Benedict XIV)1742년에 재차 조상제사의 유교  
적 제례의식은 우상숭배로서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기에 가톨릭교회에  
용납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그는 1773년에 조상제  
사를 수용한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해산시키고 소속 선교사들에게  
소환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자 중국정부는 천주교회가 조상제사를 거절  
했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유교의 가치에 반하는 반국가적 집단이자 사회  
적 혼란의 근원질로으로 여김으로써 참혹한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런 로마 교황청의 결정과 궤를 같이하여, 조선의 천주교회도 조상제  
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천주교  
지도자인 윤우일은 1790년에 당시 북경에서 외방선교회 주교였던 알렉  
산드로 구베아(1751~1808)로부터 조상제사는 미신이므로 금해야 한  
는 자문을 받아, 한국 초기의 천주교회에 조상제사를 거부하도록 영  
18  
향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791년 이 같은 가르침이 현실로 나타  
났다.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母親喪) 때에 상례(喪禮)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67  
를 갖추지 않고, 친척 권상연(權尙然)도 신주를 불태우며 조상제사를 폐  
지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정부는 숭유(崇儒) 사회를 근본적을 위태롭게  
만드는 천주교를 반국가적 행위를 하는 이적 집단으로 낙인하고, 사문난  
(斯門亂賊)으로 간주하여 천주교에 대대적인 가혹한 탄압을 가하기 시  
작했다. 백낙준은 조상제사 거부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때를 1791년의 신  
해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으로 분류한다. 그는 이 같은 조선 정부의 대대적  
박해로 인해 천주교 신자의 약 8000 명 정도가 순교를 당했다고 언급한  
. 그리고 1836년에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26명의 프랑스 선교사  
19  
들 중 12명이 순교하고, 4명이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만열 교  
수는 이 같은 천주교의 조상제사 거부로 인한 박해를 언급하면서, 역사적  
으로 피할 수 없는 반성에 직면케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은 1918년 경부터 우리나라 남산에 조선신궁이라고 하는 신사(神社)를  
만들었다. 이에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1925년 신사참배는 확실한 이단임  
을 선언한 적이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과 이탈리아, 독일이 2차 대전  
직전에 서로 밀접한 동맹관계를 갖게 되자, 일본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하여금 일본, 조선 천주교회가 신사참배 하도록 공작을 꾸몄다.  
그 결과 이례적으로 교황청 포교성이 신사는 국가의식이다라는 결정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조선 천주교회는 1925년에 이미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6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라는 포  
교성의 선언이 있자 곧 신사참배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사참배  
는 하면서도 자기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 하여 그  
것이 계기가 된 듯 한국 천주교는 제사에 대해 완강했던 자세를 무너뜨리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천주교 가정에서도 제사를 지내도록 되어 있다. 어쨌든  
제사문제로 죽임을 당한 신앙의 선배들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후배들이 그  
들을 성자의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그에 앞서 좀 더 분명히 했어야 할 문  
20  
제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18 정두희,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 (서울: 바오로딸, 1999), 32.  
19 백낙준, 『한국 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56.  
168 개혁논총  
이상의 언급처럼, 로마 가톨릭교회는 1935년 교황 파이우스 11(Pius  
XI)가 공자(孔子)의 존경의식을 허용하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  
를 수용하면서 추후 자연스럽게 조상제사를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1939  
1218일에 로마교황 파이우스 12(Pius XI)는 교서를 통해 “현대에  
와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습관의 의미가 많이 바뀌어졌기 때문에 유교에  
서 조상숭배하는 것은 하나의 시민적 의식일 뿐 종교적인 의식은 아니  
21  
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으로 지난 80여년 동안 한국에서 조상제사 반대  
를 위해 순교했던 일만 여명 천주교 신자들의 희생은 헛된 죽음이 된 것  
이다.  
그러다가 1940년에 이르러 한국의 천주교는 조상제사에 대해 포용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죽은 조상 앞에서 절하고, 고인의 초상이나 묘지  
에서 절을 해도 좋다고 수락했다. 심지어 죽은 조상을 위해 향을 피우고,  
22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허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포용적 자세는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회의인 제 2차 바티칸회의(1962-1965)에서 “교  
회는 전() 공동체의 신앙과 선()을 수용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엄  
격하게 통일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 교회는 미신이나 오류와 관련되지  
않는 생활양식을 동정적으로 취급하고 가능한 그대로 유지한다. 사실 때  
에 따라 교회는 그와 같은 의식들을 성례전 안에 포함시킨다.”라는 수용  
23  
주의 선교정책을 결정짓게 된다.  
20 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 (서울: 성경읽기사, 1987), 33.  
21 강춘오, “한국 가톨릭교회와 조상제사 문제,” 「풀빛목회」 통권50(1985): 109.  
22 Y. H. Kang, “The problem of Ancostor Worship in Christianity in Modern Korean Society,”  
Sa Mock 37 (1975): 3.  
23 김명혁, 『제사에 대한 역사적 이해』 (서울: 엠마오, 1991), 67.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69  
4.2 개신교의 조상제사 관점  
한국 초기 개신교는 이미 천주교가 겪었던 조상제사의 문제에 재봉착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로서 성경  
이 금하는 이교도의 예식임을 가르쳤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세례의식 시  
새신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조상제사 의식을 거부할 서약을 요청하  
였다. 이런 개신교의 일관적인 조상제사의 거부는 일각에서 매우 편협한  
지침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1877년 중국의 상해에서는 약  
20여개의 선교단체가 모여 선교연합회란 이름으로 1차로 모여 조상제  
사에 관해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제 2차로 모인 회의에서 미국 장로교  
회의 마틴(W.A.P. Martin) 선교사는 강연을 통해 조상숭배는 중국인의  
관습이므로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 회  
의에서 중국 내지선교회 창설자 허드슨 테일러(H. Taylor) 선교사는 조상  
숭배 용인을 제안한 선교사를 공박하고 조상숭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립해 달라고 하자 거의 전원이 기립하여 테일러 선교사의 주장에 동의  
했다. 그러자 회의장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선교연합회는  
잭슨(J. Jackson) 목사를 위원장으로 조상제사의 문제에 관해 특별위원회  
를 구성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논쟁을 거듭한 끝에 1980년 중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제3차 연합회의 “기독교 전국대회”에 아래와  
같이 애매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상숭배 문제가 중국선교의 장애이다. 신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조상숭배 문제로 인식을 포기하고 있는 사실이 많다. 이것은 신자가 되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조상의 위패를 불태워 없애고 조상숭배를 거부  
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조상숭배 의식에 미신적이며 우상숭배적인 요  
소가 많은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조상숭배를 부정하  
는 것보다 오랜 역사를 통해 정착해왔다는 그 사실 속에 뭔가 진리가 숨어  
24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탐구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170 개혁논총  
이런 관점은 오늘날 미국의 선교학자 로버트 슈라이터(R. Schreiter)에  
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의 책 『 Constructing local theology』 에서, 슈레  
이터는 토착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합주의와 이중 종교체계라는 개  
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혼합주의는 종래의 두 종교체계가 혼합되는 도  
중에 어느 한 체계가 다른 한 편에 종속되어 원래 지녔던 기본구조 및 정  
체성이 상실되어 혼합주의로 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중 종교체계는 혼합  
주의를 지나치게 우려하여 격리되어 복음이 토착화되지 못한 것을 말한  
25  
. 이런 슈레이터의 주장을 대변하면서, 한국일은 리차드 니버(H. R.  
Niebuhr)그리스도와 문화5가지 관계유형이 한계를 지닌다고 말  
한다. 그러면서 그는 기존 서구교회 중심의 신학적 해석의 결과로 주어진  
기독교 교리와 전통이 실상 이미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에 문화적  
해석과정을 한 번 더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의 관계를 규명할 때 오직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고 문화만 변한다는 전제에서 논지가 출발함으로써 해석학적 결함이  
존재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일의 복음과 문화에 관한 선교신학적 해석은 결국 패러  
다임의 변화가 문화에만 종속되지 않고 복음에도 적용됨을 뜻한다. 이것  
은 그리스도인 복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을 해석하는 주체에 의한  
의미의 다양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한국일은 복음과 문화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이렇게 제시한다. “선교학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문  
화의 관계에서 전자가 해석학의 주체가 되고 후자가 대상이 되는 것이 아  
니라, 두 주체가 함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복  
음과 문화에 대한 해석학적 관계에서 복음은 변하지 않는 상수이며 문화  
24 이원홍, “조상숭배문제 중국선교의 장애,” 『基督敎報』 1991105일자, 8.  
25 R.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y, 황애경 역, 『신학적 토착화』 (서울: 카톨릭출판  
, 1991), 285.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71  
26  
만이 변화의 대상이라는 주장은 선교학에서 볼 때 타당하지 않다.”  
하지만 슈레이터와 한국일의 관점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서 역시 문  
화 우위적 해석에 착안했을 때 강조되는 이원적 해석학이라고 볼 수 있  
. 이들이 주장하는 해석 주체자의 인식변화의 가능성은 복음과 문화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인본주의 신학에서 비롯된 상황화 신학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비록 한국일의 언급대로 해석의 주체자로 인해 복음과 문화가  
변화에 노출된다 해도, 그의 해석학적 결함은 해석의 주체자 역시도 복음  
안에 있어야 함을 전제하지 않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하나님 말씀  
인 성경의 계시 안에서 모든 문화와 역사가 판단되는 개신교의 신학원리  
가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신학적 원리 때문에 초창기 한국 개신교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제사를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상제사를 우  
상숭배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신사참배가 제 2계명을 어긴 우  
상숭배라고 하여 순교적 자세로 맞섰다. 옥성득은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  
27  
이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해 반대했던 이유를 5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조상숭배는 죽은 자의 영혼에게 종교적 희생제물을 바치는 행위이  
므로 십계명 중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둘째, 기제사의 영  
혼은 사람이 만든 나무조각에 거주하고 후손에게 복을 내릴 수 있다는 유  
교의 가르침 때문이다.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종교적 사상이다. 따라서 조  
상제사의 영혼에 관한 신앙체계는 기독교의 부활 교리와는 부합하지 않  
는다. 셋째, 제사가 말하는 죽은 자와 산 자 간의 상호영향력은 천주교가  
주장하는 성자숭배와 연옥설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넷째는 화체설과 천  
주교의 미사는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데, 마치 유교의 조상숭배가 그러  
26 한국일,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신학적 고찰: 복음과 문화의 관점에서,406.  
27 옥성득, “초기 개신교와 제사문제,” 「동방학지」 통권127(2004): 9.  
172 개혁논총  
하다. 끝으로 조상숭배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전통적  
인 악습을 수반하는 신앙관을 지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육적 혈통을  
잇기 위해 남자 상속인을 확복하는 관습, 축첩제도, 여성차별, 값비싼 장  
례식, 조혼 등의 관습은 기독교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렇듯 한국의  
초기 개신교는 하나님 말씀의 복음 안에서 조상제사를 강하게 거부했다.  
4.3 조상제사의 성경신학적 관점  
조상제사에 관해 논의해야 할 중요한 신학적 과제는 역시 산자와 죽은  
조상과의 관계이다. 종교현상적 관점에서 조상제사의 세계관은 먼저  
죽은 자가 여전히 살아 있고 남겨진 후손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는 사상과, 동시에 제사를 바치는 후손은 제사예식을 통해 죽은 조상들  
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종교심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초혼  
(conjuring spirits)이나 죽은 영적 존재와의 소통(spiritism)에 관해 어떤  
시각을 제공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성경은 어떤 점술(divination)이나 예언 그리고 강령술  
(necromancy)도 인정하지 않는다. 레위기 1926절은 너희는 무엇이든  
지 피째 먹지 말며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라고 말씀한다. 또  
한 레위기 1931-32절은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사람이 무당이나 이미 죽은 영  
혼에게 어떠한 소통이나 관계를 맺으려는 모든 종류의 행위가 금지된 것  
임을 의미한다. 카프만(Kaufmann)은 성경이 점술이나 강령술을 시종일  
관 거부하는 이유를 가리켜, 만물의 운명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지 않고  
점술이나 강령술과 같은 무형의 힘이나 능력들에 의해 운영된다는 신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73  
앙이 비신앙적이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죄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주장  
28  
한다.  
둘째, 성경은 죽은 자들이 산 자들과 소통하거나 접촉할 능력이 없음을  
증거한다. 욥기 77-10절은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  
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  
.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  
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  
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생명이 순  
식간에 흘러가는 인생으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죽은 자는 스올에서 다시  
는 현세로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도서 94-5절은 다음과  
같이 죽은 자에 관해 평가한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  
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  
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이처럼 죽은 자는  
결코 산 자와 접촉할 수 없고, 산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지  
상에서처럼 똑같이 소망할 수 없다. 이런 시각은 구약시대의 전형적 죽음  
관이다. 클린스(Clins)는 본질적으로 죽음이 지상에서의 마지막을 뜻하  
쉼의 장소이고 죽은 자는 결코 살아있는 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  
29  
이 부재함을 주장한다.  
셋째, 성경은 현생과 내세의 삶이 현격히 다르고 사후(死後)에는 구원  
의 기회가 없다고 가르친다. 누가복음 1619-31절의 본문은 부자와 나  
사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다. 이 본문은 죽은 자의 상태와 죽음 이후에  
28 Y. Kaufmann, The Religion of Israel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0), 32-33.  
29 D. J. A. Clines, World Biblical Commentary: Job 1-20. Vol. 17 (Dallas: World Books  
Publisher, 1989), 187.  
174 개혁논총  
나타나는 사건에 관해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다. 먼저 19-21절은 부자와  
나사로사 현세에서 어떤 인생의 모습을 취했는지 밝혀준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  
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더라.” 이렇듯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고, 나사로는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삶으로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사후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22-23). 그래서 부자는 너무 괴로워 아브라함에게 손가락 끝에 물을 찍  
어 자신이 혀를 잠깐만이라도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24). 그러자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르기를 현세의 삶으로 인해 사후에 네가 고통을  
받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건널 수 없다고 답변한다(25-26).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죽은  
나사로를 현세의 집에 보내어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내세의 사실을 증언  
하게 해달라고 재차 요청한다(27-28). 하지만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말  
로 그의 간곡한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  
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  
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  
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  
다 하시니라.” 이것은 결코 이 땅에서의 삶이 지속하여 내세에서 그대로  
병행되거나 영위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동시에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  
에게 소통하거나 영향력을 끼친다는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만  
약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  
30  
복음을 증거해도 인간은 권함을 받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후 죽은 자의 거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구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75  
약성경은 죽은 자의 거처를 나타내기 위해 스올’(
שאול
)이라는 용어를 66  
회나 사용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스올을 70인역(LXX)에서 하데스’  
(ᾍdhj)로 번역하여 10회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하데스와 스올은 많은 본  
문에서 실질적 특성을 공유한다. 이 용어들은 주로 두 범주의 용례로 나  
뉜다. 하나는 지하세계의 뜻으로 표현되고, 다른 하나는 무덤을 상징하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스올이 악인이나 의인 상관없이 모두 가게 될 곳으  
로서 처벌장소로 이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스올은 악인들이 거  
하게 될 형벌의 장소로 종종 쓰인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교회는 스올이나  
하데스를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연옥개념을  
31  
주장한다. 반면 개신교 신학은 이를 모든 인간이 겪는 죽음이나 불신자  
32  
들이 처벌을 받는 지옥개념을 이해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4절  
은 이렇게 증거한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  
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  
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  
리라.” 이것은 죽은 인간의 영혼이 자기 마음껏 구천을 떠돌아다닌 것이  
아님을 뜻한다. 성경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육체의 부활을 위해  
데리고 오신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소멸되거나, 살  
아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거하지 못한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제 86문은 사후 인간의 중간상태에 관해 다  
음과 같이 정리한다.  
30 배춘섭, 『기독교와 조상숭배』, 282.  
31 C. H.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Zondervan, 1992), 171.  
32 R. J. Gehmann, Who are the living-dead? A theology of Death, Life After Death and the  
Living-Dead (Nairobi: Evangel Publishing House, 1999), 302.  
176 개혁논총  
무형교회 회원들이 죽은 직후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누리게 되는 영광이 교  
통은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영접을 받아  
그 곳에서 빛과 영광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의 몸은 비록 죽은 가운데 있어도 그리스도에  
게 계속 연합되어 마치 잠자리에서 잠자듯 무덤에서 쉬고 있다가 마지막 날  
에 그들이 여혼과 다시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악인의 영혼들은 죽을 때 지  
옥에 던져져, 거기서 고통과 흑암 중에 머물러 있는 한편 그들의 몸은 부활  
과 큰 날의 심판 때까지 마치 감옥에 갇히듯 무덤에 보존되는 것이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을 고려해 볼 때 개혁교회는 죽은 영혼  
들이 부활의 때인 예수님이 재림 시까지 영혼의 상태로 천국과 지옥을 제  
외한 다른 공간에서 거한다는 개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죽은 의  
인들은 천국에 즉시 올라가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놓이고, 악인들은 지옥  
의 심판을 받게 됨을 강조한다(23:41-13; 고후 5:1-8). 공교롭게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중간상태를 베드로전서 3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를 인용하여 연옥설(theory of  
Purgatory)의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딕슨(Dixon)은 본문의 이 지옥인  
, 연옥인지 아니면 베드로 사도가 살던 지옥 같은 세상인지 살펴야 하  
33  
, 적어도 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연옥이 아님을 주장한다. 이렇듯 조  
상제사의 성경적 접근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허용한 수용주의 선교정책  
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반증한다. 따라서 조상제사는 상황화 선교라  
는 당위성과 적용을 수반한다.  
5 조상제사에 관한 선교적 접근  
선교지에서 조상제사의 문제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로 귀결된다. 즉 조  
33 L. Dixon, “Will the Real Jesus Please Stand Up? The Doctrine of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Emmaus Journal Volume 8 (1999): 165-180.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77  
상제사가 복음의 절대성에 위배되는지 아니면 문화의 상대성에 부합되  
는지를 살펴야 한다. 만일 종교현상학적 이유로 조상제사의 문화적 요소  
를 전적으로 거부하면, 현지인들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반발과 영적 공황  
이 발생시킬 수 있다. 반대로 사회인류학적 관점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무  
관하게 조상제사를 단순히 문화적 요소로 치부하면, 현지인은 왜곡된 복  
음을 듣게 되고 기독교의 혼합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목만수는 조상제사에 대한 선교적 접근 논의하면서, 선교사가 성육신  
34  
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을 몇 가지로 강조한다. 첫째, 조상제사에 대한  
현지인의 내부적 관점을 존중한다. 이것은 현지인들이 조상제사를 하나  
님과의 관계인 십계명의 제 2계명으로 인식하는지, 아니면 인간관계 범  
주인 제 5계명의 입장인지 이해해야 함을 말한다. 둘째, 조상제사에 관한  
일방적인 양자택일적 접근을 재고한다. 그는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복음이 더욱 증거되기도 했지만, 역으로 조상제사를 고유의 전통문화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복음의 장애가 된 것은 아닌지 고려할 것을  
주장한다. 셋째, 조상제사에 대한 사회의식의 변화를 고려한다. 그는 현  
대화의 과정에서 이미 변화된 사회의식을 고찰함으로써, 한국문화에 적  
합한 기독교문화를 창출해야 한다고 고한다. 끝으로, 서구 선교사와 타문  
화권 현지인들 사이의 문화적 갭(gap)을 재고한다. 그는 서구문화에 조상  
제사의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현지인들  
의 조상제사를 맹목적으로 이교화하여 정죄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원리에 따라 타문화권에서 성육신적 선교의 접근을 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하지만 성육신적 접근이라고 해서 반드시 복음(Text)이 기준이 되고,  
문화(Context)를 통합한 총체적인 복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 목  
34 목만수, “조상제사에 대한 성육신적 선교접근,” 「기독교사상」 통권44(2000): 191-193.  
178 개혁논총  
만수는 조상제사에 관한 상황화 신학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조상을 숭배하는 선교지는 가부장적 제도가 강하고 가장의 권위를 존중하  
는 문화이다. 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모두 조상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이시며 그들이 두려움의 대상인 조상이 아니라 탕자를 품으시고 가  
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 원하시는 아버지 상으로 인도해야 한다. 조상을 절  
대화하는 가치관을 가진 현지인에게 신학적 상황화를 이루어 하나님 아버  
지를 가장 최초의 조상으로 소개한다면 현지인들은 쉽게 하나님의 개념을  
35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복음의 이해는 문화를 통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음이  
지엽적 문화의 산물로서만 이해되거나 국한되면 결국 혼합주의에 봉착  
한다. 이와 같이 선교적 방법론에 소위 상징주의적 모델(semiotic model)  
을 취하면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주위의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폴 틸  
리히(P.J. Tillich)상징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도 존  
재하며,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데 있어 상징을 매개로 하여 모든  
종교 속에 나타나신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타문화권에서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이 아닌 철학적 존재로서 종교다원주의 근간이 되는 존재의 기  
(Ground of Being)으로서의 보편적 하나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  
안에서 타문화들 가운데 드러나는 문화적 다양성을 해석하지 않고, 단순  
히 현지인의 문화적 시각에 따라 복음을 재해석한다면 상황화 선교가  
아닌 상황화 신학이라는 더 큰 문제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타문화권에서 조상제사에 관한 접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헨리 미터(H. Henry Meeter)는 기독교 진리에서 떠난 인간이 생산한 풍  
성한 문화의 수확 뒤에는 반드시 암적 존재가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면서,  
35 Man Soo. Mok, “Practices of Macumba in Afro-Brazilian Religions: A Description and  
Evaluation from A Missiological Perspective,” (Ph.D. diss, Fuller Theological Seminary, 1999),  
221.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79  
36  
“기독교 기초 위에 세운 문화만이 영구히 존재함”을 언급한다. 이 점에  
, 이보민 박사는 바른 신앙관으로 불신문화에 대해 취사선택(取捨選  
)이라는 선교적 접근을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신문화를 지나치게 과대 혹은 과소평가 할 필요  
가 없다. “불신문화는 무조건 나쁘다, 또는 무조건 의미가 있고 좋은 것이  
다”라고 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불신문화를 그때 그때 우리의 전 생의 영역  
에서 영위하는 신앙의 행위에 비춰보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  
할 것은 배격하는, 즉 취사선택을 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반대되지 아니하는 문화적 습관은 받아들이고(예를 들면, 우리 민족 전통에  
따른 세배행위), 우리의 신앙에 위배되는 것은 배격해야 한다(예를 들면, 제  
사행위), 또는 어떤 전통문화는 그 형태를 바꾸어가면서 우리의 신앙행위에  
37  
포함시키게 된다(예를 들며, 추도의식이나 추도예배).  
이상의 주장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가장 참되고도 진리의  
척도가 되어 세상의 모든 문화적 요소들을 판단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은  
동시에 조상제사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선교적 접근이 수반되  
어야 함을 뜻한다. 알다시피, 인간의 모든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변천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하심에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어왔  
. 그렇다면 천주교의 조상제사에 관한 타협적 태도를 동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일 조상제사가 인간을 높이고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방적  
신앙행위라면, 기독교인으로서 조상제사는 더 이상 제사가 아닌 숭배가  
되고 만다. 이 때문에 조귀삼은 조상제사의 선교적 적용을 논의하면서,  
조상제사는 복음전도를 위한 교량으로 활용되어야 하고 동시에 선교사  
38  
는 복음의 우선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정흥호도 복  
36 H. H. Meeter, Calvinism, 박윤선ㆍ김진홍 역, 『칼빈주의』 (서울: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9), 68-69.  
37 이보민, 『基督敎倫理學의 諸 問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399.  
180 개혁논총  
음과 문화와 관계를 언급하면서 “결코 복음의 우선성에 결코 포기되어서  
는 안 된다. 성경에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한  
39  
다” 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 안에 인간의 문화양식과 비교해  
절대로 변치 않는 신적 영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상제  
사에 관해서라면, 선교사는 복음을 통해 죄로 오염된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적 선교(Transforming Mission)로 접근하되, 인류학적 차원에서 조  
상제사가 주는 문화적 요소를 무시하지 말고 복음의 접촉점으로 활용해  
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히려 주어진 문화를 기독교의 문화로 창  
출하고 대안을 삼아 복음 안에서 변혁된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6 결론  
지금까지 본 논고는 선교현장에서 화두로 손꼽히는 조상제사에 관해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했다. 먼저 조상제사의 문제는 여전  
히 선교현장에서 해결하기 힘든 난제(難題)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조상  
제사는 선교현장에서 사람들이 지닌 기대지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  
대사회에서도 조상제사가 성행하는 이유는 조상제사가 인류학적 측면에  
서 사람들이 세대에 걸쳐 생산한 문화적 산물이자, 정치학적 측면에서 사  
회 구성원들이 속한 공동체와 집단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지녔다는 데 있다. 이런 조상제사의 기능 때문에 복음이 전파될 시 종종  
현지인들에 의한 상당한 반발과 거부가 동반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조상제사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이라기보다는, 중  
38 조귀삼, “조상제사의 비평적 상황화 선교연구,” 「성령과 신학」 통권24(2008): 120-121.  
39 정흥호, 『상황화 신학』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6), 120.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81  
국에서 전래 된 외래종교 예식이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역으로 얼마든  
지 기독교가 복음을 통해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음을 반증한다. 실제 한  
국에서 초창기 천주교와 개신교는 복음을 통해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문  
화변혁적 선교접근을 취했다. 그러나 천주교의 경우 교황 파이우스 11세  
와 파이우스 12세가 조상제사에 대한 문화적 접근을 허용하면서, 한국의  
천주교도 결국 1940년에 조상제사를 수용하고 말았다. 반면 개신교는 일  
관되게 조상제사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조상제  
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상술하면, 조상제사는 십계명의  
1 계명을 어기는 행위이고, 유교와 샤머니즘에 따른 종교적 가르침으로  
비춰졌으며, 또한 개혁주의 신학에 반하는 연옥설과 성자숭배의 변형된  
양식으로 간주되고, 천주교의 화체설과 미사처럼 미신적이자, 하위적으  
로 연계된 축첩행위나 조혼과 같이 성경에 반()하는 여러 악한 풍습들  
때문이었다.  
이런 조상제사의 문제는 산 자와 죽은 조상과의 관계에 관한 성경신  
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답변으로서 성경은 그 어떤 점술이나 강령술  
이나 초혼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자는 산 자들과 어떻게든  
소통할 수가 없다. 또한 사후(死後) 인간의 삶은 현세와 전혀 다른 양식을  
지닌다고 기록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거처할 죽은  
자의 중간상태’(intermediate state)의 논의로 연결된다.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 문답 제 86문은 인간의 중간상태에 관해 죽은 자의 거처가 예수님  
재림 전까지 천국과 지옥을 제외한 다른 처소에 거한다는 점을 거부하지  
는 않는다. 다만 의인(義人)들은 사후에 즉시 하늘로 올라가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놓일 것이며, 악인(惡人)은 영원한 지옥심판을 받게 될 점을 강  
조한다.  
이상 판단해 보건대,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의 답변은 분명하  
. 이것은 선교가 단순히 문화 우위적인 신학을 기반으로 현지인들에게  
182 개혁논총  
접근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물론 복음이 타문화에 오해도 없이 바르게  
증거되려면 상황화 선교가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화 선교는 복  
(Text)이 특정한 문화(Context)를 위해 신학이 상황화가 되는 것을 추  
구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혼합주의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황화 선교는 타문화권에서 복음이 효율적으로 증거  
되게 할 목적으로, 그 문화와 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여 복음이 왜곡이  
나 의미변형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선교신학은 선교사  
와 현지인 모두가 복음을 통해 죄로 오염된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적 선  
(Transforming Mission)를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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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85  
국문초록  
배춘섭  
총신대학학대학교수,교신학  
본 논문의 목적은 오늘날 선교현장에서 성행하는 조상제사의 문제를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관점에서 제시하기 위함이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는 타문화권에서 선  
교할 때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된다. 타문화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복음을 전파하  
, 현지인들에게 외국종교로 인식되어 선교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반면 복음이  
문화에 흡수되어 지엽적이고 문화적 복음이 되면 혼합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조상제사는 문화인류학적 접근과 종교현상학적인 연구를 양자적으  
로 해야 한다. 특히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조상제사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접근방식  
이 서로 달랐다. 따라서 본고는 조상제사가 지닌 사회적 기능을 살핌으로써 현재까  
지도 조상숭배가 그치지 않는 이유를 답변한다. 그리고 한국의 조상숭배는 우리 민  
족 고유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유교적 산물임을 밝힌다. 또한  
개신교회는 어떤 이유로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거부했는가를 역사적  
과정과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연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조상제사에 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을 제시한다. 이것은 문화우위적 선교방법론을 통한 상  
황화 신학을 피하고, 문화이해를 전제한 복음전파를 통해 죄로 오염된 문화를 변  
화시키는 변혁적 선교(Transforming Mission)를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제어: 조상제사, 기독교, 복음과 문화, 상황화, 변혁적 선교  
186 개혁논총  
Abstract  
The Reformed MissionTheologicalApproach toAncestor  
Sacrifice  
Bae, Choon Sup  
AssistantProfessorofMissiology,ChongshinUniversityTheologicalSeminary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ddress the problem with the culture of  
ancestral rites in Korea, which flourishes in the current missionary scene, from  
the reformed mission theological perspectiv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Gospel and traditional culture becomes a critical subject when doing  
missionary work in a foreign culture. Preaching the Gospel without any  
understanding of cultural background causes difficulties in the missionary  
work as the religion may be perceived as an exotic religion by the local people.  
On the other hand, if the Gospel is blended into the culture to become  
peripheral and cultural, the syncretism of religion becomes inevitable. In this  
regard, studies on the ancestral rites ought be done by quantum steps with both  
cultural anthropological and religious phenomenological approaches.  
Particularly in the history of Korea, the ancestral rites has been treated  
differently by the Catholic and Protestant churches. Therefore, this paper aims  
to identify the reason why the culture of ancestral rites is still continued in  
Korea by examining the social functions of the ancestral rites. Moreover, the  
study reveals that the culture of ancestral rites is not a unique cultural heritage  
of Korea, but is a vestige of Confucianism from China. Lastly, the study  
investigates the reason why the Protestant Church has been regarding the  
culture of ancestral rites as an idolatry and, thus, denied it, from both historical  
and biblical theological perspectives. Ultimately, the paper addresses the  
reformed mission theological approaches to discuss the culture of ancestral  
rites. Accordingly, the study calls for the need of the ‘Transforming Mission’,  
which involves spreading of the Gospel with understanding of the cultural  
background for transformation of the culture that is corrupted with sin of  
people, while avoiding spreading of the ‘Contextualized Theology’ through  
the theory of culture-dominated missionary work.  
배춘섭 | 조상제사에 관한 개혁주의 선교신학적 접근 187  
Key Words: Ancestral Rite, Christianity, Gospel and Culture, Contextualization,  
Transforming Mission